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tial Arts Gacha RAW novel - Chapter 173
66. 세여파죽
하남 숭산 소실봉.
두 남녀가 소림사와 이어진 산길을 내려오고 있었다.
“정말 많이 변했네. 3년이라. 햇수로는 4년째고.”
“이제 실감이 되는 거야?”
“누워 있는 동안 시간의 흐름을 제대로 느끼지 못하고 있었으니까.”
40여 개월.
나이가 16세에서 20세로 바뀌어버린 시간이다.
타고난 미모로 원래도 제법 어른스러웠던 한사혜를 봤을 때는 외형의 차이점을 조금밖에 느끼지 못했는데, 확실히 다른 이들을 만나고 나니 지나간 세월이 체감이 되었다.
‘심 사형이나 모친께서 모두 무사해서 다행이네. 소림무문의 세력도 꽤 확장된 것 같고.’
산서성에서 남쪽으로.
경로 상 하남을 지나갈 수밖에 없기에, 소종천은 소림사에 들러 자신과 인연을 맺은 사람들을 만나볼 수 있었다.
한사혜에게 미리 소식을 듣긴 했지만, 시간이 그리 지났다 해서 조금은 걱정했었다.
송호빈이나 무당파의 인간들이, 소종천이 사라진 소림을 가만히 둘 리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
공식적으로 알려진 창암산의 전투에서 소종천은 마교의 간부들과 싸우며, 아군을 위해 마지막까지 퇴로를 지키다 사망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송호빈은 맹주직을 내려놓고 적당히 한직으로 물러났다.
각 문파의 정예들이 모인 선발대가 사실상 괴멸이나 마찬가지인 피해를 입었으니, 지휘관으로서의 책임을 지기로 한 것이다.
‘그 정도로 무능하면 목이 날아가도 할 말이 없을 텐데, 맹주직에서 물러났다 해도 여전히 수뇌부엔 발을 걸치고 있다는 점이 우습기 짝이 없네.’
그가 마지막에 저지른 행위에 대해선 아무에게도 알려지지 않았다.
세가를 장악하고 연맹의 일에 적극적으로 개입한 남궁건이, 그 건에 대해선 외부에 사실을 공표하지 않은 탓이다.
직전까지 소종천과의 마찰로 세가 기울었다 해도 무당파는 여전히 얕잡아 볼 수 없는 대형문파.
그런 치부를 밝히는 순간 서로의 말이 거짓이라 외치며 양 세력의 명예를 건 전면전이 벌어질 수밖에 없기에, 남궁건은 소종천이 정신을 차릴 때까지 진실을 묻어두고 있기로 했다.
대신 그렇기에 이쪽이 칼자루를 쥔 형색이 되어, 송호빈은 남궁건을 경계하느라 소림에까지 암수를 뻗지 못했다.
소종천이라는 억제력이 사라진 동안 무당파 측에서 적극적으로 시비를 걸어왔다면, 간신히 막 싹을 피운 소림으로썬 버틸 재간이 없었을 터다.
‘건이가 제법 수완 좋게 줄타기를 한 덕분에 다행히 더러운 꼴을 더 보는 것은 면했어. 이제 마음 편히 송호빈을 족치기만 하면 되는 거네.’
원한을 갚을 생각을 하니 절로 살심이 일며 주변의 공기가 무거워진다.
“으윽!”
“아이고!”
“……종천.”
근처를 오가던 다른 행인들이 원인을 알 수 없는 두려움에 몸이 굳어지며 넘어지자, 한사혜가 손을 잡으며 소종천을 말렸다.
“아, 또 실수를. 조금만 집중력이 흩어져도 엄한 사람들이 피해를 보네. 주의해야 하는데.”
코끼리가 아주 살짝 발을 들었다가 놓아도 개미에겐 지진으로 느껴질 수 있다.
초절정의 경지를 뛰어넘은 소종천은 단순히 감정 기복만으로 주변 기운의 흐름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치기에, 일반인들에겐 걸어 다니는 폭탄과 다를 바가 없었다.
소종천의 몸에서 풍겨 나오던 기세가 갈무리 되는 것을 본 한사혜는, 잠시 붙잡은 손을 만지작거리다 입을 열었다.
“이제 호남으로 쭉 움직일 거야?”
연맹 본부가 위치한 호남.
맹주직에서 은퇴했지만 여전히 본부 소속으로 남아 있는 송호빈을 치려면, 그곳까지 걸음을 하긴 해야 한다.
한사혜의 질문에 소종천은 잠깐 동안 생각에 잠겨 있다가 고개를 저었다.
“음, 아니. 일단 호북에서 한번 멈춰야지.”
“호북? 무당파?”
“응.”
소종천은 송호빈 개인에게 복수를 하고 끝날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연맹의 다른 문파들은 소종천이 모습을 드러내고 복수의 이유를 밝히면 그를 방해하지 못할 것이다.
전임 맹주의 죄가 밝혀졌음에도 그를 두둔하며 소종천을 막아설 이유나 명분이 있는 세력은 없을 테니까.
