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tial Streamer RAW novel - Chapter 123
흉터 (1)
깊숙이 조아린 머리 위로 내리쬐는 시선이 따갑다.
카메라로 슬쩍 확인해보니, 교주는 흥미롭다는 듯 날 내려다보고 있었다.
“검후를 원한다?”
“절 찾아온 손님이니, 응당 제가 맞이하는 것이 도리가 아니겠습니까.”
“단순히 그 이유에서더냐?”
“…만일 제가 검후를 사로잡는다면, 제게 처우를 맡겨주실 수 있으십니까?”
내 말이 끝난 순간, 교주의 입에서 앙천대소가 터져 나왔다.
“으하하하하하!
“…….”
“이제 보니 네놈이 검후에게 흑심을 품은 게로구나!”
택도 없는 오해였으나 굳이 변명은 하지 않았다.
비록 내 궁극적인 목표는 벽려군을 명교의 영역 밖으로 무사히 탈출시키는 것이지만, 혹여 일이 틀어질 가능성도 염두에 두어야 하니.
그녀의 처분에 대한 교주의 공증이 있다면, 최악의 상황에도 그녀의 목숨은 지킬 수 있으리라.
물론 이것은 어디까지나 차선책에 불과하다.
복수는 복수를 낳는 법이라 했던가.
스승의 복수를 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마교도들을 참살해온 벽려군은, 그 유족들과 지인들에게 있어 또 다른 가해자에 불과했다.
설령 내가 방패막이가 되어주더라도, 그녀를 향할 악의에 찬 시선들과 음습한 해코지를 전부 막아내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더구나 검후는 중원무림을 대표하는 여고수.
그런 상징적인 인물을 사로잡은 마교에서, 이렇게 좋은 선전 기회를 놓칠 리 없다.
아마 온갖 더럽고 추잡한 소문을 흘려 그녀의 명예를 실추시키고, 중원무림의 사기를 꺾으려 들겠지.
설령 내가 그녀의 손끝 하나 건들지 않는다 하더라도 말이다.
뿐만 아니라 그렇게 새겨진 낙인은, 훗날 그녀가 탈출에 성공한 뒤에도 평생을 꼬리표처럼 붙어 다니며 지워지지 않는 상처로 남으리라.
그런 상황을 막기 위해서라도, 가장 먼저 그녀를 만나는 것은 나여야만 했다.
설령 내 이미지가 시궁창에 처박히는 일이 있더라도.
“열 여인을 마다하기에 목석인 줄 알았더니, 보통의 여인으로는 성에 차지 않는다는 뜻이었더냐.”
“검성 여능천을 향한 제 복수의 첫 걸음으로 모자람이 없는 상대입니다. 마침 그 계집의 미색이 제법 곱다고 하니, 굴복시켜 제 여인으로 삼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지요.”
“천하의 검후를 노리개로 삼겠다라…. 맹랑한 놈. 이제 보니 신군의 제자이긴 하구나.”
같은 악당에게 동질감이라도 느낀 걸까.
껄껄 웃음을 터뜨린 교주의 입에서 마침내 바라마지 않던 명령이 떨어졌다.
“좋다. 성염대주 천서원, 네게 검후의 토벌을 명한다.”
“존명!”
우렁차게 외치던 나는 이어진 교주의 말에 얼굴이 딱딱하게 굳고 말았다.
“허나 본단을 들쑤신 계집을 놓치기라도 한다면 본교의 체면이 땅에 떨어질 터! 집법당주.”
“예! 교주님!”
“집법당주는 당원들을 이끌고 천서원을 지원한다. 만에 하나라도 검후가 도주하는 일이 없도록 만전을 기하도록. 성염대 수준으로는 가봤자 발목만 잡을 테니.”
“존명!”
나를 보내고 또다시 집법당주를 보낸다?
이것이 시사하는 바가 무얼까.
