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ried To A Savage Duke RAW novel - chapter (60)
피폐물 속 괴물 남주와 결혼했다 60화(60/150)
후작저를 떠나면서 세라엘은 결혼이라는 의식에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기로 했다.
최악에서 벗어나고자 선택했던 동아줄이었으니 사실 각별한 마음을 갖기도 어려웠다.
그러나 새하얀 웨딩드레스를 입은 제 모습을 상상해 본 적 없다면 거짓말이다.
잔잔한 피아노 음률에 맞춰 한 걸음씩 내딛는 장면도 어렴풋이 떠올려 보았고, 단상 앞에서 서약을 맺은 뒤 입을 맞추는 대목에선 언제나 가슴이 두근거렸다.
결혼식이 가까워질수록 당일엔 얼마나 떨릴지 헤아려 보곤 했다.
“살려 줘….”
침대 기둥을 끌어안고 선 세라엘이 고통스러운 목소리로 뇌까렸다.
몇 번이고 그려 보았던 그날에는 설렘도 두근거림도 없었다. 허리를 옥죄는 고통만 있을 뿐.
“특별한 날에는 반드시 착용해야 하는 보정 속옷이니 괴로워하지 마세요.”
릴리가 등 뒤의 끈을 인정사정없이 잡아당기며 살갑게 말했다. 부아가 치민 세라엘이 맞받아쳤다.
“난 입기 싫어. 이런 천 쪼가리 당장 벗어 버리고 싶어….”
“호호. 아가씨도 참. 결혼식이니 당연히 입어야지요! 긴장하셔서 또 이상한 소리 하시는 거죠.”
마침내 괴로운 시간이 끝나고 뒤에서 끈이 교차하며 묶이는 소리가 났다. 그러나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세라엘은 작은 구멍 하나만 뚫린 상자에 갇힌 사람처럼 성긴 숨을 내쉬었다. 뭔가 잘못된 게 틀림없었다.
“이… 이거 정상이야? 숨이 안 쉬어지는데?”
“걱정하지 마세요. 익숙해지실 거예요.”
고문을 마친 릴리는 콧노래를 부르며 폴짝폴짝 침실 밖으로 나갔다. 악마가 따로 없었다.
엉거주춤 침대 앞에 선 세라엘이 우는 소리를 냈다.
“이대로는 웨딩 로드도 걸을 수 없어.”
세라엘은 최대한 불쌍한 표정을 지으며 창가에 서 있던 루시를 바라봤다.
“하객들은 아름다운 신부가 아니라 죽어 가는 신부를 보게 될지도 몰라….”
낑낑대는 모습이 안쓰러웠던지 루시가 다가와서 끈을 약간 느슨하게 해 주었다. 조금이나마 숨통이 트이면서 호흡도 한결 나아졌다.
“제가 몰래 풀어 줬다고 릴리에게 말씀하시면 안 돼요. 릴리가 허리를 최대한 조여야 드레스가 예뻐 보인다고 강조했거든요.”
숨통이 먼저지 드레스가 먼저일까. 세라엘은 이 저주받을 것을 개발한 인간을 발로 차 주고 싶은 난폭한 충동을 느꼈다.
그녀는 루시의 손을 덥석 잡았다.
“절대 말하지 않을게. 오늘 같은 날 네가 내 옆에 있어서 정말 다행이야.”
“아가씨….”
눈물겨운 감동이 오가는 동안 문 너머에서 행거의 바퀴 구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제 결혼식의 정점인 웨딩드레스를 입을 시간이었다.
***
9세기 동안 명맥을 이어 온 블카노프 가문의 공사는 언제나 국가적인 차원의 전례로 다뤄지곤 했다.
그럼에도 최근 몇십 년간 블카노프 성에 오늘처럼 많은 손님이 모인 적은 없었다.
널따란 대정원에 삼삼오오 무리 지은 그들은 대다수가 지체 높은 가문의 귀족들이었다.
권세가는 물론 거대 규모의 사업체를 운영하는 사업가와 아카데미의 교수 등 제국 내에서 입지가 확실한 이들이었다.
그들은 이 결혼에 각자 다른 의견을 갖고 있었으나, 북부의 기반을 공고히 다지고 있는 젊은 영주의 예식을 구경해 보고 싶은 마음은 하나같았다.
“이야…. 이게 공사 중이었다던 그 유리온실이야?”
건축물에 남다른 관심을 가진 귀족들이 감탄사를 뱉으며 거대한 온실을 내리훑었다.
“설계 과정에서부터 유학파 디자이너와 건축가를 여럿 투입했다더니 돈깨나 들었겠는데.”
5m는 훌쩍 넘을 높이의 유리온실은 하객 200명을 거뜬히 수용할 수 있었다.
어두운 나무색의 프레임으로 짜인 온실의 뾰족한 박공지붕과 벽면은 안을 들여다볼 수 없는 불투명한 유리로 되어 있었다.
