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ried To A Savage Duke RAW novel - chapter (99)
피폐물 속 괴물 남주와 결혼했다 99화(99/150)
눈을 느리게 감았다 뜬 카에드는 다시 창밖을 주시했다. 시야가 닿은 곳은 광활하게 펼쳐진 자신의 영지였다.
제 손아귀 안에 있는 이곳조차 세라엘 홀로 나다니게 하고 싶지 않은데 수도 힌델이라니.
심지어 황궁이다. 세라엘의 손목을 틀어잡고, 질 낮은 희롱을 던졌던 필립의 본거지였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눈앞에 불길이 일었다.
“그날 그 여자를 성으로 들여보내는 게 아니었는데.”
짓씹듯 중얼거린 카에드가 지난날을 돌이켰다.
안개비가 내리던 새벽녘, 로잘린이 대공성에 들어섰을 때 가차 없이 문전박대를 해야 했다.
불청객을 감지한 발켄의 늑대들이 울고, 정확한 출처를 알 수 없는 불쾌감이 그의 속에 웅크렸던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시선을 내린 카에드가 제 몸을 감싼 팔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세라엘은 품 안에 다 들어오지도 않는 남자의 몸을 간신히 끌어안고 있었다.
그래, 이렇게 된 마당에 아예 성문을, 침실 문을 걸어 잠그자. 세라엘을 일평생 포근한 침실에서만 먹고 자게끔 가둬 버리는 게 어떨까. 집무를 보는 공간도 그녀의 침대 앞으로 옮겨 와 한시도 눈을 떼지 않는 거다.
각방을 쓰더라도, 미움을 좀 받더라도, 애써 쌓아 온 신뢰에 금이 가더라도 그녀의 안위를 보전하는 일이 최우선이었다.
“…….”
카에드는 마른세수를 하며 날숨처럼 욕지거리를 흩트렸다. 뒤늦은 후회는 그를 망상에 빠뜨리고 있었다.
오랜 정적 끝에 결단을 내린 그는 한숨과 함께 말을 내뱉었다.
“당신한테 작은 생채기라도 생기면 난 평생을 후회하면서 살아갈 겁니다.”
카에드는 잇달아 한숨을 내쉬며 제 허리를 두른 세라엘의 손을 잡아 내렸다.
포옹을 거절당했다고 생각했는지 등 뒤에서 그녀가 시무룩하게 눈썹을 일그러뜨리는 기색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카에드는 등을 돌려 세라엘을 마주 보았다.
“난 사냥제에 참가하지 않을 예정이니까.”
큼지막한 손이 그녀의 얼굴을 감싸 쥐었다.
“우리가 갈 곳은 무도회 하나뿐입니다.”
“네?”
“귀부인들과 황녀에게도 그리 회답을 보내십시오. 서간이 늦지 않게 도착하려면 이틀 내로 발송하는 편이 좋을 겁니다.”
예기치 못한 제안에 세라엘은 말문을 잃고 눈을 깜박였다. 반색하면 안 되는 걸 알면서도 얼굴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
“정말 그래도 돼요? 힌델에 가는 거예요?”
“오랫동안 성안에서만 지내느라 답답했던 거 알아요. 이번 기회에 수도를 방문해 보는 것도 나쁘지만은 않을 것 같습니다.”
카에드는 여전히 내키지 않은 표정이었지만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대신 어디든 혼자 돌아다니지 않고 매사에 조심하기로 약속해 줘요. 사고는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다는 거 알죠.”
“네, 사람이 많은 곳일수록 조심해야 하는 것도 기억하고 있어요. 어딜 가든지 호위를 거느릴게요.”
그는 세라엘의 얼굴을 붙든 손에 미약한 힘을 주었다. 가뜩이나 살이 오른 볼이 깜찍하게 짜부라졌다.
선홍색 입술 또한 병아리 부리처럼 부풀어 올랐다. 꺼림칙한 결단을 내리는 와중에도 키스하고 싶은 욕구가 치고 올라왔다.
엄밀히 말하자면 입맞춤보다는 어그러진 감정을 담아 잘근잘근 깨물어 먹고 싶다는 욕구에 가까웠다. 아프다며 눈물을 글썽이는 푸른 눈을 보면 기분이 좀 나아지려나.
