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ried To A Savage Duke RAW novel - chapter (81)
피폐물 속 괴물 남주와 결혼했다 81화(81/150)
“뭐가 그리 걱정된다고 헉헉대면서 달려와.”
남자는 숨을 고르는 로잘린을 향해 조소를 던졌다. 잠시 세라엘과 눈을 맞추던 황녀는 그를 난감하다는 얼굴로 바라보았다.
“몇 번이고 불렀는데 그냥 가 버리시면….”
“무슨 소리야.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네가 알려 줬잖아? 흘러내린 금발을 보아하니 밀로즈 영애인 것 같다며. 내 방식대로 인사하라는 뜻 아니었나?”
“달려가서 무례를 범하라는 뜻이 아니었어요.”
“구경꾼 앞에서 따귀를 맞고 싶지 않으면 닥치거라. 오늘이 겁대가리 없이 판치는 날인가, 하나같이 거슬리게 하고 있군.”
오가는 대화를 들으니 자초지종을 알 것 같았다.
마차에서 내린 이들이 하필 후드를 쓰지 않은 채로 지나가던 세라엘을 발견한 모양이었다.
그녀를 알아본 로잘린이 정체를 일러 주자, 왜인지 심술을 부리고 싶었던 이 남자가 점쟁이 흉내를 내어 다가온 듯했다.
세라엘은 눈매를 좁히고 괴한을 노려봤다. 자신은 로잘린과 막역한 사이가 아닌데도 황녀를 향한 남자의 태도에 눈살이 찌푸려졌다.
고작 몇 마디 지껄였을 뿐인데 그의 인성이 얼마나 밑바닥인지도 알 수 있었다. 이 짧은 순간 동안 남자는 회생 불가능할 만큼 비호감의 정점을 찍었다.
로잘린은 눈썹을 일그러뜨리며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미안해요, 밀로즈 영애. 오라버니의 장난이 지나쳤다면 사과할게요.”
세라엘이 뭐라 입을 열기도 전에 송곳니를 드러낸 남자가 로잘린을 냅다 윽박질렀다.
“이게 미쳤나. 한낱 후작의 여식한테 저자세로 빌빌대는 이유가 뭐야? 너 같은 게 무슨 제국의 황족이라고…. 주제넘게 나불대지 마.”
상스러운 언사에 세라엘은 미간을 모았다. 예의라곤 눈곱만큼도 없는 저 무뢰한의 따귀를 때리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그러다 로잘린이 그를 뭐라 칭했는지 뒤늦게 인지하고는 꽁꽁 얼어붙었다.
‘…오라버니라고?’
제국에서 황녀가 오라버니라 부를 이는 단 한 명뿐이었다. 눈앞의 남자는 돌팔이 점쟁이도, 미친 사람도 아니었다. 세라엘은 그가 누구인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남자는 얼굴의 절반 이상을 가리고 있던 후드를 걷어 냈다. 저도 모르게 침을 삼킨 세라엘은 정체를 밝히는 남자를 지켜보았다.
“……!”
그림자가 걷히자 피처럼 붉은 홍채와 푸른빛이 도는 은발이 모습을 드러냈다. 세라엘의 눈에 비친 동요를 읽어 낸 필립이 히죽 입가를 끌어당겼다.
“이제 좀 예의를 차릴 의향이 있나?”
남자는 성격도 더럽고 뻔뻔하기까지 했다. 점쟁이 흉내를 낸 주제에 낯짝도 두꺼웠다. 세라엘은 네가 먼저 상도덕 없이 굴어 놓고 예의를 바라냐며 쏘아붙이고 싶었다. 그러나 남자의 정체를 눈치챈 이상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겉모습으로만 따지면 카에드도 썩 선해 보이지 않지만, 넌 진짜 쓰레기구나.’
황가의 문양처럼 독사를 연상케 하는 이목구비는 물론 만면에 피어난 비열한 미소가 그런 인상을 주었다. 역시나 소리 내서 말할 수 없는 속마음이었다.
기세를 꺾고 얌전해진 세라엘이 마음에 들었는지 필립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는 대뜸 그녀의 코앞에 손등을 내밀었다.
“로페른 제국의 황위를 계승할 혈통에게 예를 갖추어라.”
“예를 갖추라는 말씀은….”
손등을 보던 세라엘의 눈길이 잘게 떨리며 필립의 얼굴로 향했다.
황태자 필립 비아테. 빛바랜 기억 속의 원작을 돌이키자 그에 관해 가닥이 잡히는 사실이 몇 개 있었다.
필립은 카에드와 직접적인 마찰은 없었다. 그러나 모든 비극의 근간인 비아테 황실의 적통이자, 카에드가 공자로부터 화살을 맞을 때 바로 옆에서 히죽거렸던 인간 아니었던가?
