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ried To A Savage Duke RAW novel - chapter (87)
피폐물 속 괴물 남주와 결혼했다 87화(87/150)
카에드는 부하들을 이끌고 호텔 밖으로 나왔다.
축제의 열기가 가라앉은 도시는 한산했다. 가도를 메웠던 관광객은 보이지 않았고, 칼스비크 특유의 차고 건조한 공기가 텅 빈 거리를 채우고 있었다.
말을 매어둔 곳으로 걸어가는데, 무언가를 곰곰이 생각하던 로이가 입을 열었다.
“그나저나 황실 행사에 참여하실 건가요? 공식적인 모임은 부인께서도 동행해야 하잖아요.”
“아니.”
카에드는 고민 없이 대답했다.
“부인께선 연회를 좋아하시니 가고 싶어 할 수도 있겠는데요. 이번 피로연에서 친우도 제법 사귀신 듯한데, 제도에 가시겠다고 하면 어쩌실 거예요?”
“행사가 열린다는 사실 자체를 숨기는 것도 방법이겠지.”
“거짓말하면 싫어하실 텐데요.”
“숨기는 건 엄연히 거짓말이 아니니까.”
할 말을 잃은 로이가 눈썹을 문질렀다. 카에드는 혼잣말을 짓씹듯 읊조렸다.
“제도는 무슨. 가능하다면 성 밖으로 평생 한 발짝도 못 나가게 하고 싶은 심정인데.”
한시도 떨어지지 않고 품에 꽁꽁 가둔 채 좋은 것만 먹이면서, 세상 모든 위협과 불안으로부터 동떨어진 삶을 선물하고 싶었다.
그러면 속박한다고 싫어하려나. 조랑말처럼 활달한 그녀를 떠올려 보면 그럴 가능성이 컸다.
하지만 세라엘이 황궁에 가는 일만큼은 있어선 안 되었다. 황태자가 그 지저분한 시선으로 그녀를 쳐다보는 일은 두 번 다시 없기를 바랐다.
여자를 농락하기 좋아하는 필립이 그녀를 붙들고 있는 모습을 봤을 땐 피가 거꾸로 솟는 기분이었다.
황녀가 지내던 곳을 감시 중이었기에 로잘린의 동태는 파악하고 있었으나, 갑작스레 외출하여 필립을 만났다는 전보와 엇갈렸다.
소식을 전달받지 못했는데도 그는 본능적으로 세라엘이 갔던 길을 뒤좇았다. 그러지 않았다면 필립이 또 어떤 수작질로 그녀를 괴롭혔을지, 상상만으로도 눈앞의 모든 것을 난도질하고 싶은 강한 격분에 휩싸였다.
카에드는 제 얼굴을 거칠게 쓸어내리며 짧은 숨을 내쉬었다. 그를 지켜보던 로이가 의견을 제안했다.
“저는 황실 행사에 참여하는 게 그리 나쁜 생각은 아닌 것 같은데요.”
“어느 쪽이. 무도회?”
카에드가 뼈 있는 물음을 던지자 로이는 피식 웃어 보였다.
카에드 못지않게 보기 좋은 용모를 가진 그는 인기가 많은 편이었다. 대공의 수행원으로서 귀족 모임에 동행할 때마다 귀부인들로부터 열렬한 관심을 받았다.
인상만큼이나 서글서글한 성격 덕분에 여자들은 그를 어려워하지 않았고, 로이도 쏟아지는 관심을 싫어하는 편이 아닌지라 다가오는 이를 거부하지 않았다.
“저도 사리 분별은 해요, 두목. 귀부인과 놀아나고 싶다는 이유로 힌델에 가자고 제안하진 않아요.”
“그럼 사냥제를 뜻하는 거였군.”
“그렇죠. 황태자는 만일을 위해 아예 싹을 뽑는 게 좋지 않을까 싶어서요. 지금으로선 유일한 위협인데, 쓸데없는 씨를 뿌리기 전에 일찌감치 제거하는 편이 나을 수도 있어요.”
멀리서 악셀이 볼멘소리로 맞장구쳤다.
“그 더러운 독사 새끼, 사냥제에 참가해서 실수인 척 죽여 버려요!”
콜이 입 다물라며 악셀의 뒤통수를 후렸다. 옥신각신하는 소년들을 뒤돌아보던 로이가 그에 나름대로 동의한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나쁜 의견은 아닌데요.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짐승이 내는 소리로 오인해서 사격하는 일도 있잖아요. 누가 쐈는지 의심받을 일이 없도록 뒤처리만 잘하면 될 것 같은데요.”