움켜쥔 손에 잇달아 힘을 주며 카에드가 신신당부했다.
“설령 내 곁에서 떨어져야 하는 피치 못할 상황이 오더라도 절대로 혼자 행동해선 안 됩니다.”
세라엘은 열심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양 뺨이 짓눌린 탓에 뭉개진 발음이 새어 나왔다.
“절대로 무모한 짓은 하지 않을게요.”
“약속해요.”
“약속할게요. 놀러가는 게 아니란 것도 알고 있어요.”
진의를 가늠하듯 오래 시선을 맞추던 카에드가 마침내 얼굴을 놓아 주었다.
세라엘은 깡충 뛰어 그의 목에 두 팔을 둘렀다. 딱딱하게 굳어 있던 그가 한숨을 내쉬며 그녀의 등허리를 마주 안았다.
그래도 안심이 되지 않아 거듭 당부했다.
“나를 불안하게 만들지 말아요. 내가 내 욕심을 앞세우는 일이 없게. 응?”
세라엘은 어쩐지 기시감이 드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의문을 표하는 대신 그의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을 불안하게 하지 않을 거예요.”
조금도 안심되지 않는 말에 카에드는 눈을 내리깔았다.
독립까지 노리며 어떻게든 멀어지려고 했던 제국의 수도를 고작 무도회를 위해 제 발로 걸어가게 되었다니.
그것도 세라엘을 데리고, 독사가 똬리를 튼 굴로 들어가는 위험을 무릅쓰려 하고 있었다.
벌써부터 까맣게 타들어 가는 속이 무색하게도 바짝 곤두선 감각은 세라엘이 전하는 모든 것에 열렬히 반응했다.
달큼한 향이, 제게 안겨드는 말랑한 몸이, 간지럽게 흩어지는 숨결이 더없이 자극적이었다.
그것을 엉망으로 헤집어 버리고 싶은 충동과 세상 무엇보다 소중히 간직하고 싶은 양가적인 마음이 그를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이게 다 내가 답도 없이 당신한테 빠져서.”
카에드가 자조하듯 읊조렸다. 한숨처럼 흩어진 목소리를 미처 알아듣지 못한 세라엘이 눈을 깜박였다.
“네?”
“위로해 줄래요?”
곱씹어 볼 시간도 주지 않고 그가 되물었다. 세라엘은 작은 동작으로 고개를 한번 끄덕여 보였다.
곧 자그마한 손이 그의 어깨를 몇 번 토닥였다. 카에드는 어이가 없어 피실 헛웃음을 터트렸다.
“이런 식의 위로는 됐고.”
“…….”
“내가 당신한테 사과했던 방식대로 해 줘요. 똑같이.”
단언하듯 덧붙인 그가 손을 뻗어 세라엘의 입가를 훑었다.
매끄러운 살결을 쓸어 만지던 지문이 통통한 입술 위로 올라와 모양을 짓이겼다. 느리지만 노골적인 손짓이었다. 무얼 의미하는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어….”
“위로해 줘요.”
불쑥 다가선 그가 귓가에 나지막이 속삭였다.
“불안해서 미칠 것 같습니다.”
도무지 넘겨들을 수가 없는 발언에 세라엘은 마른침을 삼키며 자기도 모르게 입술을 핥았다.
“얼른요. 내 불안한 마음은 당신만이 달래 줄 수 있어요.”
카에드가 미적거리는 그녀를 재촉하듯 손목을 잡아끌며 의자에 털썩 앉았다. 날카로운 선으로 이루어진 수려한 얼굴에는 기대감이 아닌 지친 기색이 물들어 있었다.
거듭 침을 삼키던 세라엘이 그의 손을 깍지 껴 마주 잡았다.
***
“커다란 짐마차가 연속으로 세 대나 들어오고 있어요.”
고개를 빼고 창밖을 내다보던 루시가 감탄했다.
“지금은 하인들이 짐을 하나씩 빼서 우리 마차에 나르고 있어요. 엄청 무거워 보여요.”
“그래?”
테이블에 앉아 깃펜을 놀리던 세라엘이 고개를 들어 창가를 응시했다.
