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ried To A Savage Duke RAW novel - chapter (84)
피폐물 속 괴물 남주와 결혼했다 84화(84/150)
피곤에 절어 있던 세라엘의 머릿속에 번쩍 불이 켜졌다.
“뭘 준비했는데?”
저 미소에 호되게 당해 보았던 세라엘은 미심쩍은 눈초리를 숨기지 못했다.
설마 또 괴상한 란제리를 갖다둔 건 아니겠지. 그 망측한 천 쪼가리를 보았을 때 그녀는 심장 마비가 어떠한 것인지 몸소 경험했다.
릴리는 흥분한 표정으로 숨을 들이쉬었다. 더욱 불안해지는 순간이었다.
“2층에 부부 침실이 마련되었답니다! 오늘부터 영주님과 아가씨는 한 침실에서 알콩달콩 주무실 수 있어요!”
세라엘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침실이라는 단어가 나올 때마다 릴리가 박수를 짝! 치면서 말하는 바람에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어… 뭐라고? 부부 뭐?”
“부부 침실이요! 당장 사용하셔도 손색없도록 가구도 더 들이고 아가씨 짐까지 옮겨 놓았어요. 두 분께서 외출하고 돌아오시면 짜잔 보여드리려고 분주하게 움직였답니다.”
얼이 빠진 세라엘의 입술이 조용히 벌어졌다. 갖가지 상념으로 뒤엉킨 머릿속이 일순 텅 비어 버린 느낌이었다.
“아하. 부부 침실이라니 그것참….”
“좋은 소식이죠? 원래는 설계사를 불러 대대적인 공사를 들어가려고 했는데, 아가씨께서 굳이 손대지 않아도 아주 넓고 좋은 방이라고 하셨잖아요. 마침 영주님께서도 최대한 이른 시일 내에 부부 침실을 마련하라고 하셨으니, 일사천리로 준비하게 되었지요. 이왕이면 깜짝 선물처럼 보여드리는 게 좋을 것 같더라고요!”
어찌나 흥분했는지 릴리는 목전에 바이퍼가 떡하니 서 있는데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세라엘은 눈을 빠르게 깜빡이면서 잠시간 말을 잃었다.
초야를 보냈던 방을 부부 침실로 사용할 예정이란 건 알고 있었다. 카에드가 세라엘의 취향대로 꾸며 보라며 수도에서 설계사를 불러 주겠다고도 했으니까.
다만 손댈 부분이 없을 정도로 마음에 쏙 드는 방이라, 지나가는 말로 공사할 필요는 없겠다고 했을 뿐인데 외출하고 온 사이에 부부 침실이 준비되어 있을 줄은 몰랐다.
결혼식을 치른 지 일주일도 안 되어서 침실을 공유하게 된 셈이다.
“영주님께서 지시하신 대로 아가씨의 편의 위주로 침실을 꾸며 놓았거든요. 3층 침실에 있던 티테이블과 소파도 그대로 옮겨 놓았고, 드레스 룸에는 옷장을 두 개나 추가해서 수납공간이 아주 많아졌답니다. 어서 2층으로 가서 저랑 함께 확인해 보아요.”
“일단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나서 가 볼게. 지금 정신이 좀 없어서….”
릴리의 장단에 맞출 기분이 아니었던 세라엘은 피곤한 듯 머리를 짚었다.
하마터면 난투로 번질 뻔한 대거리를 코앞에서 목격하고, 카에드와 그 비열한 독사 사이에서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는 마당에 한가로이 부부 침실이나 구경하고 싶지 않았다.
릴리는 유쾌한 농담이라도 들은 양 까르르 웃었다.
“아가씨도 참! 이제 부부 침실로 가셔서 옷을 갈아입으셔야죠! 그뿐만 아니라 아침 단장도, 양치질과 목욕도, 다과와 독서, 낮잠과 취침까지 모두 그곳에서 하실 거랍니다. 부부 침실이니까요. 자! 어서 저를 따라오세요.”
손뼉을 치며 연거푸 부부 침실을 강조한 릴리가 후다닥 앞장섰다. 세라엘은 말을 잃고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지었다.
“가시죠.”
바이퍼가 무심한 얼굴로 재촉했다.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그녀는 멍한 기분으로 터벅터벅 걸음을 옮겼다.
친숙하지 않은 동행인까지 단 채 계단을 오르고, 긴 복도를 지나 2층 침실에 도착했다. 바이퍼는 두 여자가 입실할 수 있도록 문을 열어젖혔다.
“두목의 귀가 전까지 근처에 있겠습니다.”
“아, 고마워요.”
