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tial Arts Gacha RAW novel - Chapter 131
56. 소림(2)
“시원하게 싹 미셨네요? 하마터면 못 알아볼 뻔했습니다.”
“흘흘. 보기 나쁘진 않은가?”
머리를 삭발하고 굉장히 낡아 보이는 가사를 걸친 채 찾아온 심익한.
헤어졌을 때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
수왕족들 사이에서 상당히 높은 권력을 지니고 있었던 전전대의 씨왕.
수왕채를 떠나고 아주 긴 시간이 흐른 것은 아니었지만, 심익한을 다시 만날 일이 있다면 꽤 나중의 일이 되지 않을까 생각했었다.
‘다시 보니 반갑기는 한데 기분이 묘하네.’
자신을 사형제 간의 인연으로 받아들이고 아무런 대가 없이 대접을 해주었던, 소림의 마지막 세대라 할 수 있는 무승.
소종천은 중원으로 돌아오면서 그에게 빚을 갚는다는 마음으로, 소림 방장의 신물이라는 녹옥불장의 소재에 대해 확인해 달라는 부탁을 받아들였다.
그리하여 이런저런 일을 겪다가 청해성에서 결국 녹옥불장을 손에 넣을 수 있었고, 이미회의 상인들을 통해 물건을 전달함으로써 어느 정도 보답은 했다고 여겼었다.
“잠시 못 본 사이에 엄청난 성장을 이룬 모양이군. 역시 사제는 대단한 인물일세.”
“에이, 뭘요.”
절정에 머물러 있는 심익한이 초절정에 들어선 소종천의 무위를 정확히 꿰뚫어 볼 수는 없지만, 같은 뿌리를 둔 무공을 익힌 처지이기에 이전보다 더욱 발전했다는 것 정도는 알아볼 수 있었다.
감탄하는 심익한에게 머쓱해하며 미소를 지어 보인 소종천은, 이내 웃음기를 지우고 입을 열었다.
“혹시 녹옥불장에 무슨 일이 생겼습니까? 제가 찾아낸 게 알고 보니 그럴듯한 모조품이었다거나?”
“아닐세. 사제가 보내준 것은 아무 하자 없는 진품이었다네. 그래서 이렇게 가져오기도 했고.”
몸을 살짝 틀어서 등에 메고 있던 함을 보이며 웃음 짓는 심익한.
그런 그를 마주하며 조금 난처한 기색을 보인 소종천은, 잠시 말을 고르다가 입을 열었다.
“슬슬 밥때도 돼가니까, 오랜만에 식사라도 함께하면서 이야기를 나눠보죠.”
“그러세.”
소종천은 심익한이 찾아온 이유를 대강 짐작할 수 있었다.
중원을 떠나 남은 생을 끝까지 남만의 부족들과 보낼 것 같았던 이가 다시 중원으로 돌아왔으니, 사실 이유야 듣지 않아도 뻔하지 않은가?
소림 방장의 장문제자라는 신분을 가졌던 이가, 방장의 신물인 녹옥불장을 손에 넣자 수십 년을 살아갔던 터전을 떠났다.
거기에 누가 봐도 스님이라고 생각할 법한 차림새를 하고 있으니, 의중을 눈치채지 못하면 그게 이상한 일이다.
‘소림을 부활시키고 싶다는 거겠구만. 나 역시 협력하길 바라는 것일 테고. 끄응…… 곤란한데.’
자리를 옮긴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 보고 앉아 긴 대화를 나누었다.
역시나 이야기는 예상한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소림의 승려로서 지켜야 할 계율을 어겼음에도, 사숙들께선 나를 처벌하지 않고 머나먼 서방으로 떠나셨지. 수왕족과 함께한 수십 년의 세월을 후회하진 않지만, 항상 그분들에 대한 죄스러움을 가슴 한편에 가지고 살아왔네.”
과거의 일을 언급하며 시작된 이야기는 금방 현재의 시간에 걸맞은 주제로 돌아왔다.
“도와주게 사제. 나 혼자라면 꿈도 못 꿨을 일이었겠지만, 사제를 만나고 나서 희망이 생겼다네. 사문을 재건하는 일에 앞장서주시게.”
“으음.”
난감한 일이었다.
문파 하나를 다시 세운다는 것이 어디 보통 노력으로 이룰 수 있는 것이겠는가.
마교 토벌이라는 목표와 그걸 위한 성장 외에는 별 관심이 없는 소종천에게, 심익한의 요청은 이득은 없고 매우 귀찮기만 한 일이었다.
‘대단한 보상을 걸고 임무가 생겨나도 솔직히 애매할 판에 말이야.’
어디 동네에 조그만 무관 하나 차리는 일도, 제자를 받아 키우고 그럴싸한 틀을 갖추려면 일이 년의 시간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하물며 그 소림을 다시 제대로 살려내려면, 자신의 의지나 능력은 둘째 치고라도 당최 얼마나 많은 시간이 필요할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
‘하고 싶지 않은데…… 또 마냥 매몰차게 거절할 수도 없네? 쩝!’