“뭐가 보여?”
“저건 마거릿 제과점에서 온 과자 상자처럼 보이고, 저건 아마도 인형이 든 상자, 저 커다란 상자 안을 채운 건… 뭐지?”
“동화책일 거야.”
“맞네요. 책이었구나.”
황실 행사에 가기로 결정이 되면서 오슬로의 보육원을 방문하는 날이 미뤄지게 되었다.
미리 선물이라도 보내고 싶은 마음에, 세라엘은 축제에서 소개받았던 제과점을 포함하여 여러 상점에 주문서를 넣어 보육원에 전달할 물품을 잔뜩 준비했다.
내려가서 두 눈으로 확인해 봐야 알겠지만, 루시의 말을 들으니 빠짐없이 잘 도착한 듯했다.
루시가 창문 밖으로 내밀었던 고개를 돌려 세라엘을 응시했다.
“답장을 쓰고 계시는 거예요?”
“응.”
세라엘은 앞서 편지를 보낸 7명의 귀부인에게 답장을 다시 쓰는 중이었다. 무도회에 불참하겠다는 내용이 적힌 종이는 버리고, 황궁에서 보자는 글자로 채우고 있었다.
“부인들께서 황궁으로 떠나시기 전에 편지가 무사히 도착하겠지요?”
“아슬아슬하겠지만 잘 도착할 거 같아.”
“황궁에서 개최되는 가면무도회라니 상상만 해도 두근거려요. 정말 기대되시겠어요.”
“글쎄….”
세라엘은 마지막 답장을 봉투에 넣으며 쓴웃음을 지었다.
내일이면 황궁으로 떠나는 날이었지만 마냥 설렌다고 할 순 없었다. 순전히 무도회를 즐기러 간다기보다 황녀의 성의에 보답하기 위해 참석하는 거나 다름없었기에.
또 착잡해하던 카에드의 반응을 떠올려 보면 순수하게 기뻐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도 이왕 가는 김에 적당히 즐기고 오는 편이 나을 거 같아.”
세라엘이 봉투를 차곡차곡 쌓으며 말했다. 그편이 찝찝한 아쉬움만 남기는 것보다는 나으리라.
“즐기는 게 마땅하세요. 제가 릴리와 상점에 가서 가면을 사 왔는데 마음에 드는 거로 한번 골라 보시겠어요?”
루시는 커다란 가죽 가방에서 가면들을 꺼내어 침대 위에 나열했다.
하나같이 화려하고 멋진 가면이었다. 한쪽 눈만 가리는 가면이 있는가 하면, 정수리부터 목까지 가리는 가면도 있었다.
“가면 장인이 그러는데 각각의 가면마다 얽힌 이야기와 주제가 있대요. 일단 겉보기에 예쁜 가면 위주로 골라왔는데 혹시 몰라 설명서도 받아 왔어요.”
루시가 양피지 한 장을 꺼내 들었다. 세라엘은 절규하는 듯한 표정의 흰색 가면을 가리켰다.
“저건 어떤 주제로 만들었을까. 슬픔과 관련이 있을 거 같아.”
설명이 적힌 양피지를 본 루시가 고개를 내저었다.
“주제는 환희래요. 천국에 간 종교인을 상상하며 만든 가면이래요.”
“특이하네. 모로 봐도 울부짖는 가면인데.”
장인은 참으로 심오한 사상을 가진 자가 틀림없었다.
나열된 가면들을 관찰하던 세라엘이 끄트머리에 있는 선홍색 가면을 집었다. 이마 전체와 눈을 가리는 나비 모양의 반가면이었다.
“생김새는 이게 가장 마음에 들어.”
눈이 모호한 방향으로 휜 그것은 테두리와 눈자위에 반짝이는 금실이 구불구불 수놓아져 있었는데, 그 선을 따라 투명한 보석이 촘촘하게 박혀 있었다.
“안목이 훌륭하세요. 저도 색감이 참 고운 가면이라고 생각했어요.”
“천만에. 이건 어디서 영감을 받아 만든 가면일까?”
“음…. 잠시만요.”
루시가 양피지 위에 손가락을 짚어 내려갔다.
그때, 침실 문을 똑똑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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