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tial Streamer RAW novel - Chapter 176
무릉도원 (2)
목욕을 마치고 멀끔해진 려군은 선녀처럼 아름다웠다.
잠시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던 나는 두 눈이 마주치자 서둘러 고개를 돌렸다.
“옷은 이따가 낮에 따뜻할 때 한 번 더 빨게요.”
“네.”
“갈까요?”
다시 그녀를 업고 모닥불 근처로 돌아온다.
계속 누워만 있기 지루할 것이란 생각에 전날 내가 기댔던 나무 등걸을 그녀에게 내어주고, 나는 어제에 이어 집을 마저 짓기 시작했다.
어느새 잠에서 깨어난 람쥐도 려군의 어깨 위에 올라 집짓기를 구경했다.
“집을 만드는 중인가요?”
“한동안은 여기서 지내야 할 것 같아서요. 이왕이면 편한 게 좋잖아요.”
“하루 만에 이렇게나…. 가휘는 못하는 게 없나봐요.”
“아하하…. 별 거 아니에요.”
동영상을 보고 따라할 뿐인 입장에서는 머쓱할 따름이다.
아니나 다를까, 진실을 아는 채팅창에선 오늘도 칼춤이 난무했다.
[리드유라 : 또 또 여자 앞이라고 잘난 척하네 ㅋㅋ] [미갸엘 : 하루 종일 숲이랑 하늘만 보여주네…. 아쉬울 때만 시청자 찾는 새끼. 좋은 건 혼자 보는 새끼] [프로배드 : 우희 피 눈물 쏟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린다 이놈아!!] [크래카라 : 이 새끼 떠나기 전에 려군이랑 잔다에 전 재산 겁니다.] [원퉁사 : 부부가 따로 없네 ㅋㅋ 저러다 백퍼 눈 맞지]난 확언했다.
그녀는 여전히 아름답고 그녀를 향한 나의 호감 역시 그대로지만, 우희와 약빈이를 두고 더 이상 부적절한 관계를 이어나갈 마음은 없다.
시청자들의 의심을 극구 부인한 난 다시 묵묵히 공사에만 집중했다.
그 날 저녁 무렵이 되자 두 사람이 잠시 묵기엔 제법 그럴듯한 집이 완성됐다.
내가 만들었지만 처음 한 것이라곤 믿기 힘든 퀄리티.
아마 무공이 없었더라면 수십, 어쩌면 수백 배의 시간이 더 걸렸겠지.
“오늘은 여기까지만 할까?”
마무리 작업은 내일 마치기로 하고 어질러진 주변을 정리한다.
려군은 그 때까지도 자다 깨다를 반복하며 집짓기를 구경하고 있었다.
“신기해요. 잠시 눈을 붙였을 뿐인데 갑자기 집이 생겼어요.”
“오늘 밤부터는 저 안에서 지내요. 아직 부족하지만 적어도 비는 안 새니까요. 조금 전에 시험해봤어요.”
“부족하다뇨. 전혀요. 너무 마음에 들어요.”
“그럼 다행이구요. 람쥐도 가자.”
그녀를 안고 실내로 이동했다.
나뭇가지와 풀, 흙 따위를 번갈아 덮은 보금자리는 그냥 땅보다 훨씬 푹신하고 아늑했다.
나와 려군은 변변찮은 가구조차 없는 바닥에 나란히 누워, 밖에서 들려오는 밤벌레들의 합창을 감상했다.
그렇게 고요하고 평화로운 분위기 속에 얼마나 침묵이 이어졌을까.
“가휘, 거기 있는 거 맞아요?”
“네.”
“잠깐 졸았나 봐요. 무서운 꿈을 꿨어요.”
내가 옆으로 돌아눕자 그녀가 내 뺨을 향해 손을 뻗었다.
“눈을 뜨니 난 동굴에서 홀로 쓸쓸히 죽어가고 있고 이 모든 건 꿈인…. 가휘, 이건 현실인가요?”
“…제가 얘기 안 했나요? 저도 려군을 다시 만나고 여러 차례 같은 악몽에 시달렸어요. 하지만 지금도 우린 같이 있잖아요. 괜찮아요. 꿈 아니에요.”
“…안아주세요. 다른 뜻은 없어요. 그냥 잠들 때까지만…. 안심할 수 있게….”
