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tial Streamer RAW novel - Chapter 159
진입 (1)
전설의 흡성대법이 잠들어 있다는 비동의 입구는 중원 각지에서 몰려든 무인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주인 없는 비급에 눈이 먼 군웅들과 혼란을 막으려는 무림맹 무사들 사이에선 하루가 멀다 하고 실랑이가 벌어지고 있었다.
우리가 도착한 것은 이러한 갈등이 절정에 달했을 때였다.
“무덤 입구는 봉쇄되었습니다! 안에 혈마의 비급이 있다는 소문도 헛소문일 가능성이 높으니 모두 협조 부탁드립니다!”
“우리 목숨 우리가 알아서 하겠다는데 무슨 참견이냐!”
“옳소! 무림맹이 언제부터 우리 군소방파와 낭인들을 그리 걱정해주었소! 이번에도 필시 보물을 독차지하려는 속셈인 게지!”
“쯧쯧, 있는 놈들이 더하다더니.”
“모두 흥분을 가라앉히세요! 이번 사태는 여러모로 수상한 점이 많아 무림맹에서는 현재 조사대를….”
성난 군웅들 앞에서 열변을 토하는 미청년을 발견한 벽려군의 눈이 이채를 띠었다.
“주강은 수련생이네요.”
“네. 무진도 있네요.”
주강은과 강무진.
난 그리운 학관 동기의 얼굴을 보며 미소를 머금었다.
벌써 3년인가?
세월도 빠르지.
기숙사에서 떠들썩한 매일을 보낸 것이 엊그제 같은데.
그러나 재회의 반가움에 앞서 한 가지 확인할 사실이 있었다.
-교관님, 혹시 무진이나 강은, 둘 중 한 사람이 황실과 연관이 있나요?
-알고 있었나요? 사실 주 소협은 황궁의 삼십이 황자예요.
진즉 물어볼걸.
허탈하리만치 시원한 대답이 돌아왔다.
그러나 눈치로 보아 벽려군도 주강은이 여자라는 사실만큼은 모르는 듯했다.
하긴 얼굴이 곱상해도 오죽 곱상해야지.
더구나 남성의 특징인 목젖이며 태양혈까지 발달했으니, 의심하지 않는 것도 납득이 간다.
나도 우연히 그녀의 가슴을 동여 맨 붕대를 보지 못했다면 깜빡 속았을 것이다.
-그럼 존명…. 아니, 양진철의 정체도 아시나요?
-양철진 수련생 말하는 거 맞죠?
-아, 네. 양철진.
-양철진 수련생도 뭔가를 숨기고 있나요? 맹에서 따로 들은 바는 없어요.
벽려군과 잠시 전음을 나누는 사이에도 입구의 상황은 시시각각으로 달아오르고 있었다.
“무림맹의 봉쇄가 얼마나 허술한 지는 이미 전 한 차례 밝혀진 바 있소! 심지어 다른 입구를 통해서는 마교도놈들마저 들어갔다 하더이다!”
“마교도라니? 그 말이 사실이오?”
“내 말이 거짓이라면 천벌을 받을 것이오! 입이 있으면 답해 보시오, 젊은 무사 양반! 사악한 마교도들의 침입은 모른 체 하고서, 같은 중원인이 우리들만 핍박하는 이유가 무엇이오!”
“모른 체 한 것이 아니라…!”
강은의 말문이 막히자, 그는 기다렸다는 듯이 한층 사람들을 선동했다.
“나는 오늘 무림맹에 밉보이는 일이 있더라도 기필코 저 안에 들어가야겠소! 나와 뜻을 같이 할 용기 있는 자는 없소?”
“하남의 육모가 함께 하겠소!”
“우리 섬서이랑도 대협의 의견에 찬성하오!”
마교에 대한 소문이 결정적이었다.
무림맹 무사들의 족히 열 배는 되어 보이는 군웅들이 흉흉한 기세로 병장기를 꺼내들자, 간신히 유지되던 양측의 균형이 무너지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입구가 열렸다!”
“와아아아!”
“들어가면 안 돼! 안 돼… 젠장!”
흙먼지를 일으키며 비동 내부로 진입하는 수백 명의 사람들을 황망히 바라보던 강은 또한 이를 악물며 비동 안으로 몸을 날렸다.
이제 우리도 나설 시간이다.
“가자.”
“영영. 넌 여기 남아 궁도들과 함께 입구를 살피거라.”
“아가씨…?”
“이곳이 정말 암중세력이 파놓은 함정이라면 누군가 비동 입구를 무너뜨리려 할지도 모른다. 뒤를 맡기마.”
