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tial Streamer RAW novel - Chapter 179
생환 (2)
“려군, 괜찮아요?”
“고마워요….”
내게 부축을 받은 려군이 옷매무새를 정갈히 했다.
이어서 스승의 유해를 향해 한 차례 절을 올린 그녀는, 나와 함께 벽에 적힌 글귀를 읽기 시작했다.
[월녀문 십팔대 장문 백모란이 남긴다.본녀는 사마외도의 함정에 갇힌 끝에 이름 모를 절벽에서 최후를 맞이할 운명이었으나,
하늘의 보살핌 덕에 이리 유언이라도 남길 말미를 얻었으니 어찌 감사하지 않겠는가.
본디 무인에게 죽음은 항상 곁에 있는 것이니 무엇이 억울하겠냐만,
한 가지 미련이 남는다면 아직 어린 제자 군아가 눈에 밟히는구나.
월녀검결의 후반부를 전수받지 못한 채 비급과 스승을 모두 잃었으니 언젠가는 한계에 직면할 터.
그리하여 이곳에 월녀검결의 후반부를 남기노니.
이름 모를 연자여.
부디 이곳을 빠져나간다면 월녀문의 벽려군을 찾으시오.
미련할 만큼 우직한 아이이니 스승의 복수를 위해 가시밭길을 걷고 있을 터.
부디 스승의 복수일랑 잊고 본인의 행복을 찾으라 전해주시면, 이 몸 저승에서도 은인의 앞날을 축복하리다.
만일 까마득한 세월이 흘러 군아의 이름마저 풍화되었거든 월녀문의 당대 계승자에게 이 검결을 전해주시오.
군아, 네가 내 제자여서 참으로 행복했다.
나 또한 네 남은 삶 속에서 복수나 슬픔이 아닌 행복한 기억으로 남길 바란다.]
글귀 하단에는 마치 낙서처럼 보이는 선 몇 개가 새겨져 있었다.
그러나 월녀검의 계승자인 려군의 눈엔 다르게 보인 것이 틀림없다.
“…….”
스르릉-.
스승의 유해를 말없이 바라보던 벽려군의 허리춤에서 옥빛검이 뽑혀 나왔다.
반개한 그녀의 눈을 발견한 난 소리없이 뒤로 물러났다.
무인이라면 바라 마지않는 깨달음의 순간이 분명했다.
도와주진 못할망정 방해할 수야 없으니.
이윽고 그녀의 검이 천천히 허공을 유영하기 시작했다.
한 획, 한 획.
스승을 잃은 뒤 홀로 개척해온 검로에는 언제나 고뇌와 좌절이 엿보였으나, 오늘은 달랐다.
스승이 남긴 답안지를 확인한 그녀의 검에 더 이상 망설임은 없으니.
확신이 깃든 검극은 이윽고 막혀 있던 둑을 단번에 무너뜨리고 메마른 대지를 촉촉하게 적셨다.
“아…!”
그녀의 얼굴이 환희로 물들었다.
오래도록 배움에 목말라 온 그녀가 심득을 빨아들이는 속도는 타의추종을 불허했으니.
메말랐던 대지는 순식간에 비옥한 대지가 되고, 싹을 틔우고, 꽃을 피워냈다.
스스스스-.
검에서 피어난 옥빛 섬광이 어느새 동혈을 가득 채웠음에도 주위는 놀랍도록 고요했다.
마치 대기의 결을 가르듯 동굴에는 바람 한 점 불지 않는 가운데,
점차 속도를 더해가던 검극을 시야에서 일순 놓친 순간,
푸화악-!
그녀의 몸을 중심으로 터져 나온 새하얀 빛이 동굴 내부의 모든 것을 집어삼켰다.
나도, 백모란의 유해도, 그녀 자신도.
“음….”
잠시 뒤, 간신히 시야를 회복했을 때 그녀는 이미 납검을 마친 뒤였다.
그러나 그녀가 풍기는 기세는 조금 전과는 천지차이였다.
