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ried To A Savage Duke RAW novel - chapter (92)
피폐물 속 괴물 남주와 결혼했다 92화(92/150)
“저기 봐요.”
들짐승인가 싶었던 그림자는 자그마한 아이들이었다.
일고여덟 살 정도로 보이는 세 명의 아이가 울타리 틈으로 고개를 들이밀다가 폴짝폴짝 뛰고 있었다. 그 귀여운 모습에 세라엘은 절로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근처 마을에서 올라왔을까요?”
“아마 그럴 겁니다. 구빈원에서 지내는 아이들처럼 보이는군요.”
“구빈원이요?”
세라엘은 미소를 희미하게 거둬들였다. 그들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이 씁쓸함과 유감을 머금었다.
구빈원이라 하면 고아를 포함하여 생활력이 없는 성인까지 수용하는 기관이었다.
적잖은 예산이 필요한 곳인데 외부로부터 도움을 받는 경우가 드물어, 열악한 환경을 가진 시설이 대다수였다. 내부에서 목숨을 잃는 이도 속출하는 곳으로 알려져 있었다.
간판만 구빈원이지, 포로수용소를 방불케 하는 폐쇄적인 시설이었다.
세라엘의 가라앉은 기류를 눈치챈 카에드가 아이들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구빈원이라기보다 보육원이 맞겠네요. 걱정하시는 것처럼 열악한 기관에서 지내는 아이들은 아닙니다.”
“보육원에서는 아이들 관리가 잘 되는 편인가 봐요.”
“보육원 구축은 지난 5년간 칼스비크에서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있는 정책 중 하나입니다. 성인과 분리하여 보살피는 건 기본이고, 주기적으로 감찰을 보내 구체제에서 빈번했던 폐단이 없도록 관리하고 있습니다.”
“그렇구나. 알게 되어서 다행이에요.”
“전국의 귀족들로부터 기부금도 제법 들어오는 편이라, 고아를 돌보는 기관에 아낌없이 지원하고 있어요.”
그의 말에 세라엘은 고개를 빼고 아이들을 관찰했다. 세 아이 모두 밝은 색감의 깨끗한 옷을 입고 토끼처럼 뛰어오르고 있었다.
화사한 옷감은 더러워지기 십상이라 구빈원 같은 곳에서 흔히 지급되는 물품이 아니었다. 물론 가까이서 봐야 알겠지만, 무관심으로 방치되는 아이들은 아닌 듯했다.
“자선 사업 개념으로 귀족들이 종종 후원한다는 얘긴 들었어도, 칼스비크의 보육원에 전국 단위로 도움을 보낼 줄은 몰랐어요.”
“보육원으로 직접적인 후원금이 들어오는 건 아닙니다. 최근 설립한 재단을 통해 들어온 기부금이고, 블카노프 가문에서 도움이 필요한 시설에 기금으로 전달하고 있는 거죠.”
“좋은 소식이긴 하지만 굳이 칼스비크 재단으로 큰 금액을 보내는 이유는 뭘까요? 혹시….”
말끝을 흐린 세라엘은 생각에 잠겼다. 그들이 단순한 호의에서 후원금을 보냈을 것 같지는 않았다.
칼스비크에서 사업하기를 원하는 귀족이 무척 많은 것으로 알고 있다. 카에드가 받는 사업 신청서만 매일 수십 장이라고 전해 들었다.
아마 인장을 가진 북부 영주의 환심을 사기 위해, 그가 설립한 재단에 투자 개념으로 지원금을 보내는 건 아닌가 싶었다.
그녀의 짐작이 맞았는지 카에드는 대수롭지 않은 표정으로 답했다.
“거액일수록 신청서가 승인될 가능성이 커진다고 판단했겠죠. 난 차등을 둘 생각이 없지만, 지속적인 후원금을 받기 위해 굳이 부정하지도 않고 있어요.”
“그렇군요….”
아이들이 까르르 웃는 소리가 그녀의 관심을 잡아끌었다. 울타리 위로 깡충깡충 뛰던 아이들은 덩굴을 엮어 만든 공을 가지고 근처를 뛰놀고 있었다.
어린애 특유의 명랑한 모습을 보던 세라엘은 불현듯 카에드 또한 양친 없이 자란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랬기에 고아들을 향한 마음이 남달랐던 걸까. 후원을 목적으로 자선 단체를 설립하여 아동 복지에 힘쓰고 있을 줄은 몰랐다.
