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ried To A Savage Duke RAW novel - chapter (97)
피폐물 속 괴물 남주와 결혼했다 97화(97/150)
“미안합니다. 초대장을 숨긴 건 잘못된 판단이었어요.”
그의 사과에 세라엘은 귓불을 만지작거리며 눈을 내리깔았다.
카에드는 목소리에 약간의 강세를 주어 재차 진심을 전했다.
“서운하게 해서 미안해요.”
가타부타 변명을 얹지 않고 잘못을 시인하는 그를 더 추궁할 마음이 없었다.
파티는 아쉽게 됐지만 참가하고자 하는 의지를 몰아붙이고 싶지 않았다. 누가 세라엘을 콕 집어 정식으로 초청한 것도 아니니 마음 쓸 일도 없을 터였다.
“…괜찮아요. 어떤 마음이셨는지 이해할 수 있어요.”
천천히 얼굴을 내린 카에드가 세라엘의 허벅지 위에 뺨을 올렸다.
“그럼 날 미워하지 않는 거죠.”
낮게 가라앉은 숨결이 살갗을 간지럽게 스쳤다. 흠칫하던 세라엘은 손을 뻗어 부드러운 흑발을 가만히 쓰다듬었다.
“안 미워할게요. 그러니까 사과하지 않아도 돼요.”
카에드가 화답하듯 고개를 움직여 뺨을 비볐다. 그녀는 마치 개를 어루만지는 듯한 괴이한 착각에 휩싸였다.
제 얼굴을 문지르던 그가 한 손을 올려 세라엘의 허리께를 움켜잡았다.
“사과하고 싶은데.”
아래에서 묵직한 울림을 가진 목소리가 들려왔다. 세라엘은 그의 머리칼을 쓸며 가벼이 미소 지었다.
“사과라면 충분히 하셨잖아요.”
“충분하지 않았습니다.”
고개를 든 카에드가 그녀와 눈을 맞추었다. 찬란한 금빛을 머금은 눈동자에 원초적인 본능이 스며들고 있었다.
“당신 기분을 더 나아지게 해 주고 싶어요.”
과거의 경험을 돌이킨 세라엘이 천천히 웃음기를 거뒀다. 이… 이 남자는 틈만 나면 몸으로 때우려고 하는구나!
“괜찮아요. 사과는 이제 그만 받을래요.”
그를 슬쩍 밀어낸 세라엘이 침대에서 일어났다. 카에드는 의외로 순순히 물러났다.
다만 세라엘의 동선을 좇아 움직이는 눈에는 점찍은 먹잇감을 지켜보는 듯한 기색이 들어차고 있었다.
그와 설전을 벌이고 때아닌 추격전을 하다가 갑자기 그런… 방향으로 진행되는 게 정상인가?
어찌 되었든 이대로 허락하면 카에드는 날이 밝을 때까지 그녀를 놓아주지 않을 것이다. 그에겐 맹견처럼 한번 물면 끈질기게 파고들며 그녀가 때려도 놓지 않는 못된 버릇이 있었다.
“그나저나 무도회에 가지 못한다니 아쉽긴 하네요.”
세라엘은 머릿속의 생각을 입에서 나오는 대로 내놓았다.
“가면을 쓰고 왈츠에 맞춰 춤을 추는 일은 생각만 해도 낭만적이거든요.”
“…….”
“서로의 정체가 아리송한 상황에서 오가는 대화도 구미가 당기지 않나요?”
“잘 모르겠군요.”
“왜요. 가면을 쓴 남자가 당신인 걸 알면서도 모르는 척 귓속말로 간질이고, 남들이 춤을 추는 동안 몰래 시선을 교환하고 손끝을 스치면 재미있을 텐데. 안 그래요?”
창가 앞에 선 그녀를 보며 카에드가 천천히 입꼬리를 치켜세웠다.
“그런 취향이 있는 줄은 몰랐네. 남들 다 보는 데서 날 만져 보고 싶었어요?”
“네? 아뇨…?”
어떻게 들으면 해석이 그리 되지. 종잡을 수 없는 발상에 세라엘은 눈과 입을 벌렸다.
“제법 구미가 당기는데요. 원하신다면 장단에 맞춰 줄 의향은 있습니다만.”
“맞추지 마세요.”
“재미있겠어요. 공개적인 장소에서 당신이 날 만지면, 둘만 있을 땐 더한 짓도 하겠다는 걸 모두가 알게 되겠네요.”
“남들한테 그런 상상의 여지는 주고 싶지 않아요.”
세라엘은 고개를 내저으며 그의 말장난에서 벗어났다.
