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ried To A Savage Duke RAW novel - chapter (86)
피폐물 속 괴물 남주와 결혼했다 86화(86/150)
기겁한 로잘린은 서둘러 필립의 팔을 붙잡았다.
“오라버니, 체통을…!”
“이것 놔!”
필립은 이복누이의 팔을 내동댕이치듯 밀어냈다. 반동으로 로잘린은 바닥에 볼썽사나운 모양새로 철퍼덕 쓰러졌다.
핏발이 불거진 필립의 선홍색 눈에 강한 노기가 어렸다.
“이, 이…!”
예사롭지 않은 기류를 눈치챈 황실 기사들이 검집 위로 손을 갖다 대었다.
카에드의 부하들은 아예 검을 빼 들었고, 그에 기사들 또한 쇠붙이 소리와 함께 무기를 꺼내 들었다.
당장 혈투가 벌어져도 이상하지 않을 일촉즉발의 위기 속에서 움직이지 않는 사람은 로잘린과 카에드 둘뿐이었다.
충격을 받은 듯 로잘린은 안색이 파리하게 질려 있었고, 카에드는 무표정한 얼굴로 필립을 바라보았다.
“좌불안석이군. 켕기는 일이라도 있나 봐.”
“감히, 감히 나를…! 절대로 가만두지 않겠…!”
“앉아.”
음산하게 가라앉은 저음이 필립을 일갈했다.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던 필립은 냉수를 들입다 맞은 것처럼 동작을 멈추었다.
그에게 팔목을 틀어 잡혔을 때 느꼈던 짙은 악의가 짧은 한마디를 통해 고스란히 전해지고 있었다.
“확인하고 싶은 게 있거든.”
카에드는 술병을 들어 빈 잔에 손수 술을 따랐다. 쪼르르, 익살스러운 소리가 칼날처럼 팽팽해진 공기를 타고 울려 퍼졌다.
불만에 가득 찬 적안이 살기등등한 발켄족 남자들을 스윽 훑었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필립은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반면 여유로운 태도로 잔을 집어 든 카에드가 필립을 가만히 응시했다.
“황녀가 대공성에 방문했던 날, 너는 칼스비크를 돌아다니면서 무언가를 찾고 있었지. 맞나?”
증오로 붉게 물든 필립의 안면에 일순 당혹감이 스쳤다. 황급히 표정을 갈무리했으나 카에드가 눈치 못 챌 리는 없었다.
필립은 손바닥에 손톱자국이 날 정도로 주먹을 쥐었다.
“내 뒤를 캐다니 무례가 도를 넘어섰다는 건 알아?”
“몰래 기어들어 왔으면 그 정도는 각오했어야지.”
“그래서 그게 뭐 어떻단 말인가. 난 북부에 있는 친우를 만나러 온 것뿐이야.”
“네 친우는 퇴출당한 치료 술사들이 모여 사는 유배지에 있는 건가?”
의미심장한 말에 로잘린은 미간을 좁히며 제 오라비를 흘끔거렸다. 필립의 안색이 희게 질리는데도 카에드는 고저 없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곳은 금기시된 약초를 사용한 죄목으로 유배된 자들이 모인 곳이지. 넌 그자들에게서 어떠한 정보가 필요했기 때문에 그곳을 방문한 거야.”
“도통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군. 듣기만 해도 위생이 더러울 것 같은 장소엔 가 본 적도 없고, 가고 싶지도 않네.”
카에드는 스산한 눈빛으로 필립을 주시하며 말했다.
“내 정보원이 일찌감치 유배지에 다녀왔어. 여덟의 동행인을 거느린 자가 환각초를 다룰 줄 아는 술사를 찾았다고 하던데.”
“…그래서 하고자 하는 말이 무엇인가?”
필립이 눈살을 찌푸리자, 카에드는 그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네가 사용할 계획이었나?”
“헛소리! 난 환각 작용이나 일으키는 하찮은 풀떼기에는 조금도 관심 없어!”
발끈한 필립이 주먹으로 테이블을 쾅 내리치며 반박했다. 억울하다는 어조가 묻어 있는 것을 보니 거짓말하는 눈치는 아니었다.