그렇지만 무당파에선 승복하지 않고 난리를 칠지도 모른다.
“이참에 무당파까지 같이 묻어버릴 거야.”
이미 한번 뒤집어 놓은 전적이 있는 무당파는 두렵진 않지만, 혹시나 자신의 연고가 모여 있는 소림에 위해를 가하려 들지도 모른다.
그러니 아예 뒤탈이 생기지 않도록, 지나가는 길에 무당파를 다시 짓밟고 갈 생각이었다.
‘예전에는 템빨에 기대야 할 수 있었던 일이지만, 이제는 본신 무력만으로도 충분해.’
물론 복수의 대상을 송호빈 개인이 아니라 무당파 전체로 놓는다면, 연맹의 다른 문파들에게서 과하다며 말이 나올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그런 문제는 신경을 끄기로 했다.
막강한 힘을 손에 쥐고 있는데, 남의 눈치를 볼 이유가 없다.
그렇게 마음먹으며 움직이기로 한 소종천은, 한사혜를 향해 고개를 돌리며 말을 건넸다.
“너는 혹시 모르니까 여기에 남아 있는 게 좋을 거 같은데.”
“싫어.”
“그러지 말고. 괜히 나 따라 무당파에 갔다가 그쪽에서 너를 노리면 곤란하니까. 이참에 제대로 된 치료를 받아.”
한사혜도 상당한 고수이기는 하지만, 무당파의 무인들에게 합공을 당하면 위험에 처할 수 있다.
게다가 지금은 손의 부상 때문에 무위를 완전하게 내보일 수 없는 상태.
자신이 신경 써준다면 최악의 상황까지 갈 일은 없겠지만, 괜히 작은 상처라도 더 생기는 모습을 보고 싶진 않았다.
‘내가 누워 있는 동안 의원을 여럿 찾았다면서 정작 자기 손은 치료하지도 않고…….’
손상된 기혈을 바로잡는 것은 최소한 몇 달은 두고 치료에 들어가야 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그리고 치료 중에 함부로 힘을 썼다간 상처가 더 악화되어, 다시는 고칠 수 없는 상태가 될 수도 있다.
한사혜는 혹여나 본인이 치료를 받는 동안 소종천에게 문제가 생길까 싶어, 기회가 있었음에도 제때 치료를 받지 않고 그의 곁을 지켰다.
괜히 꼬리를 잡힐 수도 있다고 판단한 남궁건이 최대한 접촉을 자제했기에, 거의 홀로 소종천의 곁에 머물러야 했던 한사혜로선 미련해 보이면서도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네가 조금이라도 다치면 내 마음이 많이 아플 거야.”
“……피! 웬일로 달달한 말을 해주네. 그래도 싫어.”
얼굴에 홍조를 띤 한사혜는, 수줍어하면서도 확고하게 거절의 의사를 밝혔다.
“종천이 정신을 잃고 있던 지난 시간 동안, 나 역시도 제정신이 아니었어. 매번 종천이 잘못될까 불안해서 미쳐버릴 것 같았단 말이야.”
한사혜는 그간 소종천을 돌보며 생긴 일종의 정신적인 장애를 고백했다.
식량이나 기타 생필품들을 구하기 위해 잠시 자리를 비우는 동안에도, 종천이 눈앞에 보이지 않으면 찾아오는 극심한 불안증세.
머릿속이 하얘지며 소종천에게 돌아가 무사함을 확인해야 한다는 생각 외에는 아무것도 떠올릴 수 없게 되어버린다.
그녀는 소종천과 떨어진 상태로 견딜 자신이 없었다.
‘끄응. 공황발작 같은 걸 겪는다는 건가.’
원래도 맹신과 연정에 이어 집착이라는 감정 관계가 표시되었던 한사혜다.
상태가 호전되지 않고 누워만 있는 소종천을 언제 잃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정신에 좋지 않은 영향을 끼쳤어도 이상할 것은 없다.
직접 보지 못했으니 정확히 알 순 없지만, 쭉 설명을 들어보니 자신과 오래 떨어져 있으면 꽤 심각한 상태가 된다는 모양.
이런 일로 거짓말을 하진 않을 것 같으니, 마냥 걱정된다고 한사혜를 두고 갈 수는 없게 되었다.
“할 수 없네. 불안 증상이라, 그건 또 어떻게 고쳐야 하나?”
현실이라면 약물치료와 인지행동치료를 병행하는 것으로 알고 있지만, 이런 세계에서 정신치료 분야에 정통한 전문가가 있긴 하려나 싶다.
‘현대와는 다른 신비한 기술들이 존재하는 곳이니 마냥 안 될 거라 단정 지을 순 없지만.’
그런 생각을 하고 있자니, 한사혜가 붙잡은 손을 끌어당기며 은근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종천의 일부를 내게 주면, 그래도 조금 길게 버틸 수 있기는 해.”
“……뭐라?”
갑자기 무슨 정신 나간 소리인가 싶어, 소종천은 눈을 크게 뜨고 한사혜와 시선을 마주쳤다.
