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tial Streamer RAW novel - Chapter 139
배반 (7)
벽려군의 중원 복귀는 매우 느린 속도로 이루어졌다.
천서원과의 싸움에서 치명상을 입었다는 소문을 퍼뜨리기 위해선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그러나 연기에 몰두하는 와중에도 그녀가 빼먹지 않고 챙기는 일과가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종종 하오문에 들러 천서원에 대한 소식을 알아보는 것이었다.
세간에는 이미 벽려군이 선대의 복수에 실패했다는 소문이 파다했기에 이러한 행동에 의문을 갖는 이는 드물었다.
물론 혈혈단신으로 마교에 쳐들어가 원수와 대결을 펼치고 생환했다는 것 자체가 대단한 업적이었기에, 그녀의 실패를 비웃거나 험담하는 이들은 사마진영에 속한 자들이 대부분이었다.
오히려 복수행 실패 이후 정파에서 그녀의 위상은 한층 더 드높아졌으니, 세상은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허나 벽려군에게 있어 그런 세간의 평가 따위는 아무래도 좋았다.
작금의 그녀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오직 천서원으로 분장한 가휘의 안위 뿐.
마음 같아선 지금 당장이라도 곤륜산으로 달려가 그를 돕고 싶었지만, 그것이 도리어 그의 발목만 잡는 일임을 그녀는 누구보다 잘 알았다.
“그에게 이제 내 도움 따윈 필요 없겠지.”
천무학관이 휴관한지 일 년여 만에 재회한 그는 예전과는 비할 수 없는 고수가 되어 있었다.
물론 그가 여태껏 석율로서 보여준 모습들 역시 일개 수련생이라곤 믿기 힘든 성취였으나, 곤륜산 일대를 자기 집 앞마당처럼 뛰어다니며 그녀를 이끌던 듬직한 뒷모습은 상상을 초월했다.
그는 이미 완성된 무인이었고, 의지할 수 있는 남자였다.
“…사부님, 전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요.”
그와의 뜨거웠던 입맞춤을 떠올린 그녀는 쿵쾅거리는 심장 부근을 움켜쥐며 읊조렸다.
당시에는 아무 생각 없이 충동적으로 저지른 일이었지만, 뒤늦게 은공의 정체가 가휘란 것을 확신하고 나니, 날이 갈수록 그녀의 머릿속은 복잡해졌다.
교관과 수련생이라는 입장은 차치하더라도, 그에겐 이미 제갈우희와 주약빈이란 어리고 아름다운 두 여인이 있지 않은가!
순간, 열 살 연하의 소녀들과 연적이 되어 신경전을 벌이는 자신의 모습이 떠오르자 벽려군은 그만 눈앞이 아찔해지고 말았다.
하지만 그건 상상으로만 끝내야 하는 일이었다.
교관이 되어 수련생의 정인에게 집적대다니, 그것은 그녀가 여태껏 쌓아온 명성은 물론 월녀문과 그녀의 사부의 이름에까지 먹칠을 하는 행위였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이미 그녀의 연심은 커질 대로 커진 것을.
“아….”
그렇게 한숨만 깊어가던 어느 순간, 그녀의 머릿속에 묘안이 떠올랐다.
아니, 나중에 생각해보면 그것은 묘안이라기보다는 저속한 계략에 가까웠다.
차라리.
차라리 이대로 그가 가휘인 것을 영원히 모른 체한다면.
조가휘가 아닌 천서원을 사랑한다면 그의 곁에 머물 수 있지 않을까?
그의 일부나마 차지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런 번민 속에 길을 따라 걷다 보니, 두어 달이 지났을 무렵 그녀는 한 장원의 대문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무슨 일이시오.”
“아, 네?”
“조가장에 무슨 일이냐 묻지 않았소.”
“아….”
이곳이.
뒷말을 속으로 삼킨 그녀는 고개를 들어 현판에 웅혼한 필체로 적힌 조가장이란 글자를 마주봤다.
이곳이야말로 그녀가 연모하는 사내가 태어나고 자란 장소.
지금은 그의 부모께서 거주하시는 장소.
