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ried To A Savage Duke RAW novel - chapter (59)
피폐물 속 괴물 남주와 결혼했다 59화(59/150)
“황녀님께선 카에드 님을 마음에 두고 계시나요?”
세라엘은 잇달아 입술을 움직였다.
로잘린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어떤 답을 해야 할지 궁리하면서도 세라엘에게 저돌적인 면이 있다는 걸 체감하는 중이었다.
사교계에서 종종 세라엘의 이름이 언급되는 건 알고 있었다.
무도회장에서 그녀에게 치근대는 대머리 노백작에게 머리카락이나 심으라고 쏘아붙였던 사건이 워낙 파격적이라, 몇 년이 흐른 지금도 귀족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었다.
성년도 지나지 않은 어린 여성이 어찌 그리 직설적이고 과감할 수 있는지 로잘린은 내심 호기심을 갖고 있었다.
“저는….”
뜸을 들이던 로잘린이 담담한 목소리로 말문을 열었다.
“10년 전에 칼스비크 근방의 백작령에서 주최된 무도회에 참석했던 적이 있어요. 밀로즈 영애께선 저보다 어리시니, 적정 나이가 되지 않아 그 파티엔 불참하셨을 것 같군요.”
황녀가 느닷없이 과거를 회상하자 세라엘은 멀뚱히 눈을 깜박였다. 그래도 답을 재촉하지 않고 적당히 응수했다.
“저야 어리기도 했지만 북부와는 연이 없어 참석할 일도 없었을 거예요.”
“전 규모가 큰 무도회에는 항상 참가해야 했답니다. 당시 늦은 사춘기에 접어들고 있던지라 몇 번이고 반복된 사교 파티에 다소 지쳐 있었죠.”
로잘린은 카에드를 처음 만났을 때를 돌이켰다.
“그 무도회에서 보았어요. 성인이라 해도 믿을 만큼 성숙했던 소년 적의 대공을요. 무리 지어 있던 영애들에게 물어보니 블카노프 공작가에 입양된 영식이라는데, 사교 연회에 모습을 드러내는 일이 거의 없다더군요. 모처럼 등장했던 그날 우연히 저와 마주쳤던 거죠.”
세라엘은 잠자코 귀를 기울였다. 황녀가 옛적에 보았다던 카에드의 내밀한 모습을 털어놓고 있다는 걸 직감했다.
“겉모습 때문인지 역시 이목을 독차지하고 있더군요. 정작 대공 본인은 영 관심이 없어 보였죠. 저는 대공이 무도회장에서 빠져나가는 모습을 보고 몰래 뒤를 밟았어요.”
“…….”
“회랑에 막 들어섰을 때쯤 어디선가 동물이 우는 소리가 났어요. 출처를 쫓아 두리번거리니 아주 자그마한 강아지가 바닥에 뒹굴면서 장난치고 있었어요. 백작가에서 키우는 사냥개의 새끼였는지, 들짐승의 새끼였는지는 몰라요. 주둥이가 길고 빳빳한 회색 털을 지닌 강아지였던 게 기억이 나는군요.”
로잘린이 묘사하는 강아지의 생김새를 듣자 그게 새끼 늑대가 아니었는지 막연한 짐작을 했다. 세라엘은 이어질 뒷말을 기다렸다.
“그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강아지를 쓰다듬었던 사람은….”
“카에드 님이셨군요.”
세라엘의 반응에 로잘린이 엷은 미소를 지었다.
“맞아요. 차가운 겉모습과는 반대로 세상 다정하게 새끼 짐승을 어루만져 주고 계셨어요. 우직해 보이는 손이 강아지의 배를 긁는 모습은 어둠 속에서도 이상하리만치 선명했지요. 제 머릿속에 오래도록 새겨졌던 순간이었죠. 10년이 지난 지금도 똑똑히 그려지는 것 같아요.”
로잘린의 오라비인 필립은 어려서부터 소동물을 괴롭히는 끔찍한 취미가 있었다. 그랬기에 카에드가 강아지를 쓰다듬는 장면이 유독 각별하게 다가왔는지도 몰랐다.
“저는 참지 못하고 회랑에 모습을 드러냈어요. 대공께선 귀신같이 제 존재를 알아차리시곤 고개를 드셨죠. 용기를 내서 그분의 성함을 물어보았어요. 알고 있었는데도 그저 말 한마디 나눠 보고 싶을 뿐이었죠.”
로잘린은 지금과 크게 다른 점이 없었던 카에드의 냉정한 표정을 기억해 냈다.
