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ried To A Savage Duke RAW novel - chapter (8)
피폐물 속 괴물 남주와 결혼했다 8화(8/150)
“허억.”
루시가 기절초풍하여 입을 틀어막았다.
내던진 장신구에 불이 화르륵 옮겨붙었다. 불길을 타고 사치스러운 금붙이가 조금씩 녹아 들어갔다.
세라엘은 그 모습을 잠시 지켜보다 터덜터덜 방 밖으로 나왔다.
허탈한 기분이었다. 나름대로 행복한 삶이라 생각했던 자신이 어리석었다.
‘미련하긴. 가문의 재산은 내 것도 아니고, 사랑으로 보살펴 줬던 어머니는 돌아가시고 없는데 뭐가 행복하다는 거야.’
편히 놀고먹으려는 마음가짐도 안일하기 짝이 없었다. 세라엘이 헝클어진 백금발을 쓸어넘겼다.
“바깥 공기나 쐬러 가자, 루시.”
“아… 아가씨.”
“괜찮으니까 얼른.”
루시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세라엘을 뒤따라왔다.
층계를 내려가면서 하녀 한 명과 맞닥뜨렸으나 그녀는 멈추지 않고 밖으로 향했다.
두 사람은 민들레꽃이 예쁘게 핀 들판에 앉아 후작령의 전경을 눈에 담았다.
언덕에서 내려다본 마을은 노을빛을 받아 무척 아름다웠다.
열을 맞춰 자리 잡은 주택들의 밝은 지붕은 중부 특유의 따뜻한 분위기를 자아냈고, 그 뒤로 끝없이 펼쳐진 푸른 밀밭이 평화롭게 물결치고 있었다.
세라엘이 어릴 때 친모와 종종 놀러 가곤 했던 과수원도 탐스러운 열매가 맺혀 울긋불긋 곱게 물들어 있었다.
그녀가 나고 자란 이 평온한 장소가 지금은 전혀 다른 세상처럼 느껴졌다. 세라엘은 두 무릎을 끌어모아 얼굴을 파묻었다.
‘대머리 백작과 결혼할 바엔 도망쳐 버리는 게 나아. 하지만 어디로 가야 하지?’
전생에선 좁고 누추하더라도 숙식과 안전이 보장되는 거처에서 지냈다.
그러나 이 세계, 로페른 제국은 여성이 남성에게 귀속될 수밖에 없는 데다 신분제가 존재하는 사회였다. 도주 중인 홑몸의 여자가 갈 만한 장소는 극히 한정적이었다.
세라엘이 후작 영애로 태어나 호의호식한 기간이 20여 년인데, 정말 최악의 환경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을까?
생각의 방향은 가장 먼저 떠올렸던 계획으로 향했다.
‘쌈짓돈을 훔쳐서 달아나는 건? 패물이라도 있으면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
그마저 호위가 없으니 강도를 만난다면 소지품을 모조리 빼앗길 것이다. 그것만 뺏긴다면 차라리 다행이겠지. 악한 의도를 품은 자가 젊은 여자를 곱게 보내 줄 리는 없었다.
‘…아니, 패물을 훔쳐 달아날 계획이었으면 애초에 불태우지도 않았어.’
사실은 알고 있었다. 이곳을 당장 벗어나면서 안위까지 보전할 수 있는 현실적인 방법은 하나뿐이라는 것을.
세라엘은 무릎에 묻었던 얼굴을 쳐들었다.
‘예순이 넘은 노인에게 팔려 가야 한다면, 젊고 잘생기고 돈까지 많은 남자와 이 거지 같은 저택을 떠날 거야.’
갑작스레 닥친 위기를 기회로 받아들이고 현실적인 결단을 내려야 했다. 푸르른 바닷물을 닮은 세라엘의 눈에 결연한 의지가 어른거렸다.
이제 그녀에게 남은 선택지는 단 하나였다.
***
저녁 느지막이 귀가했더니 저택이 한바탕 뒤집혀 있었다.
물 양동이와 더러운 수건이 사방에 널브러져 있어 발 디딜 틈이 없었다. 그 위로는 청소 도구를 든 하인들까지 바삐 움직이는 중이었다.
어수선한 꼴을 더 자세히 살필 새도 없이, 나타샤가 핏발 선 눈으로 세라엘에게 달려들었다.
“너! 너지! 이 망할 계집애 같으니라고!”
계모의 얼굴이며 옷자락에 꺼먼 재가 가득했다.
“주인마님! 진정하세요!”
루시와 다른 하인이 나타샤를 붙들었다.
발버둥 치던 나타샤가 재로 범벅인 손을 뻗자 세라엘은 고운 미간을 찌푸렸다.
“지저분한 손 치워요. 제가 선 넘지 말라고 하지 않았어요?”
“너 때문에 모든 게…! 너 맞지! 네가 한 짓이지!”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모르겠어요. 외출하고 막 돌아왔는데 이게 무슨 난리인가요.”
“시치미 떼지 마! 네가 벽난로 안에 내 장신구를 넣었잖아! 그걸 꺼내려다 바닥에 불이 옮겨붙고, 화장대까지 모조리 불탔단 말이야!”
