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tial Streamer RAW novel - Chapter 114
선물 (4)
빛과 그림자.
각각 연검과 채찍이 고속으로 휘몰아치며 만들어낸 잔영이 허공을 가득 수놓았다.
그러나 놀랍게도 그 수많은 궤적 중 서로 얽히거나 충돌하는 것은 단 하나도 없었다.
쐐애애애액-.
“장관이군…!”
대주라고 같은 대주가 아니라 했던가.
그녀의 연검이 제법 매섭기는 하나, 기껏해야 전 성염대주 수준일 거라 생각했거늘.
어쩌면 그 판단을 수정해야 될 지도 모르겠다.
이 정도 실력이면, 아직 모든 것이 베일에 싸인 금안마군의 제자에게 망설임 없이 내기를 걸어온 것도 이해가 간다.
그러나 오늘 그녀의 자신감은 꺾일 것이다.
난 금안마군의 제자가 아닌, 그의 죽음이니.
“가겠소.”
금안마군의 동의 없이 물려받은 보검에 기를 불어 넣은 나는, 빛 무리를 뚫고 한 걸음 한 걸음 앞으로 전진했다.
캉! 캉! 카가가각!
검과 검, 검과 채찍이 부딪히며 불똥이 튀었다.
폭풍 안쪽은 밖에서 보던 것보다 훨씬 강맹하고 사나웠지만, 내 힘은 그보다 더 하면 더 했지, 결코 못하지 않았다.
내공을 더 끌어올리면 채찍과 검을 강제로 끊어내는 것도 가능할 듯 하지만… 지금은 모처럼 검술 경험을 쌓을 기회이니 그만두자.
더구나 모든 힘을 드러내서 얻는 이익보다 손해가 더 크다.
비록 강자존의 율법이 명교를 지배한다고는 하나, 내 궁극적인 목적은 어디까지나 출세가 아닌 배반.
그림자 속의 비수 역할을 하기엔 이 정도가 딱 좋다.
그래도… 무시당하지 않을 만큼 실력을 드러내는 건 괜찮겠지.
난 오른손으로 구유무상검을 이어가는 한편, 지금까지는 보조적인 역할만 수행하던 왼손을 교룡편의 그림자 속으로 밀어 넣었다.
겁 없는 행동에 도리어 놀란 것은 홍사강 쪽이었다.
“무슨?”
“두 가지 병기를 다루는 게 당신만의 특권은 아니지 않소.”
“무모한 짓을…! 교룡편의 단단함은 결코 보검 못지않아요!”
“내 손도 제법 단단하다오.”
사부님께 받은 수투도 마찬가지고.
묵린철갑망이란 영물의 비늘로 만든 수투는 웬만한 도검에는 생채기조차 나지 않는 질긴 내구도를 자랑했다.
그러나 그보다 마음에 드는 것은 도저히 보물로는 생각되지 않은 평범한 외형이다.
덕분에 조가휘와 면식이 있는 심서우가 비무를 관전하는 와중에도 대놓고 수투를 드러낼 수 있는 것이고.
파바밧-.
‘역시 익숙한 게 최고야.’
검과 연검이 여전히 박빙의 대결을 이어가는 반면, 채찍과 손의 대결은 금세 우위가 드러났다.
아까에 비해 현저히 느려진 교룡편의 속도가 그 증거였다.
“당신, 검수가 아니었…?”
“사부님의 절기가 검술만 있는 것은 아니오.”
“윽!”
오늘도 금안마군의 얼굴에 마음에도 없는 금칠을 하며 홍사강을 압박한다.
한 발짝, 두 발짝.
그렇게 하늘을 뒤덮은 삭풍을 걷어내며 걷다 보니, 최초 이 장도 넘게 벌어져 있던 둘 사이의 거리는 어느새 절반 가까이 줄어들어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그녀의 신형이 내 검의 반경 안에 들어온 순간,
“하앗!”
얼굴에 초조함이 쌓여가던 그녀가 결국 승부수를 던졌다.
순간, 강맹일변도로 몰아치던 교룡편이 마치 살아있는 뱀처럼 기묘한 움직임을 그리며 내 팔을 휘감았다.
그러나 이 역시 금안마공의 ‘관조’를 통해 예상했던 공격이다.
“이걸 기다렸소.”
순간 내력을 강하게 끌어올려 채찍을 끌어당기자, 깜짝 놀란 홍사강이 헛바람을 들이켰다.
“헉!”
꾸드드득.
서로의 손아귀에 잡힌 교룡편이 찢어질 듯 팽팽히 당겨지며 한바탕 힘겨루기가 시작됐다.
그러나 천하의 금안마군조차 감탄하다 못해 질린 표정을 짓게 만든 가공할 내력을, 이제 이십대 중반인 그녀가 견딜 수 있을 리 만무했다.
“크흐윽…. 아!”
결국 마지막까지 애병을 포기하지 못한 그녀가 교룡편과 함께 빠르게 나를 향해 날아왔다.