그 간절한 목소리를 어찌 외면할까.
난 안쓰럽게 떨리는 그녀의 가녀린 어깨를 살포시 끌어안았다.
“팔 벨래요?”
“네….”
그녀가 꼬물꼬물 내 품으로 파고든다.
언젠가 그녀가 살아 돌아오기만 한다면 무슨 짓이든 하겠노라 하늘에 다짐한 적이 있다.
팔베개 정도야, 내 마음이 사심 없이 당당하다면.
“따뜻해요, 가휘.”
“오늘 밤은 아무데도 안 갈 테니까 안심하고 푹 자요. 내일 봐요, 려군.”
“내일…도….”
그녀의 목소리가 점차 잦아든다.
내 품 안에서 그녀는 비로소 모든 불안을 버리고 안식을 얻었다.
그리고 그것은 나 역시 마찬가지.
“후….”
그녀의 머리를 하염없이 쓸어내리며 나 역시 눈을 감는다.
그렇게 아무 일 없이 평온한 밤이 지나갔다.
***
시간이 빠르게 흘렀다.
태양과 달이 번갈아 계곡을 비추는 사이, 피골이 상접했던 려군의 얼굴에는 살이 뽀얗게 올라 원래의 건강미를 되찾았다.
완치까지는 아니어도 가벼운 무공을 펼칠 정도의 기력도 회복했다.
그러나 여전히 그녀는 나 없이는 잠들지 못했다.
“가휘….”
“또 악몽 꿨어요? 나 여기 있어요. 괜찮아요.”
내가 팔베개 위에서 머리를 쓰다듬어주면, 흐느끼며 잠에서 깼던 그녀는 그제야 평온한 얼굴로 다시 눈을 붙이곤 했다.
우린 매일 밤 함께 잠들고 함께 눈을 떴다.
삭막하기만 했던 보금자리는 어느새 의자며 주전자, 나무빗 등 우리가 함께 만든 추억들로 채워져 갔다.
그에 따라 우리 사이를 가로막던 남녀사이의 벽 역시 점차 허물어지고 있었다.
“가휘, 이거 먹어봐요. 숲에서 발견했어요.”
“처음 보는 과일이네요?”
“아- 해요.”
“아….”
서로에게 음식을 떠먹여주고.
첨벙! 첨벙!
“꺄악! 꺅!”
“어? 무공 쓰는 게 어디 있어. 나도 쓴다?”
“아악! 난 다쳤잖아요. 아, 잠깐. 잠깐만, 귀에 물….”
“괜찮아요?”
“하핫! 에잇!”
“아, 치사하게! 죽었어, 오늘.”
부끄러움도 잊은 채 속옷 차림으로 물놀이를 즐기고.
그러다 지쳐서 뭍으로 나오면 미리 따둔 나무 열매를 하나씩 입에 물고, 람쥐와 셋이 나란히 풀밭에 누워 밤하늘의 별을 감상하다 잠드는 평온한 나날.
비 오는 날 아늑한 보금자리에 어깨를 기대고 앉아 가만히 빗소리를 듣는 정취 또한 각별했다.
마치 성경의 아담과 이브라도 된 듯한 기분.
암중세력이나 가면의 신비인 따위의 복잡한 생각들은 잠시 머리에서 지웠다.
이대로 시간이 멈췄으면 할 정도로 하루하루가 행복했다.
그러나 우린 은연중에 깨닫고 있었다.
이 소중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떠날 시간이 가까워지고 있음을.
무릉도원을 발견한 지 보름이 지난 어느 날, 난 커져가는 불안감을 더 이상 외면하지 못하고 그녀에게 고했다.
“가휘, 들어봐요. 우리가 돌봐줬던 새끼 여우가….”
“…려군. 할 말이 있어요.”
“…새끼 여우가요. 숲에서… 가족들을….”
“려군.”
낌새를 채고 화제를 돌리려던 려군의 몸이 움찔 떨렸다.
“이제 슬슬 돌아가야죠. 다들 걱정하고 있을 거예요.”
“…….”
그녀는 침묵했다.
날 바라보는 눈빛은 애처롭기 그지없다.
그 안에 담긴 슬픔과 아쉬움을 나라고 어찌 모를까,
하지만 언제까지고 달콤한 꿈에 젖어 현실을 외면할 수는 없었다.
