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tial Streamer RAW novel - Chapter 117
세작들 (1)
금원대주 성모동.
덥수룩한 수염에 치렁치렁한 머리칼을 어깨까지 늘어뜨린 그는, 명교의 여러 대주들 중에서도 가장 고강한 무력을 지닌 사내였다.
그런 성모동의 집무실에 손님이 찾아온 것은 해가 질 무렵이었다.
“대주님, 저희예요!”
“들어오너라.”
잠시 뒤 문을 열고 들어온 것은 새침하게 올라간 두 눈이 매력적인 쌍둥이였다.
개개인의 무력도 무력이지만, 각각 두 자루씩 총 네 자루의 검으.로 펼치는 합격술은 웬만한 대주들도 버거워한다는 금원대의 감유청과 감유단 자매가 바로 그들이다.
“면접은 잘 치렀느냐.”
“무사히 성염대에 잠입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 천서원을 직접 보니 어떻더냐.”
“확실히 소문대로 용모가 빼어난 사내였습니다.”
언니 유청에 이어 유단 또한 재잘재잘 떠들기 시작했다.
“저희는 그래도 대주님이 더 취향이지만요!”
“쓸데없는 말은 됐다. 그의 무공도 보았느냐?”
“아쉽지만 무공은 견식할 기회가 없었습니다.”
“홍사강 그 계집이 벌써부터 천서원의 부인이 된 것처럼 설치는 바람에 말이에요!”
똑 닮은 용모와 달리 감씨 자매의 성격은 정반대였는데, 언니인 유청은 차분했고 동생인 유단은 드세고 활기찼다.
허나 호기심이 왕성하다는 점에선 두 자매 모두 비슷했다.
“겨우 홍사강을 이긴 정도로 그리 신경 쓰실 필요가 있을까요?”
“언니 말이 맞아요. 홍사강은 대주님도 문제없이 이기잖아요.”
“겨우라…. 연검과 교룡편을 모두 꺼낸 홍사강을 상처 하나 없이 제압하는 것은 나조차 불가능한 일이다. 더구나 자존심 강한 그녀가 일개 대원이 되길 마다 않을 정도라면, 천서원이란 놈의 무공이 우리의 상상 이상이라는 말이 된다.”
“…그렇군요.”
침을 꼴깍 삼킨 유청이 고개를 끄덕인 것과 달리, 유단은 여전히 납득하지 못한 얼굴이었다.
“흥! 보나마나 그 자의 잘생긴 얼굴에 홀딱 빠져서 생각 없이 벌인 일이겠죠! 그리고 무공이 센 사람은 본교에 얼마든지 있잖아요. 뭐가 문제예요?”
“단순히 무공이 강한 정도로는 교주님과 성녀님, 부교주님과 연달아 독대를 할 수 없다. 그 때문에 수뇌부에서도 현재 그 자를 예의주시하고 있다.”
“문제는 그 자의 목적이겠군요.”
“그래. 단순히 홍옥대를 휘하에 두기 위해 벌인 일인지, 아니면….”
생각에 잠긴 성모동에게 유청이 재차 의문을 표했다.
“그렇게 중요한 자리에 굳이 저희 자매를 보내신 연유가 무엇인가요? 머리를 쓰는 일은 장홍건 소협이, 무공은 귄혁 대협이 나을 텐데요?”
“가서 이상한 걸 느끼지 못했나?”
“이상한 거라니요?”
“지원자들의 성비가 어땠지?”
“앗, 그러고 보니…!”
순간 유단이 탄성을 터뜨렸다.
오늘 아침 성염대 연무장에서 본 풍경을 떠올린 까닭이다.
“여자들이 삼분지 일은 되어보였어요!”
비록 내가고수 간의 대결에서 남녀를 따지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나, 일정 경지에 오르기 전까지는 근육과 체격이 뒷받침되는 남성이 유리한 것이 사실이었다.
실제로 명교의 전투 병력 역시 남성의 비율이 훨씬 높았다.
그렇기에 오늘 유단이 성염대 연무장에서 마주한 풍경은 이런 상식을 벗어난 것이었다.
“천서원의 외모를 보기 위해 본교의 여교도란 여교도는 다 몰린 거군요!”
“그럴 리가 있겠느냐.”