부모의 부재를 겪어 보았던 세라엘에게도 그의 선행이 유독 각별하게 다가왔다.
카에드는 흠모의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그녀를 인지하고서 잠시 고민하는 기색을 보이더니, 이내 솔직한 마음을 토로했다.
“북부는 오래전부터 구빈원 출신 고아로 인한 사회 문제가 심각했어요. 가뜩이나 열악한 환경에서 방치된 아동들이 성장하면 높은 확률로 범죄를 저질렀으니까요. 칼스비크가 넓은 황무지라는 인식이 있어, 처치 곤란인 사생아나 영지 내의 아동을 유기하는 데 적소라고 판단한 중남부 귀족의 만행도 이에 한몫했다고 생각해요. 난 그들에게서 자금을 끌어와 사회 문제를 해결하려 했던 겁니다. 당신이 생각하는 것만큼 순수한 선의에서 비롯된 정책은 아니었어요.”
“그래도 덕분에 저 아이들은 행복해 보이는걸요. 구빈원에서 지냈더라면 저리 즐겁게 웃기는 어려웠을 거예요.”
의도가 어찌 되었든 사회에서 소외당하는 아동을 적극적으로 보살피는 정책에 누가 토를 달겠는가.
비용마저 타지 귀족들이 자발적으로 보낸 금액으로 충당된다니, 자금 낭비로 트집 잡을 수조차 없었다.
그 순간, 세라엘의 발치로 휙 날아온 공이 머릿속에 자리한 상념을 밀어냈다. 빳빳한 갈색 덩굴로 엮은 동그란 공을 응시하던 세라엘은 아이들이 있는 방향에 시선을 던졌다.
아이들은 멀리서 봐도 겁을 집어먹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아마도 느티나무 아래 앉은 시커먼 남자들이 두려웠던 모양이다.
자리에서 일어난 세라엘이 공을 집어 들었다. 아이들을 향해 던지려다, 제대로 전달할 자신이 없어 공을 안고 다가갔다.
“안녕?”
밝은 목소리로 인사하자 아이들은 경계심 어린 눈으로 세라엘을 올려다보았다. 가까이서 보니 머리칼이나 피부도 뽀송뽀송하고, 얼굴과 옷에 땟국물이 묻지 않아 보살핌을 받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공놀이를 하고 있었니?”
미소 지으며 공을 건네자 어리숙하게 생긴 남자아이가 받아 들었다.
“네. 누가누가 더 높이 차나 시합했어요.”
“누가 이겼어?”
“캐시가 이겼어요. 캐시는 보육원에서 발차기를 제일 잘해요.”
남자아이는 제 옆에 선 여자아이를 가리켰다. 세라엘은 짙은 밤색 머리를 곱게 땋아 내린 아이와 눈을 맞췄다.
“발차기를 잘한다니 정말 멋있다.”
“고마워요. 나는 그림도 잘 그려요.”
“어머, 정말? 캐시는 다재다능하구나. 머리핀도 잘 어울리네.”
“머리핀은 보육원 원장님이 겨울 축제에서 사 줬어요. 남방에서 올라온 상인한테서 산 머리핀이에요.”
“캐시는 공만 차는 게 아니라 내 엉덩이도 자주 차요!”
오가는 대화를 듣고 있던 남자아이가 세라엘의 관심을 받고 싶었는지 얼른 일러바쳤다. 호의적인 반응을 보이는 세라엘이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캐시는 남자아이를 향해 제법 매서운 표정을 지었다.
“딱 한 번뿐이었잖아! 그것도 네가 자꾸 날 놀리니까 찬 거지.”
“나만 찬 게 아니라 스티브도 찼잖아! 스티브, 뭐라고 말 좀 해 봐!”
다른 남자아이는 세라엘을 보느라 정신이 팔려 대답하지 못했다.
“마이크, 스티브. 너희는 둘 다 맞을 만해서 맞은 거야.”
새침하게 쏘아붙인 캐시는 곧 호기심 어린 눈으로 세라엘을 올려다보았다.
“근데 언니는 여기서 뭐 해요?”
“언니는 소풍 왔어. 말도 타고, 풍경도 구경하려고.”
“보육원 원장님이 여기는 마음대로 들어가면 안 된다고 했는데요? 높으신 분의 사유지라 허락 없이 가면 안 된다고 했어요.”
