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ried To A Savage Duke RAW novel - chapter (94)
피폐물 속 괴물 남주와 결혼했다 94화(94/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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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세라엘은 선뜻 편지를 펼치지 않았다. 가볍게 혀를 찬 카에드가 의문스럽다는 음성으로 말했다.
“왜 망설이는 건가요? 나도 내 앞으로 온 서신을 공유해 줄게요.”
그렇게 나오면 할 말은 없는데. 세라엘은 대꾸하지 못하고 애꿎은 봉투만 만지작거렸다.
반응이 미적지근하거나 말거나, 카에드는 그녀의 어깨에 얼굴을 올린 상태 그대로 손을 내뻗어 트레이 위의 봉투들을 헤쳤다. 그러고는 수신인이 블카노프 대공작으로 된 것을 골라내어 곧바로 피봉을 뜯고 눈앞에 내보였다.
“내 것부터 먼저 읽어 봐요.”
세라엘은 종이의 가장 윗부분에 쓰인 글자를 소리 내서 읽었다.
“오슬로 제2호텔 사업 계획서. 일우드 보육원 주요 경비 지출 명세서.”
“얼마든지 확인해 봐도 좋습니다.”
순간 어처구니가 없어진 세라엘이 고개를 홱 돌렸다. 그러자 그녀의 어깨에 턱을 받치고 있던 카에드와 입술이 강하게 부딪쳤다.
예기치 않은 입맞춤에 눈을 부릅뜨는 세라엘과 달리 그는 느긋하게 웃었다.
“키스하고 싶었으면 말을 하지. 거칠게 굴 필요는 없잖아요.”
“그게 아니라….”
“일단 당신 편지부터 열어 봐요. 읽고 나서 마저 하게.”
카에드가 봉투를 눈짓하자, 세라엘은 속으로 구시렁거리며 봉납을 벗겨냈다. 생각해 보면 딱히 숨길 것도 없어서 서신을 같이 확인해도 거리낌 없었다.
그녀는 어깨에 턱을 묻은 카에드도 볼 수 있게끔 종이를 펼쳐 들었다.
사랑스러운 블카노프 대공작 부인께
귀부인! 부군과 알콩달콩한 신혼을 즐기고 계시는지요?
블카노프 대공 부부의 결혼식이 어찌나 아름다웠는지 지금도 생생히 떠오른답니다. 잠잠하던 사교계를 오래도록 뒤흔들 환상적인 예식이었지요.
대공작 부인을 다시 만나고 싶던 차에, 마침 좋은 소식을 듣고서 신이 나 깃펜을 들게 되었답니다.
칼스비크에도 서간이 들어갔겠지만, 머지않아 황궁에서 가면무도회와 사냥제가 열린다잖아요.
이제껏 황실에서 주도했던 어떤 행사보다도 화려하다는데 기대되지 않아요?
부인의 결혼식에 참석했던 귀부인 모두 모인다고 해요. 남편들은 내버려 두고 여자들끼리 밤을 한번 찢어 보아요.
황궁에서 재회하기를 기대하고 있겠어요.
칼스비크에 따뜻한 포옹을 보내며,
오웬 백작 부인 올림
“밤을 한번 찢어 보자, 라….”
지척에서 중얼거리는 카에드의 목소리가 음산하기 짝이 없었다.
뜨끔한 세라엘은 괜히 그의 눈치를 보았다. 예상대로 무언가 언짢았는지 입매가 비틀려 있었다.
“배짱이 대단한 부인이군요. 남의 여자를 데리고 밤을 어떻게 찢어 보겠다는 건지.”
세라엘은 서둘러 백작 부인을 변호했다.
“아마 즐겁게 놀자는 뜻에서 나온 표현일 거예요.”
“그래야겠죠.”
마땅히 그래야만 할 거라는 어조가 퍽 섬뜩했다. 세라엘은 눈을 깜박이다 화제를 돌렸다.
“그나저나 가면무도회라니 전 처음 듣는 이야기인걸요. 대공성에도 초대장이 왔었나요?”
별생각 없이 던진 물음에 카에드가 조금 뜸을 들이다 대답했다.
