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ried To A Savage Duke RAW novel - chapter (85)
피폐물 속 괴물 남주와 결혼했다 85화(85/150)
고심 끝에 릴리가 선물해 준 크림색 잠옷을 입었다. 세라엘은 멋쩍은 마음에 허벅지 위를 스치는 옷자락을 만지작거렸다.
움직일 때마다 간지럽게 살랑거리는 감촉이 약간 생소했다. 개인 침실에서 홀로 지낼 때도 이런 짧은 옷은 입은 적이 없었다.
황태자를 만나고 오면 카에드의 기분이 분명 저조할 것이다. 릴리의 말마따나 잠옷을 입는 것만으로 그의 심기가 나아진다면야 딱히 꺼릴 일도 아니었다.
이것도 카에드가 무사히 돌아온다는 전제가 따랐지만, 대수롭지 않게 굴었던 부하들의 반응을 보면 크게 걱정할 부분은 없을 것이다. 그리 믿고 싶었다.
연신 바깥을 내다보던 세라엘은 눈이 꾸벅 감기는 것을 느꼈다. 길었던 하루 때문인지 점차 무거운 피로가 몰려왔다.
먼저 잠들고 싶지 않았던 세라엘은 침대가 아닌 소파에 자리를 잡았다. 베개에 머리를 대면 바로 곯아떨어질 것 같아서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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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에드와 황태자 일행이 도착한 곳은 5층짜리 호텔의 지하였다.
투숙객이나 외부 손님이 와서 술을 마실 수 있는 고급스러운 내부 주점이었는데, 그들은 타인의 눈을 피해 출입구가 따로 뚫린 사적인 공간으로 들어왔다.
카에드는 중앙의 마호가니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필립과 마주 앉았다. 로잘린은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약을 지켜보는 것처럼 조마조마한 눈빛으로 두 남자를 번갈아 봤다.
그 뒤로 카에드의 부하와 황실 기사들은 대치하듯 마주 보고 서서 모시는 주군을 비호했다.
필립은 느긋이 앉아 있는 카에드를 향해 속으로 온갖 상스러운 욕설을 퍼부었다.
‘제기랄, 손아귀 힘만 더럽게 센 괴물 같으니! 저주받을 천출! 짐승만도 못한 놈! 감히 내 옥체에 손을 대고도 무사할 줄 알아!’
그는 이를 으득 갈면서 땡땡 부은 팔뚝을 어루만졌다. 뼈가 두 동강 나지 않은 것이 신기할 정도로 어마어마한 악력이 틀어잡은 곳이었다.
그때, 정복을 차려입은 직원이 조용히 들어와서 각자의 잔에 검붉은 술을 따라 주었다.
손가락에 턱을 받치고 필립을 가만 응시하던 카에드가 그의 술잔을 눈짓했다.
“마셔.”
불만에 차서 입술을 비죽거리던 필립은 엷은 파동이 이는 붉은 술을 내려다보았다.
그는 다시 눈길을 올려 카에드를 보고 냉큼 코웃음을 쳤다. 미치지 않은 이상 카에드가 제공하는 술을 넙죽 받아 마실 리가 없었다.
필립은 정면을 보고 앉은 자세 그대로 손가락만 까딱여서 등 뒤에 선 기사를 불렀다. 대기 중이던 기사가 잰걸음으로 다가섰다.
“네가 먼저 마셔 봐.”
기사는 곧바로 내키지 않은 낯을 했다.
“제가 말입니까?”
“주제넘게 누구한테 말대답하는 거야. 마시라면 마셔.”
침을 뱉듯 쏘아붙인 황태자의 명령에 멈칫하던 기사는 어쩔 수 없이 잔을 들어 올렸다.
입술을 대기 직전 잠시 망설이더니, 한 모금을 꼴깍 삼켰다.
“…….”
몇몇 기사는 불안한 눈으로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술을 마신 기사는 살짝 입맛을 다시고는, 별다른 특이점을 찾지 못한 듯 말없이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필립은 확인을 받았음에도 쉽사리 의심을 풀지 못했다. 서릿발처럼 서늘한 금안이 필립을 꿰뚫을 듯 빤히 바라본 탓이었다.