으스스한 느낌을 주는 블카노프성을 배경으로 두고도 이질감이 없는 특이한 건축물이었다.
반면 온실 내부는 완전히 다른 세상이었다.
특수 처리된 유리였는지 안에선 바깥을 훤히 내다볼 수 있었다. 투명한 유리면 너머의 하늘이 몹시 푸르렀으나, 시선을 올린 이들의 관심을 잡아끈 것은 맑은 하늘이 아니었다.
높은 천장에 셀 수 없이 많은 연보랏빛 꽃을 매달아 길게 늘어뜨린 모습이 모든 하객의 마음을 단번에 사로잡았다.
중앙에 자리한 샹들리에는 수십 갈래로 뻗친 금빛 가지에 동그란 크리스털이 방울방울 맺힌 모양이라, 주변 꽃장식과도 조화롭게 어우러졌다.
귀족들은 단상까지 쭉 뻗은 웨딩 로드를 거닐며 입을 모아 감탄하다가도 문득 의아해했다.
“이상하구먼. 공들인 건 알겠는데 일회성으로 끝날 식장치고는 좀 과하단 말이지. 블카노프 대공은 어째서 이런 온실을 세운 걸까?”
“자네 바보 아닌가? 결혼식에 와 놓고 무얼 묻고 있어. 당연히 신부를 위해서 만들었겠지.”
“그게 이상하다는 거야. 그 대공이 신부든 누구든 남을 위해 이타적으로 행동할 사람이냐고.”
온실 내에는 미묘한 정적이 흘렀다.
대화를 나눈 이들은 모두 사업가 사교 클럽의 회원들로, 카에드와 여러 번 대면한 경험이 있었다.
카에드가 막 공작위를 승계했을 때 축하 인사와 함께 보낸 클럽 초대장 덕분이었다.
당연히 무시하리라 생각했는데 놀랍게도 그는 초대를 승낙했고, 이후 연회나 모임에도 얼굴을 자주 비치는 편이었다.
덕분에 밀로즈 후작을 포함한 귀족 사업가들은 제법 긴 시간 동안 그와 교류할 수 있었다.
심중을 알 수 없는 냉랭한 남자. 그들이 카에드에게서 받은 인상은 그게 전부였다. 여성의 마음을 동하게 하는 아름다운 유리온실을 만들 줄 아는 남자가 아니었다.
“세상에나. 기혼인 신사분들께서 그리 말씀하시면 안 되지요.”
불쑥 끼어든 어느 귀부인이 부채로 입을 가린 채 눈웃음을 지었다.
“본디 사랑에 눈이 먼 사내는 하늘에서 별도 따다 줄 것처럼 헌신적으로 변하지 않던가요? 블카노프 대공도 한창때인 남성인데 사랑에 빠지지 않는 게 더 이상한 법이지요. 그렇지 않나요?”
“그게 더 납득하기 어려울 것 같소만….”
“어머나. 눈앞에 사랑의 증거물이 떡하니 놓여 있는데 그런 말씀을 하시다니요.”
귀부인은 유리 천장에 주렁주렁 달린 꽃장식을 보라는 듯 손을 길게 뻗었다.
귀족 사업가들은 의미심장한 시선만 주고받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귀부인은 가볍게 혀를 찼다.
“참으로 안타깝군요. 여자에게 사랑받고 싶으시다면 대공을 한번 본받아 보시는 게 어떨는지요. 전 이만 경들의 부인께 심심한 위로의 뜻을 전하러 가 봐야겠네요.”
그들에게 일침을 가한 귀부인이 호호 웃으며 자리를 떴다. 사업가들은 얼떨떨한 표정을 짓다가 다시 온실 내를 거닐었다.
하객 중에는 대정원이나 유리온실을 구경하는 사람뿐 아니라, 결혼이라는 행사를 틈타 친교를 나누는 사람도 많았다. 세라엘의 부친인 밀로즈 후작이 그중 한 명이었다.
이 결혼식이 끝나기 전에 한 건 제대로 해 볼 심산인 후작은 정원을 돌아다니며 두리번거렸다. 오래지 않아 먹잇감을 찾아냈다.
“이봐, 오웬 백작!”
하인이 건넨 샴페인을 마시고 있던 오웬 백작은 못마땅한 눈으로 밀로즈 후작을 훑었다.
“밀로즈 후작이구먼. 여긴 어쩐 일인가?”
“어쩐 일이냐니, 이 사람아! 내 여식이 대공의 신부 아닌가. 내가 없으면 이 결혼식도 의미가 없을 테지.”
밀로즈 후작은 본론으로 들어가기 전에 헛기침을 했다.
“그나저나 자네, 요즘 칼스비크에 호텔 사업을 추진 중이라면서?”
“촉새같이 또 어디서 주워듣고 왔는가? 말이 좋아 추진이지, 보장된 것 하나 없네.”
“다 알고 왔지. 교역항이 있는 동쪽 도시에 상권 분석도 마치고 입지까지 봐 두었다면서.”