세라엘은 그제야 저택이 엉망으로 어질러져 있던 전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불타는 금붙이를 발견하고 끄집어내려던 나타샤가 아무래도 일을 더 키운 모양이었다.
씩씩대는 나타샤를 응시하며 세라엘은 고개를 내저었다.
“전 모르는 일이에요. 어머니의 화장대와 난로가 가까워서 사고가 난 게 아닐까요?”
나타샤가 잿더미로 꾀죄죄한 얼굴을 무섭게 일그러뜨렸다.
“이… 이 정신 나간 계집애가 진짜!”
“말끝마다 계집, 계집. 기품 있는 언사를 조금이나마 보여 줄 생각은 없으신가 보군요. 말이란 화자의 성품을 비추는 거예요, 어머니.”
“이게 누굴 가르치려 들어!”
난감한 표정으로 사태를 지켜보던 집사가 나서서 나타샤를 만류했다.
“마님. 다행히 다친 사람은 없으니 일단 진정하십시오.”
“그딴 게 대수야? 내 옷과 귀한 보석까지 모조리 불에 타 버렸잖아! 그 장신구들이 얼마나 비싼 줄 알아?”
“하오나….”
“시끄럽다! 범인은 무조건 쟤야. 목걸이에 발이 달려서 제 발로 난로에 들어간 것 같아?”
“수도에 가신 대공님과 영주님께서 머지않아 귀가하실 터인데, 소란이 커지면 손님들께도 큰 실례가 될 것입니다….”
집사의 말에 한풀 꺾인 나타샤가 씩씩대며 세라엘을 쏘아보았다.
‘노려보면 뭐 어쩔 건데.’
세라엘도 지지 않고 계모를 응시했다.
종적을 감췄던 카에드 일행은 후작과 수도 힌델에 갔었던 모양이다. 곧 한꺼번에 돌아오려나 본데, 카에드가 적극적으로 결혼을 밀어붙이던 그날 밤 이후 첫 재회가 될 터였다.
‘차라리 잘됐어. 내 계획을 일사천리로 진행할 수 있겠는걸.’
세라엘이 단단히 먹은 마음을 다잡았다.
소동이 잦아들면서 사용인들은 제자리로 돌아가거나 주변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구석에서 눈치만 보던 하녀 한 명이 머뭇거리며 모습을 드러냈다.
아까 세라엘이 1층으로 내려오면서 봤던 하녀였다. 저택에서 일한 지 얼마 안 된 사용인이었다.
인제 보니 나타샤에게 자주 알랑방귀를 뀌던 모습도 기억난다.
어린 세라엘이나 외출이 잦은 밀로즈 후작보다 나타샤가 저택의 실세라 판단한 게 분명했다.
두려움과 호기심이 깃든 눈으로 세라엘을 훑던 하녀가 조심스럽게 말문을 뗐다.
“저어, 주인마님….”
하녀는 제 존재를 알리고자 한 발짝 더 앞으로 나왔다.
“저기 저, 정말 죄송한데….”
“죄송하면 입 다물어.”
세라엘이 냉정하게 말을 가로챘다.
심상치 않은 기류에 나타샤는 대번에 갈매기 눈썹을 하고 역정을 냈다.
“다물긴 뭘 다물어! 너! 계속 말해 봐.”
요리조리 눈치를 보던 하녀가 냉큼 나타샤 뒤에 붙었다.
“제가 보았어요, 주인마님.”
하녀의 고자질에 계모가 손뼉을 한 번 쳤다.
“옳다구나. 저 앙큼한 것이 한 짓을 네가 목격했다 이거지?”
왜인지 화색이 도는 목소리가 어처구니없었다.
자신감을 얻은 하녀가 세차게 끄덕거렸다.
“예, 마님. 아가씨가 주인마님과 영주님 방에서 나오는 걸 제가 똑똑히 보았어요.”
“그게 틀림없겠지?”
“예. 급히 나오시는 모습이 의아하여 눈여겨보고 있었어요.”
“이 일은 후작님께 반드시 문책하고 넘어갈 터이니 네가 증인이 되는 거야. 보상은 섭섭지 않게 해 주마.”
“…감사합니다, 마님.”
살다 살다 증인 매수를 눈앞에서 하는 꼴도 다 보네. 게다가 계단에서 한번 마주쳤을 뿐인데 제법 각색이 되었다.
사람을 방화범으로 몰아가려면 큰 배짱과 철면피 같은 뻔뻔함이 필요할 텐데 저 하녀는 그런 타입으로 보이지 않았다.
“증거 있어?”
세라엘이 턱을 모로 꺾으며 물었다. 예기치 않은 질문에 주춤한 하녀는 말을 더듬었다.
“증, 증거는 없지만 제가 분명….”
“근데 네 말을 무슨 수로 믿어? 너 얼마 전에 부엌에서 육포도 훔쳐 먹었잖아.”
하녀는 매우 당황하여 얼굴색이 파리해졌다.
며칠 전 부엌일을 담당하는 하인이 요즘 소고기 육포가 조금씩 없어진다고 토로한 걸 들었다.
