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tial Streamer RAW novel - Chapter 153
밀회 (4)
“희야?”
“…가가.”
우희를 우연히 만난 것은 조가장으로 돌아오는 길목이었다.
정신이 어디에 팔렸는지 멍하니 길을 걷던 그녀는, 뒤늦게 나를 발견하곤 뭐라 형용하기 어려운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이어진 그녀의 질문 역시 의아하긴 마찬가지였다.
“혼자예요?”
“응? 그럼 누가 있어?”
나도 모르게 뒤를 돌아보며 답하자, 그녀는 아무런 대답없이 내 손목을 빤히 응시했다.
“왜? 뭐 묻었어?
평소처럼 은은한 푸른빛을 발하는 천잠사 팔찌를 바라보며 묻자 그녀가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가가는 어디 다녀오세요?”
“나? 아침에 얘기했잖아. 사업관련으로 하오문에서 소개해준 지인 만나러 다녀온다고.”
이번에는 내가 물을 차례.
“너는?”
“네?”
“너도 어디 다녀오는 길이야?”
그녀의 어깨에 묻은 흙먼지를 털어내며 묻자, 옅은 미소가 돌아왔다.
“가가 언제쯤 오나 기다리고 있었어요.”
“정말?
“응. 보고 싶어서.”
“조금 늦는다니까…. 날도 추운데.”
가녀린 어깨를 포근히 감싸며 반듯한 이마에 입술을 맞대자, 날 따라 그녀의 얼굴에도 따스한 미소가 번졌다.
***
“추운데 고생했지.”
“아니에요, 가가.”
“얼른 가자.”
제갈우희의 미소는 정인의 시선이 떨어지는 것과 동시에 씻은 듯 사라졌다.
대신 그녀의 얼굴에 자리 잡은 것은 북풍한설과 같은 냉막함이었다.
그의 품안에선 다른 여인의 분내가 진동하고 있었으니.
흔적을 지울 시간조차 아까웠다는 걸까?
그만큼 격정적인 밀애를 나누었다는 것일까?
문득, 심장이 아려오기 시작했다.
불신과 믿음.
희망과 절망.
분노와 슬픔.
그리고 그 근본에 자리한 어둡고 끈적거리는 소유욕까지.
가슴 안에 휘몰아치는 수없이 많은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서, 그녀가 선택한 것은 다름 아닌 환한 미소였다.
“가가, 오늘 밤에도 안아줄 거죠?”
“…오늘은 조금 피곤해서.”
“그래요?”
한층 더 짙어지는 미소 속에 낮게 가라앉은 눈빛을 숨긴 그녀는,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은 채 그와 보폭을 맞추어 걷기 시작했다.
두 사람이 조가장으로 돌아왔을 땐 어느덧 석양이 지고 있었다.
“식사 전에 씻어요, 가가.”
“…같이 씻을래?”
잠자리 권유를 물리친 것이 못내 마음에 걸렸을까, 그렇게 묻는 가휘에게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식사 자리에서 어머님, 아버님도 봬야 하는데. 부끄러워서 어떻게 그래요.”
“그래. 시간이 좀 이르긴 하지. 그럼 이따 봐.”
헤어지기 전, 다시금 그가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그 여자와 달콤한 밀어를 속삭였을 입술로.
어쩌면 그 여자의 몸 구석구석을 누볐을지도 모르는 입술로.
잠시 뒤, 가휘가 먼저 자리를 뜨자 그녀는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문지기를 돌아봤다.
“윤상.”
“예, 아가씨!”
이름을 불린 문지기가 감동어린 표정을 지었다.
아마 평소였다면 미래의 조가장의 안주인으로서 따뜻한 미소라도 지어주었으리라.
하지만 지금의 그녀에게 그런 연기를 할 정신적인 여유는 없었다.
“검후께서 돌아오시면 제게 따로 기별을 주세요.”
싸늘함이 묻어나는 한 마디에 문지기가 바짝 긴장한 얼굴로 답했다.
“넷!”
“아시겠지만… 제가 이런 부탁을 했다는 건 검후께는 비밀이에요. 몰래 드릴 선물이 있거든요.”
