Married To A Savage Duke RAW novel - chapter (58)
피폐물 속 괴물 남주와 결혼했다 58화(58/150)
흔쾌히 승낙했던 것이 무색하게도 세라엘은 당혹하여 입술을 벌렸다.
그것도 모자라 몸을 뒤로 살짝 기울이고 눈을 깜빡이지도 못했다. 철부지 어린애가 보아도 매우 당황했음을 알 수 있는 반응이었다.
시작부터 고난도의 질문을 던진 로잘린은 속눈썹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세라엘은 대답하지 못하고 잘게 떨리는 눈으로 황녀를 응시했다.
“질문이 어려웠나요?”
로잘린은 의아하다는 듯 턱을 비틀었다.
“영애께서 블카노프 대공을 진심으로 사랑하는지 궁금해요. 그분이 아니면 다른 사람은 꿈도 못 꿀 정도인지도요.”
입술을 감쳐문 세라엘이 속눈썹을 내리깔았다.
제 의사를 무리 없이 표현할 줄 아는 자신이 어째서 카에드만 얽히면 이리도 바보 같아지는지. 하지만 사랑이라는 무게 있는 단어를 두고 선뜻 답할 수 없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복잡한 속을 달래듯 차를 몇 번 들이켠 세라엘은 오래지 않아 입을 열었다.
“함께한 시간이 짧아 보일 순 있겠지만… 대공님은, 그러니까 저는….”
“간단한 질문이었는데 답하기 어려우신가 보군요. 이해합니다.”
로잘린은 예상했다는 듯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단정하는 어조에 세라엘은 울컥 부아가 치밀었다. 카에드를 향한 제 마음을 변호하고 싶은 이상한 충동에도 휩싸였다.
카에드 말대로 로잘린을 성 밖으로 내쳐 버렸다면 이런 기분은 느낄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황녀를 직접 마주해 봐야 마음속에 자리한 찝찝함을 털어 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세라엘의 얼굴에서 서서히 불쾌감이 사라졌다.
로잘린은 손수 찻주전자를 기울여 제 잔에 차를 따랐다. 그러고는 차분한 말투로 재차 물었다.
“그렇다면 대공과의 결혼 역시 원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받아들여도 될까요?”
“아뇨. 누구보다도 간절히 원합니다.”
세라엘은 이보다 더 명료할 수 없을 만큼 단호한 목소리로 주장했다. 조금 전 기나긴 공백과 함께 어물거렸던 것과 달리 즉각적으로 나온 대답이었다.
찻잔을 들고 막 한 모금 마시려 했던 로잘린이 흠칫하더니 눈매를 좁혔다.
“간절히 원한다니 무슨 뜻인지요?”
“말 그대로예요. 두 번째 질문에는 아직 답을 못 드렸네요. 저는 대공님이 아닌 다른 남자와 결혼하는 건 꿈도 꿀 수 없어요.”
거리낌 없는 답변에 로잘린은 안면을 뻣뻣하게 굳혔다. 세라엘을 감싼 기류가 손바닥 뒤집듯 바뀌어 있었다.
“사랑하지도 않는 남자와 간절히 결혼하고 싶다니…. 상당히 어폐가 있지 않나요?”
“어폐라고 생각하시는 이유를 모르겠어요.”
세라엘은 진심으로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신랑감으로 보자면 카에드 님을 제칠 수 있는 남자가 없다고 생각해요. 제국에서 가장 넓은 영지를 다스리는 대공작에 금전적으로 모자람도 없으시고, 근사한 인물이야 두말하면 입 아프겠죠. 심지어 소년 같은 감성과 다정한 면모도 있으시잖아요. 정녕 그분보다 괜찮은 남자를 찾을 수 있을까요?”
“소년 같은 감성과 다정한 면모…?”
카에드의 다른 점은 몰라도 그 두 가지를 공감하는 데 실패한 로잘린이 이맛살을 구겼다.
미사여구를 늘어놓느라 약간 흥분한 세라엘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전 태어나서 카에드 님처럼 멋있는 남자는 처음 봤거든요. 중부 지역에 살면서 배 나오고 관리 안 된 퉁퉁이들에게 익숙해져 있었는데 카에드 님을 보자 마치 개안한 느낌을 받을 정도였어요. …앗.”
다소 과격한 말투를 썼나 싶어 세라엘은 뒤늦게 입술을 가렸다.
로잘린은 동작을 멈추고 눈을 깜박였다. 그리고 조용히 공감했다.
