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tial Streamer RAW novel - Chapter 115
황금박쥐 (1)
또다시 광명정에 왔다.
사흘 전과 다른 것은 이번에는 수뇌부 없이 교주와의 독대라는 것.
설마 타부대의 대주를 제멋대로 대원으로 받았다고 문책을 당하는 건 아니겠지?
그 정도 일이라면 대주 윗선의 경고만으로 충분할 텐데….
그런 의문을 품은 채 광명정 깊숙이 위치한 알현실로 발걸음을 옮기자, 삭막한 회색빛 동혈 곳곳에서 따가운 시선들이 날아드는 게 느껴졌다.
모두 숨어서 교주를 호위하는 자들이다.
성녀에게 들은 바로는, 이전 교주까지는 광명정에 호위를 두지 않는 것이 관례였다고 한다.
그러나 금양 자신이 그런 허점을 노려 교주위를 찬탈한 현재, 광명전의 경계는 무척이나 삼엄했다.
조금이라도 수상한 행동을 보이면 사방팔방에서 날아든 검에 순식간에 벌집이 되리라.
그나마 알현실 안까지 호위를 두지 않은 것이 금양에게 남은 마지막 자존심이었을 것이다.
난 며칠 전 교주의 시험을 받았던 그 자리에서 다시 한 번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렸다.
“성염대주 천서원이 교주님을 뵙….”
“원래 안대를 했던가?”
“여능천의 제자에게 입은 부상이 악화되어….”
“어째서 아직 살아 있지?”
아, 나…. 이 아저씨 말 더럽게 끊네.
그래도 어쩌겠는가. 힘없는 놈이 참아야지.
그보다 왜 살아있냐니, 설마 정체를 들킨 건 아니겠지?
“속하, 무슨 말씀이신지….”
“영검대주의 보고로는 스승의 장례를 치르기 전엔 죽을 수 없다고 했다던데…. 스승의 시신을 교에 안치했는데 아직까지 살아 있는 연유가 무엇이냐?”
또라이 새낀가, 이거?
그러나 생각과 달리 내 입에서 나오는 대답은 공손하기 이를 데 없었다.
“제가 분노와 슬픔에 눈이 멀었던 것 같습니다. 스승의 원수가 아직 버젓이 살아있는데 어찌 스승을 뵈러 가오리까.”
“놈은 신군과 동귀어진했다 하지 않았나?”
“놈이 제 스승을 해하였으니, 저 역시 놈의 스승을 죽여야 셈이 맞지 않을까 합니다.”
“호…. 네 놈이 검성 여능천을 잡겠다고? 본좌조차 승리를 장담할 수 없는 노괴를?”
여기서 교주의 점수를 따겠답시고 큰 소리를 쳐봤자 허풍쟁이 취급을 당하기밖에 더하겠는가.
나는 잽싸게 고개를 저었다.
“제 주제는 제가 잘 압니다. 허나, 이 한 몸 불살라 교주께서 여능천에게 가는 길을 닦아드리는 정도는 할 수 있습니다. 부디 저를 대업의 가장 선두에 세워주십시오! 교주님께서 여능천 그 노인을 참하는 광경을 가장 먼저 눈에 새길 수 있는 영광을 베풀어 주십시오!”
나는 목 놓아 부르짖는 한편, 속으로 무림맹주님께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맹주님. 현천장까지 가르쳐주셨는데….
그래도 제가 먼저 살아야지 어쩌겠습니까. 이해해주실 거죠?
“아부가 제법이군.”
“진심을 고했을 뿐입니다.”
아부가 괜히 아부겠는가.
알고 들어도 기분이 좋은 게 아부다.
그 증거로 시종일관 쌀쌀맞던 교주의 얼굴에도 옅은 웃음꽃이 피어나지 않았는가!
“흠…. 그나저나 이번엔 흥미로운 짓을 벌였더군.”
“홍 대주와의 대결이라면….”
“탓하려 하는 것이 아니니 긴장할 필요 없다. 그저 신군이 제자를 제법 잘 키웠다 싶어서 말이야.”
“영광입니다. 돌아가신 스승께서도 기뻐하실 겁니다.”
“그래. 그런데 며칠 전 성녀와 독대를 했다지?”
이제부터 본론이구나.
난 침을 꿀꺽 삼켰다.
중요한 순간이다.
