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tial Streamer RAW novel - Chapter 151
밀회 (2)
명교 내의 대소사를 관리하는 내당 복도에 한 여인의 발걸음 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따금 전각의 기둥 사이로 드러나는 옷차림으로 보아 그녀의 정체는 시녀가 분명했으나, 일반적인 시녀가 아니라는 것만은 확실했다.
평범한 시녀에게 내당 소속의 문사가 고개를 숙일 이유는 어디에도 없으니.
“성녀궁의 여인이 여긴 어쩐 일이오?”
“사절단 지원 신청서를 작성해왔습니다.”
“사절단에?”
서류에 파묻혀 있던 문사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성녀님의 허가는 받으셨소?
“신청서에 직인을 받아왔습니다.”
“흠… 어디 보자. 천화대주 심서우 소저 본인이 맞소?”
“네.”
여인, 심서우가 내민 패를 유심히 살핀 사내가 마침내 고개를 끄덕였다.
“확인했소. 신청한 인원이 제법 많아 가부가 결정될 때까지는 며칠이 걸릴 것이나… 성녀께서도 직접 행차하시는 일이니, 아마 통과될 것이오.”
“감사합니다.”
근래 명교에선 중원과의 상호 불가침조약 체결을 위한 사절단의 인원 모집이 한창이었다.
심서우 또한 그들 중 하나였다.
“가휘 선배….”
내당을 나선 그녀는 수개월 전 편지 한 장만을 남기고 훌쩍 떠난 사내를 그리며 먼 하늘을 바라봤다.
설마 반 년 만에 명교의 부교주 자리에 오른 입지 전직인 사내의 정체가, 자신과 천무학관에서 동문수학한 학우였다니.
그러나 일개 수련생에 불과했던 그가, 어떻게 그리 고절한 실력을 지니게 되었는지 따위는 그녀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오직 반년도 넘게 그를 지근거리에서 지켜보면서도 정체를 알아보지 못한 자신의 옹이구멍이 같은 안목과, 마지막이 되어서야 정체를 밝힌 그의 무심함이 원망스러울 뿐.
“선배도 중원 측 사절단에 포함되어 있을까?”
중원의 배신자인 자신이 회담 현장에 나타나면 어떤 날 선 시선들을 받을지는 불 보듯 뻔했지만, 그런 두려움마저도 다시 한 번 그와 재회하고픈 욕망을 잠재우진 못했다.
하다못해 눈앞에서 고맙다는 말이라도 전해야 직성이 풀릴 것 같았다.
그렇게 온통 가휘와의 만남에만 정신이 팔린 그녀는, 정작 가까운 곳에서 자신을 주시하는 시선이 있다는 사실은 꿈에도 몰랐다.
“근래 언니의 행동이 수상하네요.”
“사절단 지원 신청서를 제출하는 걸 본 내당 시녀들이 있어요.”
“사절단에…? 혹시 부교주님을 만나러 가는 게 아닐까요?”
“부교주님?”
멀리서 심서우를 지켜보는 여인들의 정체는 다름 아닌 천화대원들.
그녀들은 삼 개월 전 훌쩍 중원으로 떠난 자신들의 주인을 떠올렸다.
빈껍데기나 다름없던 성염대의 대주로 시작하여 불과 반년 만에 일인지상 만인지하의 자리에 오른 명교의 전설!
비록 교주와 부교주 모두 극구 부인했으나, 현재 교도들 사이에선 새로 교주에 취임한 강유가 건곤대나이를 익힌 부교주를 경계하여 타지로 떠나보냈다는 소문이 알음알음 퍼지고 있었다.
물론 그런 주장은 극히 일부일 뿐, 실제로는 교주와 평소 사이가 돈독했던 부교주가 교의 권력이 양분되는 것을 두려워하여 스스로 물러났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둘 중 어떤 쪽이 사실이든, 부교주가 교단으로 영영 돌아오지 않을 것이란 사실에는 변함이 없었다.
“언니께서 부교주를 바라보는 시선이 애틋하긴 했지.”
“부교주님께서 언니와는 실제로 정을 통하셨을까요?”
“글쎄, 모를 일이지.”
자신들에게 채음보양을 펼치지 않았다는 부교주의 말이 사실이었음을 알게 된 것은, 그가 교를 떠난 지 한 달 정도가 지났을 무렵.
그들 또한 사람인지라, 침상에서 남몰래 수음을 하던 도중, 흘러내리는 피를 보곤 자신들이 순결한 몸임을 뒤늦게 깨달은 것이다.
그러나 진실을 알았다고 해서, 그녀들이 부교주에게 품고 있던 호감이 완전히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비록 부교주와의 난잡한 추문 탓에 앞으로 명교에서 혼인을 치르는 일은 요원해졌으나, 포로로서 비참하게 생을 마감할 운명이었던 자신들을 구해준 것이 그라는 사실은 변치 않으니.
