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tial Streamer RAW novel - Chapter 145
남의 남자
은은한 불빛이 감도는 실내에는 보기 드문 보물들과 알록달록한 보석 등 화려한 장식이 가득했다.
허나 그 무엇도 방의 중심에 앉은 여인의 미색에는 미치지 못했으니.
심지어 그녀의 미간 깊숙이 자리 잡은 짜증조차 그 아름다움을 퇴색시키진 못했다.
“몰살?”
붉은 입술에서 흘러나온 싸늘한 한마디에, 여인 앞에 부복한 사내는 깊숙이 머리를 조아렸다.
“소, 송구합니다.”
“개방주가 직접 오기라도 했나?”
“…수하들이 죽은 장소에 사도련주가 있던 것 같습니다.”
손톱을 다듬던 여인의 눈썹이 꿈틀했다.
“사도련주?”
“허나 객잔 주인이나 점소이의 말에 따르면 범인은 따로 있는 듯 합니다. 듣기론 서른이 채 안 되어 보이는 평범한 생김새의 청년이었다고….”
“감극.”
“예, 대부인.”
“결과만 말해.”
“존명!”
눈앞의 여인이 얼마나 두려운 존재인지 누구보다 잘 아는 사내는, 이어질 대답이 그녀의 심기를 거스를 것을 알면서도 명령에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최선을 다 했지만 범인은 찾지 못했습니다.”
“…….”
“하, 하지만 계획이 새어나간 흔적은 전무합니다. 금제가 발동하는 것을 목격한 자가 다수이며, 사도련 내부에 심어놓은 세작들 역시 별다른 이상은 없다고 하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사흘 전에도 같은 소리를 했지. 은령이 추격을 맡았으니 걱정할 필요 없다고. 헌데 결과가 어떻지?”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뒤통수에 꽂혀드는 서늘한 시선에 감극이라 불린 사내는 마른 침만 연신 삼켰다.
하지만 그의 수난은 아직 끝난 게 아니었으니.
“천서원이란 놈의 행적은?”
이어진 여인의 말에 그는 눈을 질끈 감을 수밖에 없었다.
“…최선을 다해 찾고 있지만 어찌나 은밀히 움직이는지 마교를 떠난 이후 목격자가 전무합니다. 놈의 과거도 캐보았으나 중원 출신이라는 단서만으로는….”
“최선, 최선, 최선! 뭐 하나 제대로 하는 일이 없어! 그 일에 들어간 자금이며 시간이 얼마인데!”
마침내 여인이 폭발하고야 말았다.
이미 고혼이 된 명교주 금양도 그녀의 분노를 피해갈 순 없었다.
“그 쓸모없는 놈! 기령단을 지니고도 일을 그르쳐? 그렇게 큰소리를 치더니.”
앵두처럼 붉은 입술을 잘근거리던 그녀의 서늘한 시선이 다시 눈앞의 사내를 향했다.
“계획을 서둘러라. 최대한.”
“존명!”
그렇게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강호에 또 한 번의 위기가 찾아오려 하고 있었다.
***
같은 시각, 멀리 떨어진 하남 무림맹에서도 비슷한 논의가 오가고 있었다.
“마교주로부터 정전 제안이 담긴 서신이 도착했다지요?”
“금양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도 반신반의 했건만, 허…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인지.”
“서신에는 사천 부근에서 논의를 하자는 내용이 적혀 있었네.”
무림맹주 검성 여능천의 한 마디에 회의장은 한층 더 소란스러워졌다.
“어쩌면 간악한 마교도 놈들의 함정일지도 모르오.”
“허나 회담 장소가 사천이면 우리 쪽이 더 유리한 조건입니다.”
“강유는 은진천이 교주이던 시절부터 평화를 주장하던 이였소. 함정이라 보기는 힘들지 않겠소?”
갑론을박이 오가던 끝에 모두의 관심은 이 모든 사태의 시발점이자, 반년 만에 명교를 뒤집어 놓은 한 사내로 모아졌다.
“헌데 천서원이라는 자에 대해서는 뭔가 알아낸 게 있소?”
“교주의 밀명을 받고 마교를 떠났다는 것밖에는….”
“허…. 듣기로는 이제 이립에 이르렀다 들었는데 부교주라니. 도대체 무공이 얼마나 고강하기에!”
“심계도 보통이 아니라 들었소. 심지어 호교무공인 건곤대나이까지 익혔으니. 그런 자의 종적이 오리무중이라니 이를 어찌해야 할 지.”