성녀가 부교주와 긴밀한 관계란 건 모르는 이가 없는 사실.
어디까지 진실을 말할 것인가.
“솔직히 말씀드리겠습니다. 향후 부교주님의 세력에 힘을 실어달라고 부탁하셨습니다.”
“흐음… 성녀가 일개 대주에게 직접? 넌 스스로에게 그 정도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나?”
“아직 입교한지 얼마 되지 않아 객관적인 판단은 어렵지만 이번에 홍사강과 겨뤄보고 알았습니다. 솔직히 대주들 중에 제 적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으흐흐, 어린놈이 제법 오만하구나.”
“언짢으셨다면 죄송합니다.”
“마음에도 없는 소리는 됐다. 명교의 무인이라면 그 정도 자부심은 있어야지.”
손사래를 친 그가 궁금증이 가득 담긴 얼굴을 내 쪽으로 기울였다.
“성녀의 제의를 내게 솔직히 밝히는 까닭이 무엇이지?”
“…제 마음이 교주님께 있기 때문입니다.”
“이유는.”
“스승께선 생전에 부교주가 아닌 교주님을 보필하실 생각이셨습니다.”
난 금안마군의 모옥에서 발견한 서신의 내용을 떠올리며 연기에 들어갔다.
“결코 교주님께서 약속하신 호교법왕의 자리가 탐나서가 아닙니다. 과거의 실수에서 비롯된 죄를 사하여 주신 교주님께 은혜를 갚아야 한다! 스승께서 누누이 하신 말씀입니다.”
“내가 신군을 좀 아는데, 믿기 힘들군. 그는 그런 말을 할 성격이 아니야.”
“한 치의 거짓 없는 진실입니다. 분명 저를 거두실 때만 해도 스승은 야망이 가득한 분이셨으나, 해를 거듭할수록 점차 부와 권력에 초연해지셨습니다.”
“음…. 신군도 세월 앞에선 어쩔 수 없었는가.”
잠시 사색에 잠겼던 교주가 다시 나를 향해 물었다.
“죽은 스승이 나를 따르고자 마음먹었기에 제자인 너 또한 그렇게 하겠다?”
“거기에 한 가지 소견을 덧붙여도 되겠나이까.”
“허한다.”
“제가 교주님을 따르고자 하는 것은 결코 스승님의 유지 때문만은 아닙니다. 교주님의 뜻이 더 이치에 맞기 때문입니다.”
“이치라?”
교주의 눈에 호기심이 어렸다.
그의 환심을 사기로 결심한 순간부터 기다려온 절호의 기회!
난 혹여나 이런 상황이 일어날 것에 대비해 전날 미리 녹화해둔 컨닝 페이퍼를 안대 속에서 엿보며 일장 연설을 펼쳤다.
“부교주가 주장하는 평화는 듣기에는 좋지만, 현실은 조금도 고려하지 못한 이상론에 불과합니다. 영검대를 따라 이곳 곤륜까지 오는 동안 교의 형제들이 얼마나 척박한 환경에서 생활하고 있는지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평화만으로는 쌓여가는 굶주림과 불만을 잠재울 수 없으니, 결국 중원 정벌의 의지는 성스러운 불처럼 계속 피어날 것입니다!”
와, 안대 쓰길 잘했어!
기나긴 연설을 말 한 마디 더듬지 않고 성공적으로 마친 순간,
“으흐흐흐흐. 으하하하하하하!”
가만히 이야기를 듣던 교주가 갑자기 광소를 터뜨렸다.
“신군이 무공은 안 가르치고 입담만 가르쳤느냐.”
“주제넘었다면 죄송합니다.”
“으음, 꽤 재미있는 이야기였다. 그래. 강유 그 놈은 예전부터 심약한 소리만 지껄였지. 피와 투쟁 없이는 아무것도 손에 넣을 수 없다는 것을 제 놈만 몰라….”
투둑, 툭-.
태사의 팔걸이를 손가락으로 두들기던 그가 문득 사나운 얼굴로 나를 응시했다.
“하지만 말 뿐이라면 누군들 못할까.”
“…….”
“혹여 부교주와 나 사이를 오가며 이득을 취하려는 속셈은 아니렷다?”
“박쥐같은 자들이야말로 제가 가장 혐오하는 부류입니다.”
내 말의 진위여부를 파악하듯, 교주의 두 눈이 가늘어졌다.