한심함이 담긴 성모동의 눈빛에 유단의 얼굴이 뾰로통해졌다.
“그럼 뭔데요….”
“금안신군하면 무엇이 떠오르지?”
“칠흑 같은 밤에도 밝게 빛나는 금안과 인륜을 벗어난 채음보양의 수법…. 설마 저희를 그자의 먹잇감으로 던져주신 건가요?”
누가 자매 아니랄까봐.
성모동은 유청의 빗나간 추리에 다시 한 차례 한숨을 쏟아냈다.
“아무렴 스승인 금안신군이 비슷한 이유로 수십 년 세월을 떠돌이로 살다 생을 마감했거늘, 제 놈이 목숨이 아깝지 않고서야 가당키나 한 일이겠느냐.”
“그럼 대체 왜 저희를.”
“채음보양은 펼치지 못하더라도 제 버릇 개 못주는 법이다. 그런 스승 밑에서 자랐으니 제자 또한 당연히 여색을 밝힐 터! 일각에선 그가 홍사강의 신병을 비무의 대가로 요구한 것 역시, 그러한 음심에서 비롯된 행동이라 보는 시각도 있다.”
“과연… 미인계란 거군요.”
“우리 자매가 좀 예쁘긴 하지!”
먹잇감으로 던져줬다고 할 땐 언제고, 미인계란 말에 싱글벙글하는 꼴이라니.
성모동은 깊어지는 시름에 자기도 모르게 이마를 짚었다.
그리고 이와 비슷한 광경이 명교 곳곳에서 벌어졌다.
비단 천서원을 견제하려는 대주들 뿐 아니라, 집법당이나 호법원, 장로원 등의 상위조직 역시 상황은 마찬가지.
어쩌면 새로운 실세가 될지도 모르는 사내를 조사하기 위해 성염대로 잠입을 명받은 인원이 물경 수백에 달하니.
허나 그들은 정작 자신들이 관찰 당하는 입장에 있다는 것은 꿈에도 알지 못했다.
“응, 너네 쌍둥이 스파이로 메모.”
‘금원대주와 감씨 자매’라는 제목의 영상이 지금 막 컬렉션에 추가 됐다.
이것이 바로 금일부로 내게 생긴 새로운 취미, 인간지도 만들기!
오늘 아침 성염대 연무장에 몰렸던 그 많은 인파 중 진정 유명세만을 쫓아 지원한 순수한 이들(?)과 누군가의 사주를 받고 행동하는 불순한 이들을 분류하는 것이 그 첫 번째 작업이다.
만일 후자라면 그들에게 명령을 내린 것은 누구인지.
교주 쪽인지 부교주 쪽인지.
다시 그들이 누구와 접촉하는지.
이처럼 거미줄처럼 읽힌 인간관계를 지도로 그려나가는 과정에서 아군과 적군의 식별을 명확히 하고, 그들을 효율적으로 상대할 빅 데이터를 수집하는 것이 이번 계획의 궁극적인 목표다.
자연히 성염대에는 각기 소속이 다른 스파이들이 무수히 침투했지만 걱정은 필요 없다.
이미 상대의 정체를 알고 있으니, 역정보를 흘리거나 해당 세력끼리 이간질시키기에 딱 적절한 구조가 아닌가!
오히려 보통의 대원들보다 월등히 높은 수준을 지닌 지원자들 덕에, 성염대의 전력이 대폭 상승하는 우스꽝스러운 일까지 일어났다.
물론 이러한 사실까지는 꿈에도 알 리 없는 미모의 쌍둥이는, 벌써부터 성염대를 반쯤 장악한 마냥 들떠 있었지만.
“맡겨만 주세요! 성염대주 따위, 우리 쌍둥이의 미색으로 홀려줄 테니까! 그치, 언니?”
“누가 먼저 홀릴 지 내기할래?”
“내가 먼저 홀려줄게.”
대답은 내 입에서 흘러나왔다.
난 화면에 비친 쌍둥이를 보며 비릿하게 웃었다.
그렇게 서로 다른 꿈을 품은 자들의 밤이 깊어졌다.
***
이튿날부터 성염대주로서의 생활이 본격적으로 막을 올렸다.
다행히 이제 막 신설된 성염대에 별도의 임무는 아직 내려지지 않았지만, 유예기간 동안 성염대를 쓸 만한 조직으로 탈바꿈시키는 것이야말로 보이지 않는 첫 번째 임무일 테지.
