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ried To A Savage Duke RAW novel - chapter (98)
피폐물 속 괴물 남주와 결혼했다 98화(98/150)
카에드는 불타오르는 벽난로 앞으로 다가갔다.
이 안에 끄적여 있을 활자가 문제였다. 황궁 무도회와 연관되어 있을 가능성이 컸고, 로잘린이 직접 보낸 거라면 초대장이라 볼 수도 있었다.
오웬 백작 부인이나 다른 귀부인들의 편지는 몰라도, 로잘린의 편지는 세라엘이 가벼이 넘기지 않으리란 불안한 직감이 들었다.
파티에 불참하기로 종결된 마당에 세라엘의 마음을 흔들 편지 따위 당장 불태워 버리는 게 현명했다.
카에드는 한 손으로 제 얼굴을 감싸 쥐었다.
미친 게 틀림없었다. 좀도둑처럼 아내의 편지를 빼내서 이런 쓰레기 같은 생각을 하고 있으려니 자괴감이 몰려왔다.
뱀의 혀처럼 날름대는 불길을 바라보는데 각방을 쓰자던 세라엘의 목소리가 이명처럼 울리는 것 같았다.
편지를 불태우는 게 현명한 선택일까. 만에 하나 세라엘이 알게 된다면 돌이킬 수 없는 불신에 사로잡힐 것이다.
작정하고 숨긴다면 들킬 일은 없겠지만, 차곡차곡 쌓아 올린 신뢰를 깨뜨릴 수 있는 위험을 감수하고 싶지 않았다.
벽난로 앞에서 멈추었던 걸음은 문밖으로 향했다. 적적한 복도를 걸어 도착한 곳은 부부 침실이었다.
끼익, 문을 열고 들어서자 작은 불빛이 새어 나왔다. 느지막한 밤중인데도 테이블 앞에 앉은 세라엘은 일렁이는 촛불에 의지해 깃펜으로 무언가를 끄적이고 있었다.
인기척을 감지한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눈이 커지는 걸 보니 카에드가 오리라고는 예상치 못한 듯했다.
“어? 일은 벌써 다 끝난 거예요?”
약간의 기대감이 어린 목소리가 사랑스럽기 그지없었다. 카에드는 소리 없이 웃으며 그녀 앞에 있는 의자를 빼 앉았다.
“아직입니다. 웬일로 깨어 있습니까?”
“낮잠을 오래 자서 그런가 졸리지 않아요.”
“낮잠을 왜 오래 잤을까. 밤에 잠 못 잤어요?”
“잘 잤는데 왜 그런지 모르겠어요.”
“그러게요. 어젯밤엔 내가 힘들게 하지도 않았는데.”
끝이 조금 올라간 말투에 세라엘은 목덜미를 쓸며 웃었다.
카에드는 턱을 괴고 나른히 내리뜬 눈으로 감상하듯 그녀의 얼굴을 응시했다.
“…….”
마른 몸에 비해 살이 살짝 오른 그녀의 볼에는 잉크로 추정되는 검은 액체가 자그맣게 묻어 있었다.
손을 뻗은 카에드가 그것을 엄지로 문질러 지워 주었다. 대신 붉은 홍조가 눈에 띄게 번져 갔다. 몸을 그렇게나 섞었는데 그녀는 여전히 별것 아닌 접촉에도 뺨을 붉혔다.
그는 책상 위에서 손가락을 두드리다 세라엘 앞에 놓인 종이를 눈짓했다.
“뭐 하고 있었어요?”
“아, 이거.”
홀린 듯 입을 벌리고 있던 그녀가 종이를 집어 팔랑팔랑 내보였다. 카에드는 종이의 정체를 알아차리곤 고개를 끄덕였다.
“귀부인들에게 답신을 쓰고 있었군요.”
“네. 미리미리 보내 놓아야 다들 수도로 떠나기 전에 확인할 것 같아서요.”
다시 책상 위로 시선을 내려뜨린 세라엘은 깃펜에 잉크를 찍어 글자를 써 내려갔다.
