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tial Arts Gacha RAW novel - Chapter 133
57. 여로(2)
귀주성.
북쪽과 서쪽으로는 사천과 운남이, 동쪽과 남쪽으로는 호남과 광서가 자리하고 있는 내륙성이다.
성 면적의 거의 9할에 가까운 수치가 산지로 이루어져 있는 험준한 지형.
그중 서부지방은 고원지대로 평균 해발고도가 5리에 육박하고, 중부를 지나 동부로 갈수록 점점 낮아지지만 그래도 2리에 가까운 고도이다.
관도를 타고 사천성을 지나 귀주성에 막 들어설 무렵, 장자군이 소종천을 향해 말을 걸어왔다.
“종천. 고향이 귀주에 있다고 했지?”
“어? 음. 그랬지.”
말하지 않은 것 같은데 어떻게 알았나 싶어 의아했는데, 잘 생각해 보니 처음 학관에 떨어지고 적응하기 어려웠던 때에 이곳 출신이라 소개한 적이 있었다.
‘그걸 기억하고 있었나 보네. 첫날에 짧게 인사할 때 뱉은 말이었는데.’
다른 생도들에게 무시당하는 시기였음에도 배려심 많은 장자군은 소종천을 살갑게 대해줬는데, 원래 세심한 성격이라 그런지 그런 사소한 일도 기억하고 있는 모양이다.
다른 사람이라면 그냥 기억력이 좋네 하고 넘어갔겠지만, 여러모로 도움받은 구석이 있던 녀석이라 고맙게 느껴진다.
“귀주 출신이었소? 그건 또 몰랐구려. 그러고 보면 종천 친우는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전혀 안 하는 것 같소.”
“딱히 할 말이 없어서.”
“여기가 종천의 고향이구나.”
“아니, 여긴 북서부잖아. 고향은 한참 더 내려가서 남동부에 있는데.”
“아무튼, 같은 성이니까. 귀주는 어떤 곳이야?”
출신 이야기가 나오자 일행들이 관심을 가지고 계속 말을 붙여왔다.
“어떤 곳이냐라…….”
한사혜의 질문에 소종천은 오랜만에 자신 안에 덧붙여진 기억을 더듬어보았다.
이윽고 대답이 뱉어졌다.
“먹고 살기 빡빡한 거지 같은 동네지.”
“흠. 말하는 투를 보아하니 별로 좋은 기억이 없던 모양이오?”
“아니, 뭐…… 사실이 그러니까.”
성 전체가 산악지형인 귀주는 우기까지 길어, 3일 연속으로 맑은 날이 없을 정도로 흐린 날이 잦았다.
그렇기 때문에 일조량이 다른 지역과 비교해 한참 부족했고, 그렇지 않아도 부족한 농지에 농사마저 쉽지 않은 편.
사람이 살기 썩 좋은 환경이 아닌지라, 성도인 귀양을 제외하면 시급은커녕 현급의 거주지도 드문 성이었다.
“귀주를 가리켜 천지인삼무라고 하는 표현도 있지.”
“처음 듣네. 그게 뭔데?”
“하늘은 맑은 날이 3일도 없고, 땅은 평평한 곳이 3리도 없으며, 사람은 돈이 3푼도 없다.”
“……그게 뭐야.”
“굉장히 암울한 이야기로 들리는구려.”
“말했잖아, 거지 같은 동네라고.”
중원의 성 중에서 주민들이 빈곤하기로 순위를 매기자면, 가장 먼저 거론되어 일 위를 다툴 수 있는 땅이 이곳 귀주였다.
“그나마 우리 집은 중산층 정도는 되었고, 아버지가 하급이나마 연맹의 무사로 들어가면서 먹고살 걱정은 없었…….”
말을 이어가던 소종천은 순간 움찔하며 혀 놀림을 멈추었다.
기억을 더듬으며 자연스럽게 말하긴 했지만, 사실 이것은 자신이 아닌 이 몸의 원주인의 경험이다.
직접 겪은 일도 아닌데 자기 일처럼 떠들어대자니 조금 마음에 걸려, 소종천은 이내 입을 다물었다.
