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tial Streamer RAW novel - Chapter 131
혼돈기 (1)
부교주와의 밀담을 끝내고 밖으로 나오던 중 봉제인형을 손에 쥔 조그만 소녀가 눈에 띄었다.
“주아.”
“천 가가!”
뒤늦게 날 발견한 아이가 도도도 달려와 내 허리를 꼭 끌어안았다.
“벌써 가는 거예요?”
“응. 친구들이랑 잘 놀았어?”
“이럴 줄 알았으면 일찍 올걸… 좀 만 더 있다 가면 안 돼요?”
“왜 안 돼.”
작은 키 만큼이나 가녀린 어깨를 토닥이며 쪼그려 앉은 나는, 기쁨으로 물드는 커다란 눈망울을 마주보며 생각에 잠겼다.
정말 이 순진무구한 소녀가 건곤대나이의 비밀을 쥐고 있을까?
죽기 직전 자식에게 유산의 행방을 알리는 클리셰는 영화나 이야기 속에도 자주 등장하지만, 이번에는 경우가 달랐다.
그야말로 기습에 가까웠다는 교주쟁탈전 속에서, 전대 교주가 자신의 죽음을 어찌 알고 자식에게 유산을 남기겠는가.
더구나 교위 찬탈이 이루어지던 당시 그녀는 갓난아기에 불과했다지 않은가!
나처럼 환생해서 전생의 기억이라도 지니고 있지 않은 이상, 선친의 유지를 잇는 건 불가능했다.
그렇다고 인망 두텁기로 소문난 전대 교주가, 어린 딸의 몸에 건곤대나이에 대한 단서를 남겼을 것 같지도 않고.
8년 동안 그녀를 친딸처럼 돌봐온 부교주가 발견하지 못한 걸로 봐선 정말 없는 거겠지.
“천 가가?”
“아, 미안. 잠시 딴 생각을 하느라.”
“많이 다치셨다고 들었어요. 교주님께도 혼나셨다고.”
“우리 주아가 대견하네? 오빠 걱정도 다 해주고?”
“…히힛.”
칭찬이 부끄러운지 몸을 배배 꼬는 소녀의 뒤로 호위인 흑백쌍영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나 은주아의 호감어린 시선과 달리, 날 바라보는 두 사람의 눈빛에는 첫 만남에선 볼 수 없었던 적개심이 가득했다.
하긴, 부교주의 명령에 따라 어쩔 수 없이 나와 주아의 접촉을 허용하고는 있으나, 명백한 교주 파벌인 내가 그녀와 접촉하는 것이 어찌 불편하지 않겠는가.
그런 속내를 반영하듯 그들은 내가 등장한 순간부터 언제든 출수할 수 있도록 검의 손잡이에 손을 올리고 있었다.
정작 어린 주아는 아무것도 모르는 눈치지만.
“두 분 모두 오랜만이오.”
“못 뵌 사이 집법당주로 진급하셨다고요. 감축드립니다.”
인사에 대꾸한 것은 누나인 백영 금하선 뿐이었다.
반면 동생 금무경은 여전히 굳은 얼굴로 경계 태세를 풀지 않고 있다.
그러나 나 역시 두 사람과 억지로 친해질 생각은 없었다.
어딘가에서 지켜보고 있을 교주의 눈을 속이기 위해서라도, 우리 관계는 딱 이 정도가 적절했으니.
“지난 출전 때 검후와 자웅을 겨루셨다고요.”
“백영께서도 관심이 있으시오?”
“비록 진영은 다르지만 제 나이 또래의 여인들 중 검후 벽려군을 동경하지 않는 이는 없을 것입니다. 괜찮다면 그녀와의 싸움을 자세히 들을 수 있을까요?”
“나도 들을래요.”
때마침 은주아도 관심을 보인 터라, 난 사양 않고 지난 임무에서 있었던 일들을 아이의 눈높이에 맞춰 생생하게 전달했다.