“부교주는 네 주군이 될 수 없는 자다. 너나 신군처럼 짙은 마기를 띠는 이들을 품기에는, 놈처럼 위선적이고 나약한 놈보다 나 같은 패왕이 어울리지.”
“부교주가 제 마음을 얻는 일은 영원히 없을 것입니다.”
“앞으로의 행동으로 그 말을 증명하라. 그리하면 네 소원대로 여능천과 중원이 내 앞에 무릎 꿇는 모습을 바로 곁에서 지켜보게 될 것이다.”
“광명천하! 교주님의 믿음을 얻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믿어보지. 앞으로 너를 예의 주시하마. 이만 가보도록.”
“존명.”
드디어 호랑이 아가리를 벗어나는구나.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싶은 마음을 가까스로 억누른 나는, 마지막까지 덤덤한 표정을 유지한 채 알현실을 뒤로 했다.
뒤통수의 카메라로 확인한 교주의 표정이 긍정적임에 더없이 만족하며.
***
교주와 만남이 있은 며칠 뒤,
여태까지는 교주의 눈치를 보느라 행동을 조심하던 부교주 측에서 마침내 연락이 왔다.
교주와의 회동이 날 호출할 명분이 된 거겠지.
허나 연락을 받고 부교주의 처소에 도착한 나를 맞이한 것은, 잠시만 기다려달라는 시녀의 정중한 사과 인사였다.
“부교주님께서 현재 급한 보고를 받는 중이시니 잠시만 기다리시라 양해를 구하셨습니다.”
“알겠소.”
비록 약속이 지체되긴 했으나, 명색이 명교의 2인자가 일개 대주에게 양해라는 표현을 썼다는 것에 놀랐을 뿐, 화는 나지 않았다.
실제로 부교주의 집무실을 카메라로 염탐한 결과, 시녀의 말이 사실이기도 했고.
“천축에서 사절단이 온다고.”
“금양이 교주에 오른 뒤로 부쩍 천축과의 교류가 늘어난 듯합니다.”
“교주 측의 반응은 어떻지?”
부교주와 수하로 보이는 몇몇 사내들의 대화에 귀를 기울이던 그 때,
“천 대주님. 차를 내오겠습니다.”
“아, 괜찮소. 그보다 오면서 보니 죽앙헌의 풍광이 아주 뛰어나던데, 잠시 운치를 즐겨도 되겠소?”
“물론입니다. 그럼 제가 시간 맞춰 기별을 드리겠습니다.”
“고맙소.”
차 마시는 것을 마다하고 밖으로 나온 나는, 눈이 소복이 쌓인 전각을 둘러보며 깊은 숨을 들이켰다.
“스흡- 하….”
폐부 가득히 차오르는 차가운 공기에 덩달아 기분이 상쾌해진다.
부교주가 기거하는 죽앙헌은 광명정처럼 거대하고 웅장한 멋은 없으나, 대나무 숲과 산새의 지저귐으로 둘러싸인 신비로운 장소였다.
사박, 사박.
느긋한 발걸음으로 뜰을 가로지른 나는 그대로 바깥채를 지나 오솔길로 향했다.
오는 동안에는 서두르느라 미처 자세히 보지 못했던 작은 연못이며 대숲의 고즈넉함을 눈에 새기며 걷기를 잠시, 조그만 화단 하나가 눈에 띄었다.
모든 게 앙상해지는 겨울에도 노랗게 피어난 이름 모를 꽃들.
헌데 그 생명의 경이로움에 관심을 가진 것은 나뿐만이 아니었나보다.
[펭귄목살 : 애기다] [래치하 : 뒤통수 졸귀ㅋㅋㅋ] [킴기홍 : 애기야 도망쳐! 여심 폭격기야!] [샤탠 : ㄱㅇㅇ]화단 앞에는 나보다 먼저 도착한 선객이 있었다.
이제 예닐곱이나 되었을까.
조그만 몸으로 화단 앞에 쪼그려 앉은 뒷모습이 인형처럼 귀여운 소녀다.
나도 모르게 번지는 미소를 감출 생각도 못한 채 화단을 향해 걸음을 옮긴다.
바로 그 때,
“멈춰라.”
동굴처럼 깊은 목소리와 함께 거대한 그림자 하나가 내 앞을 가로막았다.
고개를 들자 각진 얼굴에 부리부리한 눈썹을 지닌 청년이 눈에 들어온다.