“아무튼 어쩔 수 없네요. 대공 전하께서 제가 무도회에 가는 게 그리도 싫다고 하시니 요구를 들어줄 수밖에요.”
“부인께서 원하신다면 가장 성대한 무도회를 1년 내내 열어 드릴 수 있습니다.”
“부인 사랑이 지극하시네요. 말씀만이라도 감사해요.”
“진심입니다. 거기서 나를 한번 만져 봐요.”
“정말…!”
몸을 일으켜 불쑥 다가온 카에드가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안았다기보다 당겼다는 표현에 가까운 접촉이었다.
갑작스럽게 맞붙은 몸에서 무시할 수 없는 열감이 전해지며 귓전에도 녹녹한 숨결을 품은 속삭임이 번졌다.
“그전에 사과부터 하게 해 주십시오.”
“그런… 사과는 받고 싶지 않아요! 또 얼마나 오랫동안 붙들려고 그래요?”
“받다 보면 좋아질걸요. 당신은 매번 말만 그렇게 하고 결국 좋아하잖아요.”
내가 언제! 하도 낯이 뜨거워 변명도 하지 못한 세라엘이 이마를 짚었다.
“저 식사한 지 얼마 안 돼서 속이 울렁거릴 텐데.”
“받기만 하면 되지 않습니까. 몸이 흔들릴 일은 없을 겁니다.”
웃음기 어린 음성으로 답한 카에드가 그녀의 손을 잡아끌고 침대로 향했다.
세라엘은 반사적으로 몸을 내뺐으나, 저항할 의지조차 우습게 만드는 힘에 속절없이 끌려갈 수밖에 없었다.
“카에드…!”
“가만히 있으면 힘들 것도 없잖아요. 받기만 해요, 받기만. 애먹이면 내가 만족할 때까지 계속할 겁니다.”
그는 조금 전처럼 세라엘을 침대 발치에 앉힌 후 무릎을 꿇었다.
세라엘은 칠흑 같은 머리칼 아래 내리깐 속눈썹과 보기 좋게 날이 선 콧날을 내려다보다, 결국 순순히 몸을 내맡겼다.
카에드는 새벽녘이 되어서야 남은 업무를 위해 침실을 떠났다.
깊은 잠에 빠져든 세라엘의 머릿속에선 각방을 쓰려 했던 포부가 연기처럼 흐려지고 있었다.
***
한낮의 햇빛이 스며든 유리온실 내부는 따뜻했다.
한때 예식장으로 사용되었던 대정원의 온실 안에는 책장과 원형 테이블, 소파 등이 마련되어 있었다. 햇살을 받으며 다과나 독서를 즐기기에 안성맞춤인 장소로 탈바꿈한 상태였다.
의자 대신 바닥에 옹기종기 모여앉은 세라엘과 하녀들이 꺄아 탄성을 내질렀다.
그들 앞에는 까끌까끌한 주홍빛 털을 지닌 새끼 늑대가 발라당 누워 허공을 향해 네 발을 휘젓고 있었다.
“너무 귀여워요.”
“사랑스러워라. 털이 자몽색이에요.”
새끼라 해도 중형견 정도의 크기였지만 그녀들의 마음을 사로잡기에 충분히 애교가 많았다.
그 옆에는 검은 수컷 늑대 ‘모’가 늠름하게 앉아 제 새끼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름은 레오로 짓는 게 좋겠어.”
새끼 늑대의 배를 간질여 주던 세라엘이 미소 지으며 말했다. 그러자 소파에 누워 작은 공을 던졌다 받고 있던 악셀이 히죽거렸다.
“누님의 작명 솜씨가 꽤 좋아졌어요.”
“이전엔 어땠는데?”
“모, 딩, 동, 이런 깜찍하고 이상한 이름만 지으셨잖아요. 요즘은 만나는 동물에게 제법 정상적인 이름을 지어 주고 계시네요.”
말을 끝맺자마자 검은 늑대가 으르렁거리더니 악셀의 다리를 콱 물었다.
“흐악!”
난데없는 공격에 악셀이 비명을 지르며 소파에서 굴러떨어졌다. 누구도 그를 가여워하지 않았다.
“그런데 저 녀석은 또 어디서 새끼를 데려온 걸까요? 애인이 많나…?”
루시가 송아지만큼 거대한 수컷 늑대를 흘끔거리며 조심스레 말했다. 줄곧 그녀를 향해 귀를 쫑긋 세우고 있던 렉터가 냉큼 한마디 던졌다.
“결단코 아닐 거야!”
“응?”