여전히 반개한 두 눈에는 현기가 가득했으며, 은연 중 흘러나오는 기도는 내가 아는 절대자들 못지않았다.
‘금안마군…. 어쩌면 그 이상.’
그녀가 이룩한 상상이상의 성취를 바라보며 뿌듯해 하던 그 때,
“아….”
“괜찮아요?”
난 모든 집중력을 끌어낸 끝에 기력이 고갈된 그녀를 얼른 부축했다.
“축하해요, 려군.”
“시간이… 얼마나 지났나요?”
“반 시진 정도요. 후반부는 어느 정도 익힌 건가요?”
“아마… 전부. 스승님께 절을 올리고 싶어요. 절 부축해줄 수 있나요?”
“그럼요.”
내 도움을 받아 백모란의 유해 앞에 선 그녀가 다시금 천천히 절을 올렸다.
“불초제자, 이제야 스승님을 뵙습니다. 스승님의 염려처럼 오랜 세월을 복수귀로 살았으나 이제라도 사랑하는 이를 만나 행복을 꿈꾸게 되었습니다. 부디 저희의 앞날을 지켜봐 주세요.”
“려군….”
“고마워요, 가휘. 가휘는 제 평생의 은인이에요. 고마워요….”
떨리는 목소리로 떠듬거리던 그녀의 눈에서 결국 참고 참았던 눈물이 터져 나왔다.
난 안타까운 마음에 그녀를 오래도록 보듬고 서 있었다.
***
“혈마의 비동에서 조 소협께 구명지은을 입은 사천 동걸문의 서영두요. 조문을 올리러 왔소.”
“조 공자께서는 현재 부상이 심하여 칩거 중이시오. 누구도 받지 말라는 명이 있었으니 이해해주시오.”
“음…? 분명 내가 듣기로는.”
“허튼 소문을 믿고 그 이상 입을 놀린다면 경을 치를 것이오.”
“허…! 조가장의 위세가 아무리 대단하다고는 하나 어찌 좋은 뜻으로 온 이를 이리 박대한단 말인가!”
“멀쩡히 살아 있는 사람을 망자 취급하는 이를 어느 누가 환대하겠소. 그만 돌아가시오.”
굳게 닫힌 대문 너머에서 들려오는 실랑이를 듣던 제갈우희의 눈에 슬픔이 깃들었다.
이런 소동은 비단 어제 오늘 일 아니었다.
가휘가 변을 당한 그 날, 절벽에 모여 있던 이들은 하나 같이 입이 무거운 이들이었으나, 본디 발 없는 말이 천 리 가는 법.
조가장으로 복귀하는 일행의 얼굴에 드리운 암운을 본 이들은, 비동을 탈출한 이들의 증언을 바탕으로 제법 그럴듯한 추측을 만들어 냈고, 세상 사람들에게 가휘의 죽음은 어느덧 기정사실이 되어 있었다.
‘그나마 가가께서 마교의 주구 취급 받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여겨야 할까?’
제갈우희의 얼굴에 자조적인 미소가 피어났다.
비동 내에서 벌어진 사건에 대해 상세히 보고 받은 무림맹주는 놀랍게도 가휘를 자신의 전인으로 공표했다.
그의 비호 덕에 가휘의 상식을 벗어난 무공에 대해 온갖 억측을 쏟아내던 호사가들은 합죽이라도 된 듯 입을 다물었다.
물론 그 뒤엔 제갈세가를 비롯한 남궁세가, 팽가, 북해빙궁 등 가휘와 크고 작은 연을 맺은 수많은 세력의 탄원이 있었지만, 조가장이 검성 여능천에게 큰 은혜를 입은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설령 그의 호의가 자신의 명성을 드높이려는 의도에서 비롯되었다 한들.
그리하여 조가장은 혈마의 비동에서 조가휘에게 목숨 빚을 진 이들의 조문행렬과 소문의 진위를 파악하려는 자들로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그러한 행동이 남겨진 이들에게 어떤 상처를 줄지는 안중에도 없는 모습들이었다.
