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tial Streamer RAW novel - Chapter 162
조우 (1)
섬도삼협이 기문탈출실의 경험을 바탕으로 가까스로 진법에서 탈출한 그 시각.
그곳에서 수십 장은 더 깊은 곳에 위치한 지하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다만 이쪽의 대처는 섬도삼협에 비해 훨씬 능숙하고 민첩했다.
“군사. 이 돌을 옮기면 될까요?”
“반치만 더 우측으로 두게.”
“존명.”
명교의 지낭, 곽정유의 지시에 따라 무사가 돌을 옮긴 순간,
놀랍게도 지옥을 옮겨놓은 듯했던 풍경이 이지러지며 평범한 공동의 모습이 드러났다.
마귀들의 환영을 상대로 검격을 뿌려대던 명교 무사들은 적들이 사라지자 너나 할 것 없이 탄성을 터뜨렸다.
“후…. 무서운 진법이었습니다. 군사께서 안 계셨다면 어찌 됐을 지 생각만 해도 아찔합니다.”
“후후. 자네들이 평소 훈련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는 증거지.”
“군사께서 평교도들을 위해 마련해주신 기문 탈출실 덕입니다. 최초에 이 일을 제안하신 것이 부교주라 하셨지요?”
“음. 부교주께서 아직 집법당주이실 때 알려주신 의견을 바탕으로 토대를 세웠지.”
그 순간, 곽정유와 무사의 대화를 지켜보던 천화대 여인들의 입에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부교주님의 선견지명이 정말 대단하세요. 대체 어디까지 읽고 계신 건지….”
“전대 교주를 물리칠 수 있었던 것도 부교주님의 심계 덕이라고 들었어요.”
“그래도 다른 교도들이 부교주님을 사신 취급하면 속상하지 않아요? 사실 그렇게 마음이 따뜻한 분도 없는데. 안 그래요, 언니?”
“어? 으응….”
잠긴 목소리로 답하는 면사 여인의 정체는 천화대주 심서우.
그녀는 동료를 배신했던 자신의 과거가 혹여 평화 회담에 악영향을 끼치지 않을까, 중원에 들어선 순간부터 면사를 쓰고 활동하고 있었다.
그러나 얼굴 전체를 가린 면사로도 그녀의 몸에서 풍기는 음울한 분위기를 숨길 수는 없었다.
“부교주께서 계셨더라면….”
말끝을 흐린 심서우의 시선이 ‘영화’란 이름의 천화대원을 향했다.
정확히는 그녀의 허전한 옷소매로.
이틀 전 함정을 돌파하는 과정에서 한 쪽 팔을 잃은 대원 앞에서, 그녀는 차마 고개를 들 수 없었다.
“내가 아니라 부교주였다면 네가 팔을 잃는 일은 없었을 텐데….”
“그렇지 않아요, 언니.”
“내 탓이야. 미안해, 영 매.”
“자꾸 그러시면 저 진짜 화낼 거예요. 무인의 목숨은 스스로 지키는 것이라고 가르쳐 준 건 언니였잖아요. 다 제가 부족해서 일어난 일이에요. 저 정말 괜찮아요. 목숨을 잃지 않은 게 어디예요.”
“영 매….”
두 여인을 지켜보던 천화대원들의 눈에 이슬이 맺히던 그 때였다.
“신파극 그만 찍고 준비해. 누군가 오고 있으니까.”
싸늘한 목소리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홍사강.
천서원이 본단을 떠난 뒤로 웃음을 잃은 여인은 누구에게나 곱게 말하는 법이 없었고, 자연히 그녀를 바라보는 천화대원들의 눈초리 역시 결코 곱지만은 않았다.
그러나 양측의 갈등이 싸움으로 번지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녀의 경고처럼 공동의 입구를 통해 쏟아져 들어온 일단의 무리 때문이었다.
“풍광기자…? 마교!”
“이런, 누군가 했더니 무림맹 분들이셨구려. 뒤쪽의 젊은 친구들은 천무학관의 수련생들인가?”
“중원을 향한 야욕을 버린 것이 아니었나? 어째서 아직도 사천 한복판에 있는 것이오!”
“유람 중이오.”
“남의 무덤에서 말이오?”
태연하게 오가는 대화와 달리, 서로를 바라보는 양측 무인들의 눈빛에는 긴장이 가득했다.
어찌 그러지 않겠는가.
비록 상호 불가침 조약을 맺었다고는 하나, 오랜 세월에 걸쳐 쌓인 서로에 대한 불신과 혐오감은 하루아침에 지워지는 것이 아니었으니.
더구나 오랜 지기조차 원수로 돌변하게 만드는 것이 바로 보물이 지닌 마력이 아니던가!
