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ried To A Savage Duke RAW novel - chapter (76)
피폐물 속 괴물 남주와 결혼했다 76화(76/150)
눈치가 없는 편은 아닌 것 같은데 세라엘은 이따금 맹한 면모를 보였다.
그녀의 식사가 끝날 때마다 바로 그 파티시에로부터 얻어 낸 조리법으로 디저트를 만들어다 바쳤다. 맛있다며 쉴 새 없이 감탄하던 그녀의 모습을 보고 제 결정이 어찌나 만족스럽던지.
공유하겠다는 조리법 하나만 보고 사업 허가서를 써 주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녀에게 좋은 음식만 먹고 지내는 달콤한 생활을 선사하고 싶었던 제 마음을 이리도 몰라 줄 수가 있나. 심사가 뒤틀린 카에드는 사탕을 받아먹으면서 세라엘의 손가락을 살짝 깨물었다.
“……!”
세라엘은 소리도 내지 못하고 눈만 동그랗게 떴다. 그에게 먹여 주던 손가락이 모양 그대로 허공에서 멈칫했다.
저리 태연한 얼굴로 이런 얄궂은 장난을 치다니. 그것도 이렇게나 사람이 많은 곳에서!
그녀는 연한 치아 자국이 남은 손가락을 황망히 내려다보았다. 유치하게 똑같이 깨물 수도 없고, 그랬다간 되레 말려들 게 뻔하고. 이걸 어쩌면 좋을까 머리를 굴리던 세라엘은 짐짓 매섭게 한마디 던졌다.
“복수할 거예요.”
카에드는 가소롭다는 듯 픽 웃었다.
“이전에도 내게 복수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지금도 복수의 칼날을 갈고 있거든요.”
“기대되는군요. 한번 해 보십시오.”
“제가 뭘 어떻게 할 줄 알고 그러시나요? 어마어마한 고통을 안겨드릴 수도 있다구요.”
“어디 마음껏 복수해 봐요.”
그는 세라엘의 얼굴을 향해 불쑥 손을 뻗었다. 불건전한 기운을 품은 손가락이 그녀의 입술을 살살 매만졌다.
“이왕이면 입을 써 줬으면 좋겠네요. 이걸로 깨물어도 좋고, 핥아 주면 더 좋겠는데.”
경악한 세라엘이 그의 옷자락을 황급히 틀어잡았다.
“그게 왜 복수예요? 게다가 사람이 이렇게나 많은데 그런 발언을… 누가 들으면 어떡하려고 그래요!”
두 사람을 에워싼 군중은 음유시인의 공연에 정신이 팔린 상태였다. 어차피 아무도 신경 쓰지 않고 있었지만, 카에드는 낮게 웃으며 다른 제안을 던졌다.
“그럼 사람이 없는 곳으로 가시겠습니까?”
“좋아요.”
누가 거절할 줄 알고. 세라엘은 머뭇거리지도 않았다. 축제 구경도 실컷 했으니 자리를 옮기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칼스비크의 영주가 관광객 득시글한 곳에서 아내의 손가락을 깨물며 음란한 말을 속닥이는 것을 누가 알아챌까 두렵기도 했다.
그들은 축제 거리에서 빠져나왔다. 마차가 줄줄이 세워진 길을 지나 강이 보이는 한적한 언덕을 향해 거닐었다.
하늘은 조금씩 어두워지고 있었다. 축제 기간이라 사방에 장식된 야외 조명이 주변을 은은하게 밝혔고, 강물은 불빛을 머금고서 바람을 따라 일렁였다.
가도에서부터 번져 나오는 노랫소리가 희미해질 때쯤 두 사람은 강을 건너는 다리 근처에 자리를 잡았다.
춥지도 않은지 카에드는 제 겉옷을 벗어 풀밭 위에 깔았다. 그를 만류하려던 세라엘은 잠자코 그 위에 엉덩이를 대고 앉았다.
대신 그의 몸을 따뜻하게 할 만한 무언가를 주섬주섬 꺼냈다. 휴대용 유리병에 담긴 독한 증류주였다.
“뭔가요?”
카에드가 마뜩잖은 어조로 물었다. 위로 잡아 빼야 열리는 뚜껑을 세라엘은 낑낑대며 옆으로 돌렸다.
“이거 술이에요. 아, 왜 안 열리지?”
“술인 건 알아요. 당신 안주머니에서 독주가 나오는 이유를 묻는 겁니다.”
“화내지 마세요. 제가 알코올 중독이라 술을 갖고 다니는 게 아니거든요.”
“축제에서 구매한 겁니까?”
