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tial Streamer RAW novel - Chapter 178
생환 (1)
“난 개새끼야.”
자조적으로 내뱉는 내 곁에는 알몸의 려군이 곤히 잠들어 있었다.
팔베개에 누워 팔다리를 살포시 내게 걸친 그녀의 모습은, 관계 후 부끄러움에 시선을 피하던 며칠 전과는 비할 바 없이 자연스러웠다.
며칠 전 단전에서 치솟는 복숭아 기운에 또다시 잠식 당한 우린, 신혼집이라도 차린 마냥 계곡 곳곳을 쏘아다니며 사랑을 나눴다.
그 기간 동안 내 채널에는 하늘이나 숲을 촬영한 풍경 영상들이 줄지어 업로드 됐다.
다행히 이번에는 음소거를 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혹여 실수를 할까봐 아예 무릉도원과 멀리 떨어진 산기슭에 카메라를 짱박기까지 했다.
자연히 시청자들의 원성은 하늘을 찔렀다.
당장 화면을 돌리라느니, 소리를 켜달라느니.
상식적으로 해줄 리 없잖은가.
이번에 주의를 받으면 내공이 동결되게 생겼는데.
그렇게 시청자들의 불만은 싫어요 폭격으로 이어졌고,
힐링 채널에 업로드 될 법한 영상들에는 시커먼 마기만이 잔뜩 쌓이게 되었다는 후문이다.
가슴에 치밀던 열기는 사흘 밤낮을 오직 그 행위에만 몰두한 뒤에야 간신히 사그라졌다.
직후 나와 그녀 모두 내공이 진일보한 것으로 보아, 복숭아가 영약일 것이란 추측은 사실로 밝혀졌다.
“응….”
잠결에 뒤척이던 려군이 스르르 눈을 뜬 것은 그 때였다.
“일어났어요?”
“…너무해요.”
“뭐가요? 일어나자마자.”
이마를 쓰다듬으며 속삭이자 그녀가 붉어진 얼굴을 내 가슴에 묻었다.
“그만하라고 해도 안 멈추고….”
“그 때는 복숭아 기운에 취해서…. 근데 듣다 보니까 좀 억울하네요. 려군도 그렇게 좋아했으면서.”
“제가 언제요오….”
민망한 듯 몸을 비트는 그녀의 모습이 교태롭기 그지없다.
자신의 몸짓이 얼마나 남자에게 해로운지 전혀 모르는 눈치다.
부드럽고 매끈한 살갗에 자극 당한 신체 일부에 불끈 힘이 들어가는 것은 당연한 수순.
삽시간에 팽창한 물건에 맞닿은 려군의 엉덩이가 화상이라도 입은 듯 흠칫 떨렸다.
“아…. 이제 정말 안 돼요, 가휘….”
“이건 려군이….”
변명도 잠시, 겁먹은 그녀의 모습이 사랑스러워 그만 피식 웃고 만다.
제대로 사고를 친 와중에도 뿌듯한 기분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수컷의 본능일까.
“가휘는 이런 일이 익숙한가 봐요.”
“갑자기요?”
“전 마음만 앞서서 허둥지둥 대는데 가휘는…. 두 사람이랑 이런 일 자주 해봤겠죠?”
난감한 질문이다.
이걸 뭐라고 답해야 하나.
현생만 따지면 여인과 관계를 맺은 것은 이번이 처음.
명교에서 복귀한 이후 우희, 약빈이와 스킨십은 자주 했지만, 옥유경 때문에 언제나 준비 단계에서만 그쳤고.
그러나 그걸 솔직히 밝히는 것도 그녀들에게 면목 없는 짓이라, 난 그저 말끝을 흐릴 수밖에 없었다.
“글쎄요….”
내 얼굴에 깃든 그림자를 읽은 것일까.
새침한 표정을 지운 려군이 다시 몸을 돌려 날 바라봤다.
“…걱정돼요?”
“안 된다면 거짓말이겠죠? 그래도 솔직히 얘기해봐야죠.”
“두 사람이 우리를 용서해줄까요?”
“무릎 꿇고 빌어봐야죠. 복숭아에 대한 얘기도 하고요.”
나흘 연속 잠자리를 함께 하는 동안, 우리는 자연스럽게 서로에게 마음을 열었다.
체념이라고 불러도 좋았다.
난 연인들에게 그녀와의 관계를 허락 받을 마음을 굳혔고, 그녀 역시 이를 거부하지 않았다.
“저도 함께 빌게요.”
“말은 고맙지만… 역효과 아닐까요?”
“그럴지도요.”