“대공께선 대답은커녕 저를 벌레 보듯 노려보시더군요. 그것마저 몇 초 되지 않았어요. 망설임 없이 일어나서 저를 등지고 걸음을 돌려 버리셨으니까요. 저는 그날 이후 한동안 대공을 잊을 수가 없었어요. 내가 먼저 이름을 알려 주었더라면 상냥하게 대해 줬을까, 소녀가 할 수 있는 온갖 망상을 했지요.”
“설마 그때부터 지금까지 카에드 님을 좋아하신 건가요?”
세라엘은 경계심 어린 목소리로 궁금한 바를 물었다. 공중 어딘가에 꽂힌 시선을 내리며 로잘린은 싱겁게 웃어 보였다.
“그날의 기억이 쉽게 잊히지 않는 건 사실이지만… 글쎄요. 대공이 어떤 사람인지는 항상 궁금했었어요.”
모호한 답변에 세라엘은 고개를 내저었다.
“이해가 되지 않아요. 그 기억 하나로 왕래도 없었던 남자를 새벽에 찾아오셨을 것 같지는 않은데요. 제게 카에드 님을 사랑하냐 물어보셨던 것도 다른 이유가 있으셨을 거고요.”
그리고 가장 께름칙했던 짐작을 입 밖으로 내놓았다.
“저는 황녀님께서 이 결혼을 탐탁지 않게 여긴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어요. 아닌가요?”
세라엘의 지적에 로잘린은 곧이곧대로 답할 의향이 없었다.
그건 오라비인 필립의 명령이었고, 자신조차도 그래야만 하는 이유와 정황을 전해 듣지 못한 터였다.
그러나 오래전의 짝사랑 상대를 만나러 오는 여정이 내심 설렜던 건 사실이다. 카에드와 애정을 주고받는 입장에서는 로잘린의 행보가 불쾌했을 것이다.
이 모든 걸 세라엘에게 알릴 필요는 없었다. 로잘린은 이번 일에 있어 이미 결정을 내린 상태였다.
“대공께선 강아지를 어루만져 주던 다정함을 고이 간직했다가 밀로즈 영애에게만 베푸는 모양이에요.”
단념하는 어조로 답한 로잘린이 얼마 남지 않은 홍차를 입에 머금었다.
“식전부터 침실을 함께 쓸 정도로 사이좋은 남녀의 결혼을 어느 바보가 막으려 할까요.”
“……!”
난데없이 사적인 연애사가 들춰지자 세라엘은 하마터면 찻잔을 엎지를 뻔했다.
“침실 같은 거 함께 쓰지 않…!”
서둘러 변명하려던 순간 조찬실의 문짝을 똑똑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이윽고 하인이 입실을 요청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흠흠. 들어와도 좋아.”
목소리를 가다듬은 세라엘이 허락을 내렸다. 문을 열고 들어온 하인은 그들 앞에 서서 정중하게 예의를 갖추었다.
“말씀 나누시는 중에 죄송합니다.”
“괜찮아. 무슨 일이지?”
하인은 로잘린에게 흘깃 시선을 던졌다.
“다름이 아니고 호위 기사분께서 황녀 전하를 찾고 계십니다.”
“기사가 나를? 무슨 일로 찾던가요?”
“알려 주시지 않았습니다. 급한 용무라 되도록 빨리 찾아뵙고 싶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의아한 표정을 짓던 로잘린이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마침 티타임도 끝나 가니 조금만 기다리라고 전해 줘요.”
“알겠습니다.”
하인은 세라엘에게도 허리를 굽혀 보인 후 조찬실 밖으로 나갔다.
의구심이 피어난 세라엘은 눈을 게슴츠레 뜨고 로잘린을 관찰했다. 황녀 본인도 예기치 않았던 듯 딱히 미심쩍은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이내 로잘린은 호로록 차를 마시며 끊겼던 흐름을 이어나갔다.
“그나저나 대공께서 오늘 안으로 저를 내보내실 계획인 듯하더라고요. 맞나요?”
“따로 말씀드리진 않았는데 어떻게 아셨어요? …혹시 아까 대화를 들으신 건가요?”
“본의는 아니었지만 그렇게 됐네요. 쫓겨날 거라고 예상은 하고 있었지요. 저도 이 이상 폐 끼치고 싶지 않으니 대공 소유의 별장이 아닌 근처 도시의 호텔에서 묵을까 해요.”
슬슬 일어나려는 듯 로잘린은 냅킨으로 입가를 닦았다.
소문과 달리 카에드와 세라엘의 혼인은 더러운 돈거래로 성사된 게 아니었고, 두 사람 간에 오가는 감정으로 봐선 결혼식을 막을 방도가 없어 보였다.
로잘린은 성공 가능성이 없는 일에 매달리고 싶지 않았다.