“왜 말을 하다 마시오?”
“건. 잠깐만.”
“음? 아.”
말없이 이동만 하는 것이 적적했던 남궁건이 소종천의 이야기를 재촉하려고 하자, 장자군이 그를 향해 눈치를 주었다.
소종천의 부친이 연맹의 임무를 수행하다 죽었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좋지 않은 기억이 떠올라 울적해졌나 싶어 남궁건을 제지한 것이었다.
굳이 그런 배려가 필요했던 것은 아니지만 일행들이 잠시 침묵을 유지했기에, 소종천은 자신만의 생각에 집중할 수 있었다.
‘원주인의 부친이 사망한 시기가 9세. 이후 홀로 계속 무공을 수련했고, 입관까지 6년에 달하는 시간 동안 모친 홀로 그 뒷바라지를 했다는 건데.’
남의 몸을 차지하고 살아가고 있지만, 사실 그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민한 적은 없었다.
이기적이라 말해도 어쩔 수 없다.
언제 죽어 나자빠져도 이상하지 않은 세계에서 적응하며 힘을 키우느라, 자잘한 문제들 따윈 신경 쓰지 않고 살았으니까.
‘그래도 이제는 좀 돌아볼 때도 되긴 했네. 그동안 생각하지 않았던 탓에 잊고 있긴 했다만, 일단 이 몸의 어머니는 살아계신다는 거니 신경 쓰기는 해야 하지 않나?’
솔직히 남의 일이라고 생각되긴 한다.
본인이 원해서 이 몸에 들어온 것도 아니고, 원래 세계로 돌아갈 수 있다면 두말하지 않고 당장 떠날 수 있다.
이쪽에서 쌓은 인연이 전혀 아쉽지 않은 건 아니지만, 삼십 년가량을 살아왔던 현대와 그쪽의 관계들을 버리고 선택할 정도는 아니지 않은가.
‘하지만 싫으나 좋으나 지금은 이 몸과 무림 세상에 묶여 있는 신세지.’
앞으로 몇 년이 될지 모르는 이곳의 삶을 살아가면서, 기억상 유일한 혈육을 무시하고 지내는 것은 도의적으로 문제가 되지 않나 싶다.
원주인이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알지 못하지만, 만약 이 몸을 돌려줄 수 있게 된다면 괜히 미안하진 않도록 가족 정도는 챙겨줘야 하지 않을까?
‘쭉 돌이켜보니 홀어머니가 고생해가며 무인이 되겠다는 아들내미를 키워다가 내보낸 모양인데, 잘 살고 계신지 확인 정도는 해야겠지?’
기억 상 모친은 배운 것 없는 산골 동네 아낙이라지만, 마인의 습격으로 학관이 문을 닫았다는 소식은 전해 들었을지도 모르겠다.
집 떠난 아들이 2년이 다 돼가도록 편지 하나 없는데 그런 소식을 듣게 되면, 의지할 구석 하나 없는 여인은 혼자 어떤 심정이 될 것인가.
‘생각해 보니 천하제일 고수가 돼서 마교 놈들을 척살하기 전에, 천하제일 불효자가 되겠는데? 이거 이참에 얼굴 비치긴 해야겠네.’
조금 고민하던 소종천은 고향인 삼도현에 들리기로 결정을 내렸다.
남의 어머니를 자신의 어머니인 것처럼 대해야 한다는 점이 굉장히 어색하긴 하지만, 그래도 원주인의 사정 따위 내 알 바 아니라며 외면하는 것도 찝찝하니 어쩔 수 없다.
“미안하지만 본가에 한 번 들렀다 가자. 여행길이 조금 더 길어지긴 할 텐데, 그래도 여기까지 와서 그냥 가기도 조금 그러네.”
“아? 그 정도야 문제없지. 아니, 문제가 있어도 가야지!”
“우리가 딱히 다른 일정이 있는 것도 아니니, 신경 쓰지 말고 원하는 대로 하시오.”