카에드는 생각에 잠긴 얼굴로 걸음을 재촉했다.
사실 사냥제가 개최될 예정이라는 말을 듣자마자 떠올린 선택지였다.
황궁에 몰래 숨어들어 행하는 암살이나 독살보다, 사냥제에서 처리하는 편이 다루기는 더 쉬웠다. 의도된 살인인지, 오인 사격을 저지르고 도주한 것인지부터 알아내기 어려울 것이다.
사냥제에 참여한 사람 모두 사냥총을 갖고 있을 테니 범인 색출도 까다로울 터였다. 만에 하나 꼬리를 밟히는 일이 없게끔 뒷수습을 잘하면 될 일이었다.
카에드의 얼굴 위로 서늘한 냉소가 스쳤다.
“확실히 그놈은 행동거지가 부산스럽지. 풀숲에 가려진 놈을 짐승으로 착각하지 않는 일이 더 어려울 것 같군.”
“괜찮은 계획이에요. 그놈은 유일한 정실 소생이지만 세간의 평이 나빠 지지자가 적다고 들었어요. 오늘 기사에게 술을 먹여 독을 확인한 꼴만 봐도 주변인의 충성도 역시 높지 않을 테고요. 놈의 죽음을 슬퍼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걸요.”
눈을 데굴데굴 굴리며 듣고만 있던 콜이 불쑥 끼어들었다.
“근데 독사가 죽으면 다음 황위는 누가 계승하는 거죠?”
“로잘린 황녀야.”
콜의 어리둥절한 물음에 로이가 대신 대답해 주었다.
“아래 배다른 황자가 둘이나 있었는데 오래전 의문의 죽임을 당했어. 워낙 어릴 때라 사고로 위장한 모양이지만 누구 짓인지는 뻔하지. 황녀를 건드리지 않은 걸 보면, 정부 소생의 서녀는 위협이 되지 않으리라 판단한 듯해.”
로잘린은 황실의 누구와도 친분이 없었고, 카에드가 아는 전형적인 비아테의 인물도 아니었다. 필립을 제거하고 그녀가 제위를 세습하는 편이 어쩌면 최선책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지켜야 할 사람이 생긴 이상 위험을 선뜻 무릅쓸 수가 없었다. 황족의 죽음으로 인한 반향이 그가 일궈 낸 안온한 삶을 위협하진 않을까.
실현할 수 있는 다른 목표를 두고 피를 보는 일을 우선으로 택할 순 없었다. 칼스비크를 독립시키는 계획이 더 안전한 선택이었다.
카에드는 육중한 흑마를 매어 둔 끈을 풀며 가뿐한 몸짓으로 올라탔다.
“일단 성으로 복귀하지. 기다리는 사람이 있으니 시간을 지체하고 싶진 않군.”
고개를 끄덕인 남자들이 말의 안장에 훌쩍 올랐다.
악셀이 대기 중인 제 말을 타기 위해 다가오자, 말에 앉아 있던 카에드가 그를 불러세웠다.
“악셀.”
“네!”
“넌 걸어오도록.”
“네?”
카에드는 대답 없이 흑마의 허리에 박차를 가했다. 로이와 나머지 부하들도 빠른 속도로 그를 따라 달려 나갔다. 악셀은 멀어져 가는 카에드의 뒷모습을 당황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아니, 잠깐. 두목, 왜요? 왜 나만 걸어가요?”
악셀이 목청 높여 부르는데도 카에드는 뒤 한번 돌아보지 않았다.
고삐를 쥐고 천천히 다가온 콜이 안타깝다는 표정으로 그를 내려다보았다.
“왜겠냐…. 네가 축제에서 누님을 신나게 놀려 먹었으니까 그러지.”
악셀이 황당하다는 듯 입을 벌리자, 콜이 혀를 차며 한마디 더 얹었다.
“이유도 없이 걸어오라고 하시겠냐?”
“그래도 마지막에는 누님이 이기게 해 줬는데!”
“처음부터 봐줬어야지. 넌 최선을 다해 초보자인 누님을 상대했잖아. 누님이 밝은 사람이라 망정이지 웬만한 사람은 기가 팍 죽었을걸. 그것뿐이냐. 누님 실력 보고 엉망진창이라고 하질 않나, 화살 반대로 끼웠다고 장난쳐서 개구리처럼 폴짝 뛰게 하질 않나.”
“놀리려고 한 게 아니라 친해져서 편하게 대한 것뿐이잖아!”