감사 인사를 듣는 둥 마는 둥 그는 바로 걸음을 돌려 복도를 걸어갔다. 릴리는 연신 바이퍼를 흘끔거리더니 침실 내로 들어와서는 속삭이듯 말했다.
“무섭기로는 저분이 두 번째인 것 같아요. 도통 무슨 생각을 하시는지 모르겠어요. 애들이 형, 형 하면서 따르는 걸 보면 신기할 정도라니까요.”
“첫 번째는 누군데?”
“헉.”
릴리가 실언했다는 표정으로 세라엘의 눈치를 보았다. 세라엘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카에드 님이구나.”
“제가 어찌 감히 영주님께…. 무례를 범해서 죄송해요. 표현이 지나쳤어요.”
“이해해. 나도 그분을 처음 뵀을 땐 무서웠어. 테이블 앞에 앉아서 음식이 코로 넘어가는지 입으로 넘어가는지도 모르고 눈만 데굴데굴 굴렸던 게 생각나는걸.”
기꺼이 공감해 주자 릴리는 금세 표정을 폈다.
“그러셨군요. 하지만 지금은 누구보다도 서로를 사랑하고 계시잖아요.”
세라엘은 잠시 침묵을 지키며 두 손안에 쥔 선물 상자를 만지작거렸다.
“남들 눈에는 우리가 죽고 못 사는 것처럼 보이나 봐.”
“당연하죠. 영주님께서 다른 일정은 다 제치고 부부 침실부터 최우선으로 준비하라고 하셨다니까요. 아가씨와 한시도 떨어지고 싶지 않으셨나 봐요.”
“…그러셨구나. 어서 귀가하셨으면 좋겠네.”
세라엘은 테이블 위에 상자를 내려놓고 창가로 다가가 고개를 내밀었다.
엉망으로 헝클어진 마음은 카에드가 무사히 성으로 돌아와야 안정이 될 것 같았다.
“저도 이제 아가씨를 마님이라 불러드려야겠어요. 어엿한 대공작 부인이 되셨으니까요.”
“알았으니까 이제 가서 목욕 준비를 해 줘.”
“네에.”
릴리는 콧노래를 부르면서 욕실로 향했다. 그러다 무언가 생각났는지 앗, 소리를 내며 걸음을 틀었다.
“참. 제가 개인적으로 또 준비한 게 있는데요.”
“뭔데?”
“저번 선물이 마음에 들지 않으셨던 것 같아서, 이번엔 다른 것으로 준비해 보았거든요.”
선물이라 하면 설마. 세라엘은 불안한 눈으로 릴리를 지켜보았다.
하녀는 어디선가 작은 짐가방을 하나 들고 왔다. 먼젓번에 보았던 문제의 그 가방이었다.
방어적으로 상체를 뒤로 뺀 세라엘이 두 손바닥을 내밀어 보였다.
“잠시만. 성의는 고맙지만 그런 걸 입기는 좀… 좀 쑥스러울 것 같아. 지금은 그럴 기분도 아니야.”
“아직 확인도 안 해 보셨잖아요. 보여드릴게요.”
세라엘은 주섬주섬 가방을 열어 뒤지는 릴리를 서둘러 만류했다.
“저번처럼 남사스러운 건 도저히 못 입겠어…!”
“진정하세요! 자세히 보세요. 이건 속옷이 아니라 무난한 잠옷이에요.”
릴리가 유쾌하게 웃으며 팔랑대는 잠옷을 하나 꺼내 들었다. 흠칫한 세라엘은 곧 의심스러운 눈으로 그것을 내리훑었다.
놀랍게도 처음 와닿는 감상은 그리 나쁘지 않았다. 상당히 짧고, 얇고, 앞가슴이 다소 파인 것만 제외하면 나름대로 입을 만한 크림색 잠옷이었다.
하늘하늘한 게 좀 예쁘기도 하고, 앞서 너무나 망측스러운 란제리를 보았기에 이 정도 노출은 무난한 것처럼 느껴졌다.
고심하는 얼굴로 잠옷을 이리저리 관찰하는 세라엘을 향해 릴리는 밝게 미소 지었다.
“역시 마음에 드실 줄 알았어요. 이번 선물은 나쁘지 않죠?”
“옷감이 부드러워서 마음에 들긴 하지만 이런 선물은 준비하지 않아도 괜찮아. 이미 잠옷도 많고, 이렇게 짧은 옷을 입고 자는 건 조금 부끄러워.”
“잠옷은 취침 시에만 입는 옷이 아니라 즐거움을 주는 장치이기도 하잖아요.”
릴리가 결연히 말을 끝맺으며 고개를 한번 끄덕여 보였다.