첫 안부 편지를 받은 날 이후, 다른 귀부인들로부터 서신이 4개나 더 도착했다. 하나같이 비슷한 내용의 편지는 황궁 무도회에서 만나자는 인사로 끝맺어져 있었다.
세라엘은 연락을 주어 고맙다는 말과 함께 무도회에 참석하지 않기로 했다는 소식을 차례차례 적는 중이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카에드의 눈에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웠다. 미처 알아차리지 못한 세라엘은 마냥 밝은 목소리로 물어 왔다.
“혹시 보육원은 언제쯤 갈 수 있을까요?”
“일주일 내로 일정을 잡아 볼 예정입니다.”
“날짜가 정해지면 알려 주세요. 빈손으로 방문하고 싶지 않아서 제과점에 주문을 넣으려고 하거든요. 아이들 인형이랑 동화책도 사고 싶어요.”
“알겠습니다. 선물을 받으면 아이들이 좋아하겠군요.”
“선물하는 저도 좋은걸요. 꼬맹이들이 웃는 모습을 보고 싶어요.”
“외출이 기다려지나 봐요.”
“그럼요. 하루하루 손꼽아 기다리고 있어요.”
답장 하나를 완성한 세라엘이 새 종이를 펼치며 말을 이었다.
“요즘 설레는 추억을 하나씩 남기는 기분이에요. 늘 성안에만 있다가 겨울 축제도 다녀오고, 들판에서 예쁜 말도 타고, 이제 보육원도 갈 예정이잖아요. 이번 외출도 기억에 오래 남을 추억이 될 것 같아요.”
카에드의 양심에 칼을 찌르는 발언이었다. 신변 안전을 위해서라지만 친구도 만나지 못하게 하고, 활동적이고 명랑한 그녀의 발목을 틀어잡는 듯하여 마음이 편치 않았다.
아무것도 모르는 세라엘은 콧노래까지 부르며 열심히 깃펜을 쥔 손을 놀렸다.
하필 그의 시야에 비친 종이 위에는 ‘아쉽지만 무도회에는 불참하게 되었어요’라는 글자가 적히고 있었다.
카에드는 잠시 뜸을 들이다, 빼돌렸던 세라엘의 편지를 쓱 내밀었다. 세라엘은 가장자리에 금박이 덧입혀진 봉투를 보고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뭐예요?”
“당신 앞으로 온 서간입니다.”
“또요?”
세라엘은 가벼이 웃으며 봉투를 받아 들었다.
“이번에는 어떤 귀부인이 보냈을까요?”
“…….”
“먼저 도착한 7통의 편지로 미루어 보면 무슨 내용일지 예상이 되네요. 모두 황궁 무도회가 무척 기다려지는 모양이에요.”
세라엘은 깃펜을 내려놓고 편지 칼을 집어 들었다.
비아테 황가의 인장이 찍힌 봉랍을 본 그녀의 얼굴에서 미소가 희미해졌다. 카에드와 시선을 맞추자 그는 담담한 표정만 지어 보였다.
“황궁에서 온 편지네요…?”
“읽어 보십시오.”
그의 요구에 세라엘은 눈을 깜박이다 봉투를 열었다.
카에드는 굳이 의자를 밀고 일어나 그녀와 함께 읽으려 하지 않았다. 그저 마주 앉아 조용한 눈으로 세라엘의 반응을 살필 뿐이었다.
구김 없는 종이 위에는 정갈한 서체의 글자가 채워져 있었다. 척 보기에도 앞서 귀부인들이 보낸 것과 다른 진중함이 묻어 있는 듯했다.
세라엘은 카에드를 힐긋 응시한 후, 또박또박한 활자를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친애하는 블카노프 대공작 부인께
얼마 전에 수도 힌델에 첫눈이 내렸어요. 칼스비크를 떠올리게 하는 계절이 성큼 다가왔다는 실감이 들면서 대공작 부인 생각이 나더라고요.
짧은 시간이었지만 부인과 대화를 나눌 수 있어 지금도 행운이었다고 생각해요. 축제에서는 정말 미안했고요.