자기도 모르게 활짝 열린 문 너머를 기웃거리던 그녀는 결국 머뭇거리며 문지기에게 말했다.
“천무학관의 벽려군이에요.”
“벽려… 검후! 저, 실례지만 명패를 보여주실 수 있으십니까?”
“여기….”
“음…. 벽 여협, 죄송하지만 혹시 가휘 도련님을 만나러 오셨다면, 도련님께선 현재 폐관 중이어서 누구도 뵐 수 없습니다.”
“그렇군요.”
외부에는 그렇게 둘러댔구나. 폐관이라고.
이미 가휘와 천서원이 동일인임을 확신하는 그녀에게, 그의 부재소식은 확신을 더욱 굳히는 계기가 될지언정 실망을 주진 못했다.
동시에 그녀는 깨달았다.
자신이 왜 이곳으로 왔는지.
마교를 탈출한 ‘그’가 가장 먼저 들를 곳이 어디일지.
그 생각, 그 욕심이 그녀의 발걸음을 이곳으로 이끈 것이 분명했다.
‘어차피 교관직은 사퇴했으니까.’
당장 그녀에겐 별다른 일정이 없었다.
무림맹에 올릴 보고 역시 이미 서신으로 보낸 지 오래였다.
애초에 교관직을 내려놓은 이상, 그녀는 무림맹 소속조차 아니었으니.
생각을 마친 그녀의 얼굴에 수줍음인지 결연함인지 모를 표정이 깃들었다.
“혹시 장주님 내외를 뵐 수 있을까요?”
조심스럽게 묻는 그녀의 얼굴은 도화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그 날, 검후 벽려군이 조가장에 일시적으로 의탁했다는 소문이 강호로 알음알음 퍼져나갔다.
***
광명정, 비밀통로 앞.
난 달아나는 교주의 등에 비수를 꽂은 사내를 차가운 눈빛으로 바라봤다.
“군사. 이게 어찌 된 일이오?”
“보는 그대로이네.”
“목적을 말하시오.”
“목적이랄 게 따로 있겠나. 그저 바뀐 하늘 아래에서 덧없는 목숨을 부지하려 발버둥 치는 것이지.”
한 마디로 목숨구걸이라는 이야기였으나, 난 그를 쉽사리 믿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는 명교의 다른 누구보다도 교주의 심복으로 이름을 알린 자였으니.
“군사께선 교주의 심복이 아닙니까.”
“독단적이고 난폭한데다 변덕스럽기까지 한 군주를 좋아하는 군사는 얼마 없을 것이네. 비록 어쩌다 그의 눈에 띄어 등용되긴 했으나, 목숨이 아까워 따랐을 뿐 그를 진심으로 섬긴 적은 없네.”
“이제 와서 말씀이십니까?”
“전 집법당주의 죽음이 결정적이었지. 다만 나도 어쩔 수 없는 겁쟁이에 소인배인지라, 부교주의 승리가 확실 시 되기 전까진 이렇게 전면에 나설 수 없었네.”
그의 필사적인 변명에도 난 어깨를 으쓱한 것이 전부였다.
“그저 목숨을 연명하기 위한 박쥐의 변명처럼 들리는군요. 설마 최후에 교주의 발을 잠시 묶어둔 것으로, 가장 큰 공을 세웠다 주장하시려는 건 아니실 거라 믿습니다.”
“물론이네. 이건 그저 소소한 성의 표시에 불과하지. 아마 내 이야기가 끝나면, 자네도 알게 모르게 내게 빚을 졌음을 알게 될 것이네.”
“제가요? 군사께요?”
“장상철.”
그 이름을 듣는 순간, 내 입에 걸려 있던 미소가 씻은 듯 사라졌다.
“자네가 엉뚱한 이를 세작으로 지목하는 바람에, 졸지에 병기부주의 자리에 오른 그 무림맹의 ‘진짜’ 세작 말일세.”
“장상철이 무림맹의 세작이란 말씀이십니까? 이 일이 끝나면 다시 면밀히 조사해봐야겠군요.”
“모른 척 할 셈인가. 그럼 이건 어떤가. 동궐, 육가정, 정소월….”
