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tial Arts Gacha RAW novel - Chapter 23
15. 야수(夜獸)와 검룡(劍龍)
“그렇다면 일단은 권법을 계속 정진해 볼까 합니다.”
소종천이 의사를 밝히자 곽진은 수염을 쓰다듬으며 입을 열었다.
“그래. 그렇게 정하였다면 되었느니라. 하면 어디 한번 소림오권을 어느 정도나 익혔는지 보여주겠느냐?”
소림오권은 소림의 대표적인 권공중 하나인 만큼, 곽진의 친우인 효원선사 역시 자주 선보였던 무공이기도 했다.
수많은 실전을 거치며 그와 자주 합을 맞췄던 곽진은, 직접 소림오권을 익히진 않았어도 완성된 소림오권이란 어떤 것인지 숱하게 겪어본 경험을 가지고 있었다.
“알겠습니다.”
곽진의 요청에 소종천은 자세를 취하고 소림오권의 다섯 형을 하나씩 풀어내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곽진은 이내 작게 감탄을 터뜨렸다.
“훌륭하구나.”
당연하게도 아직 성취는 낮았다.
하지만 기본기만큼은 완벽하게 느껴질 정도로 잘 잡혀 있었다.
스승 없이 홀로 익혔다고는 믿기 어려운 군더더기 하나 없는 모습.
‘소림의 무공이 천부적으로 몸에 딱 들어맞는 모양이로구나! 역시 이어질 만한 이에게 인연이 이어진 것이겠지. 이 아이는 천상 소림권사의 길이 어울리는 인재인 게야.’
사실은 뽑기를 통해 몸과 머리에 새겨진 무공이기에, 교범에서 그대로 뽑아낸 듯 정확한 동작을 선보이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런 사실을 알 리 없는 곽진으로선, 소종천의 모습이 마치 친우인 효원이 다시 살아 돌아오기라도 한 것처럼 느껴졌다.
“좋구나. 좋아! 형에 관해서는 내가 손을 댈 부분이 거의 없어 보이는구나. 실전적인 경험을 조금 더 갖춰 응용에 대한 숙련도만 가미된다면, 금방 성취를 높일 수 있을 것으로 여겨지느니.”
곽진은 검을 들고 소종천의 앞에 섰다.
“기본은 이미 충분하니, 필요한 것은 네 수준에서 반수 정도 앞선 이와 손을 섞는 경험이겠구나. 내 적당히 조절하여 상대해 줄 터이니 어울려 보도록 하자꾸나.”
비슷한 경지에서 조금 더 강한 상대를 상정하여 실전에 가까운 대련방식으로 지도하겠다는 의미.
곽진의 말에 소종천은 문득 머릿속에 번뜩이는 생각이 있어 입을 열었다.
“교관님. 남궁세가의 검은 어떻습니까?”
“남궁세가? 갑자기 그건 왜?”
“그게…… 어쩌다 보니 남궁건이라는 친구와 조만간 비무를 치를 예정이라서 말입니다.”
단순히 친선 비무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을 뿐이니 모용설호 때와는 상황이 조금 다르지만, 기왕 가르침을 받을 거면 지난번처럼 맞춤형 지도를 받고자 하는 생각에 말을 꺼냈다.
“허어. 건이 그 아이와?”
소종천의 말에 곽진은 눈썹을 치켜세우며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남궁건.
검법 강의를 듣는 생도들은 전부 기억하고 있지만, 그중에서도 남궁건은 특별하기에 금방 머릿속에 떠오른다.
오랜 세월 명성을 쌓아온 여러 명문세가 중에서도, 가장 높은 자리에 당당히 이름을 올리고 있는 남궁세가의 자손.
어느 시대건 남궁세가는 대대로 뛰어난 검객을 배출해 왔으며, 간간이 검성이나 검제, 검왕의 칭호를 받는 천하에서 손꼽히는 고수가 탄생하는 검가(劍家) 중의 검가다.
‘남궁건 그 아이는 굉장한 무재를 지녔지. 분명 다음 대의 남궁세가 최고수가 될 아이야.’