“분석할 것도 없었네. 블카노프 대공이 확장한 항구 도시가 무섭게 번성하고 있다는 걸 모르는 사람도 있나? 막말로 끝자락 골목길에 개업해도 대박이 날 걸세.”
“그럼 진행하는 데 지지부진한 이유가 뭐야. 대공에게서 사업 허가를 받지 못해서 그렇지?”
밀로즈 후작이 히죽 웃으며 말을 이었다.
“내가 또 누군가. 칼스비크의 영주와 옹서지간이 아닌가. 자네가 원한다면 기꺼이 줄을 놓아줄 수도 있네.”
오웬 백작이 눈을 가늘게 뜨자, 밀로즈 후작은 엄지와 검지 끝을 맞대고 동그라미를 만들어 보였다.
“약간의 소개비만 내어 주면 좋겠어.”
오웬 백작은 헹 콧방귀를 뀌었다.
“자네가 대공과 옹서 간이라고 들먹이며 이리저리 돈을 꾸고 다니는 걸 모를 줄 알아? 이젠 대놓고 소개비나 요구하다니 염치도 없구먼그래.”
“도, 돈을 꾸고 다닌다니 그게 웬 헛소리야!”
“자네가 줄을 놓을 필요도 없겠어! 대공성에 왔으니 내가 직접 인사나 하러 가야지.”
“이 사람이 그리 혜안이 없어서 무슨 사업을 하겠다고 그래!”
밀로즈 후작이 버럭 성을 내는데도 오웬 백작은 등을 돌렸다. 후작은 이를 뿌득 갈고 그를 노려보았다.
“어이! 단테!”
문득 밀로즈 후작은 저를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근데 어째 후작의 이름을 막 부르기엔 목소리가 좀 젊기도 한 것이 뭔가 이상했다. 곧 음성의 주인을 알아본 밀로즈 후작이 펄쩍 뛰었다.
“잘 지냈어요, 단테?”
“저… 저…!”
저놈의 야만인! 차마 소리 내지 못한 밀로즈 후작이 부들부들 떨었다.
어찌나 식성이 좋던지 힌델 레스토랑에서 후작의 주머니를 거덜 냈던 카에드의 부하 중 하나, 콜이었다.
콜은 그래도 아는 얼굴이라고 씩 웃으며 그에게 손을 흔들어 보였다. 옆에선 렉터가 그를 꼬집으며 남부인의 예절을 잊지 말라고 힐난했다.
휙 고개를 돌려 무시하려던 밀로즈 후작의 눈길이 다시 자석에 이끌리듯 그를 향해 날아들었다.
정확히는 콜 앞에 있는 남자를 향해서였다.
“블카노프 대공 아니신가!”
후작은 기쁜 목소리로 알은체하며 카에드에게 쫄래쫄래 다가갔다. 언제부터 대정원에 와 있었는지 그는 다른 귀족들로부터 축하 인사를 받는 중이었다.
훤칠한 남자가 구김 하나 없이 빳빳한 정복을 차려입은 모습은 모두의 이목을 잡아끌었다. 카에드 주위로 하객이 몰려드는 바람에 후작은 가까이 접근할 수 없었다.
“결혼 축하드립니다, 대공.”
“정말 아름다운 온실이에요. 신부의 마음에 쏙 들겠어요.”
어느 귀족이 흐뭇한 말투로 세라엘을 언급하자 카에드는 여유로운 미소를 지었다. 날카로웠던 인상이 부드럽게 풀어지면서 영락없이 사랑에 빠진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에 사방에서 탄성이 터지고 흥분한 속삭임이 들려왔다.
“웃을 줄도 아는 사람이었네….”
누군가 희미한 목소리로 감탄하자 적잖은 수가 동감했다.
젊은 귀부인들의 반응이 특히 뜨거웠다. 사람 얼굴을 노골적으로 쳐다보면 무례하다는 걸 알면서도 그들은 미어캣처럼 카에드의 동선을 좇으며 부지런히 구경했다.
겨우 인파를 밀치고 카에드 앞에 선 밀로즈 후작이 두 손바닥을 비비며 굽신거렸다.
“이게 얼마 만인지요. 제가 몇 번이고 서한을 부쳤는데 꽤 바쁘셨나 봅….”
“영주님.”
불쑥 끼어든 노집사가 카에드에게 뭐라 소곤거렸다.
몇 초간 어떤 소식을 전달받은 카에드가 곧 고저 없는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들어가서 착석하십시오. 이제 신부가 도착할 겁니다.”
그의 부하들이 입장을 종용하듯 온실 문을 열어젖혔다. 정원에 서 있던 모든 귀족이 걸음을 재촉했다.
금붕어처럼 입을 뻐금거리던 후작도 기류에 못 이겨 온실로 향했다.
하객들이 다 들어가고 나서 카에드는 제 입가를 쓸며 세라엘을 기다렸다.
그의 표정은 차분하기 그지없었으나 느리게 까딱이는 발은 조급함을 나타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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