좌중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가던 순간, 여태껏 잠자코 있던 군사 제갈원이 의견을 냈다.
“그 자가 금안마군의 제자인 걸 잊으신 건 아니겠지요? 낮에도 환히 빛나는 금빛 눈동자는 어딜 가든 눈에 띌 수밖에 없습니다. 금안마군도 그것을 알기에 평생을 숨어 지낸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렇지! 그걸 잊고 있었구만.”
“더구나 그 자의 무공은 사악한 마기를 근간으로 한다고 하니, 어디 심산유곡에 틀어박힌 것이 아니라면 금세 종적을 찾아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천서원에 대해 관심이 하늘을 찌르는 만큼, 그와 유일하게 겨뤘던 여인이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는 것도 당연지사.
“그나저나 그런 자를 상대로 살아 돌아온 검후도 대단하지 않소?”
“어째 저번과는 말이 다른 것 같다, 팽가야?”
“커흐음….”
벽려군의 패퇴 소식이 전해졌을 당시 험담하기 바빴던 노인에게 면박을 준 당가기가 수염을 쓰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어쨌든 검후의 상처가 보통 위중한 것이 아닌 듯하네. 벌써 석 달이나 조가장에서 요양 중인 것을 보면.”
“피륙의 상처도 상처지만 스승의 원수를 갚기는커녕 그 제자에게 패퇴하였으니 상심이 얼마나 크겠소.”
“그나저나 맹주, 정말 숨겨둔 제자 없는 것이오?”
누군가 꺼낸 말에 검성 여능천의 얼굴엔 지겹다는 표정이 떠올랐다.
“없대도. 내 그 이야기만 몇 번을 듣는지 모르겠소.”
“그럼 그 금안마군을 물리쳤다는 정파의 고수는 대체 누구란 말이오? 이미 백성들 사이에는 검성 여능천의 후인이 금안마군을 물리쳤다는 이야기가 파다한데.”
“무공 한두 수 지도해 준 젊은이들이 어디 한둘이어야지. 그래도 전인이라고 할 정도로 본격적으로 가르친 녀석은 없는데….”
“천서원도 모자라 신비고수까지… 머리가 다 복잡하군.”
허나 그들은 끝내 알 수 없었다.
자신들이 애타게 찾아 헤매는 두 사람이 실은 동일인물이며, 불과 1년 전까지 학관에서 얼굴을 마주보던 사이였음을.
그리고 조금 전까지 자신들이 걱정하던 벽려군이야말로 그 단서를 지닌 유일한 교관이라는 것도.
***
벽려군이 조가장에 의탁한지도 어언 석 달이란 시간이 흘렀다.
그 사이 그녀와 조가장 식구들의 사이는 제법 돈독해져 있었다.
“조 부인, 간밤에 평안하셨어요?”
“벽 여협도요. 괜찮으시면 제 방에서 차라도 한 잔 하시지 않겠어요?”
조가장주 내외는 천무학관에서 자식을 지도했던 벽려군에게 과할 정도로 예의를 다했다.
하지만 그들의 얼굴에 지워지지 않는 짙은 수심이 깔려있음을 벽려군은 모르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었다.
자식을 사지에 보내놓고 마음 편히 웃을 수 있는 부모가 얼마나 있겠는가.
대외적으로는 폐관수련 중인 것으로 알려진 가휘가 실은 마교에서 목숨이 오가는 나날을 보내고 있음은, 직접 곤륜산에 올랐던 그녀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었다.
벽려군은 상심에 잠긴 그들 부부를 위로하기 위해 가휘의 지난 학관 생활을 들려주곤 했다.
더불어 모친인 벽교은과 성이 같다는 것 역시 두 사람이 빨리 친해질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그녀는 가휘의 동생인 소희와도 착실히 인연을 쌓았다.
“스승니임!”
“소희야.”
창천룡 남궁현에게 호감을 가진 소녀는 여러 무공 중에서도 특히 검술에 관심이 많았다.
그러나 조가장의 식객인 적양권은 알려져 있다시피 권각술의 고수.
그 덕에 벽려군은 검술을 지도해준다는 명목으로 열세 살 소녀의 환심을 살 수 있었다.
“소희야, 전에도 말했지만 월녀검은 후반부가 실전된 무공이야. 일정 이상의 경지에 다다르긴 힘드니, 내게 사부라는 말은 과하단다. 그냥 이모라고 불러.”
