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tial Streamer RAW novel - Chapter 118
세작들 (2)
타박, 타박-
허윤구는 쫓기고 있었다.
그 사실을 깨달은 것은 반각 전, 오늘도 어김없이 무공수련을 위해 일찌감치 처소로 돌아가던 중이었다.
“음?”
대해음법을 익히기 전이었다면 결코 알아차리지 못했을 은밀한 기색.
허나, 무공의 성취를 기뻐하기엔 상황이 심상치 않았다.
‘도대체 누가….’
평소 남에게 원한 살 만한 행동은 안 했다고 자부하는 허윤구다.
그렇다면 남은 가능성은 하나였다.
‘들킨 건가?’
불길한 추측과 함께 그가 품 안의 비급을 더듬으며 식은땀을 훔치던 그 순간, 인적이 드문 길로 접어든 그를 불러 세우는 싸늘한 목소리가 있었으니,
“금영당 부당주 허윤구는 걸음을 멈추시오.”
“헉! 누, 누구시오.”
허윤구는 미행 따위는 전혀 몰랐다는 듯 당황한 얼굴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이런 나약한 모습이 어쩌면 상대의 방심을 유도할지도 모른다는 기대와 함께.
곧 주춤거리는 그의 앞으로 새까만 그림자 하나가 솟아났다.
“집법당 감찰부 소속, 오유심이오.”
나직이 읊조린 사내가 품에서 검은 수실이 달린 흑옥패 하나를 꺼내들었다.
“그대가 포달랍궁과 내통하고 있다는 제보가 있었소. 잠시 따라와 줘야겠소.”
“그게 무슨…!”
허윤구는 가슴이 철렁했으나 도리어 큰소리를 쳤다.
“누가 감히…! 이건 음모요! 도대체 누구의 말을 믿고 이런 일을 벌이는 것이오!”
“말해줄 수 없소.”
“증거는 있는 거요?”
“죄가 없다면 곧장 풀려날 것이니 협조를 부탁드리오.”
보통의 교인이라면 집법당이란 이름과 무뚝뚝한 상대의 태도에 지레 겁을 먹고 명령을 따랐을 테지만, 허윤구는 아니었다.
썩어도 준치라, 비록 금영당의 권위가 집법당에 비해 한 없이 낮다고는 하나, 부당주 정도 되는 직책에 있다 보면 없던 노련함도 쌓이는 법이니.
“집법당주 님의 직인이 찍힌 명령서는 어디 있소!”
“…….”
“명령서를 보여주기 전엔 한 발 짝도 움직일 수 없소!”
자신의 일갈에 멈칫하는 사내를 보며 허윤구는 확신했다.
아직 상부에서는 이 일을 모른다는 것을!
‘그렇다면 내게도 기회는 있지.’
어디서부터 의심을 샀는지는 모르겠으나, 집법당이 본격적인 수사에 들어가면 여태껏 자신이 벌인 이적 행위들이 낱낱이 밝혀지는 것은 시간문제나 다름없다.
일이 그 지경에 이르기 전에 서둘러 증거를 인멸해야 했다.
그러기 위해선 당장 이 자리부터 모면하는 게 중요했다.
“설마 명령서도 없이 나를 핍박한 것이오? 내 이 일을 기필코 집법당주께 따지….”
허윤구가 재차 상대를 압박하던 그 때였다.
-지금 막 당신의 처소를 수색하고 오는 참이오. 서랍 안쪽의 빈 공간이나, 침상 아래 숨겨둔 비밀장부도 전부 찾아냈지. 더 듣고 싶으면 계속해도 되오.
동료가 있었나!
어디선가 들려온 전음을 듣는 허윤구의 동공이 사시나무 떨리듯 흔들렸다.
상대의 말이 전부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들켰구나….’
증거를 인멸할 시기는 이미 지나 있었다.
순식간에 판단을 마친 허윤구는 있는 힘껏 바닥을 박찼다.
탓-!
“이런!”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예의주시하던 집법당 무사 역시 서둘러 신법을 전개했다.
“당장 멈추시오! 그렇지 않으면 그대의 죄를 인정한 것으로 간주하겠소!”
“…….”
“…그 자의 말이 진정 사실이었단 말인가.”
도대체 ‘그 자’는 누구를 의미하는 것일까?
허윤구는 밀고자의 정체가 궁금했으나 지금은 한가로이 추리나 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이대로는 잡힌다!’
교내에서 추격전을 벌여봤자 불리한 것은 자신.
허윤구는 혹여 소란을 들은 다른 교도들이 몰려오기 전에, 경사가 급한 비탈길로 방향을 틀었다.
푸드드득-.
얼굴을 할퀴는 앙상한 나뭇가지와 살을 엘 듯 밀어닥치는 겨울바람이 고통스러웠으나, 내통죄로 심문을 당하는 것보다는 백 배, 천 배 낫다는 걸 알기에 그는 더욱 빠르게 발을 놀렸다.
“크윽.”