나름 장신인 내가 고개를 꺾어 올려다봐야 할 정도로 큰 키를 지닌 사내는 덩치마저 남달라서, 마치 하늘에서 내려온 신장을 연상시켰다.
그러나 다음 순간, 청년이 뿜어내던 숨 막히는 위압감은 씻은 듯이 사라졌다.
“경아, 손님께 예의를 지키렴.”
“하지만 누님.”
“오늘 손님이 올 것을 부교주님께 미리 듣지 않았니?”
은쟁반에 옥구슬이란 말이 이보다 잘 어울릴 수 있을까.
눈앞의 위험에서조차 눈을 돌리게 만드는 맑고 고운 목소리의 주인은, 조금 전에 봤던 소녀의 바로 곁에 서 있었다.
거구의 청년과는 정반대로 눈처럼 새하얀 옷을 입은 여인은, 가녀린 체구에 온화한 눈매를 지닌 미인이었다.
뒤늦게 나를 발견하고 놀란 소녀를 안심시키는 여인의 몸에선 무인 특유의 기세는 눈곱만치도 느껴지지 않았으나, 막상 그녀를 공격하려고 생각하니 빈틈은 보이지 않았다.
한 번 보면 잊기 힘들만큼 인상적인 두 남녀의 등장에, 난 비로소 화단 앞에 쪼그려 앉아 있던 소녀의 정체를 깨달을 수 있었다.
‘저 아이가 바로 전 교주 딸, 은주아.’
7년 전 금양의 반란으로 은진천이 사망했을 당시, 갓난아기였던 그의 딸을 수양딸로 거둔 것이 바로 부교주 강유였다.
하긴, 부교주의 집무실과 이리 가까운 곳에서 마음 편히 화단 구경을 할 만한 아이가 달리 누가 있겠냐마는.
그리고 조금 전 내 앞을 가로막은 청년과 그가 누님이라 부른 여인이 바로, 전교주의 명령에 따라 은주아를 갓난아기 때부터 보필해왔다는 그림자 호위, 흑백쌍영이 분명했다.
거대한 청년 쪽이 남동생인 흑영, 금무경.
누나 쪽은 백영, 금하선이라고 했지?
성녀에게 들은 정보를 상기하며 아이에게 다가간다.
다행히 청년은 더 이상 나를 제지하지 않았다.
소녀 곁에 있던 금하선 역시 부드럽게 웃은 것이 전부였다.
“근래 소문이 자자한 성염대주시군요.”
“나 또한 흑백쌍영의 위명을 모르지 않소.”
아무리 부교주로부터 언질이 있었다지만, 내가 나쁜 마음이라도 먹으면 어쩌려고 이러지?
그 정도로 누나 쪽 실력이 뛰어난 걸까?
나야 불필요한 충돌을 겪지 않아도 된다면 환영이지만.
“안녕?”
“…….”
화단을 등진 소녀의 얼굴은 뒷모습만큼이나 귀엽고 깜찍했다.
그러나 날 바라보는 커다란 눈망울에는 경계심이 가득했으니….
빤히 내 얼굴을, 특히 안대와 금빛 눈동자를 주시하던 아이가 이내 금하선의 뒤로 쏙 몸을 감췄다.
내 얼굴이 안 먹히다니.
과연 성녀의 말마따나 상당히 낯을 가리는 모양이다.
‘오빠도 친해지려면 고생 좀 할 걸? 내가 우리 주아한테 갖다 바친 인형이랑 장난감이 얼만데.’
수진이의 푸념이 뇌리를 스친다.
그런데 수진아, 애들은 그렇게 꼬시는 거 아니야.
이렇게 쉬운 해결책을 두고.
뭐, 애들이랑 놀아줘봤어야 알지.
난 우희와 보낸 유년기의 추억을 떠올리며 품에 손을 집어넣었다.
“어-? 이게 뭐지?”
과장스런 표정과 말투에 흥미를 느낀 아이가, 금하선의 뒤에서 다시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난 씩 웃으며 품에서 꺼낸 물건을 아이에게 내밀었다.
흑백쌍영의 경계심을 자극하지 않도록 아주 천천히.
“이게 뭘-까.”
“아…?”
손 위에서 부들부들 요동치는 젤리, 액체괴물을 발견한 아이의 눈에 감출 수 없는 호기심이 깃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