그녀는 서둘러 반대손에 쥔 연검을 휘두르려 했지만, 그쪽 역시 사정은 마찬가지.
그녀가 힘겨루기에 정신이 팔린 사이, 연검 또한 내 발 밑에 짓눌려 옴짝달싹 못하는 신세가 된 지 오래였으니.
“칫!”
결국, 전략을 바꾼 그녀가 애병 두 개를 과감히 놓으며 내게 쌍장을 내질렀다.
그러나 그녀의 적수공권은 연검과 채찍에 비해 그리 위력적이지도, 신묘하지도 않았다.
턱-.
쇄도하는 일장을 어렵잖게 받아낸 나는, 그대로 그녀의 손목을 부드럽게 휘어잡았다.
이어서 이화접목의 수법까지 곁들여 돌진력을 상쇄하니, 허공에서 반바퀴 회전한 그녀의 신체가 내 품에 폭 안기게 되었다.
“하아, 하….”
내게 등을 기댄 채 손목을 머리 위로 속박 당한 그녀의 숨결이 무척이나 거칠다.
하긴, 두 자루 장병을 그리 격렬히 휘둘렀으니 지칠 만도 하지.
“살짝 당겼는데 여기까지 날아들다니, 몸이 너무 가벼운 것 아니오?”
“…금안신군 선배는 채음보양이란 사악한 술수로 내공을 쌓았다고 들었어요. 설마 당신도 그런가요?”
“난 사부와는 다르오.”
빙긋 웃으며 손목을 놓아주자 채팅창에서 온갖 비난이 쇄도했다.
[프로배드 : 남자 – 벽에 꽂아버리고 목 졸라서 들어 올림, 여자 – 스윗하게 손목 잡고 분위기 잡음] [소소설설 : 스윗중남ㄷㄷㄷ] [비굴링 : 성녀 방송가서 우희한테 꼰지르라고 도네 하면 되는 거지?] [로젠단장 : 여자랑 싸움만 하면 미연시 되네…] [펭귄목살 : 여캠 대신 이 눈나랑 로맨스 찍자] [래치하 : 손이 곱네요 “해줘”] [조가휘 : 안 할 거예요.]심서우가 의심할까봐 일일이 반박은 못하고 채팅으로 간략히 몇 마디를 적는다.
그 사이, 어느새 신색을 회복한 홍사강이 무기를 회수해 내 앞으로 다가왔다.
“패배를 인정하시오?”
“인정해요. 설마 한쪽 눈만으로 그런 신위를 보이다니.”
고집을 부릴 줄 알았건만, 의외로 그녀는 순순히 패배를 인정했다.
“다른 대주들 중에 천 대주를 감당할만한 분이 있을지 모르겠네요.”
“과찬이오.”
“감축드립니다, 대주님!”
“감축드립니다, 공자.”
어느새 달려온 종서와 심서우가 축하의 말을 건넸다.
특히 그동안 성염대의 유일한 생존자로서 멸시를 당해온 종서의 표정엔 차마 말로 표현하기 힘든 감동이 어려 있었다.
여태까지의 고생을 모두 보답받기라도 한 것처럼.
벌써부터 저렇게 좋아하면 안 되는데. 아직 내기 보상은 받지도 않았는데 말이야.
“홍 대주. 약속은 지킬 거라 믿겠소.”
“약속대로 성염대를 재건하는 데 지원을 아끼지 않죠.”
“홍옥대에서 인원을 차출해도 된다는 말, 아직 유효하오?”
“…계산이 철저하시네요. 좋아요. 오후에 연무장으로 찾아와 살펴보세요. 약속은 약속이니.”
엘리트 의식에 쩐 고집불통 아가씨를 예상했는데, 보면 볼수록 화통하고 시원시원한 게 호감이 가는 성격이다.
그렇기에 더욱 욕심이 생겼다.
“그럴 필요없소.”
“네?”
“굳이 홍옥대까지 발걸음 할 필요가 없다는 말이오.”
“그게 무슨….”
난 눈을 깜빡이는 그녀를 향해 입매를 비틀었다.
“당신.”
“네?”
“다른 대원은 필요 없소. 당신이 오면 좋겠소.”
파격적인 제안에 그녀는 과연 어떤 반응을 보일까?
그렇게 기대하며 웃음을 삼킬 찰나, 전혀 예상치 못한 대답이 들려왔다.
“좋아요.”
“설마 명망 높은 광염홍가의 여인이 약속을 어기진 않겠… 응? 지금 뭐라고 했소?”
“좋다구요.”
그녀의 대답은 변하지 않았다.
이번에는 내가 눈을 깜빡일 차례였다.
“오늘부로 천 대주님의 명령을 받겠어요.”
“아니, 그렇게 쉽게.”
“명색이 광염홍가의 여인이 약속을 가벼이 여겨선 안 되는 거니까요. 그렇죠? 하지만 부대주 자리는 제게 주셔야겠어요. 저도 아까 이인자 자리를 약속했으니 그래야 공평할 것 같네요.”
