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tial Streamer RAW novel - Chapter 126
흉터 (4)
콰앙!
검과 검이 부딪힌 충격파가 사방으로 뻗어나가며 대기가 비명을 질렀다.
잠시 뒤 뿌연 흙먼지가 가라앉으며 드러난 광경은 참혹하기 그지 없었다.
“제법이군.”
피투성이가 된 몰골로 울컥 피를 게워내는 금안의 사내.
허나 그를 상대하는 여인의 모습 역시 처참하긴 마찬가지였다.
“도대체 얼마나 많은 여인들의 목숨을 제물로 그 힘을 손에 넣었지?”
떨리는 목소리로 분노를 토해낸 벽려군은, 자신과 사내를 둘러싼 마교도들을 보며 이를 악물었다.
지금은 가만히 둘의 대결을 지켜볼 뿐이지만, 조금이라도 틈을 보이면 굶주린 승냥이 떼로 돌변할 이들이다.
“후….”
이마를 타고 흘러내리는 붉은 핏방울을 옷소매로 닦아낸 그녀는, 힘찬 기합성과 함께 다시 사내를 향해 달려들었다.
“하앗-!”
콰앙!
싸움의 재개를 알리는 충돌음과 함께 시린 검광들이 허공을 수놓기 시작했다.
짙은 묵광을 흩뿌리는 검을 상대로 정신없이 옥빛 검을 휘두르던 벽려군은, 문득 쇄골과 어깨에서 시작된 통증에 미간을 찌푸렸다.
그것의 정체는 다름 아닌 마기.
비록 상처 자체는 깊지 않았으나 피부를 통해 침투한 마기는, 마치 화상이라도 입은 듯 화끈거리며 통증을 선사했다.
허나 그것조차 그녀의 입술에서 피어나는 열기에는 미치지 못했다.
‘은공….’
맞은편에서 검을 휘두르는 사내를 보며, 벽려군은 조금 전 뜨거웠던 입맞춤을 떠올렸다.
***
“은공을 베라뇨. 그게 무슨…?”
“정확히는 그대의 옥녀검결로 내게 검흔을 남겨주길 바라오. 되도록 깊게.”
“어째서….”
황망한 표정을 짓는 그녀를 향해 석율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보였다.
“기필코 그대를 사로잡겠다고 교주를 비롯한 본단의 수뇌부들 앞에서 호언장담을 하고 오는 길이오. 이대로 돌아가면 처벌을 면치 못하겠지.”
“그렇다고 일부러 상처를…. 그러지 마세요. 차라리 저와 함께 중원으로….”
“그럴 수는 없소.”
석율이 고개를 저었다.
“이곳에서 쌓은 인연이 적지 않소. 내가 말도 없이 사라지면 그 피해는 고스란히 그들에게 돌아갈 것이오.”
“그래봤자 그들은….”
“려군. 그대가 마교에 원한이 깊다는 것은 나도 잘 아오. 나 역시 이곳에 오기 전까지는 모든 마교도들이 인두겁을 쓴 악마인 줄 알았으니. 허나 지내고보니 이곳 역시 사람 사는 곳이더구려.”
“그랬…나요.”
말끝을 흐리는 그녀에게 석율이 싱긋 웃어보였다.
“그대에게 내 생각을 강요할 마음은 없소. 지금 나눌만한 이야기도 아니고.”
“상처는 얼마나….”
“깊을수록 좋소. 교주는 의심이 많은 사람이오. 이렇다 할 부상도 없이 그대를 놓친다면 내 의도를 의심할 것이오.”
자해의 당위성을 설명한 그는 이어서 자세한 계획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내가 익힌 기공은 탐지에 뛰어나 멀리서도 적의 숫자와 위치를 알 수 있는 것은 물론, 지형을 파악하는 일에도 제법 유용하오. 집법당의 추종향도 제거했으니 쫓길 염려는 적을 것이오.”
“아… 그럼 집법당의 추적을 계속 따돌릴 수 있었던 것도.”
“그렇소. 다만 이번에는 그 힘을 반대로 사용할 생각이오.”
“반대로요?”
벽려군의 반문에 그의 얼굴에 짙은 미소가 피어났다.
“우린 일부러 마교도를 찾아다닐 것이오.”
잠시 뒤, 석율로부터 모든 계획을 전달 받은 벽려군은, 단단히 각오를 다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은공의 말씀에 따르겠어요. 다만 그 전에 한 가지 조건이 있어요.”
“조건이라면?”
“제 몸에도 마공의 흔적을 남겨주세요.”
“그건 안 될 말이오.”
벽려군의 요구를 일언지하에 거절한 그는, 이어서 그녀가 납득할 만한 이유 덧붙였다.