카에드는 심드렁한 어조로 대꾸했다.
“그래. 네가 사용할 건 아니었겠지.”
“감히 날 약쟁이와 같은 도매금으로 넘기지 마. 나는 내 존체를 망가뜨릴 짓은 죽어도 하지 않을 것이니까.”
필립이 항변하자 카에드는 터무니없는 농담이라도 들은 양 가벼이 조소했다.
칼질 한 번에 썩은 나무토막처럼 바닥을 구를 너절한 몸뚱이를 스스로 존체라 높여 부르는 것이 우스웠다.
하늘을 찌를 듯 치솟은 자의식에 오만하기 짝이 없는 태도, 비열하나 결코 영리하다고 할 순 없는 지능까지.
황태자 필립은 카에드가 블카노프 가문원으로부터 보았던 모습을 고스란히 지니고 있었다.
“네가 찾던 약초 말이지.”
카에드는 기다란 손가락으로 테이블 표면을 여유롭게 두드렸다.
“자세히 조사해 보니 단순한 환각초가 아니더군. 환각 작용은 부수적으로 따라오는 효과고 본래는 신경을 마비시키는 진통제로 쓰였다던데.”
빳빳하게 안면을 굳힌 필립을 보자 카에드 제 의심을 확신으로 탈바꿈했다.
“오늘내일하는 목숨을 간신히 붙드는 연명 치료가 필요할 때 사용된다지. 취급이 까다로운 약초인 데다 위험한 물질이라 다룰 줄 아는 술사가 몇 없다더군.”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야?”
“황태자가 몸소 나서서 그를 찾았던 걸 보면 어지간히도 중요한 기밀이었나 본데. 황실에 중환자가 있나 봐?”
불안한 표정으로 오가는 대화를 경청하던 로잘린이 뭔가 깨달은 것이 있는 듯 눈을 내리깔았다.
그녀는 몇 달 전부터 타인과의 접촉을 끊고 두문불출했던 부친을 상기했다.
“으으….”
“황제 폐하인가?”
종지부를 찍는 카에드의 물음에 필립은 시뻘건 눈을 부릅뜨고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카에드는 옅은 웃음기를 띠며 답을 재촉했다.
“이제 와서 뭘 숨기고 있어. 말해 봐.”
“자네가 알아서 무얼 하겠다고?”
“말하기 싫으면 나가. 내 용건은 끝났거든.”
카에드는 미련 없다는 듯 등받이에 몸을 느른히 기댔다.
제대로 농락을 당했다고 받아들인 필립은 낯빛을 붉으락푸르락 물들이며 의자를 박차고 일어섰다.
“…….”
필립은 몸을 바들거리며 핏발 선 눈으로 카에드를 노려봤다. 그러고는 인사 한마디 없이 몸을 홱 돌리고 방에서 빠져나갔다.
별다른 움직임은 없었으나, 표정만큼은 안절부절못하던 로잘린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걸음을 떼기 전 뒤를 돌아 카에드와 눈을 맞추었다.
“밀로즈 영애에게, 아니, 대공작 부인에게 미안하다고 전해 주겠어요? 제가 일을 키운 것 같아서 마음이 편치 않네요. 다시 만나게 되면 직접 사과할게요.”
카에드는 눈썹을 치켜세우며 술잔을 집어 들었다.
“전해 주겠습니다만 추후 만날 일이 있을지는 모르겠군요.”
“…아마도 있을 거예요.”
로잘린은 황태자를 따라 방을 나서는 기사들을 슬쩍 뒤돌아보더니 조심스레 운을 뗐다.
“머지않아 황궁에서 가면무도회가 개최될 거예요. 힌델의 북쪽 숲에서는 사냥제도 열릴 예정이고요. 제국의 모든 귀족에게 초대장을 보낼 테니 칼스비크에도 서간이 가겠죠.”
“황제가 병상에 누워 있는데도 대규모 행사를 진행하는 겁니까?”
“대공께서 짐작하셨듯이 극소수만 아는 일이었나 봐요. 저조차도 폐하께서 위독하신 줄은 몰랐으니까요. 칼스비크에 오기 전부터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했지만 저는….”
