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tial Streamer RAW novel - Chapter 124
흉터 (2)
“거기 서시오.”
이 목소리는….
뒤를 돌아보는 그녀의 눈빛이 그리움에 물결쳤다.
‘그’다.
자신이 위기에 처할 때면 언제나 바람처럼 나타나는 사내.
벌써 그에게 진 목숨 빚만 얼마일까.
설마 중원에서 머나먼 마교의 영역까지 날 도우러 온 걸까?
“어떻게 은공께서 여기에….”
벽려군은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허나 반가운 마음도 잠시, 낯선 안대 옆으로 자리한 시리도록 밝은 금빛 눈동자를 마주한 그녀는 그만 머릿속이 새하얘지고 말았다.
“아…?”
금…안?
그것은 인륜을 저버린 마공의 흔적이자, 그녀가 물리쳐야 할 악연의 고리.
찰나의 순간, 이해하고 싶지 않은 진실에 도달한 벽려군의 몸이 제자리에서 휘청거렸다.
때마침 그녀와 대치 중에 있던 마교도 중 하나가 아지랑이처럼 피어나던 미혹에 종지부를 찍었다.
“천 대주! 우리도 돕겠소! 이년아, 네가 그리 찾던 서방님이 오셨다!”
“천…대주? 석율이 아니라… 천….”
“이 여인은 교주님의 명에 따라 나 혼자 상대할 터이니, 여러분은 몸을 보중하시오.”
다시금 울려 퍼진 부드러운 중저음이 그녀의 기억 속 목소리와 정확히 일치함에도, 벽려군은 자신의 생각을 필사적으로 부정했다.
아닐 거야. 그 사람일 리 없어. 그냥 닮은 사람일 거야. 이름도… 그래서… 다른 거야.
허나 그녀의 실낱같은 기대는 이어진 상대의 전음에 무참히 박살났다.
-오랜만이오, 벽 소저.
“아…! 어떻…게.”
-이야기를 나누기엔 장소가 좋지 않소. 따라오시오.
탓.
말 한 마디로 그녀의 마음을 송두리 째 뒤흔든 사내가 표홀히 몸을 날렸다.
그녀를 수없이 위기에서 지켜주던 뒷모습 그대로.
“멈춰… 멈춰요.”
멍하니 서 있던 벽려군 역시 홀린 듯 그를 뒤쫓기 시작했다.
***
‘어떻게 당신이….’
벽려군은 빠르게 멀어지는 상대를 뒤쫓으며 그와의 첫 만남을 떠올렸다.
모든 것이 시작된 그 날을….
지금으로부터 2년 전, 금안마군의 흔적이 발견되었다는 소식에 앞뒤 안 가리고 정보상을 따라나선 그녀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사파 측에서 준비한 죽음의 함정이었다.
이미 한 세대도 더 전에 시대를 풍미한 두 노고수, 청록이마의 협공에 그녀는 순식간에 궁지에 몰리고 말았다.
그 순간 바람처럼 나타나 그녀를 위기에서 구해낸 사내가 있었으니.
자신을 석율이라고 소개한 사내는, 정체를 묻는 그녀의 말에 이렇게 답했었다.
‘그대가 만나길 기대하던 사람.’
기억을 더듬던 벽려군의 눈빛이 크게 흔들렸다.
만나길 기대하던 사람.
그토록 명백한 단서를 왜 당시에는 눈치 채지 못했을까.
스승 사후 자신이 기를 쓰고 만나려 했던 사람이라야 오직 하나 뿐인 것을.
처음부터 끝이 정해진 운명이었다니.
허나 벽려군은 상대의 입으로 진실을 듣기 전까진 도무지 작금의 상황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아니,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다.
“멈춰요, 제발… 아니라고 해줘….”
외침조차 되지 못한 애처로운 흐느낌은, 거센 바람결에 휘말려 산산이 부서졌다.
벽려군은 이를 악물며 두 다리에 진기를 불어 넣었으나, 흔들리는 마음은 무공에도 영향을 미쳤다.
조금도 좁혀지지 않는 서로의 거리 앞에, 벽려군의 마음에 피어난 의혹과 사무치는 배신감은 걷잡을 수 없이 깊어지고 있었다.
“…이쯤이면 되겠군.”
