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tial Streamer RAW novel - Chapter 152
밀회 (3)
“가가께서 제 상처를 봐주세요.”
벽려군은 자기가 내뱉은 말에 얼굴이 화끈거렸다.
차마 앞을 볼 수 없어 고개를 모로 꺾으니, 귓가로 그의 당황한 음성이 들려왔다.
“이게 무슨 짓이오, 려군. 옷을 입으시오.”
얼른 웃옷을 집어 다정히 자신의 어깨에 둘러주는 사내의 드넓은 가슴으로, 벽려군은 와락 안겨들었다.
“은공….”
서로의 가슴이 맞닿은 순간, 그가 황급히 그녀의 어깨를 밀어냈다.
“려군, 내게는.”
“말하지 마세요.”
고개를 든 벽려군은 글썽이는 눈으로 고개를 저었다.
“더 이상 말씀하지 마세요.”
“려군, 제발….”
“지금은 그냥 이렇게….”
반쯤 애원이나 다름없는 말에도 그의 반응은 단호했다.
“미안하오. 이만 가보겠소.”
결국 그녀의 어깨를 억지로 떼어놓은 석율이 매정히 몸을 돌렸다.
조바심이 인 벽려군은 발을 성큼 내디디며 얼른 그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가지 마세요.”
얇은 비단 속옷 한 장을 사이에 두고 서로의 체온이, 쿵쾅거리는 심장 소리가 교차했다.
벽려군은 우뚝 멈춰선 그를 더욱 깊숙이 끌어안으며 애처롭게 속삭였다.
“하루도 은공을 생각하지 않은 날이 없어요.”
“난 그대의 마음을 받아줄 수 없소.”
“당장 답해주시지 않아도 괜찮아요. 그냥 이렇게 가끔씩만…. 제게도 조금만 정을 나누어 주시면 안 될까요?”
자신이 성급하다는 것은 그녀도 잘 알았다.
처음에는 천천히 그의 마음에 파고 들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와 두 여인 사이의 애정행각을 보고 있으려니, 조바심이 나 도저히 스스로를 주체할 수 없었다.
“가지 마세요….”
“…….”
고민에 빠진 걸까?
제자리에 서서 말이 없는 그의 모습에, 벽려군의 구애는 보다 과감해졌다.
“은공. 그렇게 뒤로 돌아 계시면 제 상처를 봐주실 수 없어요.”
“이러지… 마시오.”
“은공….”
허리에 감은 손을 다소 느슨히 푼 벽려군은 조심스레 그의 몸을 돌아 전면으로 향했다.
이윽고 그녀의 새하얀 가슴골을 발견한 그가 눈 둘 곳을 찾아 황급히 시선을 돌리자, 벽려군은 얼굴을 붉히며 수줍게 속삭였다.
“제 상처는 어떤가요.”
“려군, 제발.”
“절 봐주세요. 지금은 절….”
벽려군은 반년 전의 입맞춤을 떠올리며 발끝을 세웠다.
하지만 당시의 추억에 목마른 사람은 자신뿐이었던 걸까?
입술이 닿기 직전 고개를 비트는 그의 모습에, 벽려군의 눈에는 착잡함이 감돌았다.
‘곤륜산에선 피하지 않았으면서.’
그 때와 지금 달리진 것은 오직 하나, 연인들과 재회했다는 사실 뿐.
벽려군은 질투심에 가슴이 욱신거렸지만 그쯤에서 포기하고 물러났다.
더 이상 억지로 입맞춤을 시도했다가 그가 자신을 귀찮은 여자로 생각할까봐, 영영 그를 놓칠까봐.
그렇게 가슴을 지피는 정염을 억지로 가라앉힌 그녀는, 입술 대신 가슴 너머로 선명히 느껴지는 그의 흉터로 관심을 돌렸다.
“제 상처를 보셨으니 은공의 상처도 보여주세요.”