“아, 알겠습니다.”
***
벽려군이 조가장으로 돌아온 것은 이미 저녁이 한참 지난 시간.
“돌아오셨습니까, 여협.”
“…수고가 많으세요.”
문지기에게 인사를 건네는 그녀의 얼굴에는 숨길 수 없는 피로가 가득했다.
그러나 그녀는 곧장 처소로 돌아갈 수 없었다.
자신의 앞을 가로막은 한 그림자를 발견했기 때문에.
“제갈우희 수련생?”
“…….”
“…제게 할 말이라도 있나요?”
잇단 물음에도 가만히 서있을 뿐, 제갈우희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어떤 감정도 담기지 않은 유리알 같은 눈동자에 벽려군은 왠지 모를 꺼림칙함을 느꼈다.
아니, 어쩌면 그것은 오늘 낮 자신과 가휘 사이에 있었던 모종의 일 때문일지도 몰랐다.
자연히 대꾸하는 그녀의 목소리도 차가울 수밖에 없었다.
“할 말 없다면 이만 가볼게요.”
싸늘하게 내뱉은 벽려군은 그대로 제갈우희를 지나쳐 장원 내부로 향했다.
그러나 등 뒤를 쫓는 찝찝함은 여전했으니.
결국 수십 걸음을 지나 다시금 뒤를 돌아본 그녀는 볼 수 있었다.
여전히 그 자리에 서서 자신을 우두커니 바라보는 제갈우희를.
그 모습이 너무나 기이하고 섬뜩해서.
혐오스러워서.
“…기분 나빠.”
벽려군은 어쩐지 속이 울렁거리는 기분을 느끼며 걸음을 재촉했다.
***
그 냄새다.
낮에 가가의 품에서 맡은 냄새.
조금 전 자신을 스쳐지나간 여인의 몸에서도 같은 냄새가 났다.
“도둑년.”
제갈우희는 멀어지는 벽려군의 등을 향해 차갑게 읊조렸다.
자신의 정인에게 눈독을 들인 이상 그녀는 교관도 뭣도 아니었다.
그저 염치도 모르는 한낱 도둑고양이일 뿐.
그녀는 무표정한 얼굴로 생각에 잠겼다.
어떻게 괘씸한 도둑고양이의 버릇을 고쳐줄까.
다음 순간, 그녀는 그만 피식 웃고 말았다
확실히 팔은 안으로 굽는 게 맞다.
박수도 손이 마주쳐야 소리가 나는 법이거늘, 이런 상황에서도 내 낭군보다 붙어먹은 년에게 더 화가 나는 것을 보면.
하지만 징치를 하기엔 아직 이르다.
일단 확실한 물증부터 손에 넣는 것이 순서일 터.
현장을 덮칠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고.
폐관동안 한층 강화된 부채의 진법에 빈아의 은신술까지 더하면 가가의 눈을 속이고 부정의 현장을 덮칠 수 있으려나?
아니면 차라리 자신과 빈아를 친딸처럼 아끼는 어머님 앞에서 눈물로 호소해 볼까.
마교의 부교주도 부모 앞에선 한낱 철없는 자식일 뿐이니.
“아니면….”
보다 간단한 방법도 있다.
절대고수인 가휘를 통제할 방법은 극히 드물지만, 벽려군은 아니니.
그녀의 자백을 받아내고 가휘로부터 떨어뜨릴 방법은 차고 넘친다.
수 겹의 절진 속에 가둬 놓고 몇날 며칠이고 쫄쫄 굶기거나, 당문으로부터 공수한 약물의 힘을 빌리면 제 아무리 검후라도 자백하지 않고선 견딜 수 없으리라.
물론 그 전에 그녀를 제압해야 하는 문제가 남아있지만.
하지만 그것도 대비는 이미 끝났다.
조금 전 그녀의 처소에 간단한 술식을 펼치고 오는 길이니.
모두가 깊게 잠든 새벽 진식을 발동시키는 것과 동시에 기습을 가하면 아무리 그녀라도 대응할 수 없으리라.