“맞아요. 아까 콜이 한 병 사길래 저도 호기심에 따라 샀던 거예요.”
주류를 파는 노점에 잠깐 들렀을 때였다. 유리 공예품처럼 섬세하고 작은 병에 담긴 연분홍빛 술이 예뻐서 마음에 들었고 가격도 합리적이라 고민 없이 집어 들었다.
술을 사들이는 세라엘에게 상인은 반드시 과즙이나 물에 희석해서 마시라는 주의를 몇 번이고 주었다. 고운 외형과는 달리 굉장히 독한 술인듯했다.
‘내 앞에서 취할 일이 없을 거라고? 이걸 마시고도 그렇게 말할 수 있나 궁금하네.’
차디찬 날씨에 겉옷을 벗은 카에드가 신경 쓰이기도 했지만, 그것보단 그의 취한 모습을 보고 싶어서 꺼낸 술이었다.
아까 카에드가 했던 말에 적잖이 서운하던 참이었다. 세라엘의 가슴속에 고이 자리한 전의를 불태우는 발언이었다.
그녀는 탐탁지 않은 눈길을 받으면서도 병을 만지작거렸다. 곧 익살맞은 소리와 함께 병뚜껑이 열렸다.
“그렇게 보지 마세요. 마시려고 산 건 아니었어요.”
“아닌데 지금은 왜 마실 기세입니까? 뚜껑 다시 닫으십시오.”
“당신 몸을 데워 주고 싶어서 그래요.”
뭐라 핀잔을 하려던 카에드가 입을 우뚝 다물었다. 회심의 미소를 지은 세라엘이 눈을 반짝이며 술병을 내밀었다.
“춥지 않으신가요? 자, 이걸 한번 마셔 보세요.”
내뱉고 나니 초보 악마처럼 속이 훤히 보이는 구슬림이었다. 그래도 세라엘은 의지를 꺾지 않고 술병을 든 손을 더 가까이 뻗었다.
그 앙큼한 저의를 카에드가 모를 리 없었다. 그는 술병을 내려다보다가 눈동자만 들어 올려 세라엘의 푸른 눈을 응시했다.
“내 몸을 데워 주고 싶으면 술보다 더 좋은 방법이 있지 않습니까?”
호기롭게 병을 들이밀었던 세라엘이 금세 곤혹스러운 낯을 하고 손을 떨었다.
“어떤 방법인데요…?”
카에드는 시선을 미끄러뜨려 그녀를 내리훑었다. 겨울 드레스로 꽁꽁 싸맨 몸이 순식간에 발가벗겨진 기분이었다.
“알잖아요. 좀 추운 것 같기도 한데, 데워 줄 겁니까?”
서 있었다면 펄쩍 뛰어올랐을 모양새로 세라엘이 어깨를 한번 흔들었다.
“아무리 사람이 없다지만 어떻게 그런…!”
“저기 밀폐된 공간이 있군요.”
카에드는 길가에 세워진 빈 마차를 눈짓했다. 대공성에서부터 세라엘이 타고 온 마차였다.
뻔뻔한 말에 그녀는 할 말을 잃고 입술을 벌렸다. 도대체 이 남자가 하는 말이 진심인지 장난인지 가늠할 수 없었다.
“농담이신 거죠?”
“농담? 내가 지금 웃고 있습니까?”
“여태 웃으면서 농담한 적도 없잖아요…!”
그동안 웃음기 한 터럭 없는 표정으로 농담을 툭툭 던져 왔으니 헷갈리잖아. 어쨌든 마차 안에서 하자는 말이 진심일 리 없었다. 세라엘이 술 마시는 걸 좋아하지 않았던 남자이니 심술을 부리는 게 분명했다.
“아무튼…. 정말 안 마실 거예요?”
“별로 안 당깁니다.”
손수 뚜껑까지 열어서 술병을 내밀었는데도 카에드는 마실 생각이 없어 보였다. 세라엘은 머리를 굴리다 곧 묘안을 하나 떠올렸다.
“그럼 그냥 마시면 재미없으니까 저랑 게임 하실래요?”
“무슨 게임입니까?”
“진실을 말하는 게임이라고 들어 보셨나요?”
세라엘은 병뚜껑을 살짝 닫고 풀밭에 올려놓았다.
“상대에게 질문을 해서 대답하지 못하면 벌주를 한 모금씩 마시는 거예요. 어때요?”
앉은 몸을 비스듬히 기울여 오른손으로 턱을 괴고 있던 카에드가 그녀의 면면을 뜯어보듯 바라보았다.