동의도 없이 뱀처럼 파고든 그녀의 섬섬옥수가, 그의 상의를 어깨 뒤로 걷어내자 오른 가슴에 길게 이어진 흉터자국이 드러났다.
자신과 그를 잇는 하나의 연결점을 홀린 듯 바라보던 그녀는, 이내 그의 흉터 위에 입을 맞추기 시작했다.
쪽-.
“으음….”
“은공의 흉터도, 하아…. 저처럼 뜨거우신가요?”
자신의 손으로 새긴 흔적을 따라 천천히, 아주 천천히 거슬러 오른 그녀의 입술이 그의 목덜미 아래까지 도달했다.
“연모하고 있어요, 은공.”
“려군.”
“아…!”
마침내 자신의 어깨를 우악스럽게 움켜쥔 손길에 벽려군의 얼굴이 짙은 희열로 물들었다.
뒤이어 둘 사이를 가로막던 마지막 비단 쪼가리가 바닥으로 힘없이 흘러내렸다.
***
“저기 희야….”
“어? 응… 빈아.”
“그, 휘 랑은 오늘 언제쯤 온…대?”
“…글쎄. 하오문과 이야기를 나누고 잠시 지인을 만나고 온다고 하셨으니까.”
오늘따라 서로를 바라보는 우희와 약빈의 눈빛에는 어색함이 가득했다.
그럴 수밖에.
아무리 분위기에 취했다고는 하나 전날 여인끼리 그런 행위를 하였으니.
가휘의 부탁에 못 이겨 약빈과 입을 맞추던 순간을 떠올린 제갈우희의 얼굴이 홍시처럼 빨갛게 물들었다.
‘어떻게 빈아랑… 내가 미쳤었나봐.’
한편, 어쩔 줄 몰라 하는 것은 약빈 역시 마찬가지였다.
어색한 침묵을 견디기 힘들었는지 시선 둘 곳을 찾아 이리저리 눈알을 굴리던 그녀는, 결국 애먼 땅바닥을 바라보며 개미만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저기… 나 오후부터 할아버지랑 장원 무사들 수련 돕기로 했는데…. 너도 같이 갈래?
“…아니, 난 가가가 가져온 태블릿에 흥미가 있어서.
“…그래?”
“응.”
“난 그거 너무 어렵던데…. 알았어. 그럼 이따 봐.
“응….”
오늘 밤 눈앞의 그녀와 또 이런저런 응큼한 짓들을 하게 되는 걸까?
밤이 기다려지면서도 두려운 그녀였다.
옛날에는 서로 못 잡아먹어 안달이었는데 어쩌다 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는지.
결국 그녀는 약빈이 자리를 뜨는 순간까지 제대로 얼굴을 바라볼 수 없었다.
“이게 다 휘 가가 때문이야. 어디서 그런 못된 것들을 배웠담? 빈아 말대로 전생에 음적이었던 게 틀림없어.”
자리에 없는 가휘에게 모든 책임을 돌린 그녀는, 달아오른 얼굴에 부채질을 하며 가휘의 처소로 향했다.
비록 민망한 마음에 약빈의 제의를 거절하긴 했으나, 태블릿에 관심이 있다는 것만은 사실이었으니.
잠시 뒤, 정인의 처소에 도착한 그녀는 서랍 한켠에 보관되어 있던 태블릿을 꺼내 전원을 켰다.
언제든 사용해도 된다는 가휘의 허락이 있었으니 함부로 다루지만 않으면 괜찮으리라.
태블릿의 간단한 조작법이나 용어 정도 또한 그에게 물어 터득한지 오래다.
“대체 성녀는 어떻게 이런 기물들을 만들어 내는 걸까?”
풀리지 않는 의문을 되뇌며 그녀의 손이 능숙하게 태블릿의 패널 위를 오가기 시작했다.
“뭐부터 보지?”
가가의 깜찍했던 어린 시절?