잠룡학관에 입관하기도 전에 이미 소검룡이라는 별호를 얻은 것만 봐도, 그 자질과 실력을 알만했다.
곽진은 이제 겨우 한 달간 수업을 진행했을 뿐이지만, 그 짧은 사이 남궁건이 보여준 남다른 자질에 몇 번이나 감탄을 하고는 했다.
‘듣자 하니 아무 배경도 없는 첩실의 자식이라 했던가?
그런 신분만 아니었어도 분명 소가주의 지위에서 후계 수업을 받고 있었을 터인데.’
연맹의 입장에서는 보기 드문 인재가 들어왔으니 감사할 따름이지만, 그만한 재능을 가진 아이가 제 가문의 지원과 혜택을 누리지 못하고 밀려났다는 것을 생각하면 안타깝게 여겨지기도 했다.
‘종천 이 아이도 그렇고. 이번 연도에 입관한 생도들은 특별한 재능을 지닌 이들이 눈에 띄는구나.’
곽진은 잠시 고민에 빠졌다.
이제야 소림오권이라는 제대로 된 무공을 수련하고 있는 소종천과 달리, 남궁건은 불이익을 받긴 했어도 가문의 직계에 어울리는 교육과정을 거친 무인.
실력의 완성도에서 아무래도 차이가 날 수밖에 없다.
그것은 단기간에 극복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녀석. 남궁세가의 검법을 상대하는 요령을 알고 싶다는 말이렷다.”
그러나 정식 제자는 아니지만 이렇게 따로 가르침을 주는 아이가, 비무에서 허망하게 당할 것이라 생각하면 마음이 편치 않다.
해서 결국 소종천의 수준에서 남궁건의 검을 상대하는 방법에 대해 고민하며, 지난번처럼 세세하게 가르침을 일러주기로 했다.
“남궁세가의 검법은 대개 빠르면서도 웅장하다. 미련스러울 정도로 올곧기만 하나, 굳이 변칙적인 움직임이 필요 없을 만큼 검식 하나하나가 강맹하기 그지없지. 아마 상대해 보면 무슨 말인지 알 수 있을 게다.”
단순하고 우직하게 느껴지나 겉보기와 달리 고절한 무리가 담겨 있으니, 정공으로나 변칙으로나 상대하기 어려운 무공.
그것이 대남궁세가라 불리는 검가의 무공이다.
곽진의 설명을 들으며 소종천은 몸에 남아 있던 기억들을 더듬어보았다.
‘남궁세가…… 확실히 유명하기는 유명한 모양인데.’
촌구석의 허접한 무가 출신이고 아버지마저 일찍 여읜 탓에, 소종천은 무림의 정세에 상당히 어두운 편이다.
천마의 난이라고도 불리는 대혈겁 이후의 수십 년 세월.
수많은 문파가 몰락하고 구파일방이니 오대세가니 하는 말도 사라졌지만, 남궁세가에 관한 이야기는 아무것도 모르는 소종천의 기억에도 남아 있었다.
현 무림에서 정파의 단일 세력으로는 가장 강성한 곳이라 평가되는 곳.
‘그런 집안 출신이니 당연히 남궁건도 굉장히 강하겠지. 모용설호랑 비교하면 어떠려나?’
재능을 확인하고 비교해 보고 싶었는데, 대기시간에 걸려 보지 못했던 것이 조금 아쉽긴 하다.
‘뭐 감정이야 내일이라도 할 수 있긴 하니.’
모용설호처럼 마음에 들지 않는 상대도 아니고, 반드시 이겨야 하는 비무도 아니니 큰일을 앞뒀다는 느낌은 없다.
친분을 쌓기 위한 교류의 의미로 가지는 비무.
딱히 승패를 가릴 필요 없이 적당히 손을 섞다가 끝내면 되긴 했다.
‘중요한 건 새로 추가되었다는 감정 상태라는 건데. 호감이라는 단계가 되는 것이 어느 정도의 난이도인지 모르겠네. 단어만 봐서는 적당히 어울려주기만 하면 될 것 같으면서도…….’