“초대장이라면 도착했습니다.”
“언제요?”
“…좀 됐습니다.”
“저한테는 왜 알려 주지 않으셨어요?”
정적이 맴돌자 세라엘은 그를 돌아보았다. 붙였던 상체를 느리게 물리며 카에드가 무미건조한 저음으로 말했다.
“행사에 참석하지 않는 편이 좋을 듯해서요.”
“아….”
세라엘은 설명을 요구하듯 카에드를 올려다보았다. 그는 별다른 말을 잇지 않고 가만히 시선을 맞댈 뿐이었다.
곧 어렵지 않게 그의 의도를 파악한 세라엘이 먼저 입을 열었다.
“힌델은 위험하니까 가지 않는 편이 낫다, 이 말씀이신 거죠?”
“잘 아는군요. 더불어 황궁은 한시도 마음을 놓을 수 없는 곳입니다. 당연히 무도회에도 불참할 예정이에요.”
세라엘은 눈썹을 살짝 들어 올렸다. 연회에 가지 말자고 회유할 줄 알았더니 그는 이미 결정을 내린 상태였다.
“그래서 초대장이 왔다는 말도 안 해 주신 거예요?”
“불참할 바에야 굳이 알릴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셨구나.”
그럼 백작 부인에게서 온 서찰이 아니었다면 전혀 모르고 넘어갔을 수도 있겠네.
세라엘은 알 수 없는 기분에 휩싸여 손가락만 꼼지락거렸다. 그러다 남은 편지 두 통도 마저 집어 들었다. 모두 피로연에서 만났던 귀부인들이 보낸 것이었다.
“이건 브라운 가문의 부인이 보낸 거고, 이거는 라미레트 가문의 영애한테서 온 거예요.”
“펼쳐 보십시오.”
요구하는 목소리는 부드러웠으나 무시할 수 없는 힘이 있었다. 세라엘은 말없이 카에드를 응시하다, 다시 종이 위로 시선을 떨궜다.
앞서 백작 부인이 보낸 편지와 비슷한 내용이었다.
서두에는 간단한 안부와 함께 결혼식에서 만나 반가웠다는 인사가 적혀 있었고, 황실 무도회에서 재회의 축배를 들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자는 말로 끝맺어져 있었다.
어지간히도 규모가 큰 파티인 듯했다. 한동안 글자를 읽고 또 읽던 세라엘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다들 무도회가 엄청나게 기다려지나 봐요.”
“주기적으로 개최되는 무도회인데 특별할 것도 없을 겁니다. 편지는 무시하십시오.”
“하지만 부인들이 이렇게 제안을 주었는데….”
세라엘이 손끝으로 편지를 가리키며 카에드를 응시했다. 듣지 못한 건지 그는 반응도 없이 산뜻하게 몸을 돌렸다.
“슬슬 정찬실로 내려가는 게 좋겠군요.”
세라엘은 그가 셔츠 단추를 끄르며 상의를 벗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얄궂은 어조로 동침을 제안하던 그의 행동이 다소 부자연스럽게 다가왔다.
아무래도 카에드가 주제를 피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 또한 어렵지 않게 이유를 알아낼 수 있었다.
갈아입을 셔츠에 팔을 끼워 넣던 카에드가 그녀를 향해 힐긋 시선을 던졌다. 세라엘은 편지를 쥔 채 제자리에 인형처럼 가만히 서 있었다.
“옷 안 갈아입어요?”
“…….”
“세라엘.”
연거푸 무시하자 세라엘을 바라보는 그의 얼굴에 당혹감이 스쳤다.
그녀는 테이블로 다가가 편지를 내려놓고 고개를 돌려 카에드를 응시했다. 어디 하나 날카로운 곳 없이 부드러운 선을 지닌 그녀의 얼굴이 제법 매섭게 굳어 있었다.
“제가 무도회에 가는 걸 원치 않으신 거죠?”
잠시간 당황한 표정을 하던 카에드가 짧은 숨을 내쉬고는 입을 열었다.