그에 대한 호기심이 연심으로 발전하는 계기가 된 아빠와의 바둑대결?
아니면 왁자지껄했던 학관 생활?
화면 위에서 갈팡질팡하던 그녀의 손이 마침내 하나의 폴더를 지목했다.
[명교]“자세히는 못 들었으니까.”
그녀는 정인과 떨어져 보낸 지난 1년의 세월이 궁금했다.
금안마군이나 마교주와의 목숨을 건 대결은 이미 전해 들었으나, 그 외에 마교에서 어떤 일상들을 보냈는지에 대해선 거의 듣지 못했으니.
“가가는 마교 사람들도 그저 평범한 사람들이랬는데.”
그가 폴더 이름을 ‘마교’가 아닌 ‘명교’로 지은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는 일이었다.
비슷한 주장을 펼치는 교관이 천무학관에도 있긴 했으나, 명문정파에 태어나 평생을 마교에 대한 악담만 듣고 자란 그녀에겐 쉽사리 믿을 수 없는 이야기이기도 했다.
“그리고… 검후 교관님과의 대결도.”
세간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검후와 천서원의 대결.
그는 중요하지 않다고 여긴 듯 말해주지 않았지만 그녀는 궁금하기 짝이 없었다.
도대체 자신의 정인은 어떤 계략을 펼쳐 그 위기를 돌파한 걸까?
그러나 관련 영상들을 훑어보기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아, 그녀는 한 가지 의문을 품지 않을 수 없었다.
“…왜 없지?”
벽려군과 관련된 영상들이 통째로 누락되어 있었다.
“다른 쪽에 보관되어 있나?”
고개를 갸웃하며 태블릿 구석구석을 뒤지기를 한참.
결국 탐색을 포기한 그녀의 입에서 탄식이 흘러나왔다.
“못 찾겠다-. 가가, 바람피운 건 아니죠?”
마음에도 없는 혼잣말을 던지며 그녀는 피식 웃었다.
그럴 리가 없지.
그가 기나긴 여행 동안 자신과 약빈에 대한 의리를 지켰다는 것은 그녀가 누구보다 잘 알았다.
1년 반 만에 재회한 그의 손목에는 자신이 선물한 팔찌가 고이 매여 있었으니.
“…그럼 대체 뭐지?”
그녀는 다시 태블릿을 조작해 원래의 폴더로 되돌아왔다.
누락된 파일들에 대한 호기심이 식은 것은 아니었다.
다만 방법을 바꾸기로 했을 뿐.
원하는 내용이 없다면 전후 사정으로부터 유추하면 될 일.
곧 그녀의 눈앞에서 가휘가 벽려군 토벌을 명받기 직전의 상황을 담은 영상이 재생되기 시작했다.
-누가 그 계집을 죽이겠느냐.
-제가 그 건방진 년의 목을 교주께 바치겠습니다!
-부디 이 적도원에게 공을 세울 기회를!
-겁도 없이 본교를 침입한 자에게 본보기를 보이겠나이다!
화면 너머로까지 전해지는 마교 고수들의 무시무시한 기세에 제갈우희는 침을 꼴깍 삼켰다.
그가 무사히 자신의 곁으로 돌아왔음을 알면서도 도저히 긴장을 놓을 수 없었다.
잠시 뒤, 마침내 화면이 역용한 그의 얼굴을 비추기 시작했다.
-교주님, 감히 제 소원을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말하라.
-저 천서원은….
“역용했어도 잘 생겼어.”
금빛 눈을 번뜩이는 색다른 정인의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던 그녀의 아미가 다음 순간 잔뜩 일그러졌다.
한참 궁금한 순간 영상이 뚝 끊겼기 때문이다.
“왜 이 다음이 없을까?”
투덜거리며 재생시킨 다음 영상에선 생뚱맞게도 토벌이 끝난 뒤의 상황을 비추고 있었다.