그런 의미에서, 부인을 황궁이 주최하는 행사에 정식으로 초대하고 싶어요.
이미 대공 부부 앞으로 형식적인 초대장이 전송되었겠지만, 이건 제가 따로 예를 갖추어 부인을 황녀의 손님으로 초청하는 거예요.
부인께서 저를 성심껏 환대해 주셨듯, 제게도 대접할 기회를 주신다면 무엇보다 큰 영광이 될 거예요.
그럼 황궁에서 만나 뵙기를 손꼽아 기다리고 있을게요.
추신: 힌델에는 유명한 야시장이 있어요. 멋진 곳이지만 소매치기와 강도가 많아서, 방문할 계획이라면 믿음직한 호위를 대동해야 할 거예요.
행운을 담아, 로잘린 비아테
카에드는 그녀가 편지를 읽을 동안 턱을 받치고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 세라엘은 마지막 온점을 눈에 담고도 한동안 침묵을 지켰다. 무언가를 곰곰이 생각하는 눈치였다.
“황녀 전하가 보낸 편지네요.”
“그럴 것 같았습니다. 뭐라고 합니까?”
“음….”
진심을 꾹꾹 눌러 담아 쓴 편지를 보니 많은 생각이 교차했다. 가면무도회에 가고 싶은 속마음은 차치하더라도, 황녀인 로잘린의 성의를 무시해선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카에드를 향한 그녀의 푸른 눈동자에는 은근한 기대감이 어려 있었다. 카에드는 속으로 로잘린을 저주하며 차분하게 대답을 기다렸다.
“칼스비크에서 있었던 일을 언급하면서 제게 고마웠고 미안했다고 하네요. 글자에서부터 진심이 느껴져요.”
“그리고?”
“황궁 무도회에 저를 정식으로 초대하고 싶다는… 말도 있어요. 대접할 기회를 달라는 부탁도 함께요. 칼스비크에서 받은 환대에 보답하고 싶은가 봐요.”
굳이 훔쳐보지 않았어도 카에드의 예상에서 빗나가지 않은 내용이었다. 세라엘이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무도회에 가지 않으면 황녀 전하가 유감스러워할 거예요.”
“그 여자 기분이 어떻든 알 게 뭡니까.”
“저는 신경 쓰여요…. 이렇게까지 말하는 걸 보니 불참하면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해요.”
의자를 밀치고 일어난 카에드가 창가로 다가섰다. 그는 착잡한 표정으로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아무래도 힌델에 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니 심사가 뒤틀린 모양이었다.
“전국의 귀족이 집합하는 자리이니만큼 밀로즈 후작 부부도 초대받았을 겁니다. 두 번 다시 보고 싶지 않았던 사람들 아니었습니까?”
그녀와 연을 끊은 양친을 언급해서라도 세라엘을 설득하려는 심산이었다.
눈을 내리깔고 로잘린의 편지를 만지작거리던 세라엘이 자리에서 일어나 그에게 다가갔다. 그녀는 창밖을 보고 선 카에드의 너른 등판에 뺨을 대고 깊이 끌어안았다.
카에드는 그를 부둥켜안는 여자를 야멸차게 밀어내지 못하고 무거운 숨을 내쉬었다.
지금 카에드가 할 수 있는 가장 모진 짓은 제 등허리를 껴안은 그녀를 마주 안아 주지 않는 것이었다.
“당신 말이 다 맞아요.”
그러나 등 뒤에서 들려온 말은 그의 예상과 반대였다.
“당신 결정을 따르기로 했는데, 전하의 편지를 받았다고 해서 제 고집을 앞세우는 건 잘못되었어요. 저도 자칫 위험한 일이 생길지도 모르는 곳은… 발을 들이지 않는 게 현명하다고 생각해요.”
“…….”
“황녀 전하께도 거절하는 답신을 보낼게요. 칼스비크에 남아 있을 테니까 불편해하지 마세요.”
순순히 수긍하는 목소리가 카에드를 안심시키기는커녕 고민의 수렁 속으로 밀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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