“무도회든 어디든, 난 당신의 안위를 제대로 돌볼 수 없는 곳에서 노닥거릴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저도 그 마음을 이해해요. 그렇지만 제가 알아야 하는 소식을 공유해 주시고, 제 의사도 물어봐 주셨으면 좋았을 거예요. 초대장을 숨기는 것보다 그편이 더 좋지 않았을까요?”
“무도회에 가고 싶은 마음이 조금도 없습니까?”
“솔직히 없는 건 아니지만….”
“봐요. 힌델이 위험하다는 걸 알면서도 참석하려는 마음이 있지 않습니까. 어차피 가지도 못할 연회의 초대장이라면 당신을 아쉽게 만들 뿐이니 보여 주지 않는 게 낫겠다고 판단한 겁니다.”
그러니까 불참의 여부를 왜 혼자서 정하는 건데…? 예의상이라도 물어봐 주면 안 되었나? 주먹을 꼭 쥔 세라엘이 고집스레 입술을 깨물었다.
“결국엔 다른 사람을 통해서 알게 되었잖아요. 게다가 그런 식으로 뒤늦게 소식을 들으면 오해를 할 수도 있다구요.”
“오해라면 구체적으로 어떤 점을 말하는 겁니까?”
“이 남자가 나를 친구도 못 만나게 하고 가둬 놓고 싶어 하는구나, 같은 오해요.”
“…….”
“물론 오해란 거 알아요. 하지만 저한테는 선택의 여지조차 없었으니 그리 생각할 수밖에 없잖아요.”
무거운 침묵이 이어지고 있었다. 세라엘은 머리 위로 물음표를 띄우며 고개를 갸웃했다. 오랜 침묵은 긍정이 아니던가…?
그녀가 의문스러운 눈초리를 하자, 마른침을 한번 삼킨 카에드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다음부터는 당신이 오해할 일 없도록 주의하겠습니다.”
이게 사과인지, 뭔지. 다음부터는 숨기지 않겠다는 건지, 아니면 더 철저히 숨기겠다는 건지. 경계가 뚜렷하게 그어지지 않은 말에 세라엘은 조용히 시선을 떨구었다.
카에드는 흐트러진 셔츠 단추를 하나하나 잠그며 고개를 돌렸다.
“시간이 늦어지고 있군요.”
창가 너머 저물어 가는 주황빛 하늘을 눈짓한 그가 말했다.
“배고프다고 하지 않았어요? 이제 식사하러 가는 게 좋겠습니다.”
“…저는 옷부터 갈아입어야겠어요. 정찬실에 먼저 내려가세요.”
“같이 내려가요. 여기서 기다리겠습니다.”
물러설 생각이 없는 듯 카에드는 침대 발치에 털썩 앉았다. 그를 멀뚱히 응시하던 세라엘은 곧 터벅터벅 드레스 룸으로 향했다.
말 한마디 하지 않았으나 머릿속이 엉망진창이었다.
뭐라 쏘아붙이고 싶은 마음과 그녀를 위해 쓸개라도 빼 줄 듯 구는 남자한테 그래선 안 된다는 마음이 팽팽하게 충돌하고 있었다.
준비된 저녁 식사는 언제나처럼 훌륭했다.
그러나 세라엘은 음식에 집중하지 못했다. 이 삐죽빼죽한 마음에 정확히 어떤 이름을 붙여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카에드는 도통 무슨 생각인지 알 수 없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제 어지간해선 그의 표정을 읽을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착각이었나 보다.
어색했던 기류는 그의 부하들이 정찬실에 합류하면서 잠시 풀어지는 듯했다. 문제는 식사가 끝나고 다시 2층으로 올라가면서부터 시작되었다.
“오늘은 일이 많지 않아 일찍 들어갈 겁니다. 그래도 피곤하면 먼저 자요.”
카에드는 부부 침실과 집무실을 가르는 복도에 서서 말했다.
말은 그리해도 자신이 돌아올 때까지 그녀가 깨어 있기를 넌지시 바라는 어투였다. 그와 같은 시간대에 잠드는 일은 흔치 않았으니 분명 기뻐해야 하는 일이건만.
세라엘은 뚱한 표정으로 대답을 미루다 고개를 가로저었다.
“저 오늘은 제 침실에서 잘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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