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ried To A Savage Duke RAW novel - chapter (67)
피폐물 속 괴물 남주와 결혼했다 67화(67/150)
내뱉고 나니 남편이라는 단어가 영 익숙지 않았다.
세라엘은 혀끝에 들러붙은 이질감을 떨쳐 내고 말을 이었다.
“기억나시나요? 아버지께서 언제나 여자는 출가외인이라 하셨죠. 그 말씀대로 오늘이 지나면 저는 밀로즈 가문과 연을 끊고 어머니는 물론 아버지와도 볼 일 없을 거예요. 저를 대머리 노인네에게 팔아넘기려 하셨던 분들이니 이 정도는 예상하셨으리라 믿어요. 피로연 열심히 즐기다 가세요. 그럼 이만.”
끼어들 틈도 주지 않고 쏘아붙인 세라엘은 가뿐히 걸음을 돌렸다.
어깨너머로 나타샤가 뭐라 지껄이는 게 들려왔지만, 가까워지지 않는 걸 보면 티론이나 다른 사람에게 제지당한 듯했다.
오늘 밤이 지나면 저 꼴 보기 싫은 인간들과 부딪칠 일은 없을 것이다. 줄곧 어깨에 둘러메고 있던 짐 덩이를 하나 내려놓은 듯 홀가분했다.
이제 세라엘이 집이라 부를 곳은 칼스비크였다. 후작저를 떠나기 전부터 인지했는데도 새삼스러운 자각에 기분이 묘했다.
감상에 젖어 들 새도 없이 세라엘은 하나둘 인사를 건네는 손님들로 인해 금세 정신을 빼앗겼다.
거대한 통유리창 너머로 어둠이 깊어지면서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결혼식도, 피로연도 이제 막바지에 이르고 있었다.
***
너른 집무실 안에는 카에드의 측근 6인이 모여 있었다.
바닥에 퍼질러 앉은 청소년 세 명은 바구니 가득 가져온 음식을 먹으며 장난을 쳤고, 성인들은 차분히 대화를 나누며 샴페인을 따라 마셨다.
카에드는 창가에 기대서서 투명한 연갈색 술이 든 글라스를 들이켜며, 마지막 하객을 실은 마차가 떠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때 의례적인 노크 후 누군가 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로이 형!”
사과 주스를 마시고 있던 렉터가 막 집무실 내로 들어선 남자를 밝은 목소리로 반겼다.
그는 서글서글한 인상을 가진 준수한 미남이었다. 렉터는 남자가 건네는 망토를 받아 주었다.
“복귀하는 데 시간이 꽤 걸렸네. 정보는 얻었어요?”
“조금. 여자 친구랑은 잘 지내고 있었어?”
“루시는 제 여자 친구가 아니라니까요…!”
로이는 얼굴을 붉히며 발끈하는 렉터의 머리칼을 가볍게 쓰다듬은 후 카에드를 응시했다.
“결혼 축하해요, 두목. 예식을 못 봐서 아쉽네요. 유부남이 된 기분은 어때요?”
“앉아.”
창가에서 눈을 뗀 카에드는 빈 소파를 턱짓했다.
정 없어 보이는 반응이었지만 누구도 개의치 않았다. 찰나에 가벼이 웃어 준 것만으로도 충분히 살가운 응수란 걸 그들은 알고 있었다.
“보고해.”
“필립이라는 자식, 뒤가 상당히 찝찝한 놈이에요.”
풀썩 소파에 앉은 로이는 시프가 건네는 와인을 받아 들며 서두를 열었다.
“꼬리 밟히기 싫었는지 중간에 기사들 전부 사복으로 갈아입혔더라고요. 도시 랜본에서 은 갑옷의 기사를 봤다는 목격자가 없었다면 이것도 알아내지 못했을걸요.”
“그건 네가 전령조를 보내서 알려 준 정보잖아. 복귀 직전에 찾은 단서는 뭐야?”
성격 급한 호크가 그를 다그쳤다. 로이는 포도주를 한 모금 마시며 어깨를 으쓱였다.
“황태자 일행은 북서쪽으로 향한 것 같아요. 이틀 동안 조사했는데도 범위가 넓고 소나기 때문에 자취를 찾을 수 없었어요. 그 이상의 추적은 어렵다고 판단해서 복귀한 거고요.”
“미꾸라지 같은 놈들. 랜본의 북서쪽에 수상쩍은 것이 있는지부터 조사해야겠군.”
“그런데 황태자는 둘째 치고, 황녀도 결혼식에 불참하지 않았던가?”
시프의 물음에 닭고기 샌드위치를 와구와구 먹던 콜이 끄덕거리며 덧붙였다.