“전에 머리를 정돈해 주면서 머리카락 일부를 주머니에 보관한 적이 있었는데, 그나마 그때는 다른 날보다 오래 버텼어. 그다음부터는 계속 머리카락을 잘라가서 그런지 이제는 효과가 점점 줄어들긴 했지만.”
이어서 ‘머리카락 말고 다른 것이라면 더 버틸 수 있지 않을까?’라고 말하며 붙잡은 손에 깍지를 껴오는 한사혜를 보며, 소종천은 뭔가 두려운 기분과 함께 약간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야! 아무리 그래도…… 설마 손이라도 잘라 달라는 건 아니지?”
대답 여하에 따라 손을 뿌리치고 안전거리를 둬야 할지도 모른다.
표정이 어색해진 소종천에게, 한사혜는 눈을 살짝 찡긋거리며 대답했다.
“무슨 바보 같은 소리야? 내가 종천이 다치는 걸 원할 리가 없잖아.”
“그렇지? 그건 다행인데…… 머리카락 정도 외에 내 일부라고 할 수 있는 게 없지 않나.”
소종천의 말에 한사혜의 시선이 아래로 내려갔다.
그 눈길을 따라 고개를 낮춘 소종천은 무언가를 떠올리고 크게 당황했다.
“야, 그, 에이.”
“아기 줘.”
“켁!”
직설적인 발언에 소종천은 말문이 막혔다.
“책임진다고 했잖아. 부인으로 맞아주겠다는 거 아니었어?”
“그…… 그런 의미가 분명 없던 것은, 아니지 않은 것도 아니올시다만…….”
“아이가 생기면 괜찮아질 거라는 확신이 들어.”
“야! 아이를 갖는 게 그리 막 결정할 일이 아니거든?”
“뭐가 문제인데? 그럼 혼인은 해도 아이는 갖지 않을 생각이었어? 아니면 책임진다던 소리는 그냥 해본 말이었던 거야?”
“으음, 그건 아니고…….”
목소리를 높이는 한사혜를 보며 소종천은 어깨를 움츠렸다.
아무리 제멋대로 행동하고 욕망을 숨기지 않는 소종천이지만, 은혜를 모르는 인간은 아니다.
그간 자신을 돌봐준 한사혜에게 약한 모습을 보일 수밖에 없었다.
“아니…… 어디서 듣기로는 아이가 뭐 만들자고 해서 바로바로 생기는 것도 아니라던데.”
쩔쩔매며 머리를 긁적이는 소종천을 보며, 한사혜가 고개를 끄덕였다.
“응. 생각처럼 쉽게 안 되더라. 그래도 이제 종천이 깨어났으니, 충분히 시도할 수 있으니까.”
“……예? 뭐라고?”
뭔가 이상한 말을 들은 것 같다.
소종천이 멍하니 바라보자, 잠시 멈칫거린 한사혜가 슬쩍 눈을 피하며 발을 움직였다.
“어서 가자. 갈 길이 머네.”
“야, 잠깐만. 아니지? 나 계속 혼수상태였…… 에이, 설마 그런 짓을?”
머릿속에 떠오르는 상상에 경악을 금치 못하며, 소종천은 한사혜에게 답을 요구했다.
‘집착이 심해도 설마 그런 짓을 하진 않았겠지? 어쩌면 깨어났을 때 애 아빠가 되어 있었을지도 모를 그런…… 하하, 아닐 거야.’
한사혜는 침묵을 유지했다.
‘……그러고 보니 얘도 조금 정상은 아닌 정신 구조를 가진 녀석이었지. 맙소사. 설마 나도 모르는 사이에 당해 버린……?’
머리가 어지러워진 소종천은 그녀에게 두려움을 느끼며 질문을 그만두기로 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미칠 듯이 궁금했지만, 반대로 들으면 안 될 것 같다는 기분도 함께 느꼈기 때문이었다.
* * *
호북성 무당산.
무당파의 입구에 걸려 있던 거대한 현판이, 날아온 무언가에 의해 산산이 조각나며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어헉!”
“무, 무슨 일인가!”
입구 주변에서 본산을 찾아온 객들을 맞이하던 무당파의 몇몇 무인들이, 대경실색하며 달려 나와 주위를 살폈다.
원인은 금방 찾을 수 있었다.
“오늘부로 무당파는 봉문을 선언해야 할 거야.”
“뭣! 이놈! 누군데 감히 그따위 소리를!”
“자, 잠깐. 저자는…….”
소종천을 알아본 누군가가 창백한 표정으로 안쪽을 향해 뛰어갔다.
잠시 뒤.
웅성거리는 소음과 함께 다수의 무인들이 몰려나왔다.
느긋한 태도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소종천이 재차 말을 꺼냈다.
“아무도 죽이진 않도록 하지.”
‘죽는 게 낫다고 생각하게 될지도 모르지만’이라고 덧붙이며, 소종천은 무당파의 무인들을 향해 걸음을 내디뎠다.
뽑기로 무림최강 174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