카에드와 직접적인 적대 관계에 있었던 인물이 모두 영문 모를 죽임을 당한 세계라 마음이 안일해져 있었나. 어쩌면 위협이 될지도 모를 남자가 눈앞에 떡하니 서 있는 걸 보자 세라엘은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랐다.
침묵이 길어지자 필립의 선홍빛 눈에 짜증이 어렸다.
“뭐야. 황족을 대우하는 예법도 배우지 못했나? 누구처럼 천출도 아니고 후작의 여식이라면서?”
필립은 곁에 서 있던 로잘린을 못마땅한 눈으로 쏘아봤다.
“아니면 너부터가 황족다운 위엄을 보여 주지 못했으니 나를 우습게 아는 거겠지. 애써 블카노프성에 보내 놨더니만 축객이나 당하고 돌아와서는.”
“밀로즈 영애와 대공은 저를 환대해 주었어요. 새벽녘에 찾아갔는데도 불구하고….”
“따귀를 맞기 싫으면 닥치라고 했지. 계집이 말만 많아서는.”
단칼에 로잘린의 말허리를 끊은 필립의 시선이 다시 아래로 향했다. 세라엘은 재차 주먹을 쥐었다. 이 옹골찬 주먹으로 필립의 명치를 있는 힘껏 치고 싶었다.
필립은 자비를 베풀어 주겠다는 어조로 말을 이었다.
“무릎을 꿇어라.”
“네…?”
“무릎 꿇으라고.”
잘못 들은 게 아니란 걸 알려 주듯 필립이 손등을 더 가까이 내뻗었다.
로잘린이 흠칫하여 필립의 팔을 잡자, 그는 눈도 마주치지 않고 다른 손으로 황녀를 밀쳤다.
“밀로즈 후작 가문의 여식은 내 앞에 무릎을 꿇고 손등에 입을 맞춰라. 그것으로 머지않은 미래에 로페른의 황제가 될 고귀한 이에게 예를 표하는 것이다.”
심상치 않은 기류에 몇몇 행인이 그들을 흘끔 돌아보기 시작했다.
세라엘은 요동치는 눈으로 필립의 손등을 응시했다. 일평생 힘든 일 따윈 해 본 적 없는 희고 매끄러운 손이었다.
인사 대신 황족의 손등에 입을 맞추는 일은 드물게 있었으나, 무릎까지 꿇으라는 건 분명 선을 넘은 요청이었다.
세라엘은 그를 거절할지, 아니면 자존심을 죽이고 응할지 선택의 기로에 놓였다.
자신의 잘못된 행동으로 카에드에게 나쁜 영향이 갈까 두려웠지만, 이 비열한 독사한테 무릎을 꿇고 입 맞추기도 싫었다.
고민은 길지 않았다. 인파로 붐비는 길 한복판에서 대공 비인 그녀가 부당한 명령에 응한다면 카에드의 위신에 해가 갈지도 몰랐다.
세라엘은 최대한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전하께 아뢰기 죄송하지만 지나친 요구인 것 같습니다.”
“…뭐라?”
종잇장 구겨지듯 필립의 인상이 찌그러졌다.
충분히 정중했는데도 저 배배 꼬인 무뢰한에겐 턱도 없는 듯했다. 세라엘은 꿋꿋이 말을 계속했다.
“저는 이제 밀로즈 가문의 여식이 아닙니다. 얼마 전 블카노프 가문에 적을 올렸으니 대공작 부인이 되었지요. 그런 제게 단명할 거라 저주를 내리시고 밤일로 대공 전하를 유혹했냐 여쭈신 것도 모자라 무릎까지 꿇으라는 건 정도가 지나치셨다고 생각합니다.”
로잘린은 사색이 되어 세라엘을 바라보았다. 어금니를 으득 깨문 필립의 표정도 심상치 않았다.
“요구가 아니라 명령이라면? 너는 황족의 명령을 거절할 만큼 배짱이 좋은가?”
“그게….”
“비아테 황가의 명예를 훼손한 중죄로 가축처럼 끌려가고 싶지 않으면 한번 대답해 봐.”
적대감을 드러낸 필립이 시뻘건 홍채를 빛냈다. 할 말을 찾지 못한 세라엘의 눈이 마구 흔들렸다.
그 순간, 그녀의 등 뒤에서 커다란 손이 나타나 내뻗어진 필립의 팔뚝을 움켜잡았다.
“흐아악!”
필립의 경박한 비명이 메아리처럼 울려 퍼졌다.
너무나도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세라엘은 바로 상황 파악을 하지 못했다. 필립은 억센 손아귀에서 벗어나려 덫에 걸린 쥐처럼 날뛰었으나 헛수고였다.