그녀의 상냥한 손길이 내 어깨를 어루만졌다.
“너무 어렵게 생각 말아요. 만약 두 사람이 절 받아들이지 않아도 원망 안 할게요.”
“설득에 최선을 다할게요.”
“세 사람의 관계를 망가뜨리면서까지 무리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전 가휘의 마음을 확인한 것만으로도, 우리가 이렇게 살아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는 것만으로 충분히 감사하고 행복해요.”
“려군….”
나와 그녀의 입술이 포개졌다.
이번에는 복숭아 탓이 아니었다.
잠시 뒤, 아직 피로가 덜 풀린 려군이 다시 내 품에서 새근새근 잠에 들자 난 고민에 잠겼다.
벽려군 앞에서 당당히 선언한 것과 달리 걱정이 태산이다.
“하….”
애들을 대체 어떻게 설득하지?
아니, 그 전에 뭐라고 말을 꺼내야 할 지.
특히 어린 시절부터 내게 다소 강한 집착을 보여 온 우희가 이번 사태에 어떻게 반응할 지는, 소꿉친구인 나조차 도무지 예측이 불가능했다.
“후…”
시원하게 흐르는 계곡물조차 가슴에 쌓여가는 한숨을 씻어내지는 못했다.
***
그 날 오후가 되어 우리는 마침내 계곡을 나섰다.
무릉도원을 발견한 지 20여일, 절벽에서 떨어진 날로부터는 무려 한 달여 만의 일이었다.
“물 잔도 챙겼고…. 이제 슬슬 갈까요?”
“저….”
“…려군?”
난 머뭇거리는 려군의 모습에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떠나기 전날 밤 침울해하던 그녀의 모습 떠오른 것이다.
그래도 그건 나와의 이별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을 텐데 어째서 아직까지….
그러나 그녀가 머뭇거린 것은 내가 생각한 것과 전혀 다른 이유에서였다.
“가휘.”
“네?”
“나… 못 걷겠어요.”
코끼리 방중술의 위력은 대단했다.
천하의 검후가 다리를 후들거리며 내 옷소매를 쥐는 모습이라니.
“왜 웃어요…. 가휘 때문이잖아요.”
“그럼 책임을 져야겠네요.”
“아…!”
“더 지체하긴 힘드니까요.”
귀까지 새빨개진 그녀를 번쩍 들쳐 업자, 이를 지켜보던 채팅창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크래카라 : 지랄들을 한다 진짜] [리더유라 : 카악 퉷!] [빅그림 : 짐승새끼야 얼마나 미친 듯이 했으면 려군 눈나가 걸음을 못 걷냐!!!!] [참지마요 : ??? : 희야, 빈아 미안해. 나 이제 눈나 없이는 못 사는 몸이 되어버렸어] [Upton9 : 아ㅋㅋ 침대 위에선 깐휘가 교관이라고 ㅋㅋ] [펭귄목살 : ㅗㅜㅑㅗㅜㅑ] [이태하다 : 망가 한 편 뚝딱ㅋㅋ] [랜덤가차 : 깐휘 팔찌 어디 갔어요?] [thot2020 : 바람피우기 전에 결혼반지 빼두는 거랑 비슷한 거 아님?] [그게 깐휘님 하반신의 미래라고 생각하면 맞을 듯] [10,000] [미푸새 님이 후원했습니다.]아니라고 단언할 수 없는 점이 무섭다.
“갈까요?”
“그래요.”
시청자들과 소통을 마치고 다시 걸음을 옮긴다.
학관 시절부터 이어진 내 혼잣말에 익숙해진 벽려군은 별다른 질문 없이 내게 얌전히 업혀 있었다.
집으로 돌아가면 그녀에게도 사정을 설명할 생각이다.
“…벌써 이만큼이나 왔네요.”
무릉도원이 점차 멀어진다.
정들었던 곳을 떠나려니 발걸음을 떼기 여간 힘든 게 아니다.
산기슭을 바라보는 려군의 눈빛 역시 나와 마찬가지로 아련하게 물들어 있다.
“이렇게 떠나면 다신 못 오겠죠?”
“또 함께 와요. 저 길 잘 기억하니까.”
“꼭 그러면 좋겠어요.”
려군이 미련을 끊어내듯 내 등에 얼굴을 묻자, 나도 두 다리에 기운을 불어넣었다.
“이제 달릴게요. 꽉 잡아요.”
“네.”
“람쥐도 이제 그만 들어오고.”
전망 좋은 머리에 타고 있던 람쥐도 쪼르르 품속으로 돌아오자 난 전속력으로 경공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숲의 녹음과 산의 정경이 빠른 속도로 우리를 스쳐갔다.