진짜 사문은 아니긴 해도, 소림의 무공을 사용하며 그 이름을 팔고 돌아다니던 소종천이다.
자신을 동문 사형제라 철석같이 믿고 있는 심익한에게, 차마 ‘귀찮으니까 혼자하십쇼’라고 말하기도 뭣한 상황.
‘내 시간을 크게 뺏기지 않는 선에서 적당히 도움 정도는 주는 게 그래도 도리이긴 한데.’
소종천은 곰곰이 생각에 빠졌다.
문파를 세우는 것이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긴 하지만, 꼼꼼하게 따져보면 아예 못 해먹을 짓이라 할 정도는 아니다.
‘소림 무문은 사라졌지만, 불문으로서의 소림은 여전히 건재하다지? 일단 터 자체는 그대로 남아 있으니, 자리 하나 까는 것쯤은 간단하겠네.’
현재의 소림에서 과연 쉽게 받아들여 줄지는 모르겠지만, 그 부분은 심익한이 있으니 크게 문제는 아닐 것 같다.
정식으로 입적한 뒤 장문제자라는 위치에 올랐던 심익한이다.
반세기라는 시간이 흘렀다지만 그에 관한 기록이 분명 남아 있을 터.
과거와는 상황이 달라졌다고 해도 자격이 있는 이를 배척하진 않을 것이라 생각되었다.
‘이미 파계한 전적이 있긴 하지만, 어차피 그때 일을 알고 있는 동문의 사람들은 다 죽었겠지. 뭐 살아 있어도 저 멀리 천축으로 떠났다고 하니 상관없을 테고.’
본인만 입 다물고 있으면 자격에 대한 지적을 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리고 무문으로서 가장 중요한 무공에 관한 건…… 뭐, 심 사형 정도면 충분히 괜찮지.’
소림 정종의 무공을 수련했으며 장문제자로 발탁될 정도의 기재였던 심익한은, 절정지경의 무인들 사이에서 상위권에 들 수 있을 만한 실력을 지녔다.
그럭저럭 한 무문의 대표를 맡을 수준은 된다는 의미.
옛 소림의 명성을 생각하면 약간 아쉽긴 하지만, 부족한 부분은 소종천이 채울 수 있으니 문제없었다.
한 문파가 가진 무력을 파악할 때 사람들이 가장 관심을 가지는 항목은, 그곳에 속한 최고수의 무위가 어느 정도인가에 관한 것이다.
중소문파들은 절정의 무인이 몇이나 몸담고 있는가로 세력의 크기를 가늠하지만, 대형문파들은 초절정의 경지에 오른 무인의 존재 유무를 중요시 여긴다.
‘나 정도면 이제 한 문파의 배경이 되어줄 수 있지.’
일선에 직접 나서서 자잘한 일을 맡을 필요도 없다.
그냥 이름을 올려두기만 하는 것으로도 그 문파가 충분히 다른 문파들의 인정을 받을 수 있게 되는 것.
그것이 초절정 무인이란 존재가 가지고 있는 무게감이다.
‘힘든 일은 진짜 소림의 제자인 심 사형이 조금 고생하시라지 뭐. 나야 어차피 앞으로 연맹의 중심에서 활약할 생각이었으니까, 적당히 명성을 날리면서 소림의 이름을 홍보해 주면 될 것 같은데?’
딱 그만큼만 관여하는 정도라면 그다지 어려울 것 없는 일이다.
그런 의중을 넌지시 전하자, 심익한은 커다란 웃음을 보이며 말했다.
“허허헛! 내가 부탁하고자 한 것이 애초에 그것이었네!”
소종천의 목표가 중원에서 마교를 몰아내고자 한다는 것임을, 심익한 역시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다.
도움이 되어달라고 말하긴 했지만, 앞날이 창창한 어린 사제의 발목을 잡을 생각은 없었다.
“사제 같은 이가 소림의 제자라는 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제 몫을 다하고 있다고 할 수 있지. 아무도 넘볼 수 없는 거목이 되어 소림의 이름을 널리 알려주시게.”
“예에, 그런 이야기라면 뭐…….”
“다만, 조금 잘못 생각하고 있는 듯하군.”
“아? 무슨?”
무슨 말인가 싶어 의아해하고 있자니, 심익한이 묘한 미소를 지으며 다른 주제를 꺼내 들었다.
“오면서 재미있는 소문을 들었네. 사제가 이 주변에서는 반로환동한 노고수라는 말이 돌더군!”
“엥, 그게 사형이 들었을 정도로 소문씩이 났다고요?”
연맹 본부에서는 올라온 보고의 진위 여부를 검토하느라 대응이 늦어지고 있었지만, 이미 사천지부가 있는 중강현과 성도를 포함한 인근 마을에서는 소종천의 명성이 알려지고 있었다.
악명 높은 마인들을 처단한 무림의 영웅이 등장했다며, 사천 땅 전역으로 소문이 점차 퍼지고 있는 마당.
‘지부에 틀어박혀서 잘 몰랐었는데, 나름대로 유명인이 되어가고 있었나? 그럼 조만간 그럴싸한 별호 하나 정도는 붙겠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심익한이 재차 말을 이어갔다.