나를 아직 못 믿는 걸까, 아니면 그의 말처럼 단순히 철저를 기하는 걸까.
머리를 굴리는 사이, 명령을 마친 교주의 시선이 다시 나를 향했다.
“천서원. 기대하고 있겠다.”
“…존명.”
원치 않았던 혹이 붙은 것이 영 꺼림칙했으나 명교에서 교주의 명령은 절대적.
난 바싹 마른 아랫입술을 깨물며 머리를 조아렸다.
***
사사사삭-.
초봄에도 녹을 기미가 없는 곤륜산의 눈 덮인 능선을 빠르게 질주하는 여덟 개의 그림자가 있었다.
잠시 뒤, 그 중 선두에 선 자가 경공을 멈추며 뒤따라오는 나머지 일행들을 돌아봤다.
“조금만 더 가면 전서구에 적힌 장소가 나온다.”
“당주. 검후의 토벌을 명받은 것이 나임을 잊지 마시오.”
벽려군 토벌을 명받고 명교 본단을 떠난 지 어느덧 보름, 밖에서도 나와 집법당주의 갈등은 그칠 줄 몰랐다.
“어린놈이 벌써부터 공을 탐하는구나. 나중에 괜히 우리가 돕지 않아 졌다느니 헛소리나 하지 말거라.”
“그럴 일 없소. 며칠 전부터 뒤통수가 오죽 가려워야지. 아군에게 등을 찔리는 것은 사양이니, 이쯤에서 따로 행동하도록 합시다.”
내 말에 집법당주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뭐라?”
“피차 솔직해지는 것이 어떻소? 이번 토벌대의 인원을 당주의 수족들로만 채운 이유가 있을 것이 아니오?”
지난 한 달간 집법당 동료들의 호감을 사기 위해 안간힘을 썼으나, 그럼에도 성향이 안 맞는 사람은 존재하기 마련.
이번 토벌에 참여한 집법당 무사들이 바로 그런 케이스였다.
명실상부 집법당주 라인인 그들은 나 홀로 공을 세우지 못하도록 방해하란 명이라도 받았는지, 오는 내내 내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며 시비를 걸었다.
아니, 차라리 시비만 걸면 다행이지.
어쩌면 검후와 전투 중 내 뒤통수를 노릴 셈인지도 몰랐다.
교주가 나를 아낀다고는 하나 이곳은 본단에서 전력을 다해 경공을 펼쳐도 열흘도 더 걸리는 장소, 더구나 죽은 자는 말이 없는 법이니.
아니나 다를까, 그들은 이번에도 말다툼이 시작되기 무섭게 집법당주를 편들고 나섰다.
“천서원, 감히 당주님께 무슨 말버릇이냐. 여기가 아직도 교주님 품안으로 보이느냐. 그러다 제 명에 못 가는 수가 있다.”
“곡 이령(二靈). 걱정 마시오. 제 명에 못 가는 것이 나 혼자는 아닐 테니.”
“뭐라?”
“우리 사이에 전투가 벌어지면 내가 죽는 한이 있어도 당신만은 저승길 동무로 데려가겠다는 말이오. 자신 있으면 지금 덤비시오.”
“이익…!”
십령십사(十靈十仕)로 분류되는 감찰부 서열 2위인 이령 곡정겸을 침묵시킨 나는 다시 시선을 돌려 집법당주를 바라보았다.
“이렇게 서로 못 잡아먹어 안달인데, 차라리 흩어져서 찾는 편이 효율이 좋지 않겠소? 검후를 찾으면 신호탄을 쏘겠소.”
“그래… 어디 네놈 마음대로 해 보거라. 다들 가자!”
탓-.
이를 부득 간 집법당주와 그 무리가 다시 경공을 재개했다.
그들의 모습이 점이 되어 사라질 때까지 바라보던 나는, 이후 은밀히 왔던 길을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한 마리 매처럼 큰 원을 그리며 상공을 맴돌던 카메라에, 수 킬로미터 너머에서 대치중인 일단의 무리가 포착된 것은 지금으로부터 일각여 전.