그와 더불어 반란을 준비하느라 동분서주하던 천서원을 대신해 실질적으로 자신들을 돌봐온 심서우에 대한 그녀들의 믿음과 애정은 더욱 컸다.
“…우리도 가요.”
“맞아요. 언니는 중원에서 배신자로 낙인찍힌 몸이에요. 어떤 위험이 있을 줄 알고 언니를 혼자 보내요?”
“대주는 심성도 착해서 욕을 먹어도 대꾸 한 마디 못할걸?”
“맞아, 맞아.”
“그럼 우리도 신청하자.”
천화대 스무 명의 여인들이 사절단에 합류하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여기, 천서원에게 누구보다 깊은 원한을 지닌 또 한 사람 역시 어둠 속에서 기지개를 켰다.
“결국 가는 게냐.”
“…….”
“그런 놈일랑 썩 잊을 것이지!”
“죄송합니다, 할아버지.”
낭창낭창한 연검과 채찍을 각기 허리와 팔에 패용한 채 방을 나서는 여인의 눈은, 고요한 애증으로 들끓고 있었다.
천서원이 교단을 떠난 지 어언 백 일이 되는 날의 일이었다.
***
우희와 약빈이가 곤히 잠든 새벽.
몰래 빈방으로 이동한 나는 저녁 무렵에 도착한 서신들을 펼쳤다.
[소협께서 폐관을 마쳤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일부러 양양지부로 돌아온 보람이 있었네요.]하오문의 홍서현이 보낸 서신에는 폐관을 축하한다는 말과 더불어, 예상대로 여태까지의 사업 보고가 담겨 있었다.
그러나 함께 동봉된 발신인이 다른 서신은 전혀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보름 전 검후 여협께서 맡기신 서신이에요.여협께선 곤륜산에서 기적적으로 생환하신 이후 매달 한 번씩 조 공자의 또 다른 신분인 석율에게 안부 서신을 보내왔어요.
아무리 폐관 중이었다고는 하지만, 같은 여인으로서 조 공자의 무심함을 그냥 지나치기 힘드네요.
헌데 마교 부교주로 알려진 천서원의 용모파기가 조 공자의 역용한 모습과 어딘지 비슷한 것 같다는 생각은 제 착각인가요?]
이런….
홍서현을 깜빡하고 있었다.
그녀는 사부님, 벽려군과 더불어 나와 석율이 동일인물이란 것을 아는 사람들 중 하나.
애초에 석율로 역용하여 벽려군을 도울 수 있던 것 역시 하오문을 사이에 두고 주선을 받았기에 가능한 일이었으니.
“이걸 어떡해야 되나….”
일단 말투로 보면 아직 100퍼센트 확신은 아닌 것 같은데.
어쩌면 마교의 부교주를 적으로 돌리게 될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자신의 의심을 편지에 적었다는 것 자체가 그녀의 의심이 확신이 아니라는 반증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하긴, 정파의 일개 후기지수가 일 년도 지나지 않아 마교 부교주에 올랐다는 말을 순순히 믿을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이 시대의 용모파기가 현대의 몽타주처럼 정교한 것도 아니고.
“우기면… 되려나? 증거도 없는데.”
그래. 일단 우겨보자.
안 통하면 뭐, 회유를 하든가, 협박을 하면 되겠지.
카메라로 대충 약점 하나 잡아서….
역시 금안마공이 무섭긴 무섭다.
옛날엔 순수했던 나를 이렇게 타락시키다니.
“이건 됐고. 다음은….”
이어서 벽려군의 이름이 적힌 서신을 바라본다.
설마 한 달에 한 번씩 내게 서신을 보내고 있었을 줄이야.
마교에 홀로 남은 내가 오죽 걱정 됐으면 그랬을까.
그녀에 대한 미안함과 더불어 한 줄기 안도감이 가슴에 퍼진다.
석 달 전부터 조가장에 머물렀음에도 굳이 하오문에 편지를 남겼다는 건, 그녀가 내 정체를 아직 모른다는 말이나 마찬가지이니까.
이윽고 서신을 펼치자 벽려군의 고아함이 묻어나오는 필체가 눈길을 사로잡았다.
[은공. 소녀 려군입니다.이 서신이 은공께 닿을 날을 기다리며 항상 마음 졸이고 있습니다.
언젠가 이 서신을 읽게 되신다면 부디 하오문을 통해 안부를 전해주세요.]
“…….”
답장, 해야겠지.
목이 빠져라 내 연락을 기다리고 있는 그녀를 언제까지고 모른 체 할 수는 없는 일이니.
이윽고 지필묵을 꺼내 탁자에 앉은 나는 그녀에게 보낼 서신을 작성하기 시작했다.
***
벽려군은 초조한 마음을 감출 길이 없었다.