***
산을 내려오기 전에 잠시 들를 곳이 생겼다.
돌아가기 전 마지막으로 사부님을 뵙고 싶다는 그녀의 간청 때문이었다.
마침 잘 된 일이다.
수십 일 전부터 매일 행사처럼 이어지는 몇몇 시청자들의 채팅 때문에 귀가 따가울 지경이었으니.
[크레이지버팔로 : 절벽 동굴 언제 가 봐요?] [묘목 : 낭떠러지에 동굴 있대요] [고라닠 : 깐휘님 절벽 가야되는 거 까먹지 마요]어떻게 까먹지도 않고 저렇게들 보채는지.
단순히 증언뿐이었다면 긴가민가했겠지만, 실제 내가 낭떠러지에서 추락하던 영상에는 시청자들이 누차 언급한 절벽 틈새가 분명히 존재했다.
절벽 위에서 그리 멀지 않은 위치라 도전할 가치도 충분하고.
어차피 가는 김에 들르는 건 어렵지 않지만, 그저 시청자들의 집념이 놀라울 뿐이다.
“고마워요, 가휘. 부탁을 들어줘서.”
“아뇨. 저도 볼 일 있다는 거 거짓말 아니니까 고마워 할 필요 없어요. 그리고 어쩌면 저희가 이렇게 살아남은 것도 돌아가신 백모란 여협의 보살핌이 있었던 건지도 모르니까요.”
“스승님께서 살아계셨으면 분명 가휘를 마음에 들어하셨을 거예요.”
“제자 울리는 놈팽이라고 혼이나 안 나면 다행이죠.”
등 뒤의 그녀와 웃음을 주고받으며 걸음을 서두른다.
목적지에 도착했을 무렵에는 어느덧 석양이 내리고 있었다.
무공이 좋긴 좋아.
보통 사람이라면 열흘은 넘게 걸릴 거리를 반나절 만에 오다니.
한편, 려군은 절벽 근처의 뻥 뚫린 동굴을 신기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비동이 이쪽으로 이어져 있었군요. 어째서 처음 방문했을 때 발견하지 못했을까요?”
“저도 정확히는 못 들었어요. 그 땐 워낙 경황이 없어서….”
려군에게 답하던 난 반파된 인근의 지형지물을 보며 말끝을 흐렸다.
마지막으로 봤을 때보다도 더 많은 파괴의 흔적들은 내가 추락한 이후 벌어진 싸움의 격렬함을 짐작케 했다.
아마 성녀 수진이가 하오문 의뢰를 통해 모두가 무사하단 소식을 전해주지 않았다면 지금쯤 잔뜩 마음을 졸였으리라.
하긴 사부님에 사도련주까지 있는데 그렇게 쉽게 당할 리 없지.
하지만 생사를 알았다고 해서 모든 걱정을 덜 수 있던 것은 아니다.
손가락을 잃으신 스승께서 얼마나 불편하실지.
우희와 약빈이가 받은 충격은, 부모님의 걱정은 얼마나 클까.
의식불명이었던 홍사강의 상태 역시 궁금하긴 마찬가지.
‘대체 그 신비인의 정체는 무엇이었을까.’
당시의 처절했던 싸움을 되새기며 내가 떨어진 절벽으로 걸음을 옮긴다.
“…여기서 참 많은 일이 있었네요.”
선대 검후가 금안마군에게 최후를 맞이했던 장소이자 려군이 내게 이별을 고했던 장소.
가장 최근에는 내가 추락한 장소.
과연 이번에는 무엇이 날 기다리고 있을 지.
“정말 여길 내려갈 생각인가요?”
“네. 추락하던 도중에 뭘 본 것 같아서요. 려군은 여기서 기다리겠어요?”
“그럴게요. 부디 조심하세요.”
아직 몸이 불편한 그녀는 절벽 위에 남는 것을 택했다.
내 입장에서도 그 편이 안심이다.
아무리 무공을 회복했다지만, 무너지는 비동에서 추락한 경험이 있는 그녀에게 절벽을 내려가는 일이 달가울 리 없으니.
“몸 단단히 묶고 가야 해요.”
“괜찮다니까요.”
“가휘만 절 걱정하는 게 아니에요. 제 말 들어요.”
부드러운 음색에는 거부할 수 없는 마력이 깃들어 있다.
결국 그녀의 걱정에 못 이겨 주위에서 캐낸 덩굴을 엮어 길고 질긴 밧줄을 만들기 시작한다.
그것으로 허리와 절벽 위의 거목을 단단히 연결한 뒤에야, 난 절벽을 내려가는 것을 허락받을 수 있었다.
