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ried To A Savage Duke RAW novel - chapter (82)
피폐물 속 괴물 남주와 결혼했다 82화(82/150)
농담이 아니란 걸 알았는지 필립은 사색이 되어 빽 소리를 질렀다.
로잘린은 기함할 듯 놀라면서도 움직이지 못했고, 세라엘은 펄쩍 뛰면서 급한 대로 곁에 있던 악셀을 잡아당겼다.
“카에드 님을 말려 봐!”
악셀은 곤란하다는 듯 눈썹을 찡그리면서도 움직이지 않았다.
“보기 힘드시면 마차로 먼저 모셔다드릴까요?”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 제안에 세라엘은 기가 막혀 입을 벌렸다. 그 옆에 선 바이퍼와 로이는 물론 콜까지도 감흥 없는 낯을 하고 있었다. 정말 카에드가 황태자의 손목을 뎅겅 자르는 걸 내버려 둘 생각인가?
세라엘은 짐승의 등가죽을 쥐듯 필립을 틀어잡은 카에드를 부리나케 쫓았다. 필립은 카에드의 억센 손아귀에서 벗어나려 힘껏 발버둥을 쳤다.
“이, 이것 놔! 로잘린! 기사! 기사를 불러! 기사는 대체 어디 있는 거야!”
“왜 반항을 하고 그래. 군중 앞에서 본보기를 보여 줘야 너 같은 벌레가 더는 번식하지 않을 것 아닌가.”
음산하기 짝이 없는 목소리에 발켄족을 제외한 일행 모두가 사색이 되었다.
“미쳐 버린 거야? 나야! 나라고, 필립! 날 기억하지 못하겠어? 어렸을 때부터 자주 봤잖아!”
“걸레짝처럼 너덜거리는 팔뚝을 보고 싶으면 계속 발악해 봐.”
간절한 외침을 깡그리 무시한 카에드는 필립의 뒷덜미를 잡아 그루터기 위에 짓눌렀다. 눈을 희번덕 치켜뜬 필립은 목청이 터져라 비명을 꽥꽥 질러 댔다.
카에드의 팔을 부둥켜안고 있던 세라엘은 아연실색하여 그를 올려다봤다. 처음으로 목도하는 그의 잔혹한 모습은 모순적이게도 그녀가 익히 알던 것이었다.
수틀리면 상대의 신체 부위를 어디든 훼손하고 마는 무자비한 성정은 정말 활자로 보았던 모습 그대로였다.
“카에드, 이제 그만해요! 그 사람은…!”
세라엘은 온 힘을 다해 카에드의 팔을 잡아당겼다. 그러다 헛발을 디뎠는지 그의 몸에 대롱 매달린 상태에서 아래로 주욱 미끄러졌다.
꼴사나운 모양새로 넘어지려던 순간 벼락같이 허리를 잡아 일으킨 손 덕분에 추태를 면할 수 있었다.
그녀의 하얗게 질린 얼굴에 반사적으로 눈길을 꽂던 카에드는 잠시간 바위처럼 꿈쩍도 하지 않았다.
아래로 고개를 돌린 그는 황태자의 얼굴을 조용히 내려다보았다. 어깨를 짓누르는 정적이 얼마나 흘렀는지 세라엘은 가늠할 수 없었다.
“이런.”
무미건조한 목소리가 말을 이었다.
“시정잡배인 줄 알았더니…. 필립이었군.”
느릿느릿 몸을 일으킨 카에드가 바닥에 도끼를 툭 내던졌다. 필립은 조금 전의 상황을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낯으로 카에드를 응시했다.
“나인 줄 몰랐다는 건가?”
“내 부인에게 치근덕대는 인간이 당신일 줄 알았겠나.”
“시, 시치미 떼지 마! 이름까지 말해 주었는데 그게 말이 되나! 내 얼굴을 모르는 것도 아니잖아!”
“황족이 보일 언행은 아니었거든.”
“이익…!”
황태자의 손목을 분지르려고 했던 것도 모자라 뎅겅 자르려던 남자가 느긋한 표정으로 능청을 떨고 있었다.
정말 필립의 정체를 몰랐던 것인가? 당연히 그럴 리가 없다. 공포에 질려 있던 황태자의 얼굴이 분노로 일그러졌다.
난생처음 겪은 굴욕감이 뒤늦게 피어오르면서 필립은 어금니를 갈았다. 일평생 타인의 머리 꼭대기에서 군림해 온 그에게 있어, 이번 일은 죽어도 잊지 못할 치욕이 될 게 분명했다.
때마침, 황실 기사들이 달려와 그를 보호하듯 둥글게 에워쌌다.