“그래? 원장님이 현명하신 분이구나. 언니는 사유지 주인한테 허락받고 와서 괜찮아.”
“저기 검은 아저씨들도 허락받은 거예요?”
세라엘은 발켄족 남자들을 돌아보았다. 하나같이 커다란 남자들이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데, 아이 눈엔 아저씨처럼 보일 만도 했다. 그녀는 웃음을 참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허락받았지.”
“저 아저씨들은 누군데요? 언니는 누구예요?”
잠자코 듣고만 있던 스티브가 팔꿈치로 캐시를 툭 건드렸다. 몸을 숙이고 속닥거리는데, 목소리 크기를 조절하지 못해 세라엘의 귀에 다 들렸다.
“이 바보야. 딱 보면 몰라?”
“으응?”
“정체를 숨긴 공주님이잖아! 저 뒤에 있는 사람들은 공주님을 지켜 주는 기사 아저씨고!”
“헉.”
세 아이가 손으로 입을 막고 놀라움과 선망이 뒤섞인 눈빛을 했다. 초롱초롱한 눈망울에 여러 빛깔의 감정이 휙휙 스쳐 가는 게 너무나 귀여웠다.
“세라엘.”
그 순간, 등 뒤로 저벅저벅 다가온 카에드가 그녀를 불렀다. 동시에 아이들의 눈과 입이 동전만큼 커졌다.
“헉!”
캐시 뒤로 후다닥 숨는 두 남자아이를 보니 아무래도 썩 긍정적인 반응은 아니었다. 하필 검은 옷과 망토에 은색 경갑까지 착용한 상태라 더욱 위협적으로 보였다.
세라엘은 겁을 잔뜩 집어먹은 아이들을 혼란에 빠뜨리지 않기 위해 카에드의 손을 꼬옥 잡아 보였다.
“언니 남편이야. 엄청 멋있지?”
“…….”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세라엘도 카에드를 처음 봤을 때 몸이 덜덜 떨릴 정도였으니 애들이라고 다를 바는 없을 터였다.
왜인지 자꾸 비어져 나오는 웃음을 삼키며 세라엘은 카에드를 바라보았다.
“혹시 챙겨온 간식 좀 가져다줄 수 있어요? 아이들한테 나눠 주고 싶어서요.”
“알겠습니다.”
그녀의 부탁에 카에드는 간식을 가지러 순순히 발걸음을 돌렸다. 어린이들은 늑대 앞에 선 아기 토끼 세 마리처럼 서로를 끌어안고 오들오들 떨었다.
세라엘은 아이들을 향해 카에드가 건넨 바구니를 내보였다. 그 안에는 보기 좋게 개별 포장된 쿠키와 케이크가 가득했다.
“먹고 싶은 게 있으면 얼마든지 가져가도 좋아.”
색색의 과자를 본 아이들은 언제 떨었냐는 듯 눈을 휘둥그레 떴다. 서로 시선을 교환하더니 허겁지겁 과자를 집어 들었다.
“감사합니다!”
“잘 먹을게요!”
“우리 원장님이 길에서 모르는 사람이 주는 건 받아먹으면 안 된다고 했는데….”
캐시가 간식을 집을지 말지 갈팡질팡하며 말했다. 세라엘은 똘똘한 아이를 향해 다정하게 웃어 보였다.
“원장님이 참 현명하신 분이네. 그렇지만 블카노프 대공 전하께서 주신 과자라고 하면 이해해 주실 거야.”
아이들은 세라엘의 말을 선뜻 알아듣지 못하고 고개를 갸우뚱했다.
눈매를 좁히고 카에드를 힐끔거리는 캐시는 감이 잡히는 바가 있어 보였다. 하지만 눈앞에 선 남자가 칼스비크의 영주라는 사실까진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블루베리 쿠키를 한입 크게 베어 문 마이크가 탄성을 내질렀다.
“원장님이 구워준 버터 쿠키보다 훨씬 맛있어요. 더 가져가도 돼요?”
“그럼. 얼마든지 가져가.”
“감사합니다!”
명랑하게 외친 마이크는 검푸른 잼을 입가에 가득 묻힌 채로 카에드의 눈치를 살폈다. 그가 몸소 과자를 가져다준 것에 감사를 표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가… 감사합니다, 아저씨.”
“…….”
카에드는 새파랗게 젊은 자신을 아저씨라 칭한 겁대가리 없는 토끼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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