누군가의 호감을 산다는 것은 대상에 따라 매우 쉬운 일일 수도, 반대로 굉장히 어려운 일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싶다.
비무를 하고 싶어 하는 것 같아 이야기를 꺼내두긴 했지만, 비무 후에도 임무 달성에 필요한 상태가 되지 않는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차라리 싸워라, 이겨라 같은 단순한 목표가 낫지. 이런 임무는 머리가 아프네.’
이런저런 잡생각을 하다 보니 어느덧 지도를 마칠 시간대가 되었다.
“내일은 대련 위주로 진행을 하도록 하자꾸나. 내 너의 수준에서 남궁세가의 검법을 파고들 여지가 있을지 한번 모색해 보도록 하마.”
“옙! 감사합니다.”
그렇게 곽진의 거처를 떠나 숙소로 돌아오던 길.
소종천은 숙소 근방에서 대면하기 껄끄러운 인물과 마주했다.
‘이 동네는 대기오염이 없어서 그런지 달이 참 밝…… 엇?’
사물의 구별이 점점 어려워지는 어두워가는 시간.
내공을 지닌 몸이라 그런지 달빛만으로도 사람의 얼굴을 구별하는 데 지장이 없었다.
감정이라고는 느껴지지 않는 딱딱하게 굳은 얼굴.
원래도 방에서 없는 사람처럼 여기고 지냈던 이.
처음 나눈 대화에서 말실수를 한 이후로 괜히 마주하기가 더 껄끄러워진 한사혜였다.
그날 이후로 말 한마디 들어본 적 없었고 따로 할 말이 있지도 않기에, 소종천은 그냥 조용히 못 본 척 시선을 돌리며 한사혜를 지나쳐갔다.
“멈춰.”
“……응?”
설마 자신을 불러 세울 줄 몰랐던 소종천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멈춰 섰다.
‘설마 지난번의 일로 이제 와서 기분 나쁘다고 뭐라 하는 건 아니겠지?’
어색함이 가득 담긴 얼굴로 시선을 마주했다.
“어…… 뭐 할 말이라도?”
“…….”
대답은 없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표정과 차가운 눈빛으로, 한사혜는 말없이 소종천을 노려보기만 했다.
‘대체 뭐 하자는 거야?’
정적을 견디다 못한 소종천이 그냥 무시하고 지나가도 괜찮을지 고민하게 될 때쯤.
간신히 한사혜의 입이 열렸다.
“싸우는 걸 봤어.”
“잉? 아, 모용설호? 비무를 했던 걸 말하는 거지?”
“그래. 미친개처럼 싸우던 거 말이야.”
“……거, 멀쩡한 사람한테 미친개라니.”
투덜거리는 소종천을 보며 한사혜는 다시 입을 다물었다.
겨우 말문을 트나 싶었던 소종천은 아무리 기다려도 다른 말이 나오지 않자, 답답함에 인상을 찌푸렸다.
‘아니, 뭔데? 시비를 걸자고 한 말은 아닌 것 같은데, 영문을 모르겠네.’
숨 막히는 분위기에 더 할 말 없으면 가보겠다는 말을 꺼내려던 찰나.
섬찟.
감각이 경고를 보내왔다.
“으익!?”
무슨 일인지 생각하기에 앞서 반사적으로 몸이 반응했다.
허리를 뒤로 확 젖히며 눈을 굴린다.
방금까지 목이 있던 자리를 할퀴고 지나가는 손가락들이 눈에 들어왔다.
땅에 손을 짚고 공중제비를 돌아 착지한 소종천은 목에 핏대를 세우며 외쳤다.
“무슨 짓이야!”
예고 없이 갑작스레 기습공격을 한 한사혜가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나랑 싸워.”
“갑자기 왜!?”
“넌 제대로 해줄 것 같으니까.”
“뭔 말이야!”
의미를 알 수 없는 말을 내뱉은 한사혜는 더 대답하지 않고 소종천을 향해 달려들었다.