-천서원, 실패의 변명은?
-그저 검후의 무공이 제 밑이 아니었을 뿐입니다.
“음…? 별 거 없는데.”
탁자에 턱을 괸 채 스킵 버튼을 연타하던 그녀의 손이 멈칫했다.
다음 순간, 그녀의 눈동자가 사정없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그녀의 시선이 멈춘 곳은 본 영상이 아닌 화면의 구석, 영령들이 대화를 나눈다는 채팅창이라는 공간이었다.
그곳엔 그녀가 그토록 알고 싶어 했던, 그러나 영원히 몰랐다면 좋았을 진실이 담겨 있었다.
[래치하 : 벽려군이랑 물고 빨고 할 땐 좋았겠지] [펭귄목살 : 깐휘님 키스 당할 때만 반응속도 찐따되는 거 사실인가요?] [louise0912 : 무술은 일류지만 입술은 삼류예요옷!] [또똠얌꿈 : 좆뱀깐휘] [폴리페뇰 : 우희랑 약빈이 자택에서 오열한 채로 발견]벽려군? 물고 빨고? 키스?
그녀가 벽려군을 무사히 탈출시키기 위해 흑심을 품은 척 연기를 했다는 사실은 이미 들어서 알고 있었다.
하지만 키스라니.
그것이 연인 간의 입맞춤을 뜻하는 단어라는 것을 배운 것이 바로 며칠 전이다.
더구나 채팅창의 영령들 또한 둘이 실제로 입을 맞추었다는 듯 말하고 있지 않은가!
“…거짓말.”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영상을 앞으로 돌렸으나, 결과는 변하지 않았다.
그래, 백 번 양보해서 실감나는 연기를 펼치는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입을 맞췄다고 치자.
문제는 해당 영상이 지워져 있다는 사실이었다.
과연 이 영상이 우연히 지워졌을까?
“가가가 지운 거야. 내가 볼까봐.”
그녀의 기억이 지금으로부터 3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갔다.
학관에 막 입학했을 당시, 벽려군의 아름다운 외모를 뚫어져라 바라보던 가가의 눈빛이 지금도 선명히 떠올랐다.
이어서 떠오른 기억은 그의 팔찌가 처음으로 끊어졌던 날.
벽려군을 사파의 함정에서 구해낸 그가 상처투성이로 돌아온 날이었다.
당시의 기억이 며칠 전 식사 자리에서 벽려군이 꺼냈던 말과 맞물리며, 그녀에게 어떤 가능성을 제시했다.
‘정식으로 교제 중인 것은 아니지만 마음에 둔 분은 있답니다.’
‘그 분과는 사파를 척결하는 싸움 도중에 만났어요.’
“아니죠?”
듣는 이 없는 질문이 허공을 맴돌았다.
‘이후로도 은공께선 몇 번이나 제가 위기에 처할 때마다 목숨을 구해주셨지요.’
‘…입맞춤까진.’
“아니죠, 가가?”
그녀는 필사적으로 부인했으나, 둘의 관계에 대한 의심이 샘솟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마지막 보루였던 팔찌조차 더 이상 위안이 되어주진 못했다.
며칠 간 약빈과 구름 위를 오가는 듯한 쾌감을 맛보며, 순결을 잃지 않고도 얼마든 사랑을 나눌 수 있음을 깨닫지 않았는가!
그리고 때마침 오늘, 사이가 의심스러운 두 사람이 동시에 자리를 비웠다는 사실이 그녀의 의심에 종지부를 찍었다.
‘희야, 빈아. 오늘은 지인을 만나야 해서 조금 늦을 거야.’
‘조 부인. 오늘은 제가 잠시 외출을 해서 늦게 올지도 몰라요.’
태블릿의 푸른빛이 깃든 그녀의 눈동자가 귀기어린 시린 빛을 띠었다.
“가가, 지금 어디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