“제도라고 다를 건 없어요. 향락만 즐길 줄 아는 귀족 영식들은 얼굴에 심술보가 그득해서 매우 추하답니다.”
“아하….”
두 여자는 묘한 시선을 교환했다. 정적을 깨뜨린 사람은 로잘린이었다.
“어찌 되었든 영애는 대공의 재력과 외적인 장점만 보고 결혼을 원하는 거였군요. 사랑이 없는데도 불구하고요.”
세라엘은 관자놀이를 짚으며 실소를 내뱉었다.
“황녀님께서 순정파이신 줄은 몰랐네요. 제국에서 성사되는 혼사의 9할이 정략결혼 아니던가요? 연애부터 시작해서 결혼까지 진전시킨 귀족을 찾는 게 더 어려울 것 같은데요.”
말은 그렇게 해도 석 달 전까지 세라엘의 가치관은 로잘린과 다름없었다.
세라엘 또한 사랑이 없는 결혼은 하고 싶지 않았다. 오랜 기간을 거쳐 서로를 알아 가면서 생긴 애정으로 가약을 맺는 것이 이상적인 순서라 믿어 왔다.
그러나 불가피하게 사랑하지 않는 남자와 연을 맺어야 했다. 가치관과 완전히 어긋난 결단을 내려야 했던 상황에서 결혼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는 게 무슨 소용이겠는가.
생면부지의 남자와 결혼하게 되었다고 실의에 빠지는 것보다, 꼬부랑 할아버지 대신 젊고 잘생긴 부자를 선택할 수 있어서 행운이라고 받아들이는 태도가 더 바람직했다.
“물론 제 의사와 관계없이 오간 혼담이었으니 유쾌하지 않았어요. 하지만 상대가 대공님이었기에 운이 좋았다고 생각해요. 그분을 사랑하냐고 물으신다면 선뜻 답할 순 없지만, 알아 가는 과정에서 호감을 갖게 된 건 사실이에요.”
세라엘을 지긋이 응시하던 로잘린은 창밖으로 눈길을 옮겼다.
한동안 말 한마디 오가지 않았다. 조찬실 내부에는 거센 빗소리만이 반복되었다.
“영애의 혼사는 일반적인 정략결혼과 조금 다르지 않았나요?”
침묵으로 일관하던 로잘린이 조용히 지적했다. 세라엘은 불쾌감을 감추지 않았다.
“그게 무슨 말씀이신가요?”
“제국에서 공공연히 도는 소문이 하나 있어요. 영애의 부친인 밀로즈 후작이 블카노프 대공과 뒷거래를 했다는 소문이죠.”
“그래서 무엇을 말하고 싶으신 건가요…?”
“영애께선 자신을 물건처럼 사들인 남자에게 정말 호감을 느낄 수 있냐는 뜻이에요.”
여과 없이 던져진 물음에 세라엘은 들고 있던 찻잔을 내려놓았다. 방금 뭘 들었나 싶어 눈이 커졌다.
이윽고 치뜬 눈꺼풀이 서서히 제자리로 돌아왔으나 세라엘은 남몰래 부들부들 떨었다.
‘우산 없이 밖으로 쫓아내고 싶다.’
충동을 참아 낸 세라엘은 찻잔을 쥔 손가락을 느리게 두드렸다.
“황녀님께서 잘못 아시는 게 있어요. 카에드 님은 제 아버지께 금화 한 닢 넘기지 않으셨고 되려 지참금까지 얻어 가셨답니다. 그것도 저택 하나쯤은 우스울 가치의 보석이었거든요.”
사실 카에드는 세라엘을 데려가기 위해 얼마든지 지급할 기세였으나, 순간적으로 기지를 발휘한 그녀 덕분에 나타샤의 값비싼 보석을 얻어 낼 수 있었다.
로잘린은 처음 듣는 얘기인 듯 미간을 찌푸렸다.
“사업가인 밀로즈 후작이 힌델의 건물을 가지고 무얼 하려 했는지는 암암리에 알려져 있어요. 그가 지참금을 주었다는 말은 전혀 들은 적 없어요.”
“당사자한테 직접 듣고 계시면서 왜 믿지 못하시는지…?”
세라엘은 하도 기가 막혀 말끝을 공손히 가다듬지 못했다. 정작 로잘린 본인은 다른 것에 놀랐는지 신경 쓰지 않았다.