더구나 개인에 불과한 벽려군과 달리 자신의 뒤엔 제갈세가가 있다.
그리고 이번 사태에 자신 못지않게 분노할 빈아에게도 신투라는 무시 못 할 조력자가 있다.
비록 의협심이 남다른 신투지만, 손녀의 눈물 앞에서도 자신의 정의를 관철할 수 있을까?
“명분도 이쪽에 있고.”
백성들 사이에 칭송받는 검후가 실은 짝 있는 남자를 탐하는 속물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 평생 강호에 얼굴을 내비치기 힘들리라.
물론 이 방법을 쓰면 가휘의 명성에도 누가 되겠지만, 솔직히 그에게 더 이상 떨어질 명예 따위는 없다.
그가 마교주를 물리치고 강호에 평화를 가져온 영웅이란 사실을 아는 이는 거의 없으니.
여태껏 강호에서 그를 부르는 별호라고 해봤자 화화공자나 사화지욕 따위의 수치스런 것들이 전부.
이번 일이 알려지더라도 기껏해야 화화공자가 제 버릇 개 못줬다며 손가락질 몇 번 받는 것이 전부겠지.
하지만 이러한 극단적인 방법들은 어디까지나 최후의 수단이다.
“가가께도 변명할 기회는 드려야지.”
혹은 반성할 기회를.
그의 손목에 걸린 팔찌가 아직 멀쩡하다는 사실이 그녀에게 일말의 이성을 되찾아주었다.
한 번의 실수로 여태까지의 화목한 관계를 파탄내는 것은 아까운 일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녀의 마음 한 구석엔 여전히 사랑하는 가휘를 믿고 싶은 마음이 존재했다.
“모든 사실을 털어놓고 용서를 구하면 이번만큼은 용서해드릴게요, 가가.”
물론 옹색한 발뺌을 하거나 벽려군을 받아달라는 말 따위를 한다면 그 땐 정말….
“흐흣. 제가 얼마나 악독한 년인지 보게 될 거예요, 가가.”
누군가 머릿속을 엿보았다면 기겁할 상상을 하며, 제갈우희의 발걸음이 가휘의 처소로 향했다.
***
“가가, 저 왔어요.”
“아, 희야. 왔어?”
“빈아는요?”
“빈아는 잠깐 카메라 가지고 사부님한테 갔어. 사부님이랑 람쥐들 사진 찍을 거라고…. 근데 아까 할 일 있다더니, 다 끝났어?”
“응.”
평소처럼 반겨주는 그를 보자, 잠시 잠잠해졌던 배신감이 들끓기 시작했다.
백주대낮에 그런 일을 저지르고서 어떻게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자신을 대할 수 있을까.
그러고 보니 벽려군도 아까 그랬지.
남의 정인을 탐하는 염치없는 계집이 뭐가 그리 당당하다고.
동시에 그녀는 문득 궁금해졌다.
도대체 두 사람은 무슨 생각으로 외도를 저지른 걸까?
그렇게 평생 숨길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 걸까?
아니면 몰래 만나다 덜컥 임신이라도 하면, 자기가 또 약빈이 때처럼 한 발 양보해줄 거라 생각한 걸까?
천만의 말씀이다.
‘두 번은 없어.’
주약빈은 그저 특이한 경우였을 뿐.
군사부일체(君師父一體)라.
그것은 약빈의 연심이 정인과 스승 사이의 불화로 이어지길 바라지 않았던 그녀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양보이자 내조였다.
하지만 예외는 하나로 충분하다.
벽려군만큼은 절대 안 된다.
그녀를 받아들인 순간, 팽소혜나 설이나처럼 평소 그에게 호의를 품고 있던 년들마저 적선이라도 하듯 달라붙으리라.
심지어 그가 일개 수련생 신분일 때도 그 정도였으니, 중원에서 손꼽히는 고수가 된 지금은 오죽할까.
‘진즉 관리를 해야 했어.’
그녀는 언젠가 지나친 집착 끝에, 가휘에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꾸짖음을 당했던 기억을 떠올렸다.
