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tial Arts Gacha RAW novel - Chapter 74
38. 수왕채(4)
법명 백거, 속명은 심익한.
소림의 기대를 한 몸에 받는 기재이자 당시 소림방장의 장문제자들 중 하나였던 그는, 이십 대의 나이에 천마의 난을 겪은 마지막 무승이기도 했다.
“사문의 어른들께서 그렇게 피를 흘리는 동안, 나는 소림의 미래라는 명목에 후방으로 밀려나 목숨을 이어갈 수 있었다네.”
천마가 조용히 자취를 감추고, 살아남은 소림의 생존자들은 다시 문파를 재건하려 했다.
그러나 몇 년이 지나 그가 삼십 대에 들어설 때까지 백방으로 노력을 했음에도, 소림은 기존의 모습을 되찾을 수 없었다.
학승들과 민간 불제자들의 도움으로 본산의 터를 살려내긴 했으나, 무문으로서의 소림은 이미 재건이 매우 어려운 상태.
너무 많은 힘을 잃어버린 데다 타문파들의 견제까지 받았던 소림무문은 결국 그대로 무너져야 했다.
그리고 힘이 부족한 생존자들은 외부의 핍박을 견디지 못하고 소림을 떠나야만 했다.
버티고 남아 있어 봐야 애꿎은 학승들에게까지 피해가 갈 상황이었기 때문.
“연맹의…… 특히 정파의 동료들이라 여겼던 자들의 행태에 크게 실망한 우리는 결국 중원을 벗어나기로 했지.”
살아남은 이들은 서쪽으로 향했다.
천축. 선종 불교의 시조인 달마대사의 고향.
현대의 인도에 해당하는 불가의 성지에서, 본토의 승려들과 교류하며 여생을 보내기로 정한 것이다.
천마가 자취를 감췄다지만 아직 마교와의 분쟁으로 소란스러운 시기였다.
그렇기에 중원의 사천에서 서장으로, 그리고 다시 천축을 향해 이어지는 일반적인 길은 사용하기가 어려웠다.
서장에는 티베트 불교의 총본산인 포달랍궁이 존재하며 소림과도 주기적으로 교류하고 있었지만, 마교의 본거지인 신강과도 가깝게 닿아 있기에 당시엔 최전선의 전쟁터라고 할 수 있는 지역이었기 때문.
“그래서 우리는 운남에서 이곳 남만의 경로를 통해 천축으로 향하려 했다네. 그 와중에 수왕족의 도움을 받아야 했고, 어쩌다 보니 나는 이곳을 떠날 수 없게 되어버린 걸세.”
“왜요?”
“……더 이상 법명을 쓸 수 없는 몸이 되었기 때문이네.”
“아.”
아직은 한창이라 할 만한 삼십 대의 나이.
큰 시련을 겪고 마음에 상처만 남은 채 고향을 떠난 그는, 평생을 멀리해 왔던 유혹을 견디지 못하고 넘어가게 된 것이었다.
‘했네. 했어.’
소종천은 혀를 차며 고개를 돌렸다.
할아버지와 외지인과의 이야기가 신기한지, 관심을 보이며 경청하고 있는 홍려아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이국의 미녀와 눈이 맞아서 승려의 계를 어기고 땡중이 되었단 소리였군.’
중원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육체미를 훤히 드러내고 생활하는 수왕족의 여인들.
그 매력이 소림의 승려마저 파계시킬 정도니 가히 악마적이라 할 수 있었다.
파계승이 된 심익한은 기존 소림의 엄한 규율대로라면, 더 이상 소림의 무공을 쓸 수 없도록 단전을 폐하는 처벌을 받았어야 했다.
-이미 소림을 잃었는데 소림의 법을 세워서 무엇 할꼬.
-너는 이곳에 남거라.
-건강하시게.
하지만 소림의 이름을 살리지 못한 죄책감에 시달리고 있던 무승들은, 그에게 달리 죄를 묻지 않고 작별인사만을 남긴 채 떠나갔다.
‘결국, 정상적으로 소림의 후계를 자처하려면 규율에 따라 머리를 밀어야 하는 건 그대로란 소리네. 에이…….’
이야기를 듣던 소종천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혹시나 법도 따위를 따지지 않아도 된다면 소림의 유지를 이어줄까 하는 생각도 했었는데, 아무래도 그른 모양이다.
“그래서 자네는 대체 어느 분의 제자인 겐가? 중원에 남으신 사문의 존장께서 계실 줄은 몰랐거늘.”
“그게, 성함을 알려주시지 않아 저도 모릅니다.”
진짜 소림의 인물을 마주했으니 듣기만 하고 어물쩍 넘어갈 수는 없기에, 소종천은 적당히 구라가 섞인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놓아야 했다.
몇 차례 이야기를 주고받던 심익한은 수염을 쓰다듬으며 소종천에게 질문을 건넸다.
“한데 어찌 계인은 받지 않았는가? 설마 법명도 정하지 못한 겐가? 자네의 경지를 보아하니 가르침을 주신 그분도 보통 고수가 아니셨을 테니, 분명 높은 배분을 가지신 분이실 터인데…….”