“의심이 많군그래.”
카에드가 제 몫의 술을 느른히 들이켜며 말했다. 필립은 불쾌감 어린 기색을 거두지 않았다.
“해묵은 습관이니 이해하게. 나 정도 위치에 있는 남자는 워낙 적이 많아 냉수 한 잔을 마실 때도 하인을 시켜 먼저 맛보게 하지.”
“없던 충성심도 달아나겠는데.”
픽 웃은 카에드가 의자에 느긋하게 몸을 기대며 팔짱을 꼈다. 필립이 붉은 눈을 부라리며 송곳니를 드러냈다.
“자네는 뭘 모르나 본데, 이건 고귀한 혈통을 받드는 종이 마땅히 수행할 의무야. 종이 아니더라도 길바닥에 널리고 널린 천출이라면 황가의 피를 보전하기 위해 기꺼이 한 몸 바쳐 나 대신 독약을 마셔 줄 테지.”
명백히 카에드를 겨냥한 모욕이었다. 대다수의 귀족처럼 필립 또한 카에드를 블카노프 가문에 입양된 비천한 남자라 믿어 의심치 않고 있었다.
듣고 있던 발켄족 남자들이 강한 적개심을 드러내며 목에 핏대를 세웠다. 흠칫한 로잘린은 마른침을 삼키며 카에드의 눈치를 보았다.
정작 그는 감흥 없는 표정으로 턱을 기울였다.
“내가 독약을 쓸 일은 없을 테니 긴장 풀어.”
“모를 일이지. 황태자의 팔목을 있는 대로 비튼 자가 술잔에 독을 못 타겠어?”
“독살은 재미없잖아.”
카에드는 유리잔의 스템을 느릿느릿 쓸어내리며 나직한 저음으로 덧붙였다.
“난 멱을 따는 쪽을 선호하거든.”
위협을 느낀 필립이 움찔 상체를 뒤로 물렸다. 그는 눈을 크게 치떴다가, 치밀어오르는 분노로 턱을 딱딱하게 굳혔다.
“자네… 설마 나를 협박하는 건가?”
“안심시켜 준 거지. 술에 독을 탔을까 봐 무섭다면서.”
“안심이라고? 그럼 조금 전의 발언은 대체 무슨 뜻인가!”
“시시한 독살보다 피가 분수처럼 터지는 걸 선호한다는 뜻이지.”
“진짜 궁금해서 물은 게 아니잖아! 애초에 자네가 독을 탔는지 안 탔는지를 물었던 거야!”
“두 번씩 말하게 하는군. 내가 그따위 시시한 짓을 왜 하겠나.”
어깨를 비스듬히 세워 앉은 카에드가 심드렁하게 말했다.
표정 변화가 극도로 적은 그의 얼굴은 속내를 읽기 어려워, 농담인지 진정으로 하는 말인지 알 수 없었다.
어릴 적부터 블카노프 공작가에 드나들었던 필립은 단 한순간도, 저 무미건조한 얼굴이 불쾌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필립의 미끈한 낯이 점점 종잇장 구겨지듯 일그러졌다.
‘짐승 같은 놈. 황족을 모독한 죄, 불경죄로 이 자리에서 처형시켜 버릴 수도 있건만.’
노골적인 살해 협박을 듣고도 황태자는 어떠한 결단을 내릴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다.
정실 소생의 황태자와 공작가의 핍박받는 입양아. 고저가 명확히 그려졌던 그들의 현재 위치는 그때와 정반대가 되어 있었다.
필립과 호형호제하던 블카노프 공자를 포함하여 모든 가문원이 미심쩍은 변고를 당했을 때부터였다.
공작위를 승계받고 나날이 영향력을 키워 가던 카에드가 대공으로 격상된 일은 그야말로 무소불위의 권력을 거머쥔 것이나 다름없었다.