당시에는 사랑은 존중이라는 생각에 간섭을 그만두기로 약속했지만, 이제 와서 보니 그건 잘못된 선택이었다.
달콤한 꿀을 그릇 밖에 두면 벌레가 꼬이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거늘.
“희야, 무슨 일 있어?”
“…왜요?”
“낮부터 안색이 안 좋아. 오랜만에 추궁과혈 해줄까?”
벽려군한테도 이렇게 다정히 굴었겠지.
그렇게 생각하자, 그의 상냥함조차 분노를 지피는 불씨에 불과했다.
그것이 도화선이 되어, 마침내 그녀는 사랑하는 이의 운명을 결정지을 한 마디를 입에 담았다.
“휘 가가, 나한테 할 말 없어요?”
***
“휘 가가, 나한테 할 말 없어요?”
“할 말?”
연인 사이에 할 말이 하나밖에 더 있겠는가.
“사랑해, 희야.”
“…….”
어… 이게 아닌가?
나도 눈치가 있으니 그녀가 평소와 어딘가 다르다는 것 정도는 진즉 눈치 채고 있었다.
하지만 짚이는 게 없는 것이 문제다.
그럼에도 난 전생의 연애경험에 기초하여 조심스러운 한 마디를 꺼냈다.
“희야, 혹시 내가 기분 상하게 한 거 있어?”
“…가가.”
“응?”
다음 순간, 그녀가 살포시 내 품에 안겼다.
“나 그냥 옥유경 익히지 말까?”
“어? 왜…?”
“빨리 가가와 제대로 하고 싶어.”
“갑자기?”
“응….”
발끝을 세운 그녀가 내 목을 깊숙이 끌어안으며 속삭였다.
“그래야 가가가.”
-바람 안 피울 거잖아.
귓가에 소곤소곤 파고드는 목소리에 소름이 우수수 돋았다.
“그게 무슨 말….”
황급히 꺼내던 말은 그녀의 섬뜩한 미소 앞에 종적을 감추었다.
“가가, 내가 재밌는 거 보여줄까요?”
뺨 위를 미끄러진 섬섬옥수가 탁자 위를 가리켰다.
그곳엔 명교를 떠날 때 성녀로부터 받은 태블릿이 있었다.
그것을 본 순간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설마 희야가…?
하지만 문제가 될 만한 영상들은 전부….
“여기 앉아요, 가가.”
생각이 미처 깊어지기도 전에 내 손목을 낚아챈 그녀가 나를 태블릿 앞으로 이끌었다.
그리고 불과 수십 초가 지나기도 전에, 내가 지녔던 막연한 불안감은 최악의 형태로 현실에 모습을 드러냈다.
“가가, 여기 볼래요?”
그녀의 손끝이 가리키는 것을 본 순간 시간이 멈췄다.
[래치하 : 벽려군이랑 물고 빨고 할 땐 좋았겠지] [펭귄목살 : 깐휘님 키스 당할 때만 반응속도 찐따되는 거 사실인가요?] [louise0912 : 무술은 일류지만 입술은 삼류예요옷!] [또똠얌꿈 : 좆뱀깐휘] [폴리페뇰 : 우희랑 약빈이 자택에서 오열한 채로 발견]일시정지된 영상의 한 구석엔 내 바람기의 증거가 명백히 드러나 있었다.
“재밌지.”
“아….”
“벽려군이랑 정말 물고 빨았어?”
그녀가 등 뒤에서 어깨를 짚으며 속삭였다.
난 뱀 앞에 놓인 개구리처럼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했다.
그 사이 내 목을 스멀스멀 기어오른 그녀의 손은 어느덧 내 뺨을 감싸고 있었다.
“왜 지웠어?”
“희야….”
“응? 왜 지웠어. 날 납득시켜 봐요, 가가.”
아직도 할 말이 없어요?
또다시 대답을 종용하는 그녀 앞에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하나뿐이었다.
“…미안해.”
그 순간, 차가운 미소로 일관하던 그녀의 가면에 균열이 일었다.
난 서서히 눈물이 고이는 그녀의 눈망울에 죄책감을 안고 깊이 고개를 숙였다.
“미안해, 희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