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tial Streamer RAW novel - Chapter 170
추락 (2)
어떻게 지상까지 도착했는지 아무런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러나 먹구름이 낀 듯한 기분과는 정반대로 비동의 출구는 햇살이 가득했다.
그래서 더 서글펐다.
두 번 다신 볼 수 없는 그녀와 달리, 세상은 이렇게나 멀쩡했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여긴.”
동굴 입구에 멍하니 주저앉아 바깥 경관을 바라보던 중 문득 깨닫는다.
어쩐지 이 장소가 눈에 익다는 것을.
머잖아 난 울 것 같은 기분으로 파르르 입 꼬리를 떨었다.
기억났다.
이곳은 비동에 진입하기 전 우리 일행이 마지막으로 밤을 새웠던 야영지 근처였다.
또한 벽려군과 단 둘이 이야기를 나눴던 절벽이 가까운 장소이기도 했다.
그랬는데.
그랬…었는데.
지금은 나 혼자 뿐이다.
-진심으로 네가 행복하길 빌어, 가휘.
-마지막으로 나 한 번만 안아줄 수 있어?
-살아… 가휘.
“아… 아아….”
행복하라면서요…. 그런데 그렇게 가는 게 어디 있어요.
다 마른 줄 알았던 눈물이 또다시 눈앞을 적신다.
왜 그 때 안아주지 못했을까.
그게 뭐가 그리 어려운 일이라고.
슬픈 얼굴로 산을 내려가던 그녀의 모습이 떠올라 가슴이 미어졌다.
아, 려군….
악몽.
이건 악몽이다.
지상으로 오는 내내 몇 번이나 눈을 감았다 뜨길 반복했는지 모른다.
다시 눈을 뜨면, 깜빡 잠든 나를 업은 벽려군의 등이 눈앞에 있을 것 같아서.
하지만 그럴 때마다 역으로 깨닫는 사실은.
이 모든 일이 현실이라는 것.
그녀가 세상에 없다는 진실.
문득 가슴의 상처가 아려왔다.
곤륜산에서 서로가 서로에게 남긴 상처.
그녀가 내게 남긴 흉터는 아직도 이렇게 선명하건만.
그녀는 더 이상 없다.
없다.
깜깜한 낭떠러지 밑으로 사라져버렸다.
“으흐흑….”
“가가. 가가, 정신 좀 차려봐요. 가가.”
“아… 으….”
“흐윽, 흑-.”
내 곁에 쪼그려 앉은 우희의 눈에서도 눈물이 터졌다.
우울함은 전염된다.
이내 멍하니 흐느끼는 나를 따라 동굴 입구는 울음바다가 되었다.
함께 동굴을 탈출한 일행 중 생환의 기쁨을 누리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말없이 동굴 벽을 마주본 채 어깨를 떠는 약빈이.
두 눈이 퉁퉁 부운 소혜를 끌어안은 채 조용히 한숨만 내쉬는 설이나.
심지어 벽려군과 단 하루뿐인 인연인 천화대원들조차 울적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특히 요 몇 개월 간 벽려군을 탐탁찮게 대하던 우희는 다 자기 때문인 것 같다며 자책했다.
그 와중에 아직도 동굴 바닥에 누워 깨어나지 못하는 홍사강의 모습은 나를 더 깊은 죄책감의 늪으로 인도했다.
모두 나 때문이다.
내가 오만했다.
어째서 암중세력의 함정을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 자신했나.
어째서 지인들을 만나자마자 탈출을 종용하지 않았나.
사람들이 흡성대법을 포기하지 않아서? 그딴 건 변명에 불과하다.
그 기저에 깔려 있는 것은 자신감이었다.
수십 갑자에 이르는 내공과 건곤대나이를 지닌 나라면, 어떤 위기가 찾아와도 감당할 수 있다는 자신감.
탈출 중에도 마찬가지.
생판 모르는 남들이야 죽든 말든 상관 않고 주위 사람들만 챙겼다면.
그랬다면 홍사강이 사경을 헤매는 일은, 벽려군을 저 외로운 지하에 쓸쓸히 남겨두는 일은 없었을 텐데.
결국 모든 것이 내 잘못이다.
“미안해요. 미안…해요.”
사과를 받을 상대가 없다는 사실에 공허함은 더욱 커진다.
그렇게 점차 침울해져가는 분위기를 깨뜨린 것은, 홀로 바깥 동향을 살피고 온 심서우의 다급한 외침이었다.
“이상해요.”
“뭐가… 말이에요?”
눈물을 닦아내며 자리에서 일어나는 우희에게 서우가 설명했다.
“주변을 둘러봤지만 사람들이 보이지 않아요. 게다가 곳곳에 시신들이 널려 있어요.”