비록 거리가 먼 탓에 점처럼 작아 보였으나, 그들 중 한 사람은 내 기억 속의 벽려군이 분명했다.
허나 그녀와 남몰래 접촉해야만 했던 나는, 일부러 일행에게 시비를 걸어 지금의 상황을 유도한 것이다.
“아직 그 자리에 있어야 되는데….”
[래치하 : 돌아온다] [펭귄목살 : 두 명 오고 있음] [빅그림 : ㅌㅌㅌㅌ]이를 악물며 연영신법을 펼치던 나는, 빠르게 올라가는 채팅창을 발견하곤 혀를 찼다.
시청자들 말마따나 먼저 보냈던 집법당 무사들 중 두 사람이 돌아오는 모습이 카메라에 잡혔기 때문이다.
의심 한 번 더럽게 많네.
어떻게 한 번을 안 도와주냐.
심지어 되돌아오는 사람 중 하나는 조금 전 나와 다퉜던 곡 이령이었다.
죽일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으나 이내 고개를 저었다.
그것이야말로 집법당주가 원하는 그림일 수도 있으니.
비록 그의 수족들이 거슬리기는 하나, 그간 마교에서 고생해서 만든 기반을 걸고 모험을 할 정도는 결코 아니었다.
생각을 마친 나는 흔적이 남지 않는 선에서 연영신법을 최대로 전개했다.
벽려군과 대치중인 명교의 병력.
내 뒤를 쫓는 집법당주의 수하.
그렇게 온갖 변수를 품은 채, 나와 벽려군 사이의 거리는 빠르게 가까워지고 있었다.
***
하남 무림맹에서 마교가 위치한 신강까지의 거리는 무려 만 리에 가깝다.
그 먼 거리를 단 두 달 보름 만에 주파했다는 것 자체가 복수를 향한 벽려군의 집념을 잘 드러냈다.
“그 서신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지만 않았어도….”
넉 달 전 하오문에서 받아본 서신 속엔 감숙 부근에서 일어난 여인들의 실종사건이 적혀 있었으나, 벽려군은 여태까지의 경험과 천무학관의 개학이 멀지 않았다는 이유로, 그것이 금안마군의 소행일 가능성을 부정했다.
당시에는 현명한 결정이라고 생각했지만, 뒤늦게 금안마군이 마교로 복귀한다는 소식을 접하고 나니, 안일했던 자신의 과거를 자책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넉 달 전 바로 학관을 떠났더라도 금안마군이 마교로 복귀하기 전에 따라잡았을 확률은 0에 가까웠지만, 사부의 죽음과 관련된 단서를 소홀히 했다는 죄책감은 마교로 향하는 그녀의 발걸음을 더욱 다급하게 만들었다.
더구나 당시 그녀의 결단을 가로막은 요소 중 하나는 가휘와 석율, 두 사내와 재회하고 싶다는 갈망이었으니.
학관에 있는 동안 마음에 무뎌진 게 분명했다.
복수란 명목 하에 수없이 많은 목숨을 빼앗은 자신이 여인의 행복이라니….
‘스승님, 잠시나마 딴마음을 먹은 이 불초제자를 부디 용서하세요.’
벽려군은 만장단애 밑으로 떨어지던 스승의 마지막 모습을 되새기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자신의 무공이 왕년의 금안마군에게 미치지 못함을 누구보다 잘 알면서도….
허나 그런 미련할 만큼 우직한 복수심이야말로, 지난 14년 간 그녀를 지탱해온 삶의 원동력이었다.
그러나 간신히 신강 인근에 도착한 그녀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금안마군이 이미 죽었다는 소식이었다.
무림맹주의 전인과 동귀어진한 끝에 그 제자만 살아남았다는 것이다.