“난 교주를 비롯해 교내의 수뇌부들에게 주목을 받는 입장이니 증거가 필요하다지만, 그대는 다시 먼 길을 돌아가야 하지 않소? 도중에 어떤 위험이 도사리고 있을지 모르는데 상처까지 더할 순 없소.”
“그래도 어찌 은공의 몸에만 상처를 입히겠어요.”
“아까 전 내 심장을 찌르려던 사람이라고는 믿기 힘들구려.”
“은-공-.”
그녀가 민망함에 곱게 눈을 흘긴 순간 석율의 표정이 잠시 멍해졌다.
벽려군은 혹여 자신의 얼굴에 뭐라도 묻었나 싶어 손으로 얼굴을 더듬었다.
“…은공?”
“아, 미안하오. 듣고 있소.”
“제게도 증거를 남겨 달라 말씀드렸어요. 비록 마교처럼 강제로 몸을 수색하는 일은 없겠지만, 무림맹에도 눈은 존재해요. 세작들의 의심을 피하려면 그들에게 보여줄 흔적 정도는 필요하지 않을까요?”
“하지만 려군. 마기에 당한 상처는 쉽지 낫지 않소. 그대의 몸에 흉물스런 흉터가 남을지도 모르오.”
“어차피 은공이 아니었다면 곤륜산에서 뼈를 묻을 운명이었으니, 작은 흉터쯤은 아무렇지 않아요. 부디 은공 혼자서 모든 짐을 짊어지려 하지마세요.”
한 치도 물러남이 없는 그녀의 모습에 결국 그가 먼저 백기를 들었다.
“하아…. 알았소. 그리 합시다.”
“저부터 해주세요. 은공께서 먼저 하시면 약속은 나 몰라라 달아나실지 모르니.”
“…못 당하겠군.”
혀를 찬 그가 천천히 검을 들어올리니, 스멀스멀 흘러나온 묵빛 마기가 주변을 잠식했다.
이미 그에게 모든 사정을 들었음에도 흠칫 놀랄 정도로 섬뜩하고 불길한 마기였다.
“이제라도 그만두는 것이 어떻겠소.”
“…해주세요.”
“언제부터 이리 고집이 셌소.”
벽려군은 아무것도 못 들은 척 말을 돌렸다.
“어떤 무공을 사용하실 생각인가요.”
“…구유무상검이라 하오. 설마 날 죽일 뻔했던 마공을 내가 익히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소.”
그녀의 긴장을 풀어주려는 듯 우스갯소리를 던진 그가 문득 머쓱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상처를 새겨야 하니 옷을 조금 걷어줄 수 있겠소?”
“옷을요? 어디를….”
“쇄골이나 어깨 부근이 좋을 듯하오. 평소 옷에 가려지면서도 남들에게 드러내기에 무리 없는 곳이지.”
“…네.”
군말 없이 고개를 끄덕인 그녀의 옷이 스르르 흘러내리며 새하얀 어깨가 드러났다.
‘그러고 보니 예전에도 이런 일 있었지.’
문득 서장 승려들과의 전투에서 입은 화상을 치료하는 과정에서, 그에게 맨 등을 드러냈던 기억을 떠올린 벽려군의 얼굴이 새빨갛게 물들었다.
“이 정도면 될까요?”
목소리는 또 왜 그렇게 떨리는지.
“실례하겠소.”
“네….”
핏-.
시퍼런 칼끝이 살갗을 파고들었으나, 무림인이라면 이런 상처쯤은 일상다반사.
벽려군은 신음소리 한 번 내지 않았다.
“괜찮소?”
“따끔한 정도예요.”
“시간이 지나면 심해질 것이오. 마기가 괜히 마기겠소.”
기어코 고집을 부려 상처를 새긴 그녀가 마뜩찮았던 걸까?
피를 닦을 천을 건네는 그의 목소리가 어쩐지 퉁명스럽다.
“피를 닦으시오.”
상처 자체는 깊지 않아 출혈은 금방 멈췄다.
벽려군은 피를 닦아내며 자신의 몸에 새겨진 흔적을 면밀히 살폈다.
그가 특별히 신경을 쓴 것인지, 아니면 그저 그를 향한 호감 때문인지.
한 떨기 꽃을 닮은 상처는 흉하기는커녕 어딘지 신비로워 보였다.
“이젠 제 차례네요. 오늘 절 놀라게 하셨으니 각오는 되셨나요?”
스릉-.
옷을 추스른 그녀의 허리춤에서 월녀검이 뽑혀 나오자, 그가 짐짓 어깨를 움츠리며 엄살을 떨었다.
“안 아프게 부탁하오.”
“농담이에요.”
