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tial Streamer RAW novel - Chapter 157
북해로 (3)
이게 어찌 된 일일까.
영락없이 위기에 처해있을 줄 알았던 설이나가 빙궁에서 제법 떨어진 장소에서 저렇게 멀쩡히 돌아다니고 있다니?
설마 쫓기고 있는 건가?
하지만 그렇다기엔 화면에 비친 무리의 표정이 그리 다급해보이지 않는다.
혹시 모를 만약을 대비해 난 카메라를 한층 더 멀리 날려 보았지만, 딱히 그녀의 뒤를 쫓는 무리들은 보이지 않았다.
한편, 채팅창은 간만에 등장한 설이나를 반기는 말들로 가득했다.
[펭귄목살 : 헤으응 엘프 눈나] [햐퍄퍄퍄 : 오늘도 햇반 없네] [yion. : 겨이나 ㅎㅇ] [소설사랑흐구 : 매실붐은 온다!] [thot2020 : 조가장 빙수기계 왔는가] [굠굠 : 설빙 극♥락 매화수 극♥락 겨넬 극♥락]그나저나 이대로면 서로 엇갈릴지도 모르겠는데?
“이쪽으로.”
“가가, 정말 설 소궁주가 확실해요?”
“응, 확실해. 옆에 하영영 소저도 확인했어.”
“어째서 설이나 수련생이 이곳에….”
“그건 지금부터 확인해봐야겠죠.”
우린 설이나 일행의 진행 방향으로 썰매를 틀었다.
얼마 뒤, 양측 사이의 거리가 보다 가까워지자 나머지 일행들 역시 멀리서 다가오는 기운을 감지했다.
그리고 그것은 상대 역시 마찬가지.
다만 카메라를 통해 이미 상대의 정체를 확인한 우리와 달리, 멀찍이서 경공을 멈추고 이쪽을 바라보는 그들의 시선에는 경계심이 가득했으니.
-그대들은 누구이기에 우리를 기다리고 있지?
설원에 울려 퍼진 웅혼한 음성에 일행 전원의 얼굴에 놀람이 깃들었다.
“소궁주의 내력이 이 정도였나요?”
“영약이라도 먹었나보지. 그래봤자 휘 랑에게는 못 미치겠지만.”
다른 건 몰라도 한 가지는 확실했다.
설이나의 내공이 예전과는 비할 바 없이 늘었다는 것.
일시적으로 발동한 금안에 비친 그녀의 단전은 눈부신 빛으로 가득했으니.
하지만 지금은 감탄보다 오해를 푸는 게 순서.
-다시 한 번 묻겠다. 그대들은 어째서 빙궁으로 향하고 있지?
난 한층 더 차가워진 목소리를 향해 반가움을 가득 담아 답했다.
-우리예요, 설 소저.
그 순간, 점차 험악해지던 상대 진영의 분위기가 눈처럼 녹아 없어졌다.
-…화화공자?
“저 별호도 오랜만에 들으니까 반갑네.”
“재작년 방학 때는 꼬박꼬박 조 공자라고 부르더니, 그새 원래대로 돌아왔나 봐요.”
일행이 잠시 추억에 젖은 사이, 설이나를 비롯한 빙궁의 무리가 조심스레 우리를 향해 다가왔다.
얼마 뒤, 육안으로 서로의 얼굴을 자세히 확인할 정도의 거리가 되자, 그들의 선두에 선 설이나와 하영영의 발걸음은 한층 빨라졌다.
“화화공자…! 진정 그대가 맞느냐? 게다가 검후 교관님에 흑백이화까지!”
“흑백이화 엄청 오랜만에 듣네.”
“그렇다니까?”
별호 몇 마디로 우리는 간만에 학관 시절로 돌아간 듯한 기분에 젖어들 수 있었다.
***
한바탕 소란이 지나갔다.
1년 만에 만난 친구끼리 손을 맞잡고, 포옹한 채 등을 토닥이고.
재회의 반가움에 잠시 잊고 있던 본래의 목적이 떠오른 것은, 그 다음이었다.
“그나저나 어떻게 이 먼 북해까지 온 것이냐. 학관은 어찌 하고?”
“저도 폐관수련을 하느라 작년 한 해 휴학했어요. 그런데 폐관을 마치고 나오니 빙궁에서 내란이 벌어졌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미안해요. 진즉 도우러 왔어야 하는데.”
“아니다. 머나먼 중원에서 여기까지 온 것만으로도 충분히 감사한다.”
절레절레 고개를 젓는 설이나를 따라 흩날리는 은발이 마치 요정처럼 신비롭다.
“저야말로 궁금해요. 설 소저가 여기 있다는 건 빙궁의 반란은 해결된 건가요? 아니면….”