“려군.”
“…그런가요. 가야겠죠.”
“…네.”
“혹시 오늘 당장…?”
“설마요. 짐도 꾸려야 되고. 아쉬우니 마음의 정리도 해야죠. 내일…. 내일 가요.”
“…네.”
체념한 눈빛으로 고개를 떨구는 그녀를 바라보는 내 가슴도 그녀만큼이나 아팠다.
***
떠나는 전날 까지도 우리는 계곡에서 함께 물놀이를 즐겼다.
아쉬움을 잊으려 발버둥을 치듯, 평소보다 더 열심히 놀았다.
하지만 가슴 속의 공허함은 채워지지 않았다.
“이게… 마지막이네요.”
마지막 물놀이를 마친 뒤.
모닥불 앞에서 젖은 몸을 말리는 그녀의 모습은 너무나도 슬퍼 보였다.
가라앉은 분위기를 띄울 겸 난 숨겨둔 선물을 꺼냈다.
“려군, 이거 보세요.”
“…사과네요?”
“려군 눈에도 그렇게 보이죠.”
씩 웃으며 손을 앞으로 내밀자, 과일향을 맡아본 그녀의 눈이 동그래졌다.
“복숭아네요?”
“저도 처음에는 사과인 줄 알았어요. 선물이에요.”
“가휘가 찾았어요?”
“…실은 아침에 람쥐가요.”
“뭐예요오-.”
머쓱하게 웃는 나를 따라 마침내 그녀의 입가에도 미소가 피어났다.
“혹시 더 없나 뒤따라가 봤는데 이게 전부더라구요. 계곡 위에 자란 커다란 나무에 딱 하나만 열려있었나 봐요.”
“영과일까요?”
“그럴 지도요. 전 마교 부교주라 내공 많으니까 이건 려군 먹어요.”
“그러지 않기로 했죠. 나 화내요.”
“그건 무서운데. 같이 먹을까요? 아, 참고로 람쥐는 이거 싫대요.”
웃으며 복숭아를 반으로 가른다.
신기하게도 껍질이 붉은 복숭아는 안쪽까지 새빨갰다.
생소한 비주얼. 그러나 이내 복숭아를 한 입 베어 문 순간, 맛이라는 게 폭발했다.
“와-. 이거 엄청 맛있네요?”
“가휘가 첫 날 짜줬던 게 제일 맛있는 줄 알았는데 순위가 바뀌었어요.”
“저도요.”
과장을 보태면 이제 다른 과일은 못 먹을 것 같은 맛이었다.
그러나 영과일 지도 모른다는 짐작과 달리, 딱히 단전에 별다른 기운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냥 생김새만 특이했던 걸까요?”
설레발을 친 우린 멋쩍게 웃으며 저녁 식사를 시작했다.
낮에 사냥한 사슴 고기가 뜨겁게 달군 돌판 위에서 지글거리는 소리를 내며 익어갔다.
소금과 후추가 없는 게 한 가지 흠이지만, 새콤달콤한 과일 몇 가지를 졸여 만든 소스를 곁들이니 나름 별미였다.
“고기는 오랜만이네요. 내일 배탈 나는 건 아닌가 모르겠어요.”
“…그럼 하루 더 머무는 건가요?”
그녀의 엉뚱한 질문에 난 웃지 않을 수 없었다.
“일부러 배탈이라도 나려고요?”
“네. 잔뜩 먹어야겠어요.”
“나도 그럴까?”
반쯤 진심 섞인 농담이 오가던 도중, 그녀가 문득 물이 담긴 돌잔을 아련한 눈빛으로 바라봤다.
내가 이곳에 와서 처음 만든 식기였다.
“…이 잔은 기념으로 가져가려구요.”
“…….”
“가휘는요?”
“전….”
난 말끝을 흐렸다.
그녀가 잔을 가져가려는 의도를 알 수 없기에.
그것이 단순히 계곡에서의 추억을 기리는 용도를 넘어, 나를 잊지 않겠다는 의미라면.
난 뭐라고 답해야 할까?
“가휘.”
“네?”
“…그 때 내게 했던 말 기억나요?”
“언제요?”
“혈마의 비동에서. 내가 낭떠러지로 떨어지기 전에 나눴던 말들요.”