이 각 넘게 이어지던 추격전은 어느 한적한 숲속에서 막을 내렸다.
벽려군은 마침내 걸음을 멈춘 사내에게 비틀거리며 다가갔다.
사박, 사박-.
소복이 쌓인 눈을 밟고 다가가는 그녀에게 사내가 미안한 기색을 보였다.
“벽 소저. 아무 말도 없이 끌고 와서 미안하오.”
“처음부터 날 속일 생각으로 접근한 건가요?”
“그런 게 아니….”
“어떻게.”
석율의 말을 자른 목소리는 그녀 스스로도 놀랄 만큼 차가웠다.
“어떻게 그렇게 감쪽같이…! 재미있었나요? 아무것도 모르는 날 옆에서 지켜보면서… 즐거웠나요?”
“벽 소저, 오해요.”
“당신이 금안마군의 제자였다니. 난 그런 것도 모르고….”
당신을….
파르르 떨리는 입술 안쪽으로 뒷말을 삼키는 그녀에게 그가 천천히 다가왔다.
“소저. 믿기 힘든 상황인 것은 아오. 허나 난 금안마군의 제자가 아니오.”
“그 눈동자 이상의 다른 어떤 증거가 더 필요할까요?”
“벽 소저.”
“더 이상 다가오지 마요! 더는… 당신에게 속지 않아요.”
벽려군은 다가오는 상대를 검을 들어 제지했다.
그의 안타까운 표정조차 분노로 잠식된 그녀의 눈엔 가증스런 연기로 비칠 뿐이었다.
“…월녀문 19대 장문 벽려군. 오늘 그대를 베고 돌아가신 사부님의 넋을 위로하겠어요.”
그것은 석율과의 지난 추억들을 끊어내려는 의지인 동시에, 흔들리는 스스로를 향한 다짐이기도 했다.
허나 석율을 가리킨 그녀의 검 끝은, 그녀의 목소리만큼이나 애처롭게 떨리고 있었다.
***
쐐액-! 쐑-!
“하아, 하….”
벽려군은 스스로가 어떤 검초를 펼치는지조차 알지 못한 채 검을 휘둘렀다.
그러나 이성을 잃은 상황에서도 십 년 넘게 실전 속에서 단련된 그녀의 신체는, 그 때 그 때 상황에 맞는 검로를 자연스럽게 전개하며 상대를 압박했다.
허나 분노와 슬픔에 잠식되어 휘두르는 검술에 당해줄 만큼 상대의 실력 또한 녹록치 않았으니.
전투가 시작된 지 반 각이 지나도록 허공 가르는 소리만 요란할 뿐, 벽려군의 검은 상대의 옷자락조차 베어내지 못했다.
그럼에도 그녀는 쉬지 않고 검을 휘둘렀다.
끊임없이 머릿속에 피어나는 잡념을 끊어내기 위해.
약해지는 스스로를 다그치기 위해.
허나 그런 노력도 사내의 한 마디 앞에 너무나 쉽게 무산되고 말았다.
“벽 소저, 진정하시오.”
“…….”
“벽 소저.”
걱정이 가득 담긴 목소리에 벽려군의 얼굴이 울먹일 듯 일그러졌다.
“날 그렇게 부르지 마요.”
“제발 내 말을….”
“그 목소리로 날 부르지 마요!”
평정심을 잃고 소리친 그녀는 한층 빠르게 검을 휘둘렀다.
그의 한 마디, 한 마디에 진탕되는 마음을 달래려면 이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런 의지와는 달리, 이미 그녀의 머릿속엔 그와 함께 했던 옛 추억들이 새록새록 떠오르고 있었다.
맹독에 당한 자신을 안아 들고, 벽력탄이 묻힌 동공을 탈출하던 그의 믿음직한 품속.
서장 승려들의 자폭 공격에서 서로가 서로를 지키기 위해 상대의 몸을 덮던 순간들.
지금도 품속에 고이 간직한 피독주까지.
그 모든 기억들이 주마등처럼 떠오르며 그녀의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그리고 어느새 그녀의 눈앞에도 뿌연 습막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난 당신을 뭐라고 불러야 하나요, 천 대주? 석율?”
“석율이오. 제발 진정하고 내 이야기를 들어주시오. 난 금안마군의 제자가 아니오.”