목이 떨어지기 직전의 마교도에게서 그 소식을 접한 벽려군은 순간 정신이 멍해졌다.
허나 그녀는 결국 상대의 말을 거짓으로 치부했다.
무림맹주에게 제자가 있다는 것도 금시초문이요, 제자에게 그런 중요한 임무를 맡겼다면 스승님과 인연이 적지 않은 무림맹주께서 그녀에게 귀띔 한 번 주지 않았을 리 없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만에 하나 마교도의 이야기가 사실이라 한들, 달라질 것은 없었다.
금안마군이 이미 죽었다면 그 제자의 목으로라도 스승님의 원혼을 달래야 할 테니.
서걱-.
“끄륵….”
“금안마군에게 전하라! 검후가 선대의 원한을 갚기 위해 찾아왔다고!”
인질로 잡았던 마교도의 목을 벤 그녀는 사방에서 몰려드는 적들을 피해 곧장 몸을 날렸다.
병형상수(兵形象水).
손자가 말하길 군대는 물을 닮아야 한다고 했다.
물은 위에서 아래로 흐르며, 빈 곳을 채우고 가득 차면 물러나는 성질을 지녔으니.
벽려군 또한 그 가르침을 따라 적이 쇠한 곳을 노려 습격하고, 적의 증원이 오면 빠지기를 반복하며 적들의 숫자를 착실히 줄여나갔다.
누군가는 무림인에게 어울리지 않는, 더 나아가 검후의 명성에 독이 될 치졸한 방식이라 비난할 것이나, 그녀는 스스로의 한계를 잘 알았다.
사람들의 말처럼, 스승의 죽음과 함께 유실된 월녀검결의 후반부를 익히지 못한 자신은 반쪽짜리 검후일 뿐이니.
그러나 그러한 방식도 마교의 본거지인 곤륜산 초입에 들어선 순간 한계를 맞이했다.
경계를 서는 마교도들의 무공이 눈에 띄게 증가했기 때문이다.
더구나 이미 그녀의 수법을 파악한 적들은 결코 혼자 다니는 법이 없었다.
천무학관에서 교관을 하고 있어도 이상하지 않을 실력의 고수들이 떼로 덤벼드니, 그녀의 발걸음은 곤륜산 초입에서 막혀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었다.
오늘 역시 상황은 마찬가지.
세 명의 대주급 무인을 상대로 건곤일척의 승부를 펼치던 그녀는, 좀처럼 풀리지 않는 싸움에 미간을 찌푸리며 뒤로 풀쩍 물러섰다.
“쥐새끼 같은 계집! 겨우 그 정도 실력으로 본교의 땅을 밟았더냐! 보나마나 네 스승인 백모란이란 년의 실력도 보잘 것 없었겠지.”
“고년, 땀에 젖은 모습이 제법 고혹적이구나. 지금이라도 항복한다면 내가 네년의 서방이 되어줄 수도 있다.”
“그리 말하면 저년이 죽기 살기로 저항할 것이 아닌가! 으하하하하!”
“하아, 하….”
적들이 무어라 도발하건, 심지어 돌아가신 스승을 들먹여도 그녀의 평정심을 깨뜨릴 수는 없었다.
그저 호흡을 가다듬으며 상대의 빈틈을 찾는 것에만 몰두하던 그 때,
“거기까지요.”
무슨 일에도 동요하지 않을 듯했던 벽려군의 몸이 벼락이라도 맞은 듯 우뚝 멈췄다.
어떻게 잊을까.
죽음이 확실시 되는 여행길에 오르기 전, 마지막으로 듣길 바랐던 목소리인데.
그러나 동시에 그것은 이곳에서 들려서는 안 되는 목소리였다.
중원과 이역만리 떨어진 이곳에서는 결코….
벽려군은 꿈을 꾸는 기분으로 서서히 몸을 돌렸다.
그토록 그리워했던 사내의 이름을 입에 담으며.
“…은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