어떻게 잊겠는가. 지금도 눈을 감으면 생생히 기억나는 그 순간을.
날 바라보던 려군의 슬픈 눈을.
이별을 앞두고 나눈 짧은 전음을.
-답해줘, 가휘. 너에게 난 어떤 의미였니?
거기에 대한 나의 대답은….
-희야와 빈아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분명 교관님을 사랑했을 거예요.
-그런 말 들으면… 죽기 싫어지잖아.
그 날 우리가 나눈 대화와 이 순간 그녀가 질문을 던진 의도를 되새긴 난 침음을 흘렸다.
“려군, 그건….”
“알아요. 당신의 마음이 굳건하다는 걸. 내가 파고 들 틈이 없다는 걸…. 곤란하게 하려는 건 아니었어요. 그냥… 알고 싶었어요. 그 때 내게 했던 말이 진심인지, 아니면 그저 동정심에서 비롯된…위로의 말이었는….”
“아니에요.”
대답은 빨랐다.
비록 그것이 그녀에게 더 큰 미련으로 남을지언정, 당시 내 기분에 거짓은 없었다.
“절대 아니에요, 거짓말. 진심이었어요. 하지만….”
“고마워요.”
“…….”
“조금은 후련해졌어요.”
그녀는 시원섭섭한 얼굴로 웃어 보였다.
“그렇다고 어색하게 대하면 울지도 몰라요.”
“…안 그래요.”
“돌아가면.”
억지로 미소 짓던 그녀의 얼굴이 점차 일그러진다.
“이런 시간이 다신 없겠죠?”
“또 이렇게 함께 놀아요.”
“그 때 가휘 곁에는 제가 아닌 다른 여인들이 함께겠죠?”
“…려군.”
“잠깐 옆에 앉아도 되나요? 위로 정도는 해줄 수 있잖아요.”
“제가 갈게요.”
투박한 나무 의자를 들고 그녀 곁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러나 그녀는 평소처럼 내게 어깨를 기대오지 않았다.
머지않을 미래에 닥쳐올 슬픔에 미리 한 발을 적시듯.
타닥, 타닥-.
우린 말없이 앉아 타오르는 모닥불만 바라봤다.
보름 간 허물어졌던 보이지 않는 경계가 다시 우리 사이를 가로막은 기분이다.
하지만 추억은 습관처럼 우리의 몸을 움직였다.
언제부터 보고 있었어요?
지금요.
동시에 서로를 돌아본 두 얼굴에 미소가 번진다.
모닥불의 열기 때문일까.
뺨이 발갛게 물든 그녀와 눈을 마주치고 있자니 가슴 속에서 온갖 감정이 피어났다.
연민, 죄책감, 고마움, 애정.
그리고 욕정….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퍼뜩 정신을 차린 것도 잠시 다시 기분이 몽롱해진다.
마치 독한 술을 들이켠 것 마냥 머릿속이 뿌옇게 흐려지고, 가슴에선 정체를 알 수 없는 열기가 솟구쳤다.
“…가휘?”
그녀의 동공이 확대됐다.
난 어느새 내가 그녀의 코앞까지 다가간 것을 깨닫는다.
그러나 그것이 용서받지 못할 행동임을 알면서도, 난 스스로를 억제할 수 없었다.
“왜 그래요, 가…읍…? 으응-. 응….”
정신을 차렸을 땐 어느새 그녀와 입술이 맞닿아 있었다.
입술과 입술이 부드럽게 뭉개지며 혀가 뒤엉킨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
황급히 그녀의 어깨를 밀어낸다.
그러나 놀라서 커진 그녀의 두 눈은 그 때까지도 그대로였다.
“미안해요.”
“…….”
“제가 어떻게 됐나 봐요. 미안….”
용서를 구하던 입술이 그녀의 입안으로 삼켜졌다.
고개를 뺄 틈도 없이 어느새 어깨를 휘감은 그녀의 양 팔이 내 뒤통수를 감싸고 애정을 갈구한다.
“하아… 하…. 으응-.”
“으음….”
“가-히-. 응-.”
이가 부딪히고 코가 쓸리는 어수룩한 키스.
그러나 그 어설픈 움직임 속엔 거부하기 힘든 마력이 담겨있었다.