“…시신?”
“네. 처음엔 탈출 중에 상처를 입은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는데, 상처를 살펴보니 낙석이 아니라 검에 베인 흔적들이 압도적이에요.”
우희의 눈빛이 심각해졌다.
“…흡성대법.”
“백나은에게 건넨 흡성대법이 혈겁을 일으켰을 거란 말인가요?”
“그렇다 쳐도 아무도 없는 건 이상해요. 우리가 도중에 일어난 사고…로 남들보다 뒤쳐지긴 했지만, 다른 이들도 비동을 탈출하느라 녹초가 되었을 텐데. 더구나 귀교의 군사라면 쟁탈전 참여를 꺼려하지 않았던가요?”
“그렇다면 대체….”
여러 추측들이 오가며 어느덧 일행들 사이에 긴장감이 퍼졌다.
붕괴된 다리를 지난 이후 출구에 도달하기까지 별다른 위기는 만나지 못했다.
그것은 다른 이들 역시 마찬가지일 터.
그렇다면 그 많던 사람들은 대체 어디로 간 걸까.
“확인해봐야겠어요. 가가, 다녀올게요.”
“…….”
말없는 나를 슬픈 눈빛으로 일별한 우희가 동굴을 나섰다.
잠시 뒤, 시신들을 살피고 돌아온 그녀는 심서우가 알아내지 못한 몇 가지 사실들을 밝혀냈다.
“시신들이 모두 한 방향을 향해 누워 있어요. 하나 같이 공포에 질린 얼굴들을 보니 무언가로부터 도망치던 중 변을 당한 것 같아요. 게다가 모두 일격에.”
“…달아나기 급급했던 백나은이 싸울 의지도 없는 사람들을 상대로 그렇게 눈에 띄는 일을 벌일 것 같지는 않아요.”
“내 생각도 그래요. 그리고 가가께 은혜를 입은 무림맹과 귀교의 사람들이 이렇게 아무 말 없이 사라졌다는 것도 마음에 걸려요.”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요?”
살짝 겁에 질린 팽소혜의 얼굴은 모두의 심정을 대변했다.
그 의문에 대한 해답은 머잖아 밝혀졌다.
가장 원하지 않았던 형태로.
-저 자인가.
일행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가 목소리를 내기 전까지 누구도 그의 등장을 눈치 채지 못했기 때문이다.
어느새 나타난 걸까.
동굴 입구를 가로막고 서서 우리들을 오시하는 사내의 얼굴에는, 아무 무늬도 없는 새하얀 가면 하나가 걸려 있었다.
그러나 그보다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킨 것은, 그의 손아귀에 목을 잡힌 채 허공에서 발버둥 치는 한 여인의 존재였다.
“커헉, 컥….”
“저 자가 천서원이 맞는지 물었다.”
“그렇, 끅… 그렇…소.”
“백나은?”
그녀의 정체를 알아본 모두의 얼굴에 경악이 떠올랐다.
불과 몇 시간 전 그녀와 검을 맞댄 네 여인의 표정은 더 했다.
절대고수인 그녀를 저리 어린 아이처럼 다루는 사내의 정체는 대체 누구란 말인가!
머릿속에 전쟁이라도 난 듯 경종이 울리는 가운데, 마침내 그가 우리를 방문한 이유가 밝혀졌다.
“흡성대법의 비급 일부가 찢겨 있더군. 이 자의 말에 따르면 그 쪽의 청년이 한 짓이라던데… 사실인가?”
“믿어… 주시오…. 난 아니오. 처음 비급을 받을 때부터 그랬단 말이오. 정말이오.”
눈물콧물을 흘리며 애원하던 백나은이 이윽고 표독한 시선으로 나를 노려봤다.
“이놈아! 어서 솔직히 말하거라. 네가 비급을 찢지 않았느냐!”
“저 뻔뻔한 자가…!”
“백나은, 당신은 자존심도 없나요!”
한 차례 우리를 습격한 걸로도 모자라 또 다른 괴물을 유인해 온 백나은에게 일행들의 분노가 쏟아졌다.
동시에 우리는 깨달았다.
동굴밖에 즐비한 시체와 사라진 사람들의 원인이 눈앞의 신비인에게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고.
한편, 우리 일행이 생각에 잠긴 사이에도 신비인을 향해 좌사의 목숨 구걸은 계속되고 있었다.
“끄흑, 약속대로 살려주….”
“…….”
“제발…. 솔직히 말했는데…. 살려….”
우두둑-.
목이 꺾인 백나은의 몸이 축 늘어졌다.
직후 바닥에 버려진 그녀의 얼굴이 급속도로 노화하기 시작했다.