“빨간 머리 여자는 지금도 대도시 오슬로의 호텔에서 두문불출하고 있어요. 딱히 꼬투리 잡힐 만한 일은 없었다더군요.”
“난 그래도 안심이 안 돼요.”
줄곧 로잘린을 의심해 온 악셀이 눈매를 좁혔다.
“황녀가 대동했던 기사 중 하나가 성에서 나가기 전에 급히 황녀를 찾았잖아요. 황태자로부터 뭔가 지시를 전달받았던 게 아닐까요? 그전에 두목이 축객령을 내려서 시도도 못 해 봤겠지만.”
잠자코 듣고만 있던 렉터가 불쑥 끼어들었다.
“난 황녀 쪽은 잘 모르겠어. 누님의 친절을 빌어 성에 계속 머물겠다고 고집할 수도 있었는데 그러지 않았잖아. 황태자와 한패인 것 같다는 느낌이 들지는 않아.”
“이게 내 직감을 무시하고 있네! 비아테가 다 거기서 거기지, 한패가 아니라는 건 어디서 튀어나온 코끼리 발상이야!”
별안간 악셀이 언성을 높이자 렉터는 깜짝 놀랐다. 곧 렉터도 이맛살을 구기며 맞받아쳤다.
“무시한 게 아니잖아! 감시를 철회하자고 한 것도 아닌데 왜 코끼리처럼 소리를 지르냐.”
“이 하이에나 같은 게 감히 형한테 코끼리가 뭐야!”
“형이 먼저 코끼리라고 했잖아!”
“닥쳐라.”
차분히 술로 목을 축이던 바이퍼가 일갈했다. 두 청소년은 깨갱 하고 동시에 입을 다물었다.
카에드는 유리잔에 남은 술을 한 번에 털어 넣었다. 탁, 소리와 함께 책상에 내려놓은 잔 안에는 채 용해되지 못한 흰 가루가 극소량 남아 있었다.
온종일 들끓었던 감정이 무겁게 가라앉는 것을 느끼며 그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감시는 계속해. 정보원을 파견해서 랜본의 북서 방위를 기준으로 황태자가 갈 만한 장소가 있는지 알아봐. 지저분한 놈이라 흔적이 남았을 거다.”
“알겠습니다, 두목.”
카에드는 목깃을 조이는 타이를 아래로 잡아 뺐다.
“이만 해산해라. 뜻깊은 날이니 마음껏 먹고 마시도록.”
명령이 떨어지자 청소년들은 우당탕 소음을 내며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그 뒤를 나머지 측근들이 뚜벅뚜벅 따라나섰다.
카에드는 의자 등받이에 상체를 기대며 흥분도를 잠재우는 약효가 몸에 완전히 퍼지기를 기다렸다. 평소보다 몇 배가 넘는 양을 복용한 탓에 시간이 걸릴 테지만, 이렇게라도 미리 제동을 걸어 놓아야 했다.
그래야지만 다가오는 밤에 세라엘을 몰아치는 일이 없을 터였다.
***
“아가씨. 방금 깜빡 잠드셨나요?”
욕조 안에 장미수를 쪼르르 붓는 소리와 함께 루시의 음성이 귓전에 들렸다.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근 채 반쯤 졸고 있던 세라엘은 멍한 눈을 깜박거렸다.
“응… 너무 피곤했나 봐.”
“피곤하실 만도 해요. 손님맞이가 보통 쉬운 일이 아니잖아요.”
세라엘은 졸린 눈을 비비며 피로연을 복기했다.
“그래도 즐거웠어. 친해진 귀부인들과 앞으로 종종 편지를 주고받기로 했고, 오웬 백작 부인은 여름이 되면 남부 별장에 놀러 오라고 초대해 줬어.”
비몽사몽 종알대는 그녀의 어깨 위로 향기로운 오일이 끼얹어졌다.
루시와 함께 목욕 시중을 들던 릴리가 뭉친 곳을 부드럽게 풀어 주자 기분 좋은 노곤함이 몰려왔다.
“정말 즐거우셨겠어요. 하지만 이제부터가 시작인데 기운을 다 빼 버리시면 어떡해요. 아침까지 힘내셔야죠. 자, 여기 물약도 좀 드세요.”
릴리는 코앞에 기운을 회복시키는 강장제를 들이밀었다. 목욕 중이라 발그레한 혈색이 오른 세라엘의 뺨이 더욱 달아올랐다.
잠을 깨우려고 저리 부끄러운 말을 하는 걸까? 그런 거라면 제대로 성공했다.
머릿속이 더없이 또렷해진 세라엘은 물약을 받아 들었다. 새콤한 레몬 맛이 가미된 약을 들이켜자 전신에 피가 빠르게 도는 느낌이었다.