납득할 만한 이유를 들은 하영영이 그제야 결연한 얼굴로 고개 끄덕였다.
“알겠어요, 아가씨. 수상한 움직임을 보이는 이가 있으면 목숨을 걸고 사수할게요.”
“맡기겠다.”
그렇게 설이나를 제외한 빙궁도 스무 명을 입구에 대기시킨 우리는 서둘러 혈마의 무덤으로 진입했다.
***
비동에 들어선 순간, 외부와는 확연히 다른 음습하고 서늘한 공기가 우리를 덮쳤다.
처음 겪는 일은 아니었다.
전생에도 가족이나 여친과 유명한 동굴을 몇 차례 관광한 적이 있으니.
그러나 관광지의 동굴과 달리, 이곳엔 방문객을 위한 조명이나 계단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눈앞의 물건조차 분간이 가지 않는 암흑천지 속에서, 사람들은 저마다 시야를 확보하기 위해 횃불과 화섭자 따위로 불을 밝혔다.
“상상했던 것보다 더 어둡네요. 넓고.”
종유석이 가득 매달린 드높은 천장을 바라보며 우희가 읊조렸다.
고수의 반열에 들었음에도 자연의 장엄함 앞에 주눅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듯했다.
“빈아, 넌 사부님과 여행 중에 동굴을 탐험해 본 적 있어?”
“응. 그래도 이렇게 거대한 곳은 없었어.”
“교관님은….”
벽려군을 향해 묻던 난 말끝을 흐렸다.
문득 곤륜산의 어느 좁을 바위틈에서 그녀와 몸을 겹쳤던 기억이 떠오른 까닭이다.
대답하는 그녀의 얼굴에도 씁쓸한 미소가 걸려 있긴 마찬가지였다.
“…북해에 갈 때 준비했던 방한용 옷을 버리지 않아 다행이에요. 상당히 추워요.”
“물방울도 떨어지는데…. 바위에 물기가 많아. 미끄러지지 않게 조심해.”
“그런가? 난 시원해서 좋다.”
설이나의 한 마디에 일행의 얼굴에 옅은 미소가 피어났다.
“북해는 사람 살 곳이 못 돼.”
“진짜 추웠는데. 설 소저가 학관에서 왜 그렇게 땀을 흘렸나 알 거 같아.”
“그 얘기는 하지 말아라….”
농담도 잠시, 우린 다시 진지한 기색으로 이동을 시작했다.
“아직까진 별 거 없지?”
“비동이 개방된 지 벌써 이레가 흘렀어요. 아마 초입에 있던 함정 대부분은 파훼됐겠죠. 어쩌면 사람들의 경각심을 낮추기 위해 입구 부근에는 별다른 기관을 설치 안 했을 수도 있구요.”
“응. 그래도 혹시 모르니 조심히 가자.”
비록 동굴 초입에 불과했지만 방심은 금물이다.
이곳이 암중세력이 준비한 함정이 맞다면 언제 어디서 생각지 못한 변수가 발생 할지 알 수 없으니.
그러나 이처럼 신중을 거듭했음에도 우리의 전진 속도는 다른 무리와 비교하면 토끼와 거북이 수준으로 빨랐다.
당연한 일이다.
맵핵이나 다름없는 카메라로 미리 전방의 지형을 살필 수 있는데다, 녹화 기능 덕에 길을 잃을 염려도 없으니.
그렇게 남들이 길을 찾아 헤매는 사이 빠르게 동굴 초입을 주파한 우리는 어느덧 선두 그룹을 따라잡을 수 있었다.
그들의 후미에는 조금 전에 본 강은 일행 역시 함께였다.
“다들 모여 있네요.”
“응. 앞에 길이 끊어져 있어.”
카메라로 살펴본 인파의 선두에는 한 때 다리가 존재했던 흔적만이 덩그러니 남은 낭떠러지가 존재했다.
200년 만에 찾아온 손님들의 무게를 견디지 못 하고 끊어진 걸까?
아니면 앞서 보물을 찾아 들어온 이들이 경쟁자를 줄이기 위해 일부러 끊었든가.
-살펴보니 다른 길은 없어 보여
-뛰어서 건너야겠네요.
실제로 경신법에 자신이 있는 몇몇 고수들은 이미 저마다 화려한 몸놀림을 선보이며 낭떠러지 저편으로 건너간 지 오래였다.
그러나 절반 이상의 무인들은 머뭇거리기만 할 뿐 함부로 발을 떼지 못했다.