“나한테 해명해서 뭐 어떡할 거야. 하여간 쓸데없는 데에 승부욕이 넘쳐서는. 상대 봐 가면서 적당히 할 줄을 몰라.”
“와….”
“이 정도 선에서 끝난 걸 다행으로 여겨. 두목이 널 아끼니까 그렇지, 바이퍼 형이나 호크 형한테 처벌을 넘겼으면 닭 잡듯 쥐어팼을걸.”
악셀은 울상을 지으며 까마득히 먼 대공성을 바라봤다. 절벽 끝에 웅장하게 자리한 성이 이곳에서는 자그마한 점처럼 보였다.
“저기까지 어느 세월에 걸어가냐?”
“너 빠르잖아.”
놀리듯 빙긋 웃은 콜이 말의 옆구리에 박차를 가하며 카에드를 따라갔다.
악셀은 허망한 낯으로 멀어지는 그를 응시했다. 그러다 독기 어린 눈을 하고 전속력으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
성으로 돌아온 카에드는 적막한 복도를 저벅저벅 걸었다.
늘 거닐던 2층 복도가 지금처럼 두근거린 적이 없었다. 그녀와 단둘이서 공유할 장소로 향하고 있어서인지, 그 안에서 기다리고 있을 존재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부부 침실 앞에 다다른 카에드는 문을 조용히 열어젖혔다.
촛불은 모두 꺼져 있었으나, 어둠 속에서도 선명한 시야는 내부를 문제없이 볼 수 있었다.
텅 빈 침대 위에는 누운 흔적이 없었다. 다만 작게 쌕쌕거리는 소리가 문을 등진 소파에서 들려오는 거로 보아, 세라엘이 어디서 잠들었는지 알만했다.
자그마한 숨소리에 피식 웃음을 터뜨린 카에드가 그녀를 향해 저벅저벅 다가갔다. 세라엘을 마주하기 직전, 테이블 위에 놓인 검은 상자가 먼저 눈에 띄었다.
“…….”
개인적으로 사고 싶은 게 있으니 절대 따라오지 말라 당부했던 이유가 이거였나. 모로 봐도 카에드를 위한 선물이었다.
그는 가슴 깊은 곳에서 전해져 오는 거센 맥동을 느끼며 노란 리본을 풀었다.
상자 속에는 고상한 디자인의 커프 링크가 자리하고 있었다. 카에드는 오묘한 금빛으로 반짝이는 그것을 조심스레 집어 들었다.
딱히 취향은 아니었다. 이런 걸 장식으로 써 본 적도 없었다. 하지만 고심하며 골랐을 세라엘을 떠올리니 그 무엇보다 애지중지할 물건이 될 것 같았다.
검은 상자 옆에는 절반으로 접힌 종이가 있었다. 모퉁이가 약간 꾸깃꾸깃해진 종이를 펼치자, 흑백의 곡선으로 그려진 세라엘이 드러났다.
자그마한 얼굴에 오밀조밀 들어찬 이목구비가 제법 섬세했다. 하지만 실제와 다른 점이 많았다. 실물의 눈꼬리는 좀 더 올라갔고, 쌍꺼풀은 더 연했으며, 귀 끝부분은 더 뾰족해야 했다.
이외에도 차이점을 얼마든지 짚어 낼 수 있었다. 그래도 무척이나 마음에 드는 초상화였다.
카에드는 그림 속의 세라엘을 손가락으로 조심스럽게 쓸어 보았다. 열기를 지닌 손끝은 살짝 왼쪽으로 치우친 가르마에서부터, 부드러운 콧대와 입술, 턱선을 덧그리다 목선까지 미끄러져 내려왔다.
말없이 그림을 내려다보는데 절로 입꼬리가 올라가면서 잇새로 작은 바람이 새어 나왔다.
이것도 선물이라고 같이 놓아둔 걸까? 사실 상관없었다. 그녀가 주기 싫다고 해도 고집을 피워서 이 초상화를 차지하고 말 것이다.
잇달아 낮은 웃음을 터뜨리자 소파 쪽에서 뒤척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곤히 잠든 세라엘을 깨우고 싶지 않아 기척을 죽였다. 오늘 하루 동안 꽤 피곤했을 텐데, 그녀가 푹 쉬고 체력을 충전하길 원했다. 그래야 그도 원하는 것을 조금이나마 요구할 수 있을 테니까.
카에드는 입가에 미소를 머금은 채 소파를 돌아 잠든 세라엘의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얼굴에서 서서히 웃음기를 거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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