흩어진 내공과 함께 육신에 걸려 있던 주안술 또한 풀리기 시작한 것이다.
명교에서 오랫동안 절대고수로 군림하던 여인의 최후는 그렇게 허망했다.
눈엣가시 같던 자의 죽음에도 우린 순순히 기뻐할 수 없었다.
다음 차례는 우리일 테니.
“묻지.”
그가 조용히 읊조린 순간, 멈춰 있던 시간이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
“가가를 지켜!”
“천화대는 공자를 보호…!”
“흡성대법의 나머지는 어디 있나.”
분주히 대열을 갖추던 모두의 어깨가 흠칫 떨렸다.
어느새 공간을 뛰어넘어 내 앞에 도달한 신비인을 돌아보는 모두의 얼굴은 귀신이라도 본 듯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그는 내가 빠진 일행의 전력으로는 도무지 상대할 수 없는 고수였다.
“멈춰!”
“가가 도망쳐요!”
“하앗!”
계란으로 바위치기임을 알면서도 그녀들은 용감히 돌진했다.
그러나 신비인은 아주 간단하면서도 효율적인 방법으로 모두의 발걸음을 제자리에 묶었다.
“끅-.”
목을 잡힌 내 몸이 허공으로 두둥실 떠올랐다.
여인들은 발을 동동 구르면서도 더 이상 다가오지 못했다.
“다시 묻지. 네가 흡성대법의 나머지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 사실인가?”
“있어요! 있으니까…! 그러니까 제발 가가의 목숨만은 살려주세요. 부탁드려요. 제발….”
나 대신 외친 것은 우희였다.
평소 자신만만하고 당당하던 모습은 어디로 가고, 신비인에게 애원하는 그녀의 얼굴은 공포에 질려 있었다.
불과 몇 시간 전 벽려군의 죽음을 눈앞에서 겪었기 때문이리라.
어제까지만 해도 얼굴을 맞대고 이야기를 나누던 지인과의 이별이, 막연했던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부채질 한 것이리라.
이윽고 사내가 내 품을 뒤지기 시작하자 그녀의 얼굴은 한층 더 새파래졌다.
“응?”
“쯋….”
품 안에 웅크리고 있던 고든람쥐가 그의 손아귀에 잡힌 순간 난 숨을 삼켰다.
그러나 다행히도 조그마한 생명체의 가여운 목숨까지는 그의 관심 밖인 듯 했다.
“흠….”
바동거리는 다람쥐를 놓아준 그는 머잖아 내 품에서 혼돈기의 흡자결을 찾아냈다.
이윽고 종이에 적힌 구결을 살피기 시작한 그의 입가에는 처음으로 표정이라 부를 만한 것이 떠올랐다.
그것은 다름 아닌 환희였다.
“과연….”
“이제 가가를 놓아주세요. 부탁드려요.”
우희의 애원에 비급을 떠난 그의 시선이 흘긋 나를 바라봤다.
그러나 그 눈빛은 백나은을 바라볼 때와 마찬가지로 여전히 일말의 자비도 담겨 있지 않았다.
“이걸 또 누가 봤지?”
“나 혼자… 봤소….”
난 목이 졸린 상태에서도 억지로 답했다.
그것이 다른 이들의 목숨을 살릴 최선의 답안이라고 믿으며.
직후 그의 손이 내 목을 조르기 시작했다.
“컥.”
“이것이 비동에서 네가 얻은 전부인가.”
“안 돼!”
“휘 랑!”
내 위기를 보다 못한 우희와 약빈이가 검을 빼어 들고,
그것을 본 사내의 입가에 살소가 피어나던 그 순간,
콰아아앙-!
거대한 폭음과 함께 근처의 암벽이 터져나가며 일단의 무리가 나타났다.
“콜록, 콜록-.”
“헉, 헉… 죽는 줄 알았어요.”
“그러기에 이런 데는 오는 게 아니라니까.”
이 목소리는….
“애초에 련주께서 하도 부수고 다닌 통에 무너진 것 아닙니까?”
“말도 안 되는 소리. 다 계산하고 하는 거라니까. 그보다… 얼마나 떳떳하지 못한 자이기에 대낮부터 얼굴을 가리고 다니는가?”
어디선가 본 광경이 지금은 그렇게 반가울 수 없었다.
곧 자욱했던 흙먼지 너머에서 또 한 사람의 절대자가 덥수룩한 머리칼을 좌우로 털어내며 모습을 드러냈다.
“어이, 놈팽이. 내가 또 눈에 띄면 어떻게 한다고 그랬더라?”
사도련주, 단혁.
그의 등장으로 상황은 또 한 차례 반전을 맞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