“이렇게 젊고 예쁜 이모도 있나요? 그럼 앞으로는 그냥 언니라고 불러도 돼요?”
“…사람들이 흉볼 텐데.”
나이가 두 배도 더 차이 나는 소녀에게 언니라는 호칭으로 불리는 것이 어찌 남세스럽지 않을까.
허나 벽려군은 소희에게 그 호칭을 불릴 때마다 자신의 조가장의 며느리가 된 듯한 착각에 빠지곤 했다.
비슷한 예로, 이따금 그녀는 가휘의 지도역이었다는 위치를 십분 활용해, 그의 모친인 벽교은을 조 부인이 아닌 ‘어머님’으로 부르곤 몰래 부끄러워하기도 했다.
그렇기에 그녀는 소희의 ‘언니’란 말에 난색을 표하면서도 결코 거부는 하지 않았다.
“오늘은 어디까지 했지, 소희야?”
벽려군이 천무학관의 교관으로 근무하며 알게 된 한 가지는 자고로 부모 중 자식 칭찬 싫어하는 이는 없다는 것.
그녀로부터 소희의 재능과 노력을 전해들은 조가장주 내외는, 아들 걱정에 시름이 깊은 와중에도 미소를 감추지 못했다.
장주 가족 뿐 아니라 사용인들 사이에서도 벽려군의 인기는 하늘을 찔렀다.
애초에 백도 여검수를 대표하는 검후란 칭호를 모르는 백성은 저잣거리에 찾아보기 힘들었으니.
특히 항아라는 시녀는 어찌나 성격이 살갑고 활기찬 지 그녀를 처음 본 날부터 여협, 여협하고 부르며 호의를 숨기지 않았다.
하지만 벽려군이 경악한 것은 따로 있었으니.
‘우리 아들이에요. 귀엽죠?’
‘…항 소저를 닮아 눈이 참 예뻐요. 이름이 뭔가요?’
‘석율이요!’
‘석…율?’
갓 조가장에 의탁했을 당시의 일을 떠올리면 아직도 어처구니가 없고 가휘가 괘씸해지는 벽려군이었다.
둘러댈 이름이 없어서 갓난아기의 이름을 대다니.
한편으론 가휘의 그런 행동조차 귀엽다는 생각이 드는 걸 보면, 콩깍지가 씌어도 단단히 씐 거겠지.
그러나 벽려군의 꿈같은 하루하루는 최근 고비를 맞이했다.
천무학관의 방학을 맞이하여 조가장으로 복귀한 제갈우희와 주약빈의 등장과 함께.
“소식은 들었지만… 교관님이 왜 여기 계세요?”
“그게….”
환영 받을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지만 차갑기까지 한 두 사람의 반응에, 실제로 속된 의도로 조가장에 눌러 앉은 벽려군은 주눅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허나 동시에 그녀는 자신의 선택이 정답이라는 확신을 얻을 수 있었다.
가휘와 석율이 동일인물이 아니라면 그녀들이 자신에게 이렇게까지 날선 태도를 보일 이유가 어디 있을까?
한편, 제갈우희도 뒤늦게 자신의 말이 심하다 싶었는지 다급히 한 마디를 덧붙였다.
“부상이 심하시다고 들었는데…. 헌데 제 서신은 못 받으셨나요?”
여기부터가 중요한 고비였다.
그녀의 서신을 통해 가휘의 정체를 눈치 챘다는 사실만큼은 반드시 숨겨야 했다.
“고맙다는 인사가 늦었어요. 역시 제갈세가의 정보력은 천하제일이네요. 하오문보다 금안마군의 정보를 빠르게 얻다니…. 하지만 서신을 일찍 받았더라도 제 행동이 달라졌을 진 모르겠네요.”
“…그런가요?”
제갈우희의 유리알 같은 시선이 그녀의 얼굴을 훑었다.
수련생이 교관을 바라보는 눈빛이라기엔 지나치게 차가운, 의심과 경계가 담긴 여인의 눈빛.
아마 그녀의 말이 진실인지 확인하려는 것이리라.
벽려군은 단전의 기운을 끌어올려 콩닥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키는 한편, 미리 준비했던 대답을 읊기 시작했다.
“호북을 지나던 중 불현듯 조가휘 수련생이 개학한 뒤에도 학관에 도착하지 않은 게 생각났어요. 당시엔 제 일이 바빠서 알아볼 생각도 못했는데, 폐관 때문이었군요. 그리고 아직 금안마군의 제자에게 당한 상처가 낫지 않아서 어차피 교관직은 당분간 내려놓아야 할 것 같았으니까요.”