세라엘은 약간 열이 오른 제 귓불을 주물럭거렸다.
즐거움이라면 이미 충분하고도 넘었다. 여기서 더 주었다간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 몰라 두려울 뿐이었다.
“목욕을 마치고 나면 한번 입어 보세요. 잘 어울리실 거예요.”
릴리는 내보이던 잠옷을 가방 안에 다시 넣으며 말했다.
고민하던 세라엘이 부담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나중에 입어 볼게. 오늘은 카에드 님께서 기분이 좋은 상태로 귀가하실 것 같지 않아. 이런 걸 입고 있으면….”
뭐랄까. 그를 걱정하는 상황인데, 마음먹고 꼬시려는 듯한 차림을 하기가 영 내키지 않았다.
속마음을 뱉지 못하고 말끝을 흐리자, 릴리는 대수롭지 않은 얼굴로 어깨를 으쓱였다.
“되레 저기압이었던 기분이 풀리시지 않을까요? 고된 하루를 보내고 돌아오신 영주님께서 아가씨를 보시면 하루 동안 쌓인 피로가 싹 날아가지 않을까 싶어요. 평소에도 영주님께선 아가씨의 흩날리는 머리카락만 보아도 표정이 환해지시거든요.”
“음….”
“예전에 아가씨 거처가 4구역에 있을 때도 틈만 나시면 그쪽을 바라보셨어요. 애정이 듬뿍 어린 눈을 하실 때도 있고, 연인을 그리워하는 듯한 눈을 하실 때도 있었고요. 영주님의 그런 면모는 처음 보는지라 사용인 사이에서도 한바탕 난리가 났었죠.”
“4구역 거처라면 내가 칼스비크에 막 도착했을 때 지내던 곳이잖아.”
“그렇지요.”
릴리는 해맑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갓 연애를 시작한 연인처럼 시나브로 감정을 키워 온 그녀와 달리, 카에드는 그녀를 처음 만났을 때부터 지금과 같은 감정을 가졌다는 뜻이었다.
전혀 몰랐던 건 아니었지만….
“가방 안에 비슷한 잠옷이 몇 개 더 있으니 목욕물이 준비되는 동안 구경해 보세요.”
그녀의 속을 모르는 릴리는 가벼운 걸음으로 침실에서 나갔다. 하녀의 뒷모습을 보던 세라엘은 테이블 앞에 털썩 앉아 긴 숨을 내쉬었다.
가뜩이나 불안한 마음 위로 의문이 피어올랐다. 칼스비크에서의 평온한 삶이 깨지는 걸 원치 않아 줄곧 회피했던 의문이었다.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던 세라엘은 상념을 털어내듯 머리를 한번 흔들었다. 그가 무사히 귀가하는 일이 우선이었다. 누구도 죽이지 않고, 자신도 다치지 않은 채로.
그녀는 불안한 눈으로 창밖을 살피다, 보들보들 감촉이 좋은 잠옷 위로 눈길을 내렸다.
잠옷을 입을지 말지 태평하게 고민할 계제는 아니었지만, 혼란스러운 마음을 환기하려면 가만히 있는 것보다는 나았다.
세라엘이 목욕을 마치고 나왔는데도 카에드는 귀가하지 않은 상태였다.
혼자 침실에 남은 그녀는 열린 창밖으로 빼꼼 얼굴을 내밀었다. 사위가 어두운 중정에서는 마차나 말이 다가오는 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언제쯤 돌아오려나.’
기약 없이 누군가를 기다리는 일이 꽤 고역이었다. 체감상 몇 시간은 흐른 것 같은데 정작 시곗바늘의 움직임에는 큰 변화가 없었다.
대신 그를 위해 준비한 달콤한 쿠키와 따뜻한 와인은 조금씩 식어가고 있었다. 세라엘은 착잡한 마음을 끌어안고 테이블에 팔을 포개어 엎드렸다.
순간 머릿속에서 무언가 번개처럼 스쳤다. 의자를 밀고 일어난 세라엘은 외출복의 안주머니를 뒤적거렸다.
그 안에는 반으로 고이 접힌 두꺼운 종이가 들어 있었다. 축제에서 화가가 그려 주었던 세라엘의 초상화였다.
장시간 접혀 있던 탓에 약간 구겨진 상태였으나 여전히 멋진 그림이었다.
색채가 입혀지지 않았다는 점만 빼면 실물과 다를 바 없는 그림을 내려다보다, 커프 링크가 포장된 선물 상자 옆에 놓았다.
‘그나저나….’
아래로 떨어진 세라엘의 눈이 제 차림새를 훑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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