카에드는 서늘한 눈으로 그들을 죽 훑었다. 모두 사복 차림이었으나 걸음에 맞춰 묵직한 쇠붙이 소리가 나는 것으로 보아 무장한 상태란 걸 알 수 있었다.
불구경하듯 서 있던 카에드의 측근들 또한 기민하게 날을 세우고 기사들을 응시했다.
“으으, 젠장….”
팽팽하게 대치하는 상황에서 문득 필립은 보는 눈이 지나치게 많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들 앞에서 짐승 멱따는 소릴 낸 자신을 되새기며 필립은 욕설을 뇌까렸다. 그때 카에드가 나직하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내 아내를 희롱한 것도 모자라 위협한 이유는 뭐지?”
그들을 둘러싼 웅성거림이 한층 높아졌다. 퉁퉁 부어오르기 시작한 팔뚝을 매만지던 필립이 흠칫 눈썹을 세웠다.
황태자는 이 수모를 어떻게 앙갚음할지 머리를 굴리고 있었다.
자치권을 인정받았다지만 칼스비크는 독립하지 않은 영지였기에 여전히 제국에 종속된 땅이었다. 대공이라 하더라도 주군의 위치에 있는 황족에게 상해를 가했으니 어떻게든 대가를 치르게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목격자가 많았다. 저 군중 가운데 조금이라도 눈치가 있는 사람이라면, 축제 한복판에서 소동을 벌인 남자들이 칼스비크의 대공작과 황태자라는 사실을 알아챌 수 있을 것이다.
황태자가 대공 비를 건드렸다는 걸 적지 않은 사람이 알게 되었으니 그의 입장도 마냥 유리하지 않았다.
카에드의 말이 제법 충격이었는지 황실 직속 기사 두 명까지 시선을 교환하고 있었다. 필립은 그게 너무나 거슬렸다. 재수 없게도 그들은 로잘린을 따르는 기사였다.
직업의식 없는 저 배은망덕한 것들을 나중에 다 잘라 버려야겠다고 생각하며 황태자는 슬그머니 후드를 뒤집어썼다.
대공이 자신에게 모멸감을 준 책임은 나중에라도 물을 수 있으니 일단 소란을 잠재울 필요가 있었다.
바락바락 악다구니를 썼던 것이 무색하게도 필립은 원래의 느른한 목소리로 말했다.
“…장난이 과했던 것 같군. 그럴 의도는 없었네.”
“여성을 상대로 돼먹지 못한 수작질을 한 것도 모자라, 무릎을 꿇지 않으면 중죄로 처벌할 것이라 협박한 게 장난으로 치부할 일인가?”
손목 두 짝을 잃을 뻔한 필립이 한 수 접고 들어오는데도 카에드는 적의를 거두지 않고 으르렁거렸다.
입술을 짓씹던 필립은 반감이 어린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보며 자신을 변호했다.
“난 누구든 희롱하거나 위협할 의도가 없었네. 북부에선 농담을 한 죄로 손목을 자르는 형벌이 있는지도 몰랐어. 제도였다면 이따위 사소한 일로 처벌하는 경우가 없….”
살벌하게 번득이는 눈동자를 마주한 필립이 입을 다물었다. 마침 로잘린과 눈이 마주친 그는 재빨리 그녀를 앞에 내세웠다.
“심지어 자네 부인이 누군지도 몰랐다고. 그저 지나가고 있었을 뿐인데, 내 누이가 대공 비라 일러 주어 인사치레로 농을 던졌을 뿐이야. 로잘린, 그렇지?”
사시나무처럼 떨던 로잘린이 제게 향하는 화살을 인지하고서 숨을 멈췄다. 황녀는 긴 한숨을 내리 쉬더니 고개를 주억거렸다.
“오라버니의 말이 맞아요. 오슬로의 축제에 도착하자마자 제가 밀로즈 영애를 발견했어요. 곁에 계셨던 오라버니께도 그대로 말씀드렸고요.”
“들었지? 내 누이가 아니었다면 모르고 지나갔을 거라고. 자네 부인을 해코지하려던 게 아니었단 말이네.”
카에드는 여전히 무감한 낯이었으나, 목에 굵은 핏대가 곤두서는 것으로 보아 노기를 눌러 참는 듯했다. 로잘린이 세라엘과 눈을 맞추며 잇달아 사과를 건넸다.
“소란을 일으켜서 미안해요. 일이 이렇게 커질 줄은 몰랐어요.”
“아뇨. 황녀께서 사과하실 필….”