“정말 그 구두쇠 후작에게서 대공이 지참금을 떼어 갔다는 말씀인가요?”
말을 끝맺자마자 로잘린은 제 실수를 깨닫고 세라엘의 눈치를 보았다. 부친을 구두쇠라고 지칭하여 세라엘이 화가 났을까 봐서였다.
세라엘은 그 부분엔 별 관심 없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대공님이 아니라 제가 달라고 요구한 거예요. 물론 제 등 뒤에 대공님이 없었다면 얻지 못했을 테지만요.”
두 여자는 할 말을 잃고 서로를 보다가 각자의 찻잔으로 눈길을 떨어뜨렸다.
붉은 홍차를 티스푼으로 몇 번 휘젓던 로잘린이 불쑥 화제를 돌렸다.
“혹시 블카노프 대공도 같은 생각인가요?”
“어떤 점을 말씀하시는 건지요?”
“대공도 밀로즈 영애에게 호감을 느끼고 있는지 묻는 거예요.”
“아, 음…. 아뇨.”
세라엘은 슬쩍 눈길을 돌렸다. 열기가 양 뺨에 확 몰리는 게 느껴졌다.
“아마 저랑은 다르실 거예요. 카에드 님은 호감 수준이 아니라 저를 상당히 좋아하시는 것 같거든요.”
“…….”
본인 입으로 말해 놓고도 쑥스러워서 세라엘은 슬쩍 손을 들어 얼굴의 반쪽을 가렸다.
“아마 이 결혼식에 저보다 더 큰 의미를 부여하고 계실 거예요. 대정원에서 예식장까지 건설하고 계실 정도거든요.”
그녀는 은하수처럼 반짝이는 호숫가에서 카에드와 공유했던 시간을 되새겨 보았다.
“한 사람의 일방적인 감정이 아니라는 뜻으로 받아들여 주세요.”
“…가능한 일인가요.”
문득 로잘린이 자조적으로 시선을 떨구며 뇌까렸다.
답을 기대하고 물은 게 아니라 중얼거림에 가깝다는 걸 눈치챈 세라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로잘린은 보릿자루를 상대하는 것도 그보다 나았을 만큼 냉랭했던 카에드를 떠올렸다. 타인을 향한 연정은커녕 일평생 원초적인 욕망도 겪어 보지 못했을 무정한 남자였다.
그러나 응접실에서 나오자마자 마주친 세라엘에겐 어떠했던가.
카에드는 선잠에서 깨어난 그녀를 무척이나 걱정하는 언행을 거리낌 없이 내비쳤다. 다른 영혼이 들어왔나 싶을 만큼 극성이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종전에 다과를 하러 내려오라는 하녀의 전갈을 받고 조찬실로 향하던 로잘린은 1층 홀에서 카에드와 세라엘 일행을 발견했다.
로잘린은 의도치 않게 기둥 뒤에 숨어 대화를 엿듣고 말았다.
가히 충격적이었다. 아직 예식을 치르지도 않은 그들이 잠자리를 공유하는 듯한 뉘앙스를 내비쳤을 땐 로잘린은 제 청력을 의심했다.
잘못 들은 게 아니란 걸 알려 주듯 카에드가 세라엘에게 입을 맞추는 모습까지 목격했다. 코앞에 일행을 두고도 스스럼없는 접촉이었다.
일련의 사건이 퍼즐처럼 짜 맞추어지면서 로잘린은 깨달았다.
냉혹하기 짝이 없는 남자와 사느라 고생하고 있을 줄 알았던 세라엘은 더없이 극진한 애정을 받고 있었다. 로잘린이 막 대공성에 도착했을 때, 취침 중인 세라엘을 위해 소음을 내지 말라며 보행을 요구한 것도 모두 사실이었던 거다.
그녀를 잠시나마 가엾게 여겼던 자신이 어처구니없었다. 임무를 완수할 가능성이 바닥을 쳤는데 누가 누굴 불쌍히 여기고 있던 건지.
“황녀 전하께서 대공성을 방문한 이유가 이거였군요.”
상념에 빠져 있던 로잘린은 어느 틈에 똘망똘망해진 눈으로 자신을 주시하는 세라엘을 마주 보았다.
부끄러워하던 기색을 싹 거둬 낸 세라엘이 운을 뗐다.
“사랑 운운하셨던 이유도 이제 알겠어요. 전하께선 저와 대공님이 결혼식을 치르는 걸 원치 않으신 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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