무공의 일부만 배울 수 있는 속가제자라면 상관없겠지만, 신공까지 전수받은 진산제자라면 규율에 따라 머리를 밀고 계인을 찍어야 정상이다.
나이 든 고수라면 대체로 꼬장꼬장한 성격이 되는 것은 어쩔 수 없으니, 그런 부분에 대해서 제대로 처리하지 않고 넘어갔을 리 없다고 여겨 나오게 된 질문.
“세상이 이러니 어쩔 수 없었던 거죠. 소림의 무맥이 이어지고 있다는 것을 숨겨야 했으니까요.”
“으음…… 그것도 그러하겠군.”
승려의 티를 낼 수 없었다고 적당히 둘러대자, 타문파들의 외압을 경험했었던 심익한은 납득하고 넘어갔다.
“그래서 자네는 앞으로 어쩔 셈인가?”
오랜 이야기 끝에 현재 소림의 상황이 자신이 떠나기 전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을 알게 된 심익한은, 복잡한 심경이 담긴 눈빛으로 소종천을 보며 질문을 던졌다.
“아직은 더 힘을 키워야 할 때라고 봅니다. 다만, 먹고사는 데 돈이 필요하니 이렇게 일을 하고 있는 거구요.”
“자네를 가르치신 분께서는 어찌 지내시는가?”
“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십니다.”
“허어! 그런가. 아미타불…….”
뽑기 시스템을 말함이니 거짓말은 아니긴 하다.
소종천의 사부가 나이든 노승일 것이라 여겼던 심익한은, 그 말을 천수가 다해 돌아가셨단 의미로 받아들이고 불호를 중얼거렸다.
“어떤 분이셨는지 알 수 없지만 아마 그분은 내게도 사백 또는 사숙쯤 되는 분이셨을 걸세. 그러니 나 역시 자네를 사제처럼 생각하겠네.”
잠시 흐름이 끊겼던 대화가 다시 이어졌다.
손자뻘 이상의 나이 차가 있지만, 문파의 배분이라는 것이 원래 그렇다.
소종천을 가르친 이가 못해도 자신의 사부와 동급의 배분일 것이라 짐작한 심익한은, 소종천을 스스로와 같은 항렬의 사형제로 대우하기로 했다.
졸지에 60살쯤 차이 나는 노인과 호형호제하게 된 소종천이 뒤통수를 긁적이며 대답했다.
“어, 그런데 파계하셨으니 엄밀히 따지면 같은 제자가 아니시잖아요? 굳이 항렬을 따질 필요가 없지 않을지?”
“그, 그건 그렇긴 하네만…….”
속을 후벼 파는 소종천의 발언에 심익한의 표정이 침울해졌다.
비록 현재의 삶에 후회는 없다지만, 사문에 대한 죄책감을 마음 한구석에서 잊지 못하고 살아온 심익한이다.
소림의 재건을 포기하고 떠나야 했던 그는 소종천이 저렇게 말하자, 티가 날 정도로 동요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거 한마디 했다고 세상 다 산 듯한 표정을 짓는 심익한의 모습에, 소종천은 머쓱한 얼굴로 말을 바꿨다.
“뭐 사소한 건 따지지 말죠. 그냥 사형으로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허, 허허. 고맙구나.”
잠시 뒤, 마음을 추스른 심익한이 솔깃해지는 제안을 건넸다.
“……원한다면 이곳에 머물며 무공을 연마하도록 하게나. 외지인들의 숙소에서 생활해야 하겠지만, 숙식을 포함한 기타 자잘한 지원은 내가 해주도록 하겠네.”
자신이 포기했던 일을 이어받았다 여겨지는 소종천에게, 부채감을 느끼고 뭐라도 도움이 되고자 꺼낸 말.
‘오?’
소종천으로서는 딱히 거절할 이유가 없어 보였다.
‘일과 수련을 병행하는 것보다야 낫겠지. 무공 쪽으로 도움을 받을 수도 있을 테고.’
이미 대화를 나누는 도중에 감정을 통해 심익한의 무위를 확인했었다.
여태껏 만난 무인 중 가장 강한 존재였던 곽진보다는 못하지만, 그 역시 절정의 경지에 위치한 무인.
게다가 소림의 무공들에 정통하기까지 하니, 소종천의 무공을 지도해주기엔 최적의 인물이기도 하다.
‘그래도 일단 다른 애들하고 이야기는 해봐야겠지.’
같이 온 일행들이 있어 먼저 논의를 해야 한다 말하자, 심익한은 고개를 끄덕이며 천천히 결정해도 좋다는 뜻을 밝혔다.
“그건 그렇게 하고 이제 자네 얘기도 좀 해보게. 대단한 내공을 쌓은 것으로 보이는데, 신공의 성취가 얼마나 되는가?”
“이제 6성입니다.”
“허어! 그 말이 사실인가?”
나름대로 기재 소리를 듣고 자란 심익한이지만, 평생을 수련한 반야신공의 성취가 아직 7성에 머물러 있다.