“귀교 또한 흡성대법을 노리는 것이오?”
“아니라고 하면 믿어주겠소?”
그렇게 양측의 기세가 점차 험악해지던 그 때였다.
무림맹 사람들이 들어선 동혈의 입구가 닫히며 천장에서 독 발린 암기가 쏟아지기 시작한 것은.
쿠구구궁-.
“함정이다!”
“또야?”
두 무리는 죽일 듯 서로를 노려보던 것도 잊고 허겁지겁 병장기를 들어 암기를 쳐내기 시작했다.
천화대원들과 대치하던 홍사강 역시 재빨리 허리춤의 연검을 풀어내며 선두로 나섰다.
스가가각-!
시린 은빛이 허공을 화려하게 수놓으며 수 백 개의 암기를 튕겨냈다.
여태까지와 특별히 다를 것이 없는 함정으로는 검술이 경지에 달한 그녀에게 아무런 위해도 가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녀의 시선을 사로잡은 것은 따로 있었으니.
“하앗!”
당찬 기합성은 무림맹, 정확히는 천무학관의 진영에서 터져 나왔다.
이제 열다섯이나 되었을까.
분연히 검을 휘두르는 소녀의 앳된 외모와 조그마한 키는 절로 사람들의 보호본능을 일으켰다.
그러나 홍사강이 주시한 것은 그녀의 외모가 아니었다.
‘저 검술은…?’
어찌 잊을까.
‘그’와 처음으로 검을 나누었던 그 날의 추억을.
입교하자마자 스승의 후광으로 대주 자리를 꿰찬 그를 시험하기 위해 연무장을 찾은 자신을 도리어 진심으로 굴복시킨 그 검술을!
지금 소녀가 펼치는 검술은 그 날 그가 보여준 검술과 놀랍도록 닮아 있었다.
카가가강-!
허공을 노니는 연검의 속도가 한층 박차를 가했다.
잠시 뒤, 폭우처럼 쏟아지던 암기의 비가 마침내 그친 순간, 홍사강은 자신이 눈여겨보던 소녀를 향해 빠르게 걸어갔다.
“그 검술.”
“동생에게 무슨 볼 일이오!”
“애송이는 비켜.”
콰앙!
“크윽…!”
“오라버니!”
소녀의 앞을 가로막는 청년을 일 검에 날려버린 홍사강은 조그마한 소녀에게 검을 겨누며 으르렁거렸다.
“계집.”
“이게 무슨 짓이에요!”
“그 검, 누구에게 배웠지?”
“…네?”
“넌 천서원 그 자와 무슨 관계지?”
“천서원?”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온 이름을 들은 소녀가 커다란 눈망울을 깜빡이며 되물었다.
“귀교의 부교주 말씀이신가요? 그걸 왜 저한테 묻죠?”
“모른 척해도 소용없다!”
“꺅!”
뱀처럼 솟구친 연검이 소녀의 어깨로 쇄도했다.
그러나 소녀의 대응 역시 만만치 않았다.
카앙!
“윽…!”
“제법이구나, 계집.”
“다짜고짜 무슨 짓이에요! 회담장에서 나눈 약조는 모두 거짓이었나요?”
“이건 내 사적인 일이다.”
그것을 시작으로 곧 두 사람 사이에는 수차례 매서운 공방이 오갔다.
“멈춰라, 악녀!”
“흥!”
“홍사강! 검을 거두지 못할까! 교주님의 오랜 비원을 물거품을 만들 셈이냐!”
“벌은 추후에 달게 받겠어요.”
뒤늦게 가세한 무림맹의 고수는 물론, 곽정유의 노한 음성마저도 소녀를 향한 그녀의 집착을 막을 수는 없었다.
그럼에도 소녀는 침착을 유지하며 그녀의 연검을 하나하나 빗겨냈다.
아마 명교의 후배였다면 대견하다며 칭찬이라도 했으리라.
그러나 지금의 홍사강에게 그런 여유 따위는 없었다.
오히려 검을 섞으면 섞을수록 확신만 더해질 뿐.
“이래도 천서원을 몰라? 그 검을 가르쳐 준 게 누구야!”
“모른다니까요! 이건 세상에서 저랑 할아버지랑 휘 오라버니밖에 모르는….”
“휘 오라버니?”
그녀의 눈썹이 꿈틀한 순간이었다.
둥-.
“크윽.”
허공을 격해 심장을 두드리는 충격에 홍사강은 몸을 비틀며 뒤로 물러났다.
욱신거리는 가슴을 부여잡은 채 고개를 든 그녀의 두 눈에, 자신을 향해 퉁소 끝을 겨눈 한 여인이 들어왔다.
그녀의 이름은 금라희.