“종천의 집에 간다고? 어머니 혼자 계시는?”
고향에 들를 것이라 전하자 다들 가볍게 수긍했는데, 유독 한사혜가 안절부절못하며 당황해하는 태도를 보였다.
“왜? 뭐 문제 있냐?”
“준비가 필요해.”
“무슨 준비? 그냥 가면 되는데.”
“준비가 필요해!”
버럭 소리를 지르며 눈에 쌍심지를 켜는 모습에, 소종천은 당혹스러워하며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 그래. 가면서 성도에 들러야 하니, 뭐 필요한 게 있으면 준비하던가…….”
괜히 뭐라 더 말하면 한사혜의 눈이 돌아갈 것 같아서, 그냥 마음대로 하라 말하고 내버려 두었다.
일행들은 관도를 따라 쭉 내려가며 대방현이라는 마을에 들려 하루를 묵었다.
고향 땅이라고 해도 지도가 잘 발달된 시대도 아니기에, 기억을 뒤져봐야 귀주의 지리에 대해 자세히 떠오르는 것이 없다.
그렇기에 객잔의 점소이에게 수고비를 조금 주고 이런저런 대화를 나눈 소종천은, 일행들에게 돌아와 일정에 관한 이야기를 전했다.
“여기서 물자를 넉넉하게 채우고 이동해야겠네. 성도인 귀양까지 변변한 마을이 하나도 없는 모양이야.”
“보통 성도 근처에는 큰 도시들이 같이 있지 않아?”
“맞아. 그리고 여기가 바로 ‘근처’의 ‘큰’ 도시야.”
“……이곳이?”
장자군이 황당하다는 듯이 주위를 둘러보며 반문했다.
촌이라고 할 정도는 아니지만 도시라기에는 너무 초라한 마을.
게다가 듣자 하니 무공을 익히지 않은 일반인이라면, 대방현에서 성도까지 열흘가량은 걸어야 한다고 했다.
“그나마 가깝고 번화한 마을이 이 정도란 말이오?”
“내가 괜히 거지 같다고 했겠냐.”
머리를 긁적이며 대답하는 소종천의 모습에, 일행들은 농담이 아니었음을 깨닫고 다채로운 표정을 지었다.
“그럼 며칠은 노숙을 해야 한다는 말이네.”
“그렇지. 뭐 보시다시피 대단한 건 없는 동네지만, 단단히 준비해서 가자고.”
몇 달이나마 사천지부에서 몸담으며 받은 봉급이 있기에, 자금 사정은 아직 그럭저럭 넉넉한 편이다.
일행들은 마을 내에 몇 곳 있지도 않은 상점들을 돌아다니며, 그나마 품질이 좋은 편에 속하는 물자들을 골라 구입했다.
“점심이나 먹고 출발해 볼까.”
“며칠 동안 산속에서 생활해야 한다면 지금 든든하게 먹어둬야 하겠네.”
“그래야지. 아, 건이 너는 두부 반찬에 콩밥만 먹자.”
“갑자기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이오? 혹시 내가 평소에 과하게 식비를 썼소?”
“단백질이랑 비오틴 성분이 많은 음식을 먹어야 해.”
“비오……? 어떤 걸 말하는 건지 전혀 모르겠소만.”
“그런 게 있어. 다 널 위해서 하는 소리란다. 간식은 견과류 같은 거 많이 챙겨 먹고.”
“흠. 영문을 알 수가 없구려.”
소종천은 남궁건의 미래를 걱정하며 진심 어린 충고를 전했다.
탈모라는 게 막는다고 막아질지는 모르겠지만, 그간 쌓은 정이 있는데 내 머리가 아니라고 마냥 내버려 둘 수는 없지 않겠는가.
먹는 것을 통제당하는 상황은 받아들이기가 꽤나 불편한 일이다.
그래도 남궁건은 조금 불평을 늘어놓을 뿐, 소종천이 하는 말이라 거부하지 않고 따라주었다.
식사를 마치고 나서, 일행들은 대방현을 떠나 관도에 올랐다.