실수로라도 가휘에 대한 연심이 새어나가지 않도록 주의를 거듭하며, 벽려군은 변명을 마쳤다.
허나 방심은 금물, 오늘 이후로는 혼잣말조차 마음껏 할 수 없을 것이다.
무림대회 때도, 마교 성염대의 습격 때도 보지 않았나.
그녀의 부채에 새겨진 은신진이 얼마나 대단한지!
밤 고양이 같은 주약빈의 은신술은 또 어떻고.
더구나 그녀에겐 적양권이란 든든한 조력자까지 함께이지 않은가!
‘티내면 안 돼. 내가 연모하는 건 은공. 가휘가 아니라 은공.’
벽려군은 스스로에게 암시를 걸었으나, 그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님은 날이 지나기 전에 밝혀졌다.
“어머니임-. 저희 왔어요.”
“주약빈이 어머님, 아버님을 뵈어요.”
“고생 많았지? 이리 오렴, 한 번 안아보자.”
“또 곧장 이리로 왔느냐? 제갈가주께서 노하실까 걱정되는구나.”
“어머님. 아버님은 제가 온 게 싫으신가 봐요. 저 속상해요.”
벽려군은 착각하고 있었다.
자신이 조가장 사람들로부터 제법 환심을 샀다고.
그러나 이곳에 수 년 간 머물며 사랑을 받아온 우희와 약빈에 비하면, 지난 몇 개월 간 그녀가 해온 노력들은 바람 앞의 등불처럼 허망한 것이었다.
장주내외는 벌써부터 두 사람을 며느리처럼 대했고, 소희 또한 둘을 친언니처럼 대했다.
그것도 벽려군 자신에겐 보여주지 않았던 응석까지 부리며.
“언니드을!”
“얘 왜 이렇게 컸어?”
“그니까. 야, 왜 이렇게 컸냐?”
“현 가가는?”
“쪼끄만 게 벌써부터 남자를 밝혀. 걘 집 한 번 들렀다 온대.”
그것은 벽려군이 남몰래 해오던 소꿉장난과는 차원이 다른 유대였다.
마치 한 가족이나 다름없는 그들의 모습에 벽려군은 짙은 소외감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언젠가 자신에게도 기회가 있을 것이란 작은 기대 속에, 조가장 사람들에게 얼굴 도장을 찍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한겨울의 추위조차 잠시 모습을 감춘, 햇살이 유난히 따스한 오후.
“꺄악!”
백주대낮에 울려 퍼진 여인의 비명에, 검병에 손을 얹은 벽려군의 발걸음은 어느새 조가장의 정문을 향해 질주하고 있었다.
허나 목적지에 도착한 그녀는 우려와 달리, 조금 전에 들은 것이 기쁨에서 비롯된 비명임을 알 수 있었다.
“휘 가가!”
“휘 랑!”
“다녀왔어.”
부서지는 햇살 속에서 맑게 웃음 짓는 청년을 발견한 벽려군의 몸이 제자리에서 휘청거렸다.
‘그’다.
그녀가 그토록 만나길 바랐던 사내가 그곳에 있었다.
“아… 가휘…. 무사했구나.”
허나 아련한 표정도 잠시, 그의 품에 안겨 행복한 미소를 짓는 두 여인을 발견한 벽려군의 눈은 삽시간에 암울한 색으로 물들었다.
그가 자신이 아닌, 다른 여인의 남자란 걸 잠시 잊고 있었다.
‘왜 저곳에 내 자리는 없을까.’
불쑥 고개를 든 질투심을 가라앉히기 위해, 그녀는 지난 석 달 동안 외웠던 주문을 다시 한 번 꺼낼 수밖에 없었다.
내가 좋아하는 건 가휘가 아닌 은공.
그래야 돼.
지금은.
두 눈을 감은 채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되뇄건만, 이상과 현실은 달랐다.
막상 그를 눈앞에 둔 벽려군은 들끓는 감정을 좀처럼 주체할 수 없었다.
그 날 입술에 닿았던 온기가, 너른 가슴에 안겼을 때의 체취가 아직도 기억에 선명한데.
그가 남긴 상처 자국이 아직도 심장을 불사를 듯 화끈거리는데!
“아….”
잠시 뒤, 다시 눈을 뜬 그녀의 눈엔 여전히 번민과 열망이 가득했다.
그리고 마침내 그녀의 발걸음이 행복에 잠긴 세 사람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