그런데 고작 열다섯에 불과한 소종천이 6성의 성취를 이루었다는 말에, 놀라움을 숨기지 못하고 재차 되묻는다.
‘비정상적인 내력의 양이야 영약의 도움을 받았을 거라 짐작할 수 있지만, 저 나이에 신공의 성취가 벌써 6성이라니? 그만한 재능을 가진 이가 역대에 존재한 적이 있었던가?’
소림이 무림의 태산북두라 불리던 시절.
본산의 보고에는 상당한 양의 보물들이 보관되어 있었고, 그중에는 소림 비전의 연단술로 빚은 대환단이란 이름을 가진 엄청난 효능의 영약도 있었다.
수십 년에 한 개를 제작하기도 쉽지 않아, 방장조차 마음대로 취급할 수 없는 무림 최고의 영약 중 하나.
극히 귀하기는 하지만 일단 그런 것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심익한은 처음 소종천을 마주했을 때 놀라긴 했지만, 전혀 이해할 수 없다고 여기진 않았다.
대환단을 복용하고 동일한 계통의 내공을 익힌 고수가 자신의 내력 손실을 감수하고 진기도인을 돕는다면, 저만한 내공을 지니는 것이 불가능하진 않다.
‘하지만 신공의 성취는 순수하게 본인의 재능으로만 이룰 수 있는 것. 저 말이 사실이라면 천하제일, 아니…… 고금제일의 재능을 가졌다 해도 과언이 아닐 진데.’
아무리 파계했다지만 한때 방장의 직전제자였던 자신을 앞에 두고, 바로 들통이 날 거짓을 고하진 않을 터.
심익한은 기대감을 담은 눈빛을 보내며 입을 열었다.
“다른 무공들은 어떤가? 아니, 말로 떠들 게 아니라 보여줄 수 있겠나?”
“어려울 건 없죠.”
“그럼 내가 상대해 봐도 돼?”
“응?”
조용히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홍려아가 눈을 빛내며 끼어들었다.
“보기보다 제법 실력이 있다는 소리지? 그럼 나랑 겨루자. 허공에 대고 푸덕거리는 것보다 그게 재밌잖아?”
“그것도 나쁘지 않겠구나.”
홍려아의 말에 심익한이 수염을 쓰다듬으며 웃음을 흘렸다.
“려아는 내 손녀이자 수제자인 아이지. 실력은 충분할 걸세. 물론 사제가 대련을 수락해야 하겠지만 말이네.”
소종천은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음…… 조금 곤란한데요.”
“뭐야? 너도 다른 외지인들처럼 여자랑 싸우기 싫다 그거니?”
홍려아가 신경질적인 목소리로 말하며 샐쭉한 표정을 짓는다.
아마 다른 무인들을 상대로 대련을 청했다가 그런 소리를 들은 경험이 있는 모양이다.
물론 소종천은 주먹질에 성별을 따지는 성격은 아니었다.
그야 상대가 미녀인 만큼 싸우는 것이 꺼려지긴 했지만, 필요하다면 손을 쓰지 못할 것도 없다.
“그건 상관없긴 한데…… 괜찮겠어요? 듣자 하니 꽤 귀한 신분이라던데, 다치게 하면 나만 곤란해지지 않나?”
“헤에, 요 깜찍한 녀석 보게? 이길 자신은 충분한가 보지?”
“뭐, 어렵진 않을 것 같은데.”
“어쭈?”
홍려아의 눈빛이 사나워진다.
입꼬리를 올린 홍려아가 날카로운 송곳니를 드러내며 말을 이었다.
“설령 싸우다가 사고로 죽게 되더라도 네게 위해가 갈 일은 없을 거라 약속할게. 들었죠, 할아버지? 할아버지가 증인이야.”
“허어. 려아야.”
“그렇게까지 말한다면야.”
기세등등한 그녀의 태도에 소종천은 고개를 끄덕이며 앞으로 나섰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알림이 떠올랐다.
[임무 발생!]‘어랍쇼?’
오랜만에 떠오른 임무 알림에, 소종천은 냉큼 내용을 확인했다.
[남자는 힘]수왕족의 차기 지도자, 홍려아와 대련하여 그녀를 제압하십시오.
보상 : 150금, 2청강석
‘개꿀인데?’
임무 명이 조금 이상하긴 했지만, 내용은 매우 단순했다.
게다가 보상에 무려 청강석이 섞여 있다.
‘지금 청강석이 8개가 있으니, 이것만 수행하면 천급 뽑기가 가능해.’
무조건 해야 하는 임무였다.
‘내공으로 봐서는 일류 초입. 게다가 무공은 수왕권이라는 권법과 외공인 나한철종뿐이니, 내가 이기는 건 당연하겠지.’
이래서야 대놓고 떠먹여 주는 상황이 아닌가.
기분이 좋아진 소종천은 씩 웃음을 지으며 홍려아와 마주했다.
그리고 곧, 이것이 생각보다 쉬운 임무가 아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뽑기로 무림최강 75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