이를 악문 허윤구의 신형이 길게 늘어났다.
그렇게 시작된 쫓고 쫓기는 추격전은 무려 이 각 가량 이어졌다.
탓탓탓탓-.
“허억, 헉-.”
허윤구는 좀처럼 벌어지지 않는 추격자와의 거리에 조바심을 내면서도, 동시에 자부심 역시 느꼈다.
집법당은 말 그대로 교의 죄인들에게 법을 집행하는 조직이다.
그만큼 소속된 당원 하나하나의 무공이 전율스럽기 짝이 없고, 피도 눈물도 없는 집행 절차는 지은 죄가 없는 선량한 교도들마저 두려움에 떨게 만드는, 말 그대로 명교의 사신 같은 존재들!
헌데 불과 일 년 전까지만 해도 전투부대도 아닌 금영당의 평당원이었던 자신이, 집법당 소속의 무사를 상대로 대등한 속도를 선보이고 있다니!
더구나 그가 익힌 대해음법은 절세무공이긴 하나 결코 경공에 특화된 무공은 아니었으니, 무공에 자부심이 드는 것도 당연했다.
그리고 그런 자부심은 자연히 딴 생각으로 이어졌다.
‘어쩌면 내가 이길 수도 있지 않을까? 이대로 꼬리를 달고 갈 바에야 차라리…!’
결단을 내린 허윤구의 몸이 허공에서 팽그르르 회전하며 추적자를 향해 강맹한 일장을 쏟아냈다.
“헛?”
생각지도 못한 강맹한 일격에 대경한 집법당 소속 무사 역시 황급히 팔을 뻗었다.
콰앙-!
마주친 손바닥 사이에서 굉음이 터지며 주위 나무들이 쓰러질 듯 몸을 기울였다.
잠시 뒤, 흙먼지가 걷히며 집법당 소속 오유심의 낭패한 얼굴이 드러났다.
“타할장…? 허 부당주! 그대가 진정 교를 배반하고 포달랍궁의 무공을 익힌 것이오!”
“그동안 집법당을 두려워했는데 이제 보니 별것 아니구려.”
“감히…!”
이미 엎질러진 물, 허윤구는 더 이상 무공을 숨기지 않았다.
콰앙, 쾅!
연신 폭음이 터지며 순식간에 수십 차례의 공방이 오갔다.
그 격돌에서 손해를 본 쪽은 이번에도 오유심이었다.
“으음….”
“하아, 하…. 으흐흐! 이것이 바로…!”
겨우 두 발짝 밀려난 자신과 달리 다섯 걸음도 넘게 물러나는 상대를 보며 허윤구는 환희에 젖은 웃음을 터뜨렸다.
이 정도 무공이면 명교가 아닌 어딘들 대접받지 못할까?
어차피 혈혈단신인 몸, 지켜야 할 것도 없으니!
무공에 대한 확신은 교를 저버릴 용기로 이어졌다.
허나 그는 가장 중요한 사실 한 가지를 잊고 있었으니.
“일이 잘 안 풀리는 듯한데, 폐가 안 된다면 슬슬 참견해도 되겠소?”
이 목소리는…?
“네놈이었구나!”
추격전의 도화선이 되었던 목소리의 주인을 향해 몸을 돌리던 허윤구는 두 눈을 부릅떴다.
밤 고양이처럼 샛노랗게 빛나는 상대의 눈동자가 눈에 익었기 때문이다.
온갖 개성 있는 무인이 가득한 명교에서도 저런 눈을 지닌 이는 그가 알기로 단 한 사람뿐이었다.
“금안…! 성염대주 천서원?”
“실제로 만나는 건 처음이군. 반갑소.”
“그대가 왜 여기에…?”
뜻밖의 상황에 그가 멈칫한 틈을 타, 상대의 손이 물 흐르듯 허공을 유영했다.
스르륵-.
알면서도 미처 대응하지 못할 정도로 빠르고 신묘한 손놀림.
잠시 뒤, 허윤구의 가슴을 빠져나온 손에는 그가 목숨처럼 아끼는 대해음법의 비급이 잡혀 있었다.
“오 대협, 받으시오.”
사내가 휙 던진 비급을 받은 집법당 무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건…!”
“그 정도면 증거가 되겠소?”
“되다마다! 이거라면 그 자의 처소를 수색할 필요도 없지.”
뭣이?
허윤구는 어안이 벙벙했다.
처소에서 비밀장부를 비롯한 물증이 나왔다는 전음에 탈주를 감행했는데, 지금 두 놈이 나누는 이야기를 들어보니 단순한 심증만으로 일을 벌인 듯하지 않은가!
“천서원! 날 속였구나!”
“본교를 배반하고 포달랍궁과 내통한 자가 무엇이 그리 당당하다고 소리를 치는 것이오?”
“입교한지 한 달도 안 된 놈이 무엇을 안다고 지껄이느냐! 당장 비급을 내놓지 못할까!”