하오문을 통해 석율의 연락을 받은 것이 사흘 전.
양양시 외곽에 위치한 어느 허름한 객잔의 객실에서 만남을 약속받은 그녀는, 약속 시간이 되기 한참 전부터 객실에 도착하여 그를 기다렸다.
상대가 다루도 아니고 객실을 잡은 이면에는 어떤 엉큼한 속내가 도사리고 있을 것이란 은근한 기대와 함께.
똑똑.
“아!”
문 두드리는 소리에 퍼뜩 망상에서 깨어난 그녀는, 삿갓을 쓴 채 방안으로 들어서는 사내를 보며 반색했다.
“미안하오. 늦었소.”
“은공!”
의자를 박차고 달려 나간 벽려군은, 이 순간만큼은 그의 연인이 된 기분으로 그의 목에 매달렸다.
“뵙고 싶었어요.”
“벽 소저….”
“…이름으로 불러주시기로 약속한 걸 잊으셨나요?”
“려군, 잠시만….”
“아… 기쁜 마음에 결례를.”
그제야 부끄러움이 밀려온 그녀는, 콩닥거리는 심장을 억누르며 그의 가슴에서 떨어졌다.
조가장에서도 그와 마주칠 때마다 이러고 싶은 것을 참느라 얼마나 힘들었던가.
오늘 일부러 객실을 잡은 것을 보면, 이러한 마음은 아마 그 역시 마찬가지였으리라.
그러나 이어진 그의 말은, 잔뜩 부풀었던 그녀의 가슴에 찬물을 끼얹기에 충분했다.
“나야말로 결례를 범했소. 천서원의 용모파기가 중원에 널리 퍼지는 바람에 다루를 이용하지 못한 것을 이해해 주시오.”
“아… 네….”
떨떠름한 기분도 잠시, 벽려군은 다시 미소를 지으며 그를 탁자로 이끌었다.
그가 가휘의 모습을 하고 있을 때는 미처 나눌 수 없던 이야기들이 그녀에겐 잔뜩 있었으니.
“반란이 성공했다는 소식을 듣고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요.”
“모두 그대가 염려해준 덕이오. 나야말로 그대가 무사히 중원으로 복귀했을지 노심초사했소.”
“…기뻐요. 중원에는 언제 돌아오셨나요?”
“며칠 안 되었소.”
벽려군은 듣기 좋은 중저음이 흘러나오는 입술을 지그시 바라봤다.
열 살 연하의 후배가 자신을 속이겠다고 잔뜩 목소리를 낮춘 모습을 상상하자 어쩐지 웃음이 났다.
‘귀여운 가휘.’
자기 정체가 벌써 들켰다는 건 상상도 못하겠지?
그렇게 들뜬 마음으로 대화가 이어지던 가운데, 벽려군은 슬며시 ‘그 날’의 이야기를 꺼냈다.
서로의 몸에 지워지지 않을 상처를 새기던 그 순간을.
“…그 때는 큰 실례를 했어요, 은공.”
“무엇을 말이오?”
“제가 은공의 입술을….”
“아, 그 일 말이오.”
벽려군은 어색한 미소를 머금은 그의 입술을 뚫어져라 바라봤다.
“…많이 당황하셨죠.”
“아하…하. 덕분에 순간적으로 상처의 아픔을 잊을 수 있었으니 사과할 것 없소. 그보다.”
“은공.”
벽려군은 그가 화제를 돌리는 것을 가만히 두고 보지 않았다.
“은공께선 그 날의 상처는 좀 어떠신가요?”
“…멀쩡하오. 당시 그대가 남긴 상처 덕에 금양을 속이고 마지막에는 반란에 성공할 수 있었소. 다시 한 번 협력에 감사드리오.”
“은공께 짐만 되었던 제게 감사라니요. 말씀을 거둬주세요.”
“지나친 겸양은 미덕이 아니오. 그보다 그대의 상처는 어떻소?”
마침내 그녀가 기다리던 질문이 흘러나왔다.
한 차례 침을 꼴깍 삼킨 그녀는, 떨리는 손끝을 자신의 쇄골로 뻗으며 답변했다.
“전… 전 아직도 그 날의 상처가 화끈거려요.”
그녀의 대답에 석율의 안색이 일변했다.
“설마 아직도 마기를 배출하지 못한 것이오?”
“후….”
할 수 있어.
할 수… 있어.
이제부터 스스로가 할 행동에 지레 긴장한 그녀의 입에서 달뜬 한숨이 흘러나왔다.
이윽고, 호흡을 모두 가다듬은 그녀의 손이 허리의 복대로 향했다.
“려군?”
“은공….”
복대를 푼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난 순간,
풀어헤쳐진 상의가 어깨를 타고 바닥으로 흘러내리며 새하얗고 고운 살결이 모습을 드러냈다.
“은공께서 직접… 제 상처를 확인해주시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