“거짓말.”
그녀는 울면서 검을 휘둘렀다.
그것도 초식조차 찾아보기 힘든 마구잡이식 공격으로.
카앙! 캉!
“소저, 어찌 해야 날 믿어주겠소.”
“그 알량한 목숨을 내어준다면 생각해보겠어요.”
원한을 담아 흩뿌린 검이 그의 심장으로 쇄도했다.
허나 이어진 상대의 반응은 그녀의 상상을 초월했다.
설마 무기를 버리고 가슴을 활짝 드러낼 줄이야.
“안 돼!”
왜 그랬을까.
기겁하여 공격을 멈춘 벽려군은, 그의 가슴을 한 치 앞두고 멈춘 검을 바라보며 충격에 휩싸였다.
“어째서….”
찌르지… 못했어.
상대의 행동에 대한 의구심과 스스로를 향한 실망감이 그녀의 가슴 속에 번졌다.
동시에 그녀는 그동안 인정하지 않으려 했던 자신의 진심 또한 깨달았다.
‘내가… 이 남자를 연모하고 있구나. 아주 많이….’
다음 순간, 그녀의 얼굴에 허망한 미소가 걸렸다.
“죄송합니다, 사부님.”
원수의 제자를 상대로 불온한 마음을 품은 저를 부디….
그의 가슴 앞에서 파르르 떨리던 검끝이 빠르게 선회했다.
그리고 그 목적지는 그녀 자신의 목이었다.
쉬익-!
“무슨 짓이오!”
버럭 소리친 사내가 검을 쥔 그녀의 손목을 황급히 낚아챘다.
이어서 그녀를 와락 끌어안은 그는, 얌전히 심장을 내어주던 사람이라고 믿기 힘든 단호한 음색으로 그녀를 꾸짖었다.
“벽 소저! 이게 무슨 짓이오!”
“흐윽, 놔…. 놔요…!”
몸부림이 거세질수록, 그녀를 가둔 사내의 팔 또한 단단히 조여 왔다.
벽려군은 자결조차 마음대로 못하는 상황이 한심스러워 왈칵 눈물을 쏟아냈다.
아니, 거짓말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죽음을 막은 사내에게, 그리고 그의 품에 안겨 안도감을 느끼는 스스로에게 눈물을 지었을 뿐이니.
“원수의 제자를 눈앞에 두고도 검을 휘두르지 못했으니, 죽음으로 스승께 사죄를 드리겠어요.”
“벽 소저.”
“놔요. 찌를 거예요.”
검을 들고 위협하는 그녀를 사내는 더욱 깊숙이 끌어안았다.
“차라리 날 찌르시오”
“찌를 수 있어요. 찌를 수 있어… 이거 놔아….”
“벽 소저. 진정하시오. 벽 소저, 벽 소… 려군!”
“흑!”
사내의 외침에 화들짝 놀란 그녀의 몸이 우뚝 저항을 멈췄다.
다음 순간, 놀라서 토끼 눈이 된 그녀의 등을 천천히 쓸어내리며 그는 속삭였다.
“려군, 부디 해명할 기회를 주시오. 절대 당신이 생각하는 그런 상황이 아니오. 난 금안마군의 제자가 아니오.”
“거짓말….”
“정말이오.”
벽려군은 사슴처럼 몸을 떨었다.
“또 어떤 달콤한 말로 날 속일 건가요.”
“제발…. 려군, 난 우리가 그동안 온갖 고난을 이겨내며 제법 신뢰를 쌓아왔다고 생각했는데… 그저 내 착각이었소?”
“…….”
도리도리 고개를 젓는 그녀의 어깨를 짚은 그가 허리를 숙여 눈을 맞췄다.
“내가 금안마군을 죽였소.”
“그게 무슨…?”
“자세히 설명하기엔 상황이 급박하오.”
슬쩍 뒤를 보며 추격자의 존재를 암시한 그가 빠르게 말을 이었다.
“넉 달 전, 감숙의 실종사건을 조사하던 과정에서 우연히 마군과 그 제자와 조우하게 되었소. 난 간신히 그들을 물리칠 수 있었지만, 때마침 그를 본단으로 데려가려는 마교의 증원이 도착하고 말았소.”
“아… 그럼 당신도 하오문의 연락을…?”