알고 보면 짜고 친 고스톱이긴 해도, 당시 나와 검후의 대결은 적어도 겉으로 보기엔 건곤일척의 명승부였으니까.
더구나 전투 장면도 빠짐없이 녹화해둔 터라 묘사에 어려움은 전혀 없었다.
“그 때 검후의 검이 기이한 움직임을 그렸소. 아차, 한 순간에는 이미 가슴을 깊숙이 베고 지나간 뒤였지.”
가슴에 길게 남은 흉터를 살짝 드러내자 은주아가 당시 상황을 상상한 듯 제 눈을 꼭 가렸다.
그러나 그녀는 손가락 사이로 드러난 호기심 어린 눈빛마저 숨기진 못했다.
“으으….”
“그것이 월녀검결의 검흔…. 헌데 천 당주의 이야기 솜씨가 참으로 놀라워요. 마치 눈앞에서 그려지는 듯해요.”
그렇겠지. 실제로 영상을 보면서 설명하고 있으니까.
“과찬이오, 소저.”
난 사기꾼, 좆뱀, 노출 멈춰 따위의 채팅이 난무하는 안대 안쪽을 지그시 누르며 나머지 이야기를 이어갔다.
마침 교주 또한 주아의 감시를 명한 터라 명분은 충분했으니.
그렇게 난 제법 오래도록 부교주의 처소에 머물며, 간만에 평화로운 시간을 만끽했다.
***
교주와 부교주를 알현한 지도 어느덧 한 달이 흘렀다.
그 사이 집법당주로서 내가 쌓은 커리어는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화려했다.
수년이 지나도록 미궁에 빠져있던 살인사건의 범인이나 새외의 첩자 색출은 물론, 사소하게는 각종 비리에 연루된 잡범들까지. 누구도 내 카메라를 피해갈 순 없었다.
심지어 얼마 전에는 납품 비리 의혹이 있던 숙수와 시녀를 연행하기 위해 직접 광명정 주방에 쳐들어가기까지 했으니.
물론 앞서 언급한 사건의 범인들이 모두 진범인 것은 아니었다.
내 최우선 목적은 교주를 잡을 덫을 놓는 것이지, 클린한 마교를 만드는 것이 아니니까.
이를 위해 향후 계획에 쓸모가 있을 것으로 판단되는 이들이라면, 또 다른 악인에게 누명을 씌우는 일도 서슴지 않고 행해졌다.
맵핵과 더불어 어디든 침투 가능한 고든람쥐의 능력이면 증거조작은 그야말로 껌이나 마찬가지였으니.
어차피 죽을죄를 진 놈들이니 죄목 몇 가지가 더해진다고 별 문제는 없겠지.
물론 상기의 과정에서 음성변조기가 또 한 번 활약했음은 두말할 나위 없었다.
-네가 저지른 짓들을 알고 있다.
“누, 누구시오!”
-얌전히 때가 도래하길 기다려라. 다시 너를 찾을 테니.
그런 식으로 음지와 양지를 넘나들며 범죄자들을 통제하자, 임관 초기 몇 번이나 도마에 올랐던 최연소 집법당주에 대한 우려 는 씻은 듯 사라졌다.
오히려 지금은 나를 금안사신이라 부르며 두려워하는 시선들이 훨씬 많을 정도였다.
한편으로 난 인망을 쌓는데도 최선을 다했다.
성과금과 급여의 일부를 가난한 교도들의 구제에 사용하는 한편, 나보다 계급이 높은 실세들에게 눈도장을 찍고 다니는 것도 잊지 않았다.
지난 번 교주에게 임무의 실패의 죄를 추궁 받을 때, 그간 쌓아둔 인맥이 얼마나 큰 도움 되었던가!
비록 시작은 협박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나선 이들이 대다수이나, 이후 그토록 많은 이들이 자발적으로 날 비호할 것이라곤 상상도 못했다.
이처럼 실적과 인망을 쌓는 과정에서 난 마냥 웃지 못 할 일도 더럭 겪고 있었다.
“공자. 백열금가에서 혼담이 들어왔습니다.”