“줄 끊으면 안 돼요.”
내려가기 전 던진 농담에 벽려군이 말없이 웃었다.
“왜 그래요, 무섭게. 뭐라고 좀 해봐요.”
“아이 같아서 웃었어요. 조심히 다녀와요.”
“다녀올게요, 려군.”
한 차례 미소를 교환한 뒤 난 비로소 절벽 밑으로 몸을 날렸다.
휘오오오-.
깎아지른 절벽 너머로 아득한 허공이 펼쳐졌다.
휘몰아치는 바람 소리는 모골을 송연하게 만든다.
그러나 그보다 더 소름 돋는 사실은 따로 있었다.
[싸패는 여친이 둘이나 있는데 벽려군이랑 잔 형아가 아닐까?] [10,000] [yhs21cm 님이 후원했습니다.]투덜투덜.
여성편력과 관계된 이야기 앞에선 한없이 약해지는 나다.
싸워봤자 손해인 실랑이를 멈추고 다시 절벽 내려가기 시작한다.
“안 묶어도 되는데.”
려군의 우려와 달리 절벽을 수직으로 걸어 나가는 내 모습은 산책이라도 나온 듯 평온했다.
내공의 회복으로 건곤대나이의 운용이 가능해진 덕이다.
전성기에 비하면 보잘 것 없는 내공이지만, 겨우 내 한 몸 지탱하기엔 충분하다 못해 넘친다.
무너지는 대지를 떠받드는 어려움에 비하면야.
그렇게 평지를 걷듯 뚜벅뚜벅 걷다 보니 머잖아 영상으로 미리 확인한 틈새가 눈앞에 펼쳐졌다.
영상으로 볼 때보다 훨씬 넓어 보이는 검은 입구 앞에서 난 질색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이제 동굴이라면 지긋지긋하니까.
난 진저리를 치면서도 한 가닥 기대감을 품은 채 캄캄한 동굴 내부로 걸음을 옮겼다.
***
려군이 가휘를 기다린 시간은 반 각이 채 되지 않았다.
“려군.”
“아!”
“미안해요. 놀랐어요?”
갑자기 절벽 밑에서 솟구친 인영의 정체를 확인한 려군은 뒤늦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생각보다 금방 끝났네요. 갔던 일은 잘 됐나요?”
“…려군. 미안하지만 려군이 와봐야겠어요.”
“네?”
“이건 저보다는 려군이 알아야 할 일이에요.”
말을 마친 청년이 그녀의 허리를 감쌌다.
려군은 의아했으나 잠자코 그를 끌어안는 것으로 상대에 대한 믿음을 보였다.
그러나 그녀도 절벽을 수직으로 걷는 그의 신위 앞에서까진 평정을 유지할 수는 없었다.
‘그의 무공은 이제 나와 비할 바가 아니구나.’
허리에 덩굴을 묶기 전까진 내려갈 수 없다며 요란을 떤 것이 민망할 지경.
대견함 반, 서운함 반으로 그의 성장을 지켜보는 사이, 둘의 신형은 어느새 절벽의 틈새로 들어서고 있었다.
“이런 곳이….”
“저 앞쪽이에요.”
동혈에 진입한 그가 그녀를 바닥에 내려 주었다.
대체 저 앞에 무엇이 있기에.
동굴 안은 강화된 시력으로도 한 치 앞을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어두침침했다.
려군은 궁금증과 설렘을 안고 천천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동굴은 깊지 않았다.
가휘가 가리킨 모퉁이를 돌기 무섭게 막다른 길이 앞을 가로막았으니.
그러나 그 안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조금도 예상치 못한 광경이었다.
“이건…?”
막다른 방의 정중앙에는 가부좌를 튼 해골 한 구가 놓여 있었다.
대체 얼마나 수양이 깊은 자이기에 생명이 다하는 순간까지 저리 의연한 모습을 유지했을까.
세월이 흘러 육신이 썩어 문들어진 뒤에도 시신에 한 점 흐트러짐이 없을까.
그러나 절벽 틈새에 정체 모를 누군가의 유해가 있다는 사실보다 그녀를 충격에 빠뜨린 것은, 해골 뒤 벽면에 아로새겨진 검흔이었다.
아니, 그것은 검흔인 동시에 누군가를 위해 남겨진 글귀였으니.
-월녀문 십팔대 장문 백모란이 남긴다.-
글귀를 읽는 벽려군의 눈빛에 거대한 파문이 일고,
“스승…님?”
15년 만에 재회한 스승의 유해 앞에 벽려군의 몸이 무너져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