누군가 횃불을 던져 알아낸 낭떠러지 사이의 거리는 대략 20미터.
그 틈새를 메운 계곡은 깊이를 알 수 없는 어둠만이 자욱했으니.
상승 무공을 익히지 못한 군소방파의 무인이나 낭인들이 건널 엄두를 못내는 것도 당연했다.
물론 우리 일행 중 고작 이 정도 난관 앞에 굴복할 이는 없었다.
그와 동시에 머리를 스치는 자연스러운 의문 한 가지.
“이백 년이 지나도록 이름이 회자되는 고수가 이런 곳에 다리를 놓을 이유가 없는데 말이야. 암중세력이 함정을 준비하는 과정에 사용했던 걸까?”
“혹시 모르죠. 혈마가 무공을 모르는 아녀자와 살림이라도 차렸는지.”
“이런 동굴에?”
잡담을 나누는 사이, 또 다른 이가 보물을 꿈꾸며 벼랑 끝에 섰다.
한참 전부터 낭떠러지 앞을 서성이던 자다.
“후….”
긴장 가득한 한숨과 함께 도움닫기를 시작한 그의 신형이, 이내 절벽 끝을 힘껏 박차며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그러나 그는 스스로의 실력에 좀 더 의심을 품었어야 했다.
“헉! 아아악!”
절벽을 한 뼘 앞두고 추락하는 사내의 모습에 몇몇 사람이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마지막까지 고개를 돌리지 않은 이들은 볼 수 있었다.
진즉 어둠 속으로 사라졌어야 할 사내의 신형이 허공에 우뚝 멈춰 선 것을.
잠시 뒤, 그의 몸이 천천히 낭떠러지를 거슬러 원래의 자리로 되돌아오자, 사람들의 놀람은 더욱 커졌다.
“이게 어찌 된 일인가!”
“기사(奇事)로구나!”
군웅들 사이에 한바탕 소란이 벌어진 가운데 침착한 기색을 유지하는 것은 설이나를 제외한 우리 일행뿐이었다.
-가가예요?
-휘 랑이야?
동시에 들려온 전음에 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죽음을 눈앞에 둔 사내의 모습에 자기도 모르게 건곤대나이를 펼치고 만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헛수고였음은 머잖아 밝혀졌다.
“바람이 부는 기관장치다! 경공이 아니라 용기를 시험하는 관문인 게야!”
“과연!”
“내, 다시 한 번 해보지.”
쯧.
목숨 아까운 줄도 모르고 다시 한 번 낭떠러지 앞에 서는 사내의 모습에 난 조용히 혀를 찼다.
그리고 다시 한 번 같은 일이 반복됐다.
“젠장!”
다시금 낭떠러지 아래로 떨어지는 사내의 얼굴에는 실패에 대한 안타까움만 가득할 뿐, 죽음에 대한 공포는 종전에 비해 현저히 옅었다.
그러나 그의 표정이 급변하기까진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일 장.
이 장.
“헉?”
점점 속도를 더해가는 추락 속에,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은 사내의 얼굴이 비로소 공포에 질렸으나, 후회는 아무리 빨라도 늦은 법.
아무리 기다려도 도움의 손길은 다가오지 않았고, 곧 벼랑 안쪽에선 끔찍한 비명이 메아리쳤다.
“으아아아악!”
얼마 뒤, 동혈을 가득 채웠던 비명마저 뚝 끊기자 사람들은 그제야 낭떠러지에서 황급히 뒷걸음질치며 함부로 도전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기관장치가 아니었나?”
“그럼 좀 전의 그것은…?”
웅성거리는 사람들을 씁쓸한 눈으로 바라보던 그 때, 귓가로 우희의 전음이 들려왔다.
-너무 마음 쓰지 말아요. 또 구해줬다면 다른 사람들까지 무분별하게 뛰어들어 피해가 가중되었을 거예요. 그리고 이 정도도 통과하지 못하는 이들이라면, 이 앞에서는 살아날 수 없을 거예요.
-응. 고마워.
희미한 미소로 화답한 난, 음울한 눈길로 절벽 밑을 바라보는 강은에게 전음을 보냈다.
-강은.
내 전음에 흠칫하여 뒤를 돌아본 그의 얼굴에 반가움이 피어났다.
이윽고 그가 한달음에 우릴 향해 달려왔다.
“너희들? 설 소저와 교관님까지….”
“오랜만이야, 강은. 3년 만이지.”
“벌써 그렇게 됐나? 그나저나 너희는 이번 학기에 휴학하는 줄 알았는데.”