수도로 자주 출타하는 후작님의 여정을 위해 구비했던 거라 곤혹스럽다고 하면서.
세라엘은 2층 손님방과 서재 청소 담당인 이 하녀가 부엌에서 허겁지겁 나오는 걸 여러 번 목격한 적이 있다.
품 안에 무언가를 껴안은 채로 주변을 연신 두리번거리기에, 음식을 빼돌렸다는 걸 눈치챌 수 있었다.
‘배고파서 그런가 싶어 눈감아 준 줄도 모르고.’
세라엘이 잇달아 쏘아붙였다.
“신빙성이 없잖아? 너 같은 육포 도둑이 하는 말에는.”
“아, 아니에요. 전 절대로 소고기 육포를… 아무것도 훔쳐먹지 않았어요.”
“난 소고기라고 한 적 없는데.”
이상하다는 듯 세라엘이 턱을 기울였다.
“희한하네. 너 진짜 육포 도둑이었구나.”
“절… 절대 아니에요!”
“그런 나쁜 손버릇을 가진 사용인이 후작저에서 일할 자격이 있을까? 거짓말까지 하는 주제에 또 뭘 훔쳤을지 어떻게 알아?”
집사와 몇몇 하인들이 시선을 주고받았다.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지만 저택에 불이 나서 모두가 정신없는 상황이다. 그런 와중에 어린 하녀가 안주인의 비위를 맞추려 결백한 아가씨를 몰아세웠다.
그러다 제 죄를 되레 모두에게 밝히게 된 우스운 꼴이었다. 특히 부엌 식료품 담당인 하인이 무척 화가 난 눈치였다. 하녀는 거의 울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 그건 정말 제가 아닌….”
“야!”
나타샤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육포 도둑이 아닌 세라엘을 향해서였다.
“영악하게 말 돌리려고 하지 마!”
나타샤는 재 묻은 손가락으로 세라엘을 척 가리켰다.
“넌 진짜 끝이야. 후작님이 귀가하시면 네 만행을 일러바칠 것이다. 내 보석을 하나도 남김없이 태운 죄를 똑똑히 물을 테니 각오해.”
“그러시든가요. 나도 대공님이 돌아오시면 결혼하자고 할 거니까.”
“이 실태를 후작님께 내 당장…! …무, 뭐라고?”
뒤통수를 치는 충격에 나타샤가 입을 떡 벌렸다. 사용인들도 마찬가지였다. 세라엘은 새침하게 팔짱을 꼈다.
“대공님과 결혼하겠다고요.”
찬물을 끼얹은 듯 장내가 고요해졌다.
“왜 놀라시죠? 그게 아버지가 원하던 거 아니었어요?”
안면이 희게 질린 나타샤는 도저히 믿지 못하겠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무…무슨 헛소리냐? 네가 블카노프 대공님과 결혼을 하겠다고?”
“새삼스럽게 뭘 또 물어보세요. 백년가약을 맺을 거예요.”
세라엘은 스스로 내뱉은 말이 어이가 없어 몰래 헛웃음을 쳤다.
면식도 없는 남자와 하루 만에 백년가약이라니. 카에드에게 당당히 내보였던 가치관이 와장창 깨지는 발언이었다.
나타샤는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으로 턱을 흔들었다.
“말도 안 돼…. 내가 알기로 대공님께선 분명 혼사에 관심이 없었다.”
“어머, 잘못 아셨나 보네. 며칠 전에 대공님께서 결혼 계획이라면 있다고 하셨잖아요.”
제 주장에 힘을 싣고자 세라엘이 지난 만찬에서 나눈 대화를 짚어주었다.
거짓말에는 약간의 진실이 섞여야 진짜처럼 들리니까.
“그러고 나서 대공님은 저와 결혼하고 싶다고 하셨거든요. 다 저한테 첫눈에 반해서 그러신 거예요. 제가 너무 좋으시다나, 뭐라나.”
후작이 세라엘을 대가로 블카노프 대공에게 요구한 돈은 영지의 10년 치 세금과 맞먹는 큰 금액이라고 했다.
나타샤가 그걸 모를 리 없었다.
“대공님께서 너에게 청혼했단 말이냐?”
“전 받아들였고요. 태어나서 그렇게 멋있고 근사한 분은 처음 봤어요. 작위까지 가진 남자를 마다할 이유가 뭐가 있겠어요?”
한사코 마다했던 기억을 무시하며 세라엘은 그와 사랑에 빠진 척 너스레를 떨었다.
뭐라 말해야 할지 몰라 나타샤는 붕어처럼 입을 벙긋거렸다.
늘 당돌하고 버르장머리 없는 눈엣가시 의붓딸이 금덩이로 보이는 순간이었다.
“…그, 그게 다 정말이냐?”
“그럼 가짜겠어요? 벌써 반지까지 받았는걸요.”
세라엘이 친모의 유품이 끼워진 네 번째 손가락을 내보였다. 나타샤를 대면하기 전에 일찌감치 중지에서 약지로 바꿔 끼운 은반지였다.
소스라치게 놀란 나타샤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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