고개를 내저으려던 세라엘의 몸이 빙글 돌았다. 다시 손을 뻗은 카에드가 그녀를 제 등 뒤로 숨긴 것이다. 그 바람에 말허리가 잘리고 시야도 차단되었다. 세라엘은 그가 뒤로 돌린 팔에 얽매여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로잘린을 향한 카에드의 눈이 서릿발처럼 싸늘했다.
“당신을 내 성에 들여 환대한 것이 후회스럽군요.”
“…….”
환대 안 했잖아. 경황없는 와중에도 세라엘이 그리 생각했다. 그럼에도 로잘린은 할 말이 없는 듯 시선을 내리깔았다.
“밀로즈 영애에게 미안할 따름이에요.”
“거슬리니까 내 아내를 더는 밀로즈 영애라 칭하지 마십시오.”
“…실례했어요. 이제 주의할게요.”
정황을 지켜보던 필립이 슬금슬금 기사들 틈으로 걸음을 옮겼다.
“나는 이만 돌아가 보겠네. 이러려고 축제에 온 게 아니었는데 시간을 지체했군.”
“가긴 어딜.”
무시할 수 없는 목소리가 필립을 붙들었다. 심상치 않은 기류를 읽은 기사들이 검집이 있을 바지춤에 손을 갖다 댔고, 거의 동시에 카에드의 부하들도 무기를 빼어 들 태세를 취했다.
일촉즉발의 긴장감이 감도는 가운데, 표정을 일그러뜨린 필립이 발끈하여 위태로운 공기를 깨부수었다.
“자네는 내게 위해를 가하지 않았나? 오해였다지만 처벌 없이 넘길 수 있는 일이 아니었어. 내가 눈감아 주겠다는데도 거절할 텐가? 일을 크게 키울 셈이야?”
“뭘 그리 벌벌 떨어.”
카에드는 입술 끝에 조소를 머금었다.
“오랜만인데 회포라도 풀지.”
뜻밖의 제안에 필립은 이맛살을 구겼다. 그러나 카에드와 마주 앉아 대화를 나눌 만큼 친분이 두터운 사이가 아니었기에 의심의 끈을 놓지 않았다.
“회포를 풀자니, 진심으로 하는 말인가?”
“날 만나고 싶다는 서신을 줄기차게 보냈던 사람이 희한한 소릴 다 하는군.”
카에드는 의구심을 표하는 황태자를 비웃었다. 말문을 잃은 필립이 쏘아보는데도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칼스비크에 왔으면 내게 알려 주지 그랬어. 섭섭하지 않게 대접해 줬을 텐데.”
영 아쉽다는 어조라 사정을 모르는 이가 들었다면 곧이곧대로 받아들였을 말이었다. 필립은 이글거리는 눈으로 카에드를 올려다봤다.
“그래, 방문하겠다는 기별을 몇 번이고 보냈는데 자네가 모조리 거절했잖아!”
“칭얼대긴. 그래서 결혼식에 초대해 주지 않았나.”
“으으….”
“기껏 초대장까지 보내 줬더니만 참석하지 않은 이유는 뭐지? 칼스비크의 어디서 무얼 하고 있었길래.”
고저 없이 명확한 발음을 가진 저음은 늘 타인의 이목을 잡아끌었다. 때아닌 소란에 잔뜩 모여든 구경꾼들이 그 목소리가 전하는 말을 놓칠 리 없었다.
사정을 모르는 세라엘도 그의 말을 듣자 필립의 행보가 의심스럽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주변을 의식한 필립은 헛기침하며 로브를 더욱 깊이 눌러썼다. 인파가 우글거리는 곳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필립은 곧 마지못해 카에드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보는 눈이 많군그래. 사적인 자리에서 차분히 대화하는 게 낫겠군.”
“근처에 내 소유의 사업장이 있으니 그곳으로 가지.”
카에드는 황족인 필립을 대공성으로 데려가 대접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지금 상황에서 불만을 표할 수 없었던 필립은 잠자코 그에 따르기도 했다.
“…먼저 마차로 가 있겠네.”
필립은 카에드의 등 뒤에 있을 세라엘을 꿰뚫어 보듯 눈매를 좁히다가, 휙 몸을 돌려 마차로 돌아갔다. 착잡한 눈으로 카에드를 바라보던 로잘린도 곧 필립을 따라나섰다.
이복남매의 뒷모습을 지켜보던 카에드는 그들이 사라지자마자 곧장 세라엘의 어깨를 끌어 눈을 맞췄다.
※ 본 저작물의 권리는 저작권자에게 있습니다. 저작물을 복사, 복제, 수정, 배포할 경우 형사상 처벌 및 민사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