유리잔에 막 입을 대려던 카에드가 동작을 멈추고 로잘린을 올려다봤다. 그러자 그녀는 살짝 얼굴을 붉히며 말꼬리를 흐렸다.
“…오라버니가 기다릴 테니 이만 가 보겠어요. 부디 부인과 탈 없이 잘 지내시기를.”
로잘린은 짧게 묵례하고는 방을 나섰다. 카에드는 지척에서 대기 중이었던 부하를 향해 조용히 눈짓해 보였다.
비아테 남매의 뒤를 밟기 위해 부하도 건물을 빠져나갔다. 동시에 악셀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성난 야생마처럼 날뛰기 시작했다.
“악, 악! 짜증 나! 간사한 독사 새끼! 실수인 척 죽이고 싶어!”
“진정해. 저런 놈인 거 알고 있었잖아.”
“전해 들은 거랑 직접 눈으로 보는 거랑 같냐!”
콜이 만류하는데도 악셀은 분을 이기지 못했다. 그는 주먹을 들어 돌벽을 강하게 내리쳤다.
그러자 쾅 부딪치는 소리와 함께 벽이 움푹 파이면서, 크고 작은 돌가루가 우수수 떨어져 나왔다.
벽을 깨부수고 나서야 이성이 돌아온 악셀은 뜨끔하여 두목의 눈치를 봤다. 카에드는 난장판에 눈길도 주지 않고 입을 열었다.
“치워.”
“네.”
악셀은 바닥에 떨어진 벽돌을 주섬주섬 줍기 시작했다. 쪼그려 앉은 악셀이 안쓰러웠는지 콜을 포함한 부하 몇 명이 청소를 도와주었다.
팔짱을 끼고 벽에 기대서 있던 로이가 의자를 끌어와 카에드 앞에 앉았다.
“역시 두목 예상대로 황제가 중증이었군요. 다 죽어 가는 마당에 대외적인 행사라니 의외인데요. 눈속임일까요?”
“그렇겠지. 통치자가 위독하다는 풍문이 돌면 정세도 불안정해질 테니까.”
시간이 되돌려지기 전의 생에서 황제는 어떤 병도 앓지 않았다. 전쟁 비용을 전담하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다망했을 뿐.
그러나 현재, 발발하지 않은 전쟁은 많은 것을 바꾸었다. 세상만사가 편한 황제는 한계 없이 놀고먹으며 방탕한 생활을 즐겼다. 전해 들은 여러 소문으로 짐작해 보건대, 황제는 향락에서 비롯된 추잡한 병증으로 몸져누웠음이 자명했다.
턱을 괸 채 소년들이 돌가루를 던지며 장난치는 모습을 보던 로이가 카에드를 향해 시선을 던졌다.
“흠…. 황위가 공석이니 현시도 난세라 할 수 있겠네요.”
“그래, 황태자가 제위 계승을 하기 전에 칼스비크의 독립을 추진하는 편이 현명할 거다.”
무슨 꿍꿍이인지 몰라도 황제는 카에드를 대공으로 격상시켰다. 성공적으로 완수해 낸 북벌을 치하하기 위해서만은 아니겠지만 이유는 중요치 않았다.
황태자의 기우대로 카에드는 칼스비크의 독립을 노리고 있었다. 황제가 병중이란 사실을 확인했으니, 대대적인 계획을 밀어붙이려면 지금이 적기였다.
여생의 안녕을 위한 계획이다. 어그러지는 일이 없도록 기회를 잘 노려야 했다.
“정계 싸움도 머리 아프네요. 차라리 검을 휘두르는 편이 훨씬 쉽겠어요.”
술병을 집어 든 로이가 카에드의 빈 잔을 향해 내밀었다.
“됐다. 이제 성으로 돌아가지.”
그는 술을 거절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랑스러움을 품은 여자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다. 잠깐 떨어져 있었을 뿐인데 이리도 사무치게 보고 싶을 수 있을까. 한시바삐 귀가하여 작은 몸을 끌어안고 피곤한 마음을 달래고 싶었다.
성으로 돌아가자마자 그녀가 지쳐 쓰러질 때까지 안을 심산이었지만, 애틋한 순정을 즐기면서 평온히 잠드는 밤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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