‘괴물 같으니라고. 애당초 부황께서는 어찌 저 자에게 북방의 실권을 맡기신 건지.’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칼스비크의 자치권까지 인정받았으니, 만약 카에드가 북부의 독립을 요구한다면 황실은 꼼짝없이 응해야 할 판이었다.
제국에서 가장 광활한 영지인 칼스비크의 독립은 결코 일어나선 안 될 일이었다.
흔히들 칼스비크를 제국의 지붕이라 일컫지만, 기실 나라를 떠받드는 초석이자 기둥이나 다름없었다.
로페른이 제국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발판이자 전쟁 영웅 블카노프의 땅. 그 중대한 가치를 지닌 영지가 대공국으로서 자립해 버린다면 로페른의 기상도 예전 같지는 않을 것이다.
아니, 초석을 잃었으니 기반이 흔들리고 국정이 위태로워질 수도 있었다.
그러한 정황을 따진다면 제국의 실권을 가진 자는 카에드였고, 필립은 그의 비위를 맞추며 빌빌거려야 하는 입장이었다.
저자세로 나가야 하는 자신의 처지가 마음에 들지 않았으나, 필립은 입을 꾹 다물고 주먹을 부르르 떨었다. 여전히 술에는 손도 대지 않은 채였다.
그때 카에드가 필립의 술잔을 턱짓하며 의문을 표했다.
“왜 마시지 않지?”
가뜩이나 예민해진 필립이 벌컥 역정을 냈다.
“자네야말로 어째서 자꾸 술을 마시라 요구하는 거지? 정말 뭐라도 탄 거 아냐?”
“꼬아 듣는 재주도 좋군. 호위를 시켜 확인해도 안심이 되지 않나 봐.”
툭 내뱉듯 말한 카에드가 붉은 술을 한 모금 들이켰다.
그 시큰둥한 태도에 약이 오른 필립이 일부러 콧방귀를 뀌었다.
“특정 독극물은 무색무취에 오랜 시간이 지나야 반응이 나오는 경우도 있으니 섣불리 안심할 수 없지.”
“기껏 좋은 술을 대접해 줬더니 무례를 범하는군.”
“…내가 무례를 범한다고?”
“독살이 그리 걱정됐으면 은수저라도 가지고 다니면서 저어 보든가.”
카에드가 던진 노골적인 조롱에 필립은 얇은 입술을 걷어 올렸다.
그의 몸이 부들부들 떨리면서 테이블 위에 놓인 유리잔도 위태로운 소리를 내며 흔들렸다.
“지금 장난해? 무례는 내가 아니라 자네가 범했지! 오늘 자네가 벌인 작태는 그 자리에서 참수당하고 가문을 멸해도 시원찮았을 중죄였어! 마주 앉아 한가로이 대작이나 하고 있을 일이 결단코 아니란 말이야!”
“말하지 않았나. 내 아내를 위협하는 무뢰배가 황태자인 줄 짐작 못 했다고.”
카에드는 필립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술을 들이켰다.
머리끝까지 화가 난 황태자가 손가락을 척 들고서 그를 삿대질했다.
“제정신인가! 그따위 변명이 먹히리라 생각했다면 자네는 단단히 오판한 거야! 내 얼굴을 한두 해 마주한 것도 아니면서 나인 줄 몰랐다고?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리라 생각해? 내가 아둔한 맹추 새끼라 묻고 넘어가 주는 것 같아?”
“알아봐 주길 원했으면 로브를 아예 벗고 있었어야지.”
“이…! 농지거리는 작작 하게! 자네가 날 도끼로 아작 내려고 했을 때 내 이름까지 똑똑히 말해 주지 않았나! 몇 번이고 외쳤거늘!”
“이것 봐. 말본새가 저렴하니 쓰레기로 오해할 수밖에 없잖아.”
카에드가 입매를 치켜세우며 냉소를 지었다. 그러자 발켄족 남자들이 콧바람을 내며 낄낄 웃어댔다. 악셀은 어깨까지 들썩이며 즐거워했다.
참다못한 필립이 시뻘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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