문제는 필립이었는데, 원체 말본새가 거친 그는 입만 열면 협박이었으니 크게 걱정할 건 없을 터였다.
“이만 일어날까요?”
아쉬운 게 없는 것처럼 황녀가 산뜻하게 말했다.
세라엘은 대화를 이렇게 끝맺어도 되는 건가 알쏭달쏭한 허무함이 들었다. 그러나 로잘린이 이미 의자를 밀치고 일어나고 있어 다른 선택지는 없었다.
“차 잘 마셨어요. 대공이 아닌 밀로즈 영애로부터 환대를 받을 줄은 몰랐네요.”
살가운 목소리는 아니었으나 로잘린이 감사를 표했다. 의례적이라기보다 나름대로 진심에서 나온 인사였다.
“환대랄 것도 없었는걸요.”
알 수 없는 기분에 휩싸인 세라엘은 얼떨떨하게 답했다.
불청객에게 다과라도 대접했으니 미안할 필요는 없는데 어딘가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렇다 해서 진수성찬을 차려다 바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들은 조찬실 밖으로 나와 중앙 홀까지 걸었다. 그러다 동시에 걸음을 멈춰야 했다.
“…응?”
1층 홀에 로잘린의 호위 기사들이 짐가방과 함께 떡하니 서 있었다.
그들 뒤에는 팔짱을 낀 카에드가 계단 기둥에 등을 기댄 채 서 있었고, 폭이 넓은 계단엔 대여섯 명의 발켄족 남자들이 매우 불량한 자세로 앉아 있었다.
로잘린을 발견한 기사 하나가 투덜거리며 가방을 주섬주섬 챙겼다.
카에드는 두 여자에게 성큼성큼 다가왔다.
“대화가 끝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내 부하들이 목적지까지 동행해 드릴 테니 안녕히 가십시오.”
“…….”
카에드가 오늘 내로 황녀를 내보낸다고는 했지만, 일찌감치 쫓아낼 준비를 끝내놓고 조찬실에서 나오기만을 대기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와중에 당황한 사람은 세라엘뿐인 듯했다.
로잘린은 대공성에서 나갈 준비가 완벽하게 된 상황을 보고 잠시 생각에 빠졌다. 그러고는 기사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나를 찾았다고 들었는데 이것 때문이었나요?”
“그건 아닙니다. 여기서 말씀드리기는 좀….”
말끝을 얼버무린 기사가 카에드의 눈치를 살폈다. 기사를 바라보던 로잘린이 카에드에게 턱을 살짝 숙여 보였다.
“결례를 끼쳐 미안했어요. 밀로즈 영애께도 언질 드렸지만 대공 소유의 별장이 아닌 호텔에서 머무를 예정입니다. 호위는 필요 없겠어요.”
“호위가 아니라 감시입니다. 별장으로 가시는 게 아니라면 필히 동행해 드려야겠네요.”
카에드가 앉아 있는 제 부하들에게 고갯짓하자 그들은 일시에 일어섰다.
세라엘은 떠나는 일행의 뒷모습을 망연히 보다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리고 출입문 옆의 목재 보관함을 열어 우산 하나를 꺼냈다. 로잘린이 나가기 전에 빠른 걸음으로 따라잡았다. 세라엘은 황녀에게 우산을 건넸다.
“비 맞지 마시라구요.”
담담한 표정을 짓던 로잘린이 엷은 미소를 지으며 받아들였다.
“고마워요. 결혼식에서 다시 만나기를 기대하고 있을게요.”
인사를 건넨 로잘린은 힐긋 카에드를 돌아봤다. 어느 틈에 그는 보란 듯이 세라엘의 어깨를 감싸고 있었다.
모로 봐도 손님을 배웅하는 사이좋은 대공 부부의 모습이라 로잘린은 허탈하게 웃으며 발걸음을 옮겼다.
***
harbaragi_syk
세라엘은 시간이 그렇게나 빨리도 흐를 수 있다는 사실을 몸소 체감했다.
커튼을 착 걷는 소리와 함께 유쾌한 음성이 그녀를 깨웠을 때부터였다.
“드디어 오늘이 왔네요!”
잠에서 깨지 못한 얼굴에 환한 빛줄기가 떨어졌다. 열흘 가까이 내리퍼붓던 비는 언제 그랬냐는 듯 말끔히 개어 있었다.
세라엘은 앓는 소리를 내며 이불을 뒤집어썼다.
“일어나세요. 오늘만큼은 잠꾸러기가 되면 안 된다고요.”
보통은 조심스럽기 그지없는 루시가 이불을 확 들치고 어깨를 흔들었다.
“결혼식 당일에 늦잠이나 자는 신부로 소문날 수도 있다고요. 어서 일어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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