몸부림치는 필립과 대조적으로 그의 팔을 틀어잡은 이는 일말의 미동도 없었다. 자기도 모르게 두 손으로 입을 가린 세라엘은 어느 틈에 다가온 카에드를 황망히 쳐다보았다.
“당장 이것 놓지 못해! 무엄하다! 아악!”
“그러게 내 땅에서 왜 소란을 피워.”
꽥꽥거리는 필립과 달리 카에드는 단조로운 음성으로 내뱉었다. 콰드득, 심상치 않은 소리가 나면서 필립이 다시 고함을 내질렀다. 축제 거리를 지나던 행인이 그들을 빙글 둘러싸고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대공!”
“카에드…!”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황녀와 세라엘이 달려와 카에드를 만류했다. 무표정한 얼굴이었으나 정신이 회까닥 나간 사람처럼 그의 눈동자에는 괴이한 이채가 어려 있었다.
로잘린은 흠칫하여 뒷걸음질 쳤지만 세라엘은 그의 팔을 잡고 마구 흔들었다.
단단한 몸에서 극한으로 고양된 살기가 전해지자 덜컥 겁이 났다. 불현듯 그녀는 가까운 곳에 바이퍼와 로이, 어느새 합류한 콜과 악셀까지 멀거니 서 있는 것을 알아챘다.
“말려야 하는…!”
혹시 말려 주지 않을까 싶어 간절한 시선을 보냈으나, 그들은 말리기는커녕 팔짱을 끼고 짝다리까지 짚은 채 관망하는 중이었다.
심각성을 인지하지 못 하는 건가. 그 태평스러운 모습에 세라엘은 아연실색하여 말을 잃었다.
그녀는 카에드의 어깨에 반쯤 대롱대롱 매달려 새된 목소리로 속삭였다.
“이러다 정말 큰일 나겠어요! 보는 눈도 많잖아요…!”
영 멈출 것 같지 않아 세라엘은 있는 힘껏 그를 끌어안았다.
“카에드!”
얼마 지나지 않아 딱딱하게 경직된 몸에서 살기등등한 기세가 누그러지는 게 느껴졌다. 카에드는 내팽개치듯 필립의 팔을 놓아주었다.
필립은 용케 넘어지지 않았으나 중심을 잡지 못해 우스꽝스러운 걸음을 몇 번 밟았다. 그 모습을 본 로이가 피식 가벼운 웃음을 터뜨렸다.
간신히 두 발로 선 황태자는 무지막지한 손아귀에 틀어 잡혔던 부위를 감싸며 송곳니를 드러냈다. 카에드를 향한 시뻘건 눈동자가 고통과 분노로 뒤섞여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이… 이러고도 무사할 줄 알아! 어딜 감히!”
“겁도 없이 내 아내에게 수작질이나 하는 쓰레기가 말이 많군.”
나직하게 내뱉은 카에드가 팔을 돌려 세라엘을 제 등 뒤로 숨겼다. 너른 등판에 시야가 완전히 가려지면서 세라엘은 필립을 볼 수 없었다.
대신 악의에 가득 찬 목소리가 그의 어깨너머로 들려왔다.
“제정신인가! 부부가 쌍으로…! 내가 누군 줄이나 알고 그리 지껄이는 거야!”
“바이퍼. 가서 도끼를 가져와라.”
카에드가 뜬금없는 명을 내리자 바이퍼는 성큼성큼 인파를 헤치고 어딘가에서 손도끼를 가져왔다.
상황이 갈무리될 줄 알았던 세라엘은 불안한 눈으로 카에드를 바라봤다. 무서울 정도로 차분한 표정이 더없이 불길했다.
“칼스비크에서는 여성을 희롱하면 손목을 절단하는 형벌이 있거든.”
도끼를 건네받은 카에드가 필립의 멱살을 움켜잡았다.
“무슨… 왜… 왜 이러는 거야!”
“왜긴 왜야. 여자나 건드리는 손모가지는 잘라 버리는 게 낫잖아.”
싸늘하게 일갈한 카에드는 필립을 어딘가로 질질 끌고 갔다. 황태자 또한 작지 않은 체격인데도 도살장에 끌려가듯 반항도 하지 못했다.
카에드가 향하는 곳엔 거대한 나무 그루터기가 있었다. 무엇이든 받치고 자르기 좋은 처형대나 다름없었다.
“내 땅에 기어들어 온 참에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손목이나 자르고 가지.”
카에드는 필립을 그루터기 앞에 짐짝처럼 내동댕이치며 손도끼를 고쳐 잡았다. 일련의 동작에는 머뭇거림이 조금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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