“맞아. 우린 학관 사람들과는 별개로 움직이는 중이야.”
대답을 들은 그의 안색이 또 한 번 변했다.
“설마 가휘, 너도 혈마의 보물 노리는 거야?”
“그럴 리가. 그런 사악한 마공을 익혀서 어디에 쓰겠어.”
내 대답에 채팅창에 잠시 소란이 일었다.
[pmk4919 : ???] [유라져아 : ??] [디셈버 : 벽려군 몸에 타투 새기는데 썼지] [작은새우 : ????] [정실은우희다 : 금안마공 : ㅂㄷㅂㄷ] [라장조 : 당당해서 웃겼다ㅋㅋㅋㅋ] [Ordmary : 양심 있으면 려군 눈나 행복하게 해줘라 두 명이나 세 명이나 쓰레기인 건 똑같은데]오늘도 내 편은 없는 채팅창에서 눈을 돌린다.
“그럼 여기엔 어쩐 일로.”
“동기들이 위험한 임무를 받았다는데 손 놓고 있을 수가 없어서.”
“무슨 일이지?”
난 갑자기 대화에 끼어든 한 사내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짙은 눈썹에 형형한 눈빛이 인상적인 자였다.
“이 분은?”
“아, 날 호위하는 가문의 고수셔. 무림맹 무사들께서 계시니 문제없다고 말씀을 드렸는데도 부모님께서 어지간히 걱정이 되셨나봐. 다른 동기들과 달리 입구에 남은 것도 이 분이 극구 반대하시는 바람에….”
“장견일세. 강호에서 활동한 일이 드물어 별호는 없네.”
가문이라.
황녀를 지키는 황실의 호위 정도라고 보면 되겠지.
금의위나 동창 쪽 인물일까?
“장 대협이시군요. 전 조가장의 조가휘. 이쪽은 제 일행들입니다.”
“벽려군이에요.”
“검후?”
잠시 흠칫한 그가 이내 표정을 고치며 포권했다.
“검후의 명성은 익히 들었소.”
“그리고 차례로 제갈세가의 백봉, 적양권 대협의 따님인 주약빈 소저, 마지막으로 빙궁의 소궁주이신 설이나 소저입니다.”
설명이 이어질수록 그의 눈에는 놀람이 깃들었다.
잠시 뒤, 소개를 마친 우리에게 강은이 그간 있었던 일들을 간략히 설명했다.
“그렇잖아도 나도 선발대가 걱정되던 참이야. 이레 전 다른 입구들이 발견됐다는 소식은 들었지?”
“응.”
“그 때도 오늘과 마찬가지였어. 난 장 대협의 만류로 자리에 남았지만, 다른 동기들은 군웅을 쫓아 비동 안으로 들어갔지.”
“그 이후로 별다른 소식은 없었고?”
“응.”
현장 상황을 전해들은 우리 일행은 눈빛을 교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우린 더 안쪽으로 들어가 볼게.”
“가휘, 네가 후기지수 중에서도 빼어나다는 건 잘 알지만 여긴 위험이 가득해.”
“너도 그걸 알면서도 여기 있잖아.”
내 말에 그의 준수한 얼굴에 잠시 갈등이 어렸다.
“그럼 나도 같이 갈게.”
“너도?”
“그것은 불가하오.”
그렇겠지.
황녀가 위험을 자처하는데 어느 호위무사가 두고 보겠어.
그러나 장견의 엄중한 반대조차 강은의 결심을 되돌릴 수는 없었다.
“더 이상 말리지 마세요.”
“공자.”
“두렵다면 장 대협께서는 돌아가셔도 좋아요.”
사뭇 도발적인 언사에 장견의 눈썹이 꿈틀했다.
그러나 이내 그는 짙은 한숨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소. 허나 상황이 위험하다고 판단될 때는 공자를 제압해서라도 끌고 나오겠소.”
“…좋아요. 무진, 너는?”
“네가 원한다면.”
그들의 자세한 정체를 듣고 난 뒤여서 일까?
서로를 바라보는 강은과 무진의 눈빛 속에 우정 이상의 감정이 엿보였다.
그리고 그런 두 사람을 바라보는 장견의 기묘한 눈빛도 신경 쓰이긴 마찬가지.
그렇게 주강은 일행까지 더해진 우리 여덟은 곧 군웅들의 시선을 등에 업은 채 낭떠러지 앞에 섰다.
등 뒤에서 느껴지는 탐욕스러운 시선만큼이나 짙고 깊은 어둠이 낭떠러지 건너편에서 우리를 향해 손짓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