목욕에 이어 전신 스크럽, 오일 마사지까지 마친 세라엘의 몸은 푸딩처럼 흐물흐물해진 상태였다.
딱딱하게 뭉친 근육이 풀어진 덕분에 어깨와 팔이 가벼이 나풀거렸고, 전신에서 스며 나오는 향기는 무척이나 달콤해서 꿀벌이라도 꾀어낼 것 같았다.
“이쪽으로 오세요. 신방은 2층 마스터 룸에 마련되었답니다.”
맨몸에 무릎 위까지 오는 실크 가운 하나만 걸친 세라엘은 두 하녀와 신방으로 향했다. 이 차림으로 누구와 마주칠까 두려워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녀의 속내를 눈치챈 루시가 머뭇거리다 말을 내놓았다.
“걱정하지 마세요. 호출하지 않는 이상 내일 아침까지 여기 올라오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거예요.”
릴리는 냉큼 맞장구쳤다.
“2층에서 폭약이 터진다 해도 들을 사람은 없으니 안심하세요.”
“…고마워. 굉장히 사려 깊구나.”
세라엘이 붕 뜬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마음 놓으라고 하는 소리인 걸 알면서도 딱히 도움이 되지 않았다.
이윽고 신방의 문 앞에 도착하자 세라엘은 다급히 몸을 돌렸다.
“잠깐. 옷은 어떻게 하지? 이것만 입고 있을 수는 없잖아. 안에 잠옷은 준비된 거지?”
릴리가 결연한 표정으로 세라엘의 손을 붙들었다.
“당연하죠! 저만 믿으세요. 침실 안쪽에 욕실과 이어지는 파우더 룸이 있는데, 그 안에 짐 가방이 하나 있을 거예요. 오늘을 위해 제가 준비한 선물이니 꼭 열어 보셔야 해요.”
열어 보기가 두려웠다. 릴리의 열정을 아는 세라엘은 그녀가 썩 믿음직스럽지 않았다. 하지만 성의를 무시하고 싶지 않았기에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하녀들은 빠른 걸음으로 멀어져 갔고, 세라엘은 혼자 침실 안으로 들어섰다.
신방은 이제껏 방문해 본 대공성의 어떤 침실보다도 넓었다. 머지않아 부부 침실로 사용할 공간이기도 했는데, 굳이 설계사를 불러 꾸미지 않아도 아늑하고 깔끔한 곳이었다.
어쩌면 오늘 밤을 위해 꾸며진 장식 때문인지도 몰랐다.
침대 양옆의 사이드 테이블과 곳곳에 자리한 여러 개의 촛불이 일렁이며 신방을 은은하게 밝혔다. 특히 창가 테이블 위의 7구 촛대는 금박이 덧씌워진 고급스러운 디자인이라 절로 감탄을 자아냈다.
장정 셋이 누워도 충분한 크기의 침대엔 부드러운 크림색 침구가 구름처럼 펼쳐졌고, 천장까지 솟은 4개의 침대 기둥에는 반투명한 흰색 커튼이 둘려 있었다.
첫날밤을 보낼 준비가 완벽하게 된 침실을 보자 심장이 주체할 수 없이 콩닥거렸다. 기어코 이날이 오고야 말았다.
“안 되겠다. 술을 마셔야겠어.”
마침 테이블 위에는 신선한 과일과 디저트, 붉은 액체가 든 유리병이 놓여 있었다.
세라엘은 병을 집어 들고 잔에 절반쯤 따라 들이켰다. 이상하게도 알코올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새콤달콤한 풍미를 머금은 액체는 술이 아니라 체리 주스였다.
주변을 살펴보았지만, 테이블은 물론 널찍한 공간 어디에도 와인이나 샴페인은 보이지 않았다. 취기를 빌리면 어수선한 마음을 조금이나마 진정시킬 수 있을 텐데 술이 없다니.
세라엘은 괜한 조급함에 복도를 의식하며 귀를 쫑긋 세웠다. 카에드가 다가오는 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가 오기 전에 잠옷으로 갈아입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안이 희미하게 비치는 얇은 가운 차림으로 그를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세라엘은 파우더 룸으로 향하는 문을 열었다.
릴리가 말한 대로 기다란 대리석 탁자에 휴대용 가방이 하나 놓여 있었다. 그녀는 입고 있던 가운을 스르르 벗고 짐가방을 열었다. 그러고는 자기도 모르게 미간을 좁혔다.
“이게 뭐야…?”
안에는 도대체 용도를 알 수 없는 다채로운 천 조각들이 한가득 들어차 있었다. 세라엘은 개중 하나를 조심스럽게 집어 들고 유심히 관찰했다.
그녀의 손바닥보다도 작은 레이스 조각이었다. 그것이 여성용 란제리라는 걸 알아차리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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