“나야말로 농담이니 부디 깊게 새겨주시오. 그래야 교주 무리를 속일 수 있소.”
각오가 깃든 눈빛에 벽려군 또한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뒤, 그녀의 옥빛 보검이 허공을 화려하게 수놓았다.
스걱-.
“으음….”
시린 검광이 깊숙이 지나간 그의 몸이 반사적으로 움찔 튀어 올랐다.
뒤이어 깊게 벌어진 상처를 통해 붉은 선혈이 울컥울컥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근맥과 장기가 상하지 않도록 그리 주의를 기울였건만 출혈이 적지 않다.
허나 그조차 석율이 그녀에게 요구한 사항이었다.
“가까이 오시오, 려군.”
그녀를 곁으로 이끈 석율이 자신의 몸에서 흐른 피를 서로의 몸에 꼼꼼히 바르기 시작했다.
“잠시 실례하겠소.”
“상처가 심해요. 어서 지혈하세요.”
“아직… 멀었소. 마교인들이 생각보다… 의심이 많더이다.”
그는 벽려군을 안심시키려는 듯 너스레를 떨었으나, 통증에 찌푸려진 미간과 송골송골 맺힌 식은땀을 숨기지는 못했다.
과거 자신을 수차례나 위기에서 구원한 것으로 모자라 또다시 깊은 부상을 자처한 사내를 바라보는 벽려군의 눈엔 안쓰러움과 미안함이 가득했다.
그 사이, 어느덧 의복에 피 칠갑을 마친 그의 손은 그녀의 얼굴 위에 도달해 있었다.
슥, 슥-
“불쾌해도 조금만 참으시오.”
“아니에요.”
피에 젖은 손길이 얼굴 위를 오갈 때마다 비릿한 혈향이 코를 스쳤으나, 그녀는 불쾌하기는커녕 그를 향한 자신의 마음이 점차 부풀어 가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러던 어느 순간, 두 사람의 손이 허공에서 교차했다.
“려군…?”
“땀이 많이 나요.
어깨 위로 손을 뻗은 벽려군은 그의 이마에 가득한 식은땀을 옷소매로 찍어내기 시작했다.
석율은 그녀의 갑작스런 행동에 놀란 듯 잠시 멈칫했으나, 이내 분주히 손을 놀리며 위장을 재개했다.
“…….”
“…….”
서로가 서로의 얼굴을 매만지니 시선이 자주 겹치는 것은 당연했다.
코앞에서 느껴지는 숨결과 손끝의 온기에, 문득 절벽 틈새에서 있던 일이 떠오른 벽려군은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하지만 그녀는 물론 석율 또한 약속이라도 한듯 서로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스륵, 슥-.
침묵 속에 살갗이 스치는 소리만 옅게 울려퍼지는 가운데, 서로를 응시하는 둘의 심장소리는 끝을 모르고 크기를 더해갔다.
그리고 마침내 땀 닦기에 여념이 없던 그녀의 손끝이 그의 입술 위에서 멈춰선 순간,
“…은공.”
어디서 솟은 용기였을까.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발끝을 세우고 있었다.
“아?”
당황한 석율의 눈이 휘둥그레진 것과 둘의 입술이 포개진 것은 거의 동시였다.
“벽 소….”
그의 다급한 음성은 벽려군의 입술 안에서 녹아 사라졌다.
뽀드득-.
눈밭 위를 뒷걸음질 치던 큼직한 발은 조그만 발에 금세 따라잡혔다.
달아나려는 입술을 쫓아 까치발까지 든 벽려군은, 이어서 그의 어깨 위로 두 팔마저 휘감았다.
“려구… 읍?”
“으응-. 응-.”
잠시 떨어졌던 입술이 다시 빈틈없이 맞붙으며 혀가 깊숙이 뒤얽혔다.
뒤늦게 마기가 스며든 상처 부위에서 화끈한 통증이 밀려들었지만, 벽려군은 아랑곳 않고 서툴지만 오래도록 그의 입술을 탐했다.
“하아, 하….”
“하….”
마침내 떨어진 입술 사이로 뜨거운 숨결이 오갔다.
그러나 몽롱한 기분에 젖어 있던 것도 잠시, 통증도 잊고 벙찐 표정을 짓고 있는 석율과 눈이 마주친 벽려군은, 뒤늦게 밀려드는 부끄러움에 얼굴을 폭 숙이며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변명 아닌 변명을 했다.
“아픔은 좀 가셨나요?”
“…….”
“이제 그만 가요. 이쪽으로 가면 되나요?”
석율로부터 몸을 돌린 그녀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걸음을 재촉했으나, 그녀의 입술에 남은 화상 같은 열기는 오래도록 지워지지 않고 제자리를 맴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