“…금가의 혼인은 저번에 거절하지 않았소?”
“다른 여인입니다.”
“골치 아프군.”
젊은 나이에 벌써 집법당주에 자리까지 오른 금안마군의 제자!
그 자체만으로 혼기가 찬 여식을 둔 가문에게는 군침 도는 먹잇감이었다.
그 탓에 집법당과 처소로 날아드는 혼담 요청 서신만 하루에 수십 통.
개중에는 홍사강의 사촌동생으로부터 온 것도 있어서, 길길이 날뛰는 그녀를 달래느라 얼마나 진땀을 뺐는지 모른다.
난 아직은 일이 우선이라며 모든 혼담을 거절했지만, 그럼에도 러브콜은 여전히 그치질 않고 있었다.
그와는 별개로 교주에게 하사 받은 여인들에게 가르칠 무공의 분류는 순조롭게 진행 중이었다.
실제로 이미 쓸 만한 무공들을 서너 가지 찾아내기도 했다.
다만 살펴볼 무공이 워낙 많은 탓에 아직도 훈련에 돌입하지 못했을 뿐.
성별은 물론, 타고난 기맥과 근골에 따라 어울리는 무공은 다를 수밖에 없다.
이왕이면 불행한 운명에 휘말린 여인들에게 가장 알맞은 무공을 전수하고 싶은 마음이다.
아마 교주도 내 머리에 수천가지 무공이 저장되어 있음을 알았으면 그리 쉽게 전수를 허락하진 않았으리라.
그 수없이 많은 비급들 중 현재 내가 찾고 있는 것은 크게 두 가지.
하나는 열다섯 여인에게 어울릴 만한 개별무공.
다른 하나는 그녀들에게 소속감과 정체성을 부여할 공통의 무공과 합격진.
[태양강기공] [사내가 타고 나는 양기를 극한까지 단련하면 몸속에 또 하나의 태양을 만들 수 있음이니….]이건 패스.
오, 이건 괜찮네. 오요환영수 메모….
“하…. 이걸 언제 다 확인하냐.”
내가 우희 정도의 눈썰미만 있었어도 진즉 분류가 끝났을 텐데.
난 아직도 산처럼 쌓인 무공을 보며 한숨을 흘렸다.
그렇게 정신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던 어느 날이었다.
일과를 마친 뒤 평소와 마찬가지로 스캔본 탐색에 심취해 있던 내 눈에 독특한 제목의 비급 한 권이 들어온 것은.
[양기(兩氣)]두 가지 기운?
이건 또 뭐야.
무공비급이라기엔 지나치게 조촐한 제목이 오히려 호기심을 자극했다.
하루 열 두 시간씩 무지성으로 스캔본을 뜰 당시에는 무심코 지나쳤는지 본 기억조차 없는 제목이다.
어디, 안쪽에는 무엇이 적혀 있을지.
난 샘솟는 호기심 속에 일시정지 버튼을 해제했다.
[명교 군사 천기자 문원옥이 남긴다.난 어느 날 생각했다.
무를 논함에 있어 빠지지 않고 거론되는 것이 바로 음과 양, 두 가지 기운이다.
또한 음양의 조화를 이르러 태극이라 칭하며, 이는 중원 무당파 무공의 근간이기도 하다.
상반되는 두 가지 기운을 융합하여 한 차원 위의 기운을 이끌어내는 것.
그렇다면 선과 마, 두 가지가 하나로 섞이면 어떻게 될까?]
그것은 비급이라기보다 수기에 가까웠으나, 난 첫 장을 넘기기도 전에 매료되고 말았다.
선기와 마기의 융합이라니.
이거 완전 내 거잖아?
기연을 얻었다는 생각에 비급을 바라보는 내 눈빛은 한층 진중해졌다.
난 서둘러 다음 부분을 읽기 시작했다.
[선기와 마기는 보통 하나로 섞일 수 없으며, 더구나 이를 한 몸에 지닌다는 것은 그야말로 어불성설.허나 난 궁금증을 버릴 수 없었다.