허윤구는 비분강개하여 천서원에게 달려들었다.
허나 대주들 중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홍옥대주를 압도했다는 사내의 소문은 결코 과장된 게 아니었다.
파바밧-!
“허억?”
“고작 이 정도 힘을 얻고자 본교를 배신했소?”
“젠장! 어째서…!”
“간단한 이치지. 내가 그대보다 강할 뿐이오.”
천서원의 주먹이 비틀거리는 그를 향해 쇄도했다.
허윤구는 황급히 팔을 들어 반격에 나섰으나, 상대의 권각술은 조금 전까지 상대하던 오유심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자신이 우물 안 개구리였음을 깨달았을 땐 이미 승부가 끝난 뒤였다.
“커헉.”
“푹 주무시오. 깨어났을 땐 모든 게 끝나 있을 테니.”
그것이 허윤구가 마지막으로 들은 목소리였다.
***
금영당 부당주가 집법당으로 호송되었다는 소문은 순식간에 명교 전체로 퍼졌다.
이번 사건에 대한 세간의 관심은 추국장에 참관한 수뇌부들의 면면만 봐도 확인이 가능했다.
각 대의 대주는 물론이오, 장로원 소속 고수들과 평소에는 잘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호법원 고수들까지.
허나 그들 역시 명교의 지존인 교주가 추국장에 등장했을 때는 놀람을 감추지 못했다.
“교주님께서 드시오!”
우렁찬 외침과 함께, 전신에 칙칙한 기운을 두른 마교주 금양이 대전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 순간, 자리에 모인 모든 이들이 머리를 조아리며 한 목소리로 외쳤다.
“광명천하!”
“편히들 있도록.”
교주는 고개 숙인 사람들 사이를 지나 집법당 측에서 마련한 태사의에 몸을 기댔다.
“자네도 있었군. 성녀께서도 무탈하시었소?”
“덕분에요, 교주.”
추국장에는 성녀와 부교주 역시 자리해 있었다.
허나 수많은 이들의 관심 속에 시작된 추국은 허무하리만치 순식간에 종료됐으니….
드러난 증거가 너무나 명확했기 때문이었다.
허윤구의 처소에서 발견된 여러 장부를 비롯해 은닉 재산, 무엇보다도 품에서 나온 대해음법이 가장 결정적 증거였다.
거기에 나와 함께 허윤구를 잡아들인 집법당 무사 오유심의 증언까지 더해지니, 허윤구가 빠져나갈 구멍은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았다.
“죄인 허윤구의 단전을 폐하고 사지근맥을 잘라 지하뇌옥에 가둔다. 부정하게 축재한 재산 역시 교로 귀속된다!”
그렇게 모든 것이 예상대로 흘러가는 듯했으나, 문제는 전혀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발생했다.
판결을 마친 집법당주가 모처럼 먼 걸음을 한 교주의 눈에 들고 싶었는지, 갑자기 내게 시비를 걸기 시작한 것이다.
“헌데 이번 일을 제보한 자가 성염대주라 들었는데…. 허윤구가 내통자라는 사실은 어쩌다 알게 됐지?”
“지난밤에도 진술했다시피 그것은 내가 익힌 무공과 관계된 것이오. 스승의 유지에 따라 함부로 밝힐 수 없으니 부디 양해를 부탁드리오.
“성염대주의 기세가 요즘 무섭다고 하더니, 이 정도일 줄 몰랐군. 교주님 앞에서도 못 밝히겠다?”
“내가 익힌 무공은 물론 그것을 가르쳐주신 스승마저도 전부 본교로부터 비롯된 것, 교의 전부이신 교주님께서 궁금해 하신다면 내 어찌 밝히지 않을 수 있겠소. 허나 집법당주께서는 교주님이 아니질 않소.”
“…뭐라?”
어린놈이 꼬치꼬치 말대답을 하는 게 거슬렸을까.
반백이 넘은 집법당주가 노한 듯 언성을 높였으나 난 하던 말을 멈추지 않았다.
“내통자 스스로가 죄를 시인하였고 증거가 이리 명백한데, 제보자의 신원을 보호하지는 못할망정 나를 추궁하는 이유가 무엇이오?”
“네놈이 지금 날 꾸짖은 것이냐? 허윤구에게 들었다. 네가 증거가 숨겨진 장소들을 사전에 전부 알고 있었다고! 혹여 본인이 저지른 일을 허윤구에게 뒤집어씌운 것이 아니더냐!”
“억지를 부리시는구려. 집법당주께서는 불과 입교한 지 한 달 된 이 몸이 포달랍궁과 쉬이 접촉할 만큼 본교의 보안이 엉망이라 주장하는 것이오?”
“뭣…!”
홧김에라도 대답할 수 있을 리 없다.
죄를 지은 교도들을 색출하여 질서와 기강을 바로 세우는 것이 바로 그들 집법당의 역할이니.
“네놈….”
진노한 집법당주가 수염을 부르른 떠는 가운데, 상황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려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