맹금의 발톱과 같은 모양새로 손가락을 구부린 한사혜가, 손에 걸리는 모든 것을 잡아 뜯을 듯이 공격을 가해왔다.
‘이런 미친!’
더 이상 대화를 이어갈 상황이 아니기에, 소종천 역시 자세를 잡으며 주먹을 내밀었다.
조법(爪法).
익히는 이가 흔하진 않은 비주류의 무공이다.
할퀴고, 걸고, 비틀고, 잡아 뜯는다.
조법은 권법과 비슷한 동작인가 싶으면서도 끝에 가서 궤를 달리하는 움직임을 보였다.
단순히 공격의 위력만을 놓고 보면 권법의 타격에 미치지 못하지만, 권과는 달리 손목의 관절을 폭넓게 활용하는 조법은 권법보다 훨씬 더 변화무쌍한 움직임을 선보인다.
하수들끼리의 싸움에선 조법을 써봐야 마구잡이식의 주먹질보다 나은 점이 별로 없겠지만, 어느 정도 수련을 거친 이의 제대로 된 조법은 상대하기가 까다롭다.
아무리 다른 무공보다 위력이 약하다 해도, 손톱 끝에 닿는 상대의 피부와 근육을 상하게 만들기는 충분하기 때문.
조법을 처음 겪어보는 소종천은 그 다채롭고 변화가 가득한 공격에 굉장히 애를 먹었다.
“아오! 씨!”
부딪힌다 싶으면 손목을 비틀어 다른 쪽을 할퀴고 지나가고, 튕겨냈다 싶으면 수갑의 돌출된 금속부에 손끝을 걸어 달라붙는다.
고작 1분여 동안 수를 교환했을 뿐인데, 어느새 입고 있던 무복이 엉망으로 찢겼다.
양팔의 소매는 전부 뜯겨 나가 보이지도 않는다.
‘내 옷! 이거 다 망가지면 자비로 사야 하는데!’
단에서 지급하는 무복이 몇 벌 있다지만 무한정 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미 모용설호와의 비무에서 옷 한 벌을 걸레로 만든 소종천은, 며칠 만에 또 예비 무복을 상하게 되자 분노를 금할 수 없었다.
“야 이년아! 왜 나한테 지랄이야!?”
지갑이 가벼운 빈곤한 남자의 노여움을 담아 주먹을 내질렀다.
마침 한사혜가 공격을 가하던 중이었지만, 눈이 돌아간 소종천은 피하는 대신 몸으로 받아내며 일격을 교환했다.
찌익!
퍽!
가슴팍을 할퀴고 지나간 공격에 소종천의 옷이 더욱 찢어지며 길게 상처가 생긴다.
대신 한사혜 역시 주먹에 얼굴을 가격당해, 고개가 돌아간 채 뒤로 물러났다.
‘얕았다.’
주먹이 닿는 순간 한사혜가 목을 꺾으며 몸을 뺀 탓에, 공격이 제대로 들어가진 않았다.
제 위력을 내지 못한 공격에 반사적으로 아쉬움을 느끼던 소종천은, 문득 자신이 열다섯짜리 여자애의 얼굴에 주먹질을 했다는 사실을 깨닫고 살짝 몸이 굳었다.
‘그…… 아니, 그래도 이건 정당방위니까.’
무공을 배운 무인들끼리의 다툼에서 성별을 신경 쓰는 것도 우스운 일이다.
상대가 여자라고 그냥 당하고만 있을 수는 없지 않겠는가?
라고 생각하며 마음 한편에 생긴 무거움을 달래고 있는데, 한사혜가 돌아간 고개를 바로 하며 이쪽을 바라본다.
“그래. 이런 게 필요했어.”
“……뭐?”
시선이 마주쳤다.
권격을 완전히 흘리진 못했는지, 살짝 찢어진 입술에 핏방울이 맺혀 있는 것이 보였다.
눈에 띄는 것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웃어?’
소종천은 언제나 무표정하기만 하던 한사혜의 얼굴에서, 처음으로 미소 비슷한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뽑기로 무림최강 24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