선과 악 또한 사람이 만든 개념이니 태초에 그것들은 하나로 존재했을 터.
나는 그 미지의 기운을 혼돈기라 칭하기로 했다.]
“혼돈기….”
중2병 느낌이 물씬 나서 좋은걸?
짤막한 감상과 함께 고개를 끄덕이는 사이, 영상은 어느덧 비급의 다음 페이지를 가리키고 있었다.
[그 날 부로 난 실험에 착수했다.그러나 한 가지 문제가 발생했다.
본교에 선기를 지닌 이가 극히 드물다는 것.
난 어쩔 수 없이 마기에 대한 연구부터 시작했다.]
이어지는 페이지부터는 천기자가 수행한 수많은 인체 실험의 과정을 다루고 있었다.
“…이거 완전 매드 사이언티스트 아니야?”
난 무려 마교의 군사직을 지낸 이가 저술한 비급이 어째서 먼지로 가득했는지 비로소 알 수 있었다.
선기와 마기의 융합이라는 주제만으로도 보통의 무림인들 눈에는 허황된 이야기로 비쳤을 텐데, 거기에 이런 정신 나간 내용이라니.
그러나 난 꺼림칙함을 느끼면서도 책장을 넘기는 것을 멈출 수 없었다.
팔락, 팔락-.
영상 속 책장이 몇 번 더 넘어간 뒤,
마침내 서론이 끝나고 진기 유도법이 서술된 구간이 펼쳐졌다.
[혼돈기를 이루는 첫 단계는 마기와 선기를 바른 길로 인도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우선 마기는 단전을 나와 기해와 기문을 지나며…]“기해에서 기문으로….”
설명에 따라 기운을 인도하며 나머지 부분을 읽는다.
[이후 천돌을 지나 곧장 천주로 이끄는 방법을 먼저 시도했으나, 그 결과 실험체의 머리가 터지고 말았다.]“억, 시발, 깜짝이야?”
화들짝 놀라 기운을 거둔 나는 진득한 욕설을 퍼부으며 화면 속 비급을 노려보았다.
하마터면 요단강을 건널 뻔 하지 않았나!
이런 경고는 첫줄에 해줘야지!
그러나 이어지는 뒷부분은 더욱 가관이었다.
[직접 안 해보길 다행이다.내가 죽으면 이 위대한 지적 탐구심도 한 줌 흙으로 사라질 테니.
다만 이번 일로 교내에서 수급한 마인들이 모두 죽고 말았다.
외당주에게 연고 없는 자들을 부탁해보는 수밖에.]
그렇게 비급은 지난한 연구 과정을 지나 어느덧 마지막 단계에 이르렀다.
[그렇게 나는 천신만고 끝에 혼돈기를 이루기 위한 첫 걸음을 뗄 수 있었다.그러나 이것은 시작에 불과하다.
이제부터는 선기를 지닌 실험체가 필요하니.
하지만 본교에 선기를 지닌 이는 마기를 지닌 이보다도 드물다.
게다가 어젯밤, 무당파에서 오랜 세월 세작으로 지내며 선기를 쌓은 마지막 실험체마저 주화입마에 들고 말았다.
고문을 너무 심하게 한 걸까?
……
난 어쩔 수 없이 선기를 익힌 무인을 찾기 위해 본교를 떠나기로 했다.
북숭소림 남존무당이라, 각기 불가와 도가로 서 명성을 떨친 두 곳이라면 내 지식욕을 채워줄 실험체들을 얼마든 찾을 수 있으리라.]
“하…!”
이 미친 사이코 새끼가 결국 인체실험을 하겠답시고 마교 밖으로 기어나갔구나!
숨 쉬는 것도 잊고 비급을 탐독하던 난, 흉악범죄자의 수기를 엿보는 듯한 긴장감 속에 다음 페이지를 넘겼다.
그 순간, 내 입에선 깊은 탄식이 터져 나왔다. 그도 그럴 것이, 다음 페이지에 적혀 있던 것은….
“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