고민은 길지 않았다. 그는 자세를 바로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그럼 시작할까요? 제게 질문해 보세요.”
“당신이 먼저 하십시오.”
그가 양보하자 세라엘이 피식 웃었다.
“초심자가 먼저 하세요. 저는 여러 번 해 본 게임이거든요.”
“누구랑 해 봤습니까?”
느닷없이 찌르고 들어오는 질문에 세라엘은 뜨끔하여 여유로운 기색을 거뒀다. 차마 전생에서 즐겼던 술 게임이라고 말할 순 없었다.
지금 그녀는 후작가 출신의 귀족이다. 고주망태가 되거나 난잡해질 우려가 다분한 게임을 귀족 여성이 즐길 일은 거의 없다. 심지어 북부에 오기 전까지만 해도 그녀가 타인과 음주를 즐길 수 있는 자리는 손에 꼽을 정도로 드물었다.
친우라 부를 사람도 루시뿐이었는데 하녀와 이런 술 게임을 할 리도 없지 않은가. 세라엘이 머리를 팽팽 굴리는 동안 카에드는 잠잠한 표정으로 답을 기다렸다.
이리저리 시선을 배회하던 그녀는 결국 술병으로 손을 뻗었다.
“이럴 수가….”
망연자실하게 뇌까린 세라엘은 병을 기울이며 연한 장밋빛 액체를 한 모금 머금었다. 그 순간 입 안이 타오를 듯 뜨거웠고 눈앞이 핑 돌았다.
눈을 딱 감고 목구멍으로 넘기자 식도를 따라 불길이 화르르 내려가는 느낌이었다. 절로 몸서리가 쳐졌다.
“읍….”
저 남자를 먹여야 하는데 왜 초장부터 자신이 들이켜고 있는지 모를 일이었다.
“너무 독해요.”
세라엘은 입을 가리고 눈을 질끈 감았다. 다시 뜬 눈에 비친 풍경이 안개처럼 아롱거리는 것 같았다.
술병을 내려놓은 그녀는 어질어질한 머리를 짚었다. 그 자세로 눈을 게슴츠레 뜨고 카에드를 응시했다.
카에드는 북부에 나타난 낙타를 보는 것처럼 세라엘의 불안정한 동태를 관찰하고 있었다.
“술은 왜 마신 겁니까?”
“왜긴 왜겠어요….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이었으니까요.”
그가 턱을 옆으로 살짝 꺾었다.
“그저 궁금해서 물어본 질문이었습니다만.”
“…네?”
“게임을 시작한다는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와아.”
세라엘은 기가 막혀 탄식을 흘렸다.
“정말 이러기예요?”
“말릴 새도 없이 병을 기울이더군요. 술을 마음껏 마실 심산으로 게임을 제안한 건가 싶었습니다.”
귀신처럼 빠르면서 말릴 새도 없긴 무슨! 세라엘은 흐리멍덩해지려는 눈을 부릅뜨고 카에드를 쏘아봤다.
하지만 딱히 할 말이 없었다. 그의 말대로 게임이 시작되었다는 언질은 없었고, 그녀가 말을 끝내자마자 자연스럽게 던져진 물음이었다.
괜히 뜨끔한 세라엘이 갈팡질팡하다가 혼자 찔리는 바람에 벌주를 마신 것이다.
“너무해…. 그럼 지금부터 시작하는 거로 해요.”
“물어보십시오.”
“초심자가 먼저 하세요….”
카에드는 무심한 얼굴로 곧장 입을 열었다.
“무슨 색을 좋아하십니까?”
엉뚱한 물음이었다. 속내를 가늠하듯 눈을 가늘게 좁힌 세라엘이 답을 내놓았다.
“연두색을 좋아해요.”
“어째서?”
“카에드. 이 게임은 돌아가면서 한 번씩만 문답하는 거예요.”
심지어 진실 게임에서 좋아하는 색 따위를 묻는 사람은 처음 봤다. 아무래도 그는 게임을 완벽하게 파악하지 못한 듯했다.
규칙을 알려 줄까 말까. 세라엘 자신은 한 방울도 마시지 않고 카에드만 마시게 하려면 알려 주지 않는 게 좋을 것이다.
하지만 공정한 게임 진행을 원했던 그녀는 제 친절함에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그리고 진실 게임에서는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을 하는 게 암묵적인 규칙이에요. 그래야 상대에게 술을 마시게 할 수 있거든요.”
카에드는 어떠한 동요도 비치지 않고 어깨만 으쓱일 뿐이었다.
“알았습니다. 이제 당신 차례니 내게 질문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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