놀랍게도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이름들의 대다수는, 여태껏 내 입맛에 맞게 뇌옥에 잡아넣은 이들의 이름과 거의 일치했다.
물론 다들 겉으로 드러나지 않았을 뿐, 인면수심의 범죄를 저진 이들이었기에 누명을 씌우는 데 딱히 죄책감은 들지 않았지만.
“…모두 제가 추포한 이들이군요.”
“누명을 씌워서 말이지.”
그의 확신에 찬 표정을 보니, 더 이상 숨기는 것은 의미가 없어 보였다.
난 여태까지의 표정을 버리고 차가운 눈빛으로 그를 응시했다.
“알아선 안 될 것을 알고 계시는군요.”
“…진정하게. 협박 따위를 할 생각은 아니니. 아까 전 전장에서 자네가 펼친 활약을 보았네. 아마 나는 상대도 안 될 테지.”
“원하는 게 무엇입니까.”
“나는 그저 솔직하게 대화가 하고 싶을 뿐이네.”
나는 잠시 그의 눈을 마주보던 끝에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교주가 죽은 순간 승리는 정해졌으니.
게다가 곽정유가 내 비밀을 알아낸 방법과, 그걸 알면서도 여태껏 침묵을 지킨 이유 또한 궁금한 것이 사실이고.
“도대체 언제부터 알고 계셨죠?”
“시작은 자네가 전 병기부주를 무림맹의 세작으로 지목했을 때였지. 그 때, 내가 자네에게 도움을 주었던 것을 기억하나?”
“특정 세력이 잠복해 있는 조직 몇 군데를 집어주셨죠. 정확히 어떤 이가 세작인지까지는 알지 못한다면서.”
“사실 그건 거짓이었네. 무림맹의 세작이 누구인지는 이미 진즉 파악이 끝났지. 허나 세작을 잡아봤자 어차피 다른 세작이 빈 자리를 채울 게 뻔하지 않은가? 그럴 바에는 차라리 역정보를 흘리기 위한 용도로 남겨두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네만….”
“제가 미끼를 물었군요. 그래서… 그걸 알면서도 절 놔두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내 말에 그가 옅은 미소를 머금었다.
“당시엔 그저 교주의 눈에 든 젊은이가 얼마나 유능한지 보고 싶었을 따름이네. 그렇기에 자네가 장상철이 아닌 만종걸을 세작으로 지목했을 땐 제법 실망했네만, 이내 생각이 바뀌었지.”
“어떻게 말입니까.”
“다른 이를 세작으로 지목한 것은 자네가 생각보다 무능하다고 생각하면 그만이네만, 장상철의 처소에 있던 증거물을 감쪽같이 만종걸의 처소로 옮기는 것은 의도한 게 아니라면 불가능한 일이잖나. 그 때부터 자네를 주시하기 시작했네. 헌데 그런 일이 몇 번이고 반복되니 그 의도가 궁금하더군.”
설마 그 때부터 의심을 받고 있었을 줄이야.
“알면서도 절 가만히 놔두셨습니까?”
“어차피 누명을 쓴 이들도 본교의 발전에 방해가 되는 해충들이었으니 무엇이 문젠가.”
“계속해보십시오.”
“헌데 그런 식으로 자네가 빼돌린 이들이, 지난 번 검후 토벌의 실패를 묻는 자리에서 모두 자네를 지지하더란 말이야? 이 얼마나 대단한 수완인가! 감탄했네.”
나머지 뒷말은 전음으로 이어졌다.
-하지만 그보다도 가장 흥미로웠던 건… 자네가 유별나게 무림맹 세작들만 편애를 한다는 것이었네. 금안신군의 제자가 굳이 그런 일을 벌일 리 없으니, 어쩌면 자네야말로 금안신군을 죽인 진범이며 천서원을 연기 중인 여능천의 전인이 아닌가?
-…상상력이 풍부하시군요, 군사.
비록 ‘조가휘’라는 마지막 진실까지는 도달하지 못했으나, 나로선 간담이 서늘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가 다른 마음을 품었다면 내 목은 진즉 달아났을 것이 아닌가!