“반로환동이란 소리를 들을 만큼 사제의 무위가 출중하다는 것이겠지. 여기 오기 전부터 생각하고 있기는 했지만, 덕분에 더욱 마음을 굳힐 수 있었다네. 새로 재건될 소림의 대표는 마땅히 사제가 되어야 한다고 말일세.”
“엑?”
생각하지도 않았던 이야기였기에 소종천은 당혹해하며 눈을 깜박거렸다.
“사문의 명성을 처음부터 다시 쌓아야 하는 상황이니, 그것이 가장 좋은 선택이라고 여겨지네.”
“아니, 저보고 소림 방장을 하라는 말입니까? 그건 너무 이상하잖아요! 그 자리에 걸맞은 연륜이나 지식 같은 건 그렇다 쳐도, 저 말고도 멀쩡히 사형이 계신데.”
“비록 소림의 재건을 위해 이런 모습을 취하긴 했으나, 파계승인 내가 어찌 방장의 자리를 자처하겠는가?”
심익한은 고개를 저으며 말을 이었다.
“사실은 이런 흉내를 내는 것조차 잘못된 일이긴 하네만…… 사문을 살려내고 적법한 절차를 거쳐 자네를 방장으로 추대하기 위함이니, 먼저 간 선사들께서도 그 정도는 눈감아 주실 걸세.”
“아무리 그래도 저는 좀 아닌 것 같데.”
“아닐세! 자네가 아니면 어느 누가 소림의 정통성을 잇는단 말인가!”
이미 큰 결심을 하고 온 심익한은 반론을 받지 않겠다는 것처럼 완고한 태도를 보였다.
‘소림 방장이라니. 나랑 너무 안 어울리는 자리인데.’
소종천은 난감하다는 듯이 머리를 긁적거렸다.
애초에 정통성을 따지면 소종천은 소림과는 코딱지만 한 인연도 없는 사이비다.
시스템이 적극적으로 밀어준 덕에 소림의 무공으로 이득을 봤을 뿐이지, 의무와 책임 따위를 짊어지고 싶은 마음은 있지도 않았다.
그런 사실을 명확하게 밝힐 수는 없는 노릇이고, 그냥 약간의 부채감을 느껴 간단한 도움 정도는 되어줘야겠다 싶은 마음일 뿐.
‘그래도 꼭 해달라고 한다면 못 할 건 없으려나?’
어차피 자신과 심익한 둘밖에 없는 문파로 시작하는 것이니, 무슨 감투를 쓰든 상관없지 않나 싶기는 하다.
“잠깐만. 근데 정식 절차라면 저도 법명을 받아서 입적해야 된다는 소리 아닙니까?”
“그야 당연하지 않은가. 비록 사정이 여의치 않아 사제가 제대로 된 입적식을 치르지 못하였다지만, 사문을 재건하기로 하였으니 이제라도 온당한 절차를 밟아야 하겠지.”
“……저도 사형처럼 그렇게 머리를 밀어야 한다는 거죠?”
“당연히 소림의 무승이란 자리에 알맞은 모습을 갖춰야 마땅하네. 방장의 지위에 있는 이라면 더욱 품행을 바르게 해야겠지.”
“방장 안 합니다. 전 그냥 속가제자 정도로 이름만 올려두세요.”
“……사제?”
상관없겠다 싶었던 생각은 곧바로 쏙 들어갔다.
‘대머리로 사느니 차라리 심 사형하고 연을 끊고 말지.’
소종천은 단호하게 말했다.
“방장은 사형이 맡아야 합니다. 제가 뿌리를 부정하진 않겠지만, 사문에 대해 사형과 같은 마음을 품고 있지는 않습니다.”
“허어…….”
심익한의 표정에 실망이 드러났다.
“계율을 어긴 나는 자격이 없네. 사문의 미래를 책임질 수 있는 이는 오직 사제뿐이야.”
계속 본인은 안 된다고 말하며 자신에게 굴레를 씌우려는 심익한의 모습에, 소종천은 그냥 막 나가기로 했다.
“아니, 남자가 여자랑 으쌰으쌰 할 수도 있지! 저는 뭐 숫총각인 줄 아십니까?”
“크흠! 정식으로 적을 올리기 전에 벌어진 속세의 일은 따지지 않아도 좋네.”
“상대가 려아였습니다.”
“커헉!?”
당신 손녀와 잤다고 당당하게 밝히는 소종천의 모습에, 심익한은 설득을 위해 떠올리던 말들을 잊고 입을 크게 벌렸다.
“솔직히 무인으로서의 명예나 문파의 명성 같은 건 그다지 관심 없고요. 저는 그냥 마교 토벌의 목표를 이루면 수왕채로 돌아가서 씨왕 자리 차지하고 살까 고민 중입니다.”
“아니, 자네…….”
“겪어보니까 중원에는 그 동네만 한 곳이 없어요. 사형도 그곳에서 행복한 삶을 보냈잖습니까! 신이 내린 몸매! 시들지 않는 젊음! 개방적인 미녀들!”
“허어…….”
심익한은 눈을 질끈 감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뽑기로 무림최강 132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