보통 관도라고 하면 평평하게 잘 닦여진 도로를 말하지만, 주변이 죄다 산이다 보니 길이 영 고르지가 못했다.
그래도 다들 높은 경지의 무인인지라, 산짐승 같은 움직임으로 평지 못지않은 속도를 내며 이동할 수 있었다.
한참을 뛰어가고 있자니 다들 입이 심심해졌는지, 몇 마디 대화가 오고 가기 시작했다.
“지나다니는 사람이 굉장히 적네.”
“넓은 땅덩어리에 비해 생활하는 사람이 적은 곳이니까. 이런 곳으로 다니는 여행자도 많지 않고, 상행도 다른 성들에 비하면 뜸한 편이지.”
“보이는 것이 전부 산이니, 어딘가에 산채가 들어서 있을지도 모르겠소.”
“산적 말이야? 글쎄. 이런 궁핍한 지역에 자리 잡아봐야 영업이 잘되지도 않을 텐데.”
먹고살기가 팍팍한 동네라 누군가는 나쁜 마음을 품을 수야 있긴 한데, 그렇다고 산적질로 돌아서 봐야 행인이 없어 어렵기는 마찬가지일 것 같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자니, 저 멀리서 무언가 움직이는 기척이 느껴졌다.
초절정 무인의 기감은 평범한 사람은 눈으로 보기도 힘든 거리의 기척도 놓치지 않고 잡아낸다.
‘음? 산짐승 같진 않은데. 사람 몇 명이 모여 있는 듯한…… 어라, 매복인가?’
설마 마교의 세력인가 싶어 당황했는데, 이내 느껴지는 기운으로 그쪽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굉장히 미약한 기운들이네. 아니, 일반인치고는 강한 편인가? 뭐야, 설마 진짜 산적이 있나?’
비탈진 언덕길의 옆으로, 몸을 숨기고 있는 것인지 아닌지 조금 헷갈리는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기척이 느껴지는 곳에 가까워졌기에 속도를 늦추자, 다른 일행들 역시 소종천을 따라 뒤에 멈춰 섰다.
“종천? 왜…… 앗.”
“아직 해가 떨어질 정도는 아닌데, 벌써…… 아하.”
같은 경지에 오른 남궁건은 이미 눈치를 챘는지 어쩔 것이냐는 눈빛을 보냈고, 나머지 두 사람도 곧 저쪽의 기척을 감지하며 멈춰선 이유를 알게 되었다.
“설마 말이 씨가 된 거야?”
“그건 어떨지 모르겠다만, 어쨌거나 진짜 산적이면 한번 구경 좀 해보자.”
소종천의 말에 장자군이 황당하다는 듯이 물었다.
“그걸 굳이 구경해야 해?”
“왜? 넌 산적 많이 봤냐? 난 아직 본 적 없는데.”
“녹림도라면 본 적이 있긴 하지만…….”
“음. 그러고 보니 사파세력에는 그런 산적집단도 있었지.”
녹림이건 그냥 도적 떼건, 말로야 많이 들었지만 실제로 마주한 적은 없다.
“헉! 누, 누구냐!”
워낙 빠른 속도로 다가와서 그런지 숨어 있는 이들은 일행들을 발견하지도 못했다.
그나마 잡담을 떠들어대는 소리가 들린 탓에 뒤늦게 일행들의 접근을 알아차린 사람들이, 부스럭거리며 어설픈 위장을 풀고 수풀 밖으로 뛰쳐나왔다.
소종천은 살짝 실망했다.
‘에이! 거, 만화 같은 거에서 본 것처럼 호랑이나 곰 가죽 뒤집어쓰고 몸통만 한 박도를 들거나 그러진 않네.’
어린이 만화로 인해 생긴 고정관념에 어울려주는 복장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다들 뭔가 하나씩 무기를 쥐어 든 꼬락서니가 산적이 맞긴 한 것으로 보였다.
아직 제대로 자세도 잡지 못하고 허둥지둥하는 사내들을 보며, 소종천은 피식 웃다가 소리 높여 외쳤다.
“손님 받으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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