“그대도 받았나보군…. 계속하겠소. 마군과 제자를 동시에 상대하느라 반송장이나 다름없던 난, 그들을 속이기 위해 내가 죽인 금안마군의 제자 행세를 할 수밖에 없었소. 그들이 마군이 중원에서 얻은 제자의 얼굴을 알지 못했기에 가능했던 일이지.”
“그럼 천 대주라는 것도.”
“그자의 이름이 천서원이었소. 그를 흉내 내는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마군의 무공을 익혔으나, 결코 마음마저 악에 물든 것은 아니오. 내가 익힌 심법은 내공의 기운을 마음대로 바꾸는 것이 가능하니.”
말을 마친 그의 몸에서 정순한 기운과 사악한 기운이 번갈아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강호사에 다시없을 기사에 벽려군은 멍하니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안대를 위로 걷은 그는, 금빛이 선명한 양쪽 눈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무언가를 꺼내 보였다.
“이것은 눈의 색을 유지시켜주는 보물이오.”
“이런 것이….”
벽려군은 원래 그녀가 알던 검은 눈동자로 돌아온 석율을 보며 탄성을 터뜨렸다.
“물론 이것이 없더라도 언제든 금안으로 변할 수 있지만…. 그대에게만은 솔직히 밝히고 싶었소.”
“…갑자기 너무 많은 이야기를 들어서 혼란스러워요.”
“오직 그대에게만 말하는 비밀이오. 그대가 마교에 이 사실을 밀고하면 난 당장 죽은 목숨이지.”
“제게만….”
“그렇소. 오직 그대에게만. 난 지금 그대에게 목숨을 맡겼소. 그러니 그대의 목숨 또한 내게 맡겨주지 않겠소?”
내게 어떤 말을 하려는 걸까?
두 눈에 궁금증을 담아 물끄러미 바라보는 벽려군을 그는 지엄하면서도 따뜻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약속하시오. 절대 자신의 목숨을 가벼이 여기지 않겠다고.”
“약속…할게요.”
“전에도 비슷한 약속을 했던 것 같은데.”
“…….”
벽려군은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좀 진정되었소?”
“아….”
뒤늦게 자신이 아직도 그에게 안겨 있다는 사실 깨달은 벽려군은 화들짝 놀라 몸을 떼어냈다.
새빨갛게 달아올랐을 것이 분명한 얼굴을 살포시 옆으로 꺾은 그녀는, 민망함을 감추기 위해 괜히 마음에도 없는 말을 했다.
“금안마군을 죽였다는 증거는 있나요?”
“시신을 그대에게 양도하려 했으나, 도중에 마교인들과 얽히는 바람에 사정이 여의치 않게 되었소. 비급은 지니고 있으나, 이것을 넘겨주면 추후 마교 생활에 지장이 생기게 되니 이해해주시오.”
“…믿어도 될까요?”
“내가 이런 번거로운 거짓말로 얻을 이득이 무엇이겠소. 한 치의 거짓 없는 진실이오. 교주에게 듣자하니 벽 소저께선 아직 금안마군의 죽음을 전해 듣지 못한 것이 맞소?”
“조금 전처럼 불러주세요.”
“무엇을… 아.”
뒤늦게 그녀의 말을 이해한 사내는, 잠시 그녀의 안색을 살피던 끝에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소, 려군.”
“…금안마군의 죽음에 대해선 며칠 전에야 알게 됐어요. 믿지 않았지만.”
“중원과의 거리가 먼 탓에 소식이 늦은 모양이오. 이곳을 탈출할 때쯤이면 밖에서도 소식을 들을 수 있을 게요.”
“…미안해요. 은공을 믿지 않고 검부터 휘둘러서.”
“나야말로.”
멋쩍게 웃은 그가 손가락을 들어 그녀의 눈에 맺힌 눈물을 닦아주었다.
“놀라게 해서 미안하오. 그리고 믿어주어 고맙소.”
부끄러운 마음에 벽려군이 어깨를 움츠린 그 때, 그의 안색이 일변했다.
“이런.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오.”
“왜 그러시죠?”
“적들이 오고 있소. 가야 하오.”
먼 하늘을 바라보며 읊조린 그가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
벽려군은 움찔 놀랐으나 결코 잡힌 손을 뿌리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