설마 패배한 뒤 도주를…?
차마 불길한 뒷말을 내뱉지 못하고 말끝을 흐렸으나, 다행히 내 생각은 기우로 끝났다.
“걱정해주어 고맙다. 다행히 반란은 무사히 진압했다.”
“아… 다행이네요.”
“정말 천만다행이에요, 소궁주.”
안도의 한숨을 토해내는 건 나뿐만이 아니었다.
북해로 오는 내내, 내란에 패배한 그녀를 구출하기 위해 빙궁과 일전을 불사하거나, 최악의 경우 시신을 수습해야 하는 상황마저 상상했기 때문이다.
“정말… 모두 고맙다. 나를 돕기로 마음먹는 것이 쉽지 않았을 텐데.”
우리의 진심이 표정에 드러난 걸까, 설이나 역시 눈시울을 붉혔다.
이윽고 그녀의 입에서는 무려 한 해 동안 이어진 지겹고도 잔혹한 전쟁의 역사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렇게 아버님과 숙부 사이의 대결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놀랍게도 패배한 쪽은 아버님이었다. 당시 숙부의 움직임을 예의 주시하던 아버님께선, 숙부께서 싸움 직전 푸른 단환 하나를 삼키는 것을 보았다고 하셨다.”
역시….
나와 일행은 의미심장한 시선을 교환했다.
조금 전 설이나가 언급한 푸른 단환은, 전대 명교주 금양이 일시적인 내공증진을 위해 복용했던 그 단환이 분명했다.
그와의 목숨이 오가는 전투를 통해 단환의 효력을 제대로 실감한 나로선, 결국 자력으로 암중세력의 음모를 격파한 빙궁의 잠재력을 높이 평가하지 않을 수 없었다.
“헌데 빙궁주께서 일대일 싸움에서 패배하셨다면, 대체 내란에서 어떻게 승리를 거둔 건가요?”
“빙정을 발견한 덕이다.”
“빙정…!”
언젠가 사부님께 배운 내용을 떠올리고 있으려니, 그 모습을 오해한 벽려군이 설명을 시작했다.
“북해에 전설처럼 전해져 내려오는 한기의 결정체예요. 빙공을 익힌 이들에겐 둘도 없는 보물이죠. 단, 이룬 경지가 일천한 자가 빙정을 흡수하면 한기가 단숨에 심장까지 파고들어 온몸이 꽁꽁 얼어붙고 마는 마물이에요.”
“그렇다. 우린 궁지에 몰려 후퇴하던 중 빙궁의 지하 깊은 곳에서 자라나던 빙정을 발견했다.”
“설마 설 소저께서 빙정을…?”
“응?”
고개를 갸웃하는 그녀의 모습에 난 잘못 짚었다는 걸 깨달았다.
“설 소저의 기도가 보통이 아니어서요.”
“아!”
“전 영락없이 빙정을 흡수한 줄만 알았어요.”
뒤늦게 내 말뜻을 이해한 그녀가 배시시 웃으며 정답을 말했다.
“빙정을 얻으신 건 내가 아닌 아버님이다. 내 실력으로는 어림도 없는 일이지. 그저 아버님의 곁에서 호법을 서고 있던 덕에, 아버님께서 미처 흡수하지 못한 나머지 기운을 운 좋게 흡수한 것에 불과하다.”
“겸손할 것 없어요, 소궁주.”
“맞아. 멀리서 봐도 성취를 알겠던데? 축하해요, 설 소저.”
“모두 고맙다.”
환한 미소를 지은 그녀는 이어서 주섬주섬 품속에서 무언가를 꺼내들었다.
잠시 뒤 모습을 드러낸 그것은, 다름 아닌 무언가가 그려진 종이였다.
“백봉. 그대의 지략이라면 이 문양을 알지도 모르겠다.”
“이건….”
“숙부의 몸에서 나온 패에 그려져 있던 그림이다. 혹시 아는 것이 있을까?”
우희를 따라 나 역시 미간을 좁혔다.
그 문양이었다.
지금도 내 동영상 목록에 고이 저장되어 있는, 용과 주작이 그려진 암중세력의 문양.
조금 전 설이나가 내민 것은 그 패를 종이에 본뜬 탁본이 분명했다.
“실물은 아버님께서 지니고 계신다.”
“설 소저. 실은 우리도 비슷한 걸 본 적이 있어요.”
“그것이 정말인가?”
“네. 몇 달 전 사천에서 개방도를 잔혹하게 살해한 어떤 사내의 품에도 이와 똑같은 물건이 들어 있었어요.”
“그 뿐 아니에요.”
우희 또한 내 곁에서 말을 거들었다.