뺨에 부딪히는 간지러운 콧김에 전신의 털이 곤두선다.
“하아, 하….”
귓가로 파고드는 그녀의 달뜬 숨소리는 내 이성을 마비시켰다.
어느새 내 무릎 위에 걸터앉은 채 두 눈을 꼭 감은 그녀의 모습이 참기 힘들 정도로 사랑스럽다.
문득 슬픈 표정을 지은 누군가의 모습이 어렴풋이 떠올랐지만 이내 뿌옇게 흐려졌다.
오직 눈앞에 있는 그녀만이 내 전부다.
‘…이상해.’
뒤늦게 이것이 자연적인 현상이 아님을 깨닫는다.
그러나 단전에서 아무리 내공을 일으켜도, 현재 내 심신을 지배한 알 수 없는 기운을 몰아낼 수는 없었다.
도대체 왜…?
평소랑 달랐던 것도 딱히… 아!
순간, 겉과 속 모두 새빨간 색을 지닌 어떤 과일의 모습이 뇌리를 스쳤다.
복숭아.
려군과 나눠먹은 그 복숭아가…!
그러나 뒤늦은 깨달음은 부드럽게 오가는 혀 속에 녹아 없어지고,
이내 모닥불 주위에는 야릇한 마찰음만이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취킨김밥 : ㅗㅜㅑ] [카시 : 려군 눈나 해냈구나ㅠㅠ] [크래카라 : ㅅㅂ 내가 전 재산 건다고 했지ㅋㅋ 눈이 안 맞을 수가 없다니까] [지나가던 : 우희랑 약빈이 어떡하냐] [ljs9102 : 깐휘 새끼 저럴 줄 앎]아니라고! 그런 게 아닌데…. 적어도 카메라 만큼은….
촬영 중인 카메라를 밤하늘로 돌리는 것을 마지막으로, 내게 남아 있던 최후의 이성 한 가닥이 툭 끊어졌다.
풀밭 위로 흘러내린 옷가지 위로 우리의 몸이 포개졌다.
이윽고 달빛을 받아 식어가던 계곡에는 대낮처럼 뜨거운 열기가 몰아치기 시작했다.
***
-…해요.
-…랑해요.
-사랑해요, 가휘.
“헉!”
이상한 꿈을 꿨다.
벽려군과 선을 넘어 버리는 꿈이었다.
꿈속에서 우린 뜨겁게 사랑을 속삭이며 수차례나 몸을 섞었다.
“하… 미친….”
옆으로 기운 아침 계곡의 풍경을 바라보며 마른세수를 한다.
꿔도 그런 꿈을 꾸다니. 그것도 하필 떠나기로 한 날.
욕구불만인가?
비록 꿈에서라지만 우희와 약빈이를 두고 외도를 벌였다는 찝찝함에 몸을 뒤척이던 그 때,
“으응….”
등 뒤에서 들려온 신음소리에 몸이 바짝 얼어붙는다.
“가휘….”
잠에 취한 목소리와 함께 등에 짓눌려오는 풍만한 감촉은 여인의 가슴이 분명했다.
그것도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설마.
에이, 설마.
그럴 리 없….
“아… 아아…!”
고장 난 장난감마냥 삐거덕, 삐거덕 고개를 돌린 내 눈앞에 기다리고 있던 것은.
풀밭 위에 새하얀 나신을 드러낸 채 새근새근 잠든 알몸의 벽려군이었다.
게다가 그녀의 몸 곳곳에 남아 있는 붉은 자국과 차마 입에도 담기 힘든 민망한 흔적들은….
‘미친 새끼! 이 미친 새끼!’
이 미친놈아. 무슨 짓을 한 거야!
수면 위로 스멀스멀 떠오르는 전날의 기억에 머리칼을 쥐어뜯던 난, 문득 든 허전함에 손목을 바라봤다.
있어야 할 것이 그곳에 없었다.
무너지는 비동 속에서도 멀쩡했던 팔찌가.
우희로부터 받은 소중한 팔찌가.
사라진 팔찌는 근처 풀밭에서 발견됐다.
“…….”
올올이 풀려 바닥에 떨어진 팔찌와 벽려군의 나신을 멍하니 바라보던 난, 이내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르며 다시 한 번 머리를 쥐어뜯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