“그래도 명색이 대주인데 다른 대원들의 의견도 들어 봐야….”
“부대주 집무실은 어느 쪽이죠? 안내해줘요, 천 공자.”
제멋대로 이야기를 진행시킨 그녀가 냉큼 내 옷소매를 잡아당겼다.
이게 무슨 일이야.
난 어안이 다 벙벙했다.
억지 부리지 말라는 말이나 들을 줄 알았더니, 이건 숫제 기다렸다는 듯한 반응이 아닌가!
당황한 나는 고개를 돌려 종서를 바라봤지만, 그의 표정도 나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한편, 비무가 끝남과 동시에 죽은 눈빛을 되찾은 심서우는, 그 외의 나머지 문제는 어찌되든 상관없다는 표정이었다.
“천 대주? 이쪽인가요?”
“아, 기다리시오. 그쪽은 내 집무실….”
왜 이겼는데 이긴 기분이 안 들지?
난 홍사강의 재촉에 못 이겨 스스로도 잘 모르는 성염대 건물을 안내하기 시작했다.
더불어 비무 도중 일어난 스킨십에 분개하던 시청자들의 분노는 더욱 거세졌다.
[래시어스 : 이게 마교냐] [래이바트 : 깐느 미모 원툴] [오던사람 : 홍옥대주 없는 홍옥대ㅋㅋㅋ] [No.걸 : 싱글벙글 홍옥대주]그 날 오후 무렵, 명교에서 성염대주와 홍옥대주의 비무 소식을 모르는 이는 찾아볼 수 없었다.
***
광명정, 알현실.
며칠 전 명교의 수뇌부가 회동을 가졌던 자리에 지금은 단 두 사람만이 자리해 있다.
“그럼 서장의 사절단에 대한 건은 그렇게 처리하겠습니다.”
명교의 지낭이자 중원에서는 풍광기자라는 별호로 불리는 곽정유.
평소처럼 보고를 마치고 돌아가려는 그를, 태사의에서 들려온 나직한 목소리가 붙잡았다.
“놈은 잘 지내고 있나?”
“놈이라시면….”
“신군의 제자.”
“천서원 말씀이십니까?”
“그래.”
이제야 생각났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명교주 금양에게, 곽정유는 오늘 오전 교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한 가지 소식을 전했다.
“교주님께 따로 보고 드릴만한 사항이 아니라고 생각하여 말씀드리지 않았지만, 제법 한 수가 있는 녀석인가 봅니다.”
“…….”
궁금할 법도 하건만, 그의 군주는 절대로 답을 재촉하는 법이 없었다.
그러나 그 과묵한 시선이야말로, 곽정유가 교주를 대함에 있어 가장 어려움을 느끼는 부분이었다.
뜸 들일 마음이 순식간에 사라진 그는 얼른 머리를 조아렸다.
“오늘 오전 성염대주와 홍옥대주 간 대주직을 건 비무가 있었습니다.”
“재미있는 짓을 벌이는군. 결과는?”
“성염대주가 상처 하나 없이 이겼다고 합니다.”
“홍옥대주의 무위가 어느 정도지?”
“현재 홍옥대주로 있는 홍사강이 비록 어리긴 하나, 대주 중에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실력자입니다.”
“…아쉽군.”
뜬금없는 한 마디였으나, 곽정유는 명교의 군사답게 영민하게 반응했다.
“…신군 말씀이십니까?”
“제자를 보면 스승을 알 수 있지. 제법 아까운 자를 잃었어.”
“계획대로만 됐다면 부교주를 없앨 절호의 기회였는데 아쉽게 되었습니다.”
“신군을 해한 자의 정체는 알아냈나?”
“천무학관의 조가휘란 놈이 한 때 여능천의 전인이라는 소문이 돌았으나, 뜬소문인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설령 소문이 사실이라 한들, 아직 약관도 채 되지 않은 어린놈이 신군과 그 제자를 동시에 상대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어쩌면 황실의 농간일 가능성도 있으니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고 조사하도록.”
“존명.”
공손히 답한 곽정유가 슬그머니 고개를 들며 물었다.
“그럼 성염대주와 홍염대주의 내기 건은 그대로 승인해도 괜찮겠습니까?”
“그 정도 인사권은 주었을 텐데.”
“교주님께서 천서원에게 특히 관심이 있으신 듯 하여….”
“대주 자리 하나가 비었을 뿐이다.”
“존명.”
“그러고 보니….”
이번에야말로 알현실을 물러나려던 곽정유가 황급히 걸음을 멈췄다.
“하명하시지요.”
“그젠가 보고에서 성녀와 성염대주가 제법 오래 독대를 했다고 했지?”
“네. 뿐만 아니라 중원 출신의 시녀를 붙여주는 호의까지 보였다고 합니다.”
“…신비한 힘을 지닌 계집이다. 어쩌면 천서원에게 무언가를 봤을지도 모르겠군.”
교주의 심중을 파악한 곽정유는 명령을 듣기에 한 발 앞서 잽싸게 입을 열었다.
“자리를 마련해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