“늑대는 무조건 일부일처제야. 특히 수컷은 절대로 번잡하면 안 돼. 지고지순해서 일평생 하나의 암컷만 섬기면서 살아가야 한다고.”
“그래?”
렉터가 스스로를 변호하듯 덧붙였다.
“그럼. 아마 암컷은 활동적인 녀석이라 야생을 쏘다니는 체질일 거야. 모는 조신한 수컷이니까 밖에서 낳은 새끼를 집으로 데려와 육아를 책임지는 거지.”
“그렇구나. 책임감 있고 멋진 동물이네.”
루시가 손바닥에 주먹을 내리치며 말했다. 렉터의 말에 숨은 속뜻은 조금도 알아채지 못한 눈치였다.
그래도 렉터는 자신이 멋지다는 칭찬을 들은 것처럼 어깨를 의기양양하게 폈다. 그런 그를 한심하게 훑던 악셀이 허공으로 시선을 돌리며 뇌까렸다.
“저래서 어느 세월에 진도가 나가겠냐….”
세라엘의 손가락을 왕왕 물어뜯으며 장난치는 레오는 너무나 사랑스러웠다. 새끼 늑대의 주둥이를 문지르던 세라엘은 기지개를 켜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이만 본성으로 돌아가 볼게. 졸려서 낮잠을 좀 자야 할 거 같아.”
요 며칠 틈만 나면 잠이 쏟아지고 있었다. 딱히 밤잠이 부족한 것도 아닌데 시도 때도 없이 머리가 몽롱해졌다.
칼스비크도 완연한 겨울을 맞이했지만, 한낮에는 햇살이 쨍쨍한 편이라 낮잠 자기 딱 좋은 환경이 조성되고 있었다.
“이따 저녁 식사에서 보자.”
“들어가세요, 누님.”
걸음을 옮기는 세라엘을 루시가 종종걸음으로 따라갔다. 뒤늦게 따르던 릴리가 걸음을 멈추고 악셀을 돌아봤다.
“악셀. 아까 마님 앞으로 서신이 하나 들어오지 않았니?”
악셀은 한 박자 늦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
“확실해?”
“응.”
“흠…. 전서구가 뭘 물고 왔다는 얘길 지나가다 들은 거 같은데.”
“아, 그거. 누님 편지가 아니더라고.”
대수롭지 않게 넘기는 목소리였다. 눈을 깜빡이던 릴리는 어깨를 으쓱이며 온실에서 나갔다.
그들이 자리를 뜨자마자 카에드의 부하들은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
***
어둠이 무겁게 내려앉은 한밤중의 대공성은 적막했다.
검회색 돌벽에 난 수백 개의 창문에서 빛이 새어 나오는 곳은 극소수였다. 카에드의 집무실이 그중 하나였다.
“…….”
카에드는 기다란 손가락에 얼굴을 받치고 책상 위에 놓인 것을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테두리에 금박이 둘린 빳빳한 편지 봉투. 중앙에 찍힌 선홍색 밀랍 위로 독니를 드러낸 뱀이 자리하고 있었다.
수신인은 세라엘 블카노프였다.
그녀 앞으로 황실의 인장이 찍힌 서신이 들어왔다는 전언을 듣자마자 지체 없이 가져온 편지였다.
황가 인물 중 세라엘과 친분이 있는 사람은 로잘린뿐이니 누가 보냈는지도 알만했다.
어떤 사탕발림으로 세라엘을 꼬드기려고 이따위 종이 쪼가리에 금까지 처발라서 보냈을까.
“하아….”
한숨을 내리 쉰 그가 제 머리칼을 거칠게 쓸어올렸다.
황궁에서 온 의례적인 초청장을 숨겼단 이유로 세라엘이 불만을 털어놓은 게 고작 사흘 전이다.
잘못된 판단을 해서 미안하다 사과까지 해 놓고 그녀 앞으로 온 편지를 가로채다니. 그나마 아직 열어 보지 않은 게 다행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이거 최악이네.”
잇새로 자조적인 웃음이 흘렀다. 빼돌린 짓부터가 이미 도를 넘었는데 웬 자기변명을 덧붙이고 있는지.
부인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려는 의처증 환자가 된 기분은 썩 유쾌하지 않았다. 들키면 각방으로 끝날 일이 아니란 걸 알아서였다.
그런데도 세라엘 몰래 편지를 열어 보고 싶은 강한 충동이 솟구쳤다. 아예 장작불에 내던져 재로 만드는 편이 나을 수도 있었다.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았던 것처럼.
그것도 아니면….
한참을 고민하던 그는 편지를 구기듯 움켜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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