“헌데, 제가 이 자리에서 살인멸구를 시도하면 어쩌시려고 그런 이야기를 하십니까?”
“내가 죽으면 그 즉시 자네의 정체가 담긴 서신이 수뇌부를 비롯한 원로원과 명도육가로 전달될 것이네. 비록 내 목은 달아나겠지만 자네를 곤란하게 할 정도는 되지 않겠는가.”
“재밌네요. 그러고 보니 아까 제가 몇 차례나 빚을 졌다고 하셨는데, 다른 건 또 뭐가 있습니까?”
내 물음에 그의 얼굴에 장난스런 미소가 걸렸다.
“진법 따위는 펼쳐져 있지도 않은 그 가짜 보자기 말일세. 그걸로 나와 교주 사이를 이간질하려고 시도한 것도 눈감아주겠네. 그러니 부교주께 잘 좀 말해주시게. 군사가 보자기의 정체를 알면서도 자네가 불러준 구결을 교주께 전해드렸다고 말이야.”
“아하하하!”
“이 정도면 나도 이번 일에 제법 공을 세우지 않았나?”
완전히 부처님 손에서 놀아난 기분이었으나 기분은 그리 나쁘지 않았다.
유쾌한 웃음을 터뜨리는 나를 따라 곽정유의 얼굴에도 안도의 미소가 피어났다.
“이야기는 다 끝났나.”
“부교주님.”
진즉 도착해서 대화가 끝나기만을 기다리고 있던 부교주에게, 나와 곽정유는 동시에 포권을 올렸다.
조금 전 곽정유가 갑자기 대화를 전음으로 전환한 것은, 부교주의 시선을 의식했기 때문이리라.
반대로 내 정체를 걸고 간 크게 딜을 할 수 있었던 것도, 뒤에서 지켜보는 부교주의 존재를 믿은 것이겠지.
이토록 얄미울 정도로 머리를 잘 굴리는 사내가 곽정유였으나, 한 가지 변치 않는 사실은 결국 내가 그에게 도움을 받았다는 것이었다.
그에 비하면 이제부터 내가 할 말은 은혜 갚기 축에도 못 끼겠지.
“부교주님. 여기 군사께서 교주를 잡는 데 혁혁한 공을 세웠습니다.”
“그랬나?”
“예. 군사는 평소에도 부교주님을 흠모하였으나, 여태껏 교주의 보복이 두려워 따르지 못했다고 합니다. 부디 그의 사정을 고려하여 자비를 베푸시길 간청 드립니다.”
내 말에 부교주가 짐짓 정색한 얼굴로 머리를 조아린 군사의 뒤통수를 노려보았다.
“내가 그간 군사의 지략에 골탕을 먹은 것이 한 두 번이 아니지.”
“…….”
곽정유가 침을 꿀꺽 삼킨 순간, 부교주의 표정이 부드럽게 풀어지며 나머지 말이 흘러나왔다.
“하지만 그대가 같은 교도들을 수탈하거나 사사로이 권력을 휘둘렀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네. 부디 그 명석한 두뇌로 앞으로도 교의 안녕에 앞장서주시게.”
“존명!”
“천 당주, 이만 가세나.”
권력 환승에 성공한 것이 기쁜 듯 만면에 웃음을 띤 곽정유에게는 미안하지만, 난 찬물을 끼얹지 않을 수 없었다.
-아, 그리고 부교주께선 이미 제가 중원인임을 알고 계십니다. 그러니 조금 전의 협박이 통했다고 생각하시면… 큰 오산입니다.
살기가 담긴 전음에 곽정유의 표정이 웃던 얼굴 그대로 딱딱하게 굳었다.
-명심하겠네.
-전 조만간 교를 떠날 생각입니다. 권력 다툼에는 눈곱만큼도 관심이 없으니 괜히 견제하느라 힘 빼지 마시고, 떠나는 날까지 잘 부탁드립니다.
-그것 또한 명심하지.
그의 진심 가득한 표정에 난 비로소 만족스러운 얼굴로 부교주를 따라 광명정을 뒤로했다.
그렇게, 살얼음을 걷는 듯했던 나의 반년 간의 마교 생활이 막을 내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