“사강, 훈련은 잘 되어가오?”
“물론이에요, 대주님. 헌데 이렇게 중구난방으로 모은 자들이 쓸 데가 있을지 모르겠네요.”
“그건 걱정 마시오.”
“걱정 안 해요. 우리 대주님께서 어련히 잘 하실까. 그보다 오늘 일과 후에 함께 식사라도 어때요?”
“제안은 고맙지만 미안하오. 오늘은 볼 일이 있어서.”
“어제도 그러시더니, 대체 매일 무얼 하시느라 밤마다 그리 바쁘신가요? 설마 환희궁에서 사내의 욕망을 풀고 계신 건 아니겠죠?”
환희궁은 교내에 위치한 일종의 환락가로, 방중술을 익힌 남녀 교인이 상시 대기 중인 장소였다.
난 더 이상 그녀가 짓궂은 발언을 꺼내기 전에 얼른 백기를 들었다.
“절대 아니오. 내일은 꼭 시간을 비워두겠소.”
“그 말, 믿어보겠어요. 술은 어떤 걸 좋아하시죠?”
“식사만 하는 게 아니었소?”
“좋은 사람과 좋은 시간을 보내는데 어찌 술이 빠지겠어요. 마침 가문에서 보낸 명주가 있으니, 내일 함께 들어요.”
“제법 술을 즐기나 보오?”
“약해요. 엄청.”
“…?”
“그냥 그렇다구요.”
요염한 미소를 띤 그녀가 내 어깨 위를 손끝으로 지그시 훑으며 집무실을 나갔다.
난 중원에서 날 기다릴 우희와 약빈이의 모습을 떠올리며 유혹에 맞섰다.
하루 빨리 중원으로 돌아가기 위해서라도, 인간관계지도를 완성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그렇게 일과 중에는 신입 대원들의 훈련으로, 일과를 마친 뒤에는 대원들의 사생활을 염탐하며 눈 코 뜰 새 없이 지내다보니, 인간관계지도를 삼분지일 정도 완성했을 때는 어느덧 보름이란 시간이 지나 있었다.
금영당이란 조직에서 심어 놓은 대원을 쫓던 카메라에 예기치 못한 장면이 찍힌 것도 그 날이었다.
***
“성염대주는?”
“오늘도 평소와 별반 다르지 않았습니다.”
“홍옥대주와 대결을 벌일 때만 해도 당장 무슨 일을 낼 줄 알았더니, 의외로 얌전히 지내는군…. 수고했다.”
“그럼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성염대에서 세작으로 활동하는 여인이 물러나자, 명교의 재무를 책임지는 금영당의 부당주직을 맡은 사내, 허윤구 역시 돌아갈 채비를 서둘렀다.
“부당주님 벌써 가십니까?”
“왜? 무슨 일이라도 있나?”
“몇몇 대주들과 예산 배정 문제로 저녁식사 약속이 있습니다.”
“아, 그거 말인가. 당주님께는 미리 양해를 구했네. 자네들이라도 가서 맛있는 거 많이 얻어먹고 오게.”
“예….”
지난해부터 일과가 끝나면 부리나케 집무실을 나서는 그의 모습에 일부 호사가들은 늘그막에 애인이라도 생긴 게 아닌지 의심했으나, 그것은 천만의 말씀이었다.
집무실을 나온 그는 어디에도 한눈파는 일 없이 곧장 자신의 처소로 향했으니….
“으흐흐. 오늘은 기필코 전반부 초식을 모두 익히고 말겠다.”
날듯이 방으로 돌아온 그는 창문을 모두 닫고 방안을 밝히기 위해 등불 하나만 밝힌 채 품안에서 비급 한 권을 꺼내들었다.
이어서 그는 떨리는 손길로 비급의 책장을 넘기기 시작했다.
사락, 사락-.
“오늘은 여기부터였지…. 이런 식인가? 아니면 이렇게?”
비급 안에는 중원과는 사뭇 다른 복장을 착용한 승려가 여러 동작을 취하는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허윤구는 그림을 따라 천천히 몸을 움직이는 한편, 꼬불꼬불 적힌 문자를 해석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이 글자는 어떻게 읽는 거지? 토박-낙약?”