“어쩌면 전대 마교주인 금양이 교주위를 찬탈할 수 있던 것도, 빙궁주께서 보셨다는 그 푸른 단환 때문일지 몰라요. 우리는 어둠 속에서 일을 꾸미는 그들을 암중세력이라고 부르고 있어요.”
“그러고 보니 마교주가 바뀌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것도 이와 연관된 일인가?”
“마교 역시 빙궁처럼 자신들의 손으로 암운을 걷어내는 것에 성공했어요.”
“아….”
연이은 충격적인 소식에 멍하니 고개를 끄덕이는 그녀에게 난 아까부터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
“헌데 설 소저께선 지금 어딜 가는 중이었나요? 혹시 암중세력의 정보를 무림맹에 알리기 위해…?”
“아니다. 이 일은 아버님께서 정식으로 무림맹에 서한을 보낼 생각이다. 난 장보도에 관한 일로 개인적으로 움직이고 있다.”
“장보도요?”
장보도면 일종의 보물지도인데, 무슨 장보도?
내가 묻자 그녀가 오히려 고개를 갸웃했다.
“그대들은 중원에서 오는 길이 아니었나?”
“맞아요.”
“지금 중원은 흡성대법의 소재가 적힌 장보도가 발견되어 난리라고 들었다. 천무학관의 동기들도 조사대에 참여했다는 소식에 나도 서둘러 복귀를 하던 것인데… 혹시 내가 잘못 알고 있던 것이냐?”
우리 일행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서로를 돌아봤으나, 다들 모르는 눈치였다.
뭐지? 설마 우리가 북해에 들어온 사이 뭔가 사건이 터진 건가?
“희야, 흡성대법이 뭐야?”
“먼 옛날 중원에 혈겁을 일으킨 혈마라는 마두의 무공이에요.”
이어진 우희의 설명에 의하면 흡성대법은 무림인들이 후천적으로 쌓는 진기뿐만 아니라, 생명체라면 응당 지닌 선천진기마저 모두 빨아들이는 사악한 무공이라고 한다.
금안마군이 익히고 있던 채음보양법의 상위호환 정도 되는 모양이지?
아무튼 무림인 뿐 아니라 무공을 모르는 양민마저 흡성대법의 희생양이 되자, 당시 은퇴했던 천하제일고수 만고검이 금분세수까지 깨면서 혈마를 직접 처단했다고.
“하지만 비급은 끝내 발견하지 못하고 200년 전 혈마의 죽음과 함께 실전된 줄로만 알았는데….”
“휘 랑. 흡성대법이면….”
“응.”
약빈이의 심각한 표정에 나 역시 덩달아 표정을 굳혔다.
그렇잖아도 눈치 빠른 시청자들이 자신들이 알아낸 흡성대법의 정체에 대해 아우성을 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원퉁사 : 무협 정통 클리셰인 장보도 사건과 그 배후인 암중세력!] [크래카라 : 다잉메시지 못 풀었네 개방도 개죽음] [카시 : 깐휘 새끼야 려군 눈나 울리지 마] [간장향소주 : 한 글자 더 말하고 죽는 게 그렇게 힘들었냐] [빅그림 : 북해 왜 온 거냐고 ㅋㅋ]이제 와서 생각하면 아쉬움이 남긴 하지만 선택에 후회는 없다.
아마 설이나와의 만남이 늦어졌다면, 장보도를 조사하는 내내 마음 한 구석이 불편했을 테니.
그나저나 중원에 이렇게 엄청난 일이 벌어졌는데 왜 수진이는 아무런 연락도…. 아, 신혼여행 중이라 그런가?
뭘 얼마나 즐기고 있는 거야.
어쨌든 설이나의 말이 사실이라면 큰일이 아닐 수 없다.
암중세력의 정확한 의도는 알 수 없지만, 결코 중원에 도움이 되는 일은 아닐 테니.
그게 아니라도 학관 친구들을 돕기 위해선 한 시 바삐 중원으로 되돌아가야만 했다.
“화화공자, 그리고 세 분. 여기까지 왔으니 빙궁에 잠시 들렀다 가겠느냐?”
“초대는 감사하지만 안 될 것 같아요. 아무래도 설 소저의 말이 사실인 것 같거든요.”
“그대라면 그리 말할 줄 알았다. 그렇다면 우리 빙궁의 정예와 함께 이동하면 될 것이다. 적어도 북해에서만큼 이곳 지리를 우리보다 잘 아는 이들은 없으니까.”
“든든하네요.”
그렇게 우린 북해에 진입한지 보름여 만에 다시 중원으로 발길을 되돌렸다.
기존에 품고 있던 설이나에 대한 우려를 내려놓은 대신, 장보도와 흡성대법이라는 새로운 시름 하나를 짊어진 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