천무학관의 음공 교관이자, 소리로 상대의 장기마저 파괴할 수 있는 가공할 음공의 고수.
“물러나세요, 어린 소저. 또다시 우리 수련생을 핍박한다면 심장을 터뜨릴 테니까.”
“…재밌네.”
입꼬리를 끌어올린 홍사강의 나머지 한 쪽 손을 타고 용의 비늘을 닮은 채찍이 모습을 드러냈다.
명교의 기라성 같은 고수들을 제치고 최연소 대주 자리에 오른 그녀의 진정한 실력은 이제부터가 시작이었다.
“재밌어.”
“수련생을 지켜라!”
“쯧. 전원, 방어태세를 갖춘다.”
곧 두 여인을 중심으로 나머지 고수들마저 병장기를 치켜세우자, 공동은 일촉즉발의 긴장에 휩싸였다.
***
운무가 낀 협곡지대를 빠르게 통과한 우리는 몇 개의 난관을 더 지난 뒤에야 비로소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쫓아오던 사람들은?”
“바로 다음 진법에서 막혔어.”
“다음부터는 미리 말 좀 해.”
“그래서 신호 줬잖아.”
비동에 들어와서도 투닥거림을 멈추지 않는 우희와 약빈이를 흐뭇하게 바라보던 그 때였다.
카각-.
“응?”
“왜 그래요?”
“무슨 소리 들리지 않아?”
카가각-.
숟가락으로 얼음을 긁어내는 듯한 소리는, 내가 기대어 앉은 암반 너머에서 울려 퍼지고 있었다.
난 소리의 정체를 파악하기 위해 귀를 기울이는 한편, 카메라를 벽 너머로 날려 보냈다.
회색, 회색, 회색.
온통 회색빛으로 가득한 공간을 얼마나 가로질렀을까, 순간 벼락처럼 떨어져 내리는 검은 도신(刀身)이 화면에 잡혔다.
“다들 피해!”
콰아앙-!
일행이 앞으로 몸을 날리는 것과 동시에, 조금 전까지 내가 기대고 있던 벽이 산산이 터져나갔다.
“콜록, 콜록.”
“괜찮아?”
“응….”
먼지를 들이킨 듯 기침을 쏟아내는 약빈이의 등을 두드리는 사이,
뿌옇게 가라앉기 시작한 먼지 너머로 일단의 무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역시 련주의 도법은 천하일절입니다!”
“기 숙, 칭찬하지 마세요. 계속하시잖아요. 아빠, 맞은편에 누구 있으면 어쩌려고 그래요.”
“있기는 누가 있다고….”
뻥 뚫린 암반 사이를 빠져나오던 이들이 우리를 발견하곤 걸음을 멈춰 섰다.
그리고 그들의 선두에 선 두 사람의 정체를 확인한 나는 황급히 고개를 돌리지 않을 수 없었다.
문제는 그들 역시 우리의 얼굴을 알아봤다는 점이었다.
“백봉? 산당화?”
“사화?”
“그럼 그 쪽의 고개를 돌린 사람은… 조 소협, 당신인가요?”
“…뭐?”
순간, 동혈의 온도가 10도는 내려간 기분이 들었다.
“설마… 저놈이 그 화화인지 뭔지 하는 놈이냐?”
적개심 가득한 목소리로 으르렁거린 것은, 사화의 곁에 선 봉두난발의 괴인.
호사개의 죽음이 있던 날 밤 나와 같은 객잔에 머물렀던 바로 그 자였다.
당시엔 그의 정체를 몰랐지만 지금은 누군지 안다.
그가 내게 결코 좋은 감정을 가지지 않았을 것이란 것도.
아니나 다를까, 다음 순간 그의 신형은 공간을 가로질러 순식간에 내 앞에 당도해 있었다.
“흡!”
콰앙-!
장심과 장심 사이에서 터져 나온 충격파에 동굴이 무너질 듯 비명을 질렀다.
이윽고 각기 두 걸음과 세 걸음 씩 물러나는 우리를 본 양측 인사들의 얼굴에 놀람이 번졌다.
특히 상대방의 표정이 가관이었다.
천하의 사도련주를 상대로 비슷한 역량을 선보인 청년의 내력이 궁금했던 것이리라.
그러나 정작 당사자인 내 얼굴엔 낭패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의 손에 담긴 막대한 경력을 해소하는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건곤대나이를 펼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가 느낀 불안은 이내 현실이 되었다.
“이건…?”
놀란 표정도 잠시.
나를 바라보는 그의 얼굴에 광폭한 미소가 피어났다.
“너, 그 때 그 놈이지?”
젠장.
그와는 반대로 내 표정은 사정없이 일그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