서장의 문자표마저 참고하여 비급을 해석하는 과정은 지난했으나, 그는 그런 상황 자체에 커다란 보람을 느꼈다.
왜냐하면 현재 자신의 손에 들린 것이야말로, 포달랍궁의 흑색 계급 라마승들만이 익힐 수 있다는 호교 무공 ‘대해음법’이었으니!
흑색 라마라 하면 명교에서는 적어도 장로나 호법원 고수에 버금가는 지위를 가진 이들이다.
그런 선택받은 자들이 익히는 절세무공을, 고작 교의 자금을 담당하는 금영당 소속인 자신이 언제 볼 기회라도 있었겠는가!
평범한 가문에서 태어나 평생을 기연과 인연 없이 살아온 그에게, 대해음법을 비롯한 상승 무공이 담긴 포달랍궁의 비급들은 뒤늦게 찾아온 일생일대의 행운이었다.
츳츳츳츳-.
“그런 별 것 아닌 정보들로 이런 힘을 얻을 수 있다니.”
허윤구는 자신의 손짓에 밀려나는 대기에 전율하며, 지금으로부터 일 년 전, 사절단으로 명교를 방문했던 한 포달랍궁 승려와의 만남을 떠올렸다.
-매달 그믐이 지는 날, 곤륜산 기영봉의 가장 작은 나무 뒤에 몇 가지 질문을 적어두겠다. 그 밑에 답을 적겠다 약속하면 본궁의 대해음법은 당신 것이다.
흰 피부를 지닌 라마승이 거래의 대가로 제시한 보상은 비단 무공뿐만이 아니었으니.
그는 매 거래마다 그의 일 년치 봉급을 보상으로 지급할 것을 약속했다.
처음에는 교단의 정보를 팔아넘기는 것이 영 찝찝했던 허윤구지만, 얻을 이득에 비해 그가 건네야 할 대가는 지극히 약소했다.
지난 해 대민 농기구 지원에 배정된 예산이나 무사들이 지급 받는 무복의 단가 따위의, 말 그대로 어찌 돼도 상관없는 정보들.
그와 더불어 자신이 거절하면 다른 이에게 기회가 돌아갈 뿐이란 상대의 미련 없는 한 마디는, 그의 결정을 부추기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그로부터 1년이 지난 지금, 최초에 그가 가졌던 죄책감은 이미 대부분 희석되고 마모되어 종적을 찾기 힘들었다.
흔히들 바늘 도둑이 소 도둑 된다 하질 않던가.
여태껏 유출한 정보의 양이 어느덧 상당하다는 사실이나, 언젠가부터 상대가 요구하는 정보의 양과 질이 눈에 띄게 증가했다는 사실은 더 이상 그에겐 아무런 감흥도 주지 못했다.
지금의 그에게 중요한 것은 하루가 다르게 늘어가는 무공 경지와 곳간 가득한 재산, 그리고 그것을 바탕으로 쌓은 인맥이었으니.
실제로 그는 포달랍궁의 승려와 계약을 맺은 지 불과 1년 만에 금영당의 일개 당원에서 부당주로 출세가도를 달려왔다.
설령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 한들 같은 선택을 하리라!
그런 다짐마저 할 정도로 양심을 판 대가는 달콤했다.
“후…. 이 나이에 무공 익히는 재미에 푹 빠질 줄이야.”
두 시진에 걸친 운공 끝에 뿌듯한 얼굴로 눈을 뜬 허윤구는, 대해음법의 비급을 다시 품안에 곱게 갈무리했다.
세외의 비급을 지닌 것이 들통 나기라도 하는 날엔 의심의 눈길을 피할 수 없겠지만, 이제 대해음법은 그에게 몸에서 떼어낼 수 없는 부적이나 마찬가지였다.
이게 있어야 잠이 온단 말이지.
흐뭇한 얼굴로 비급이 든 가슴을 툭툭 두드린 그는, 그제야 침상에 누워 늦은 잠을 청했다.
그런 자신을 가만히 주시하는 황금빛 눈동자의 존재는 꿈에도 모른 채.
“…이거 생각보다 출세가 빨라지겠는데?”
허윤구의 처소에서 이백 장 가량 떨어진 풀숲에서 흘러나온 속삭임을 들은 이는 아무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