“난 안 믿어.”
문득 들려온 목소리에 제갈우희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봤다.
그곳엔 대문 꼭대기에 올라 하염없이 먼 곳을 바라보는 약빈의 모습이 있었다.
“휘 랑은 살아있어.”
“그래…. 나도 알아. 어르신께선?”
-…좀 아까 비급을 들고 출발하셨어.
“그래?”
힘없는 대꾸와 함께 오늘도 대문 근처에서 쓸쓸히 발걸음을 돌리던 제갈우희의 눈에 가휘의 모친인 벽교은의 모습이 들어왔다.
회임 여섯 달 째에 들어선 그녀가 부푼 배를 이끌고 힘겨운 발걸음을 한 것은 자신과 같은 이유에서임이 분명했다.
“어머님, 몸도 편치 않으신데.”
“아니다. 괜찮아. 그보다 밖에서 소란이 들리던데….”
“듣지 않으시는 것이 좋겠어요. 들어가요, 어머니.”
“혹여 휘아가 돌아온 건….”
“막… 확인한 참이에요. 가가께서 돌아오면 제일 먼저 말씀드릴게요, 어머니. 제 손 잡으세요.”
시녀들을 물리친 그녀의 시선이 벽교은의 배로 향했다.
가휘가 명교에서 복귀하고 얼마 되지 않아 들어선 아이라고 했다.
그 때만 해도 하루하루가 행복했는데.
더 이상 이런 슬픔은 없을 줄 알았는데.
교은을 부축하며 안채로 향하는 동안, 수많은 식솔들이 그녀들을 향해 고개를 숙여왔다.
그들이 장주 내외가 없는 곳에서 조심스레 가휘의 죽음을 입에 담는 것을 제갈우희는 모르지 않았다.
그럴 때면 그들에게 아무런 잘못이 없음을 알면서도 신경이 날카롭게 곤두서는 그녀다.
“희아.”
“네, 어머니.”
“많이 힘들지?”
“…아니에요, 어머니. 가가는 분명… 돌아올 텐데요.”
“그래. 그래야지. 그래야지….”
그녀를 잡은 교은의 손에 힘이 꾹 들어갔다.
무공을 전혀 모르는 손길임에도 손아귀가 아려오는 까닭은, 그 안에 담긴 어머니의 의지 때문일까?
우희 또한 그녀의 손을 꽉 맞잡으며 용기를 나누었다.
“…들어가세요, 어머니.”
교은을 무사히 안채로 배웅한 그녀의 발걸음은 장원 외곽에 위치한 어느 별채를 향했다.
조가장이 외부인의 출입을 엄금하는 요즘 유일하게 예외로 둔 손님을 만나기 위해.
“오셨습니까, 아가씨.”
“응. 여전히 식사는?”
“네… 오늘도 아무것도 입에 대지 않으셨어요.”
“그래.”
문 앞을 지키던 시녀와 짧은 대화를 나눈 그녀는 곧장 별채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곳엔 병색이 완연한 한 여인이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오늘도 식사 안 했다면서요.”
“…….”
침상에 앉은 아리따운 여인이 물끄러미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봤다.
그녀의 이름은 홍사강.
자신을 버린 사내를 찾아 머나먼 중원행에 나선,
그러나 결국 복수 대신 희생을 택한 가련한 여인.
명교 소속인 그녀를 조가장에서 맡게 된 것은 그녀의 상세가 보통 위중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사경을 헤매는 그녀를 본단으로 이송하는 것이 무리라고 판단한 곽정유는, 그녀를 제외한 나머지 교도들을 이끌고 현재 호북성 외곽에 조그만 장원을 구해 은거 중이었다.
처음 그녀가 마교인이란 말을 들었을 때만 해도 질겁한 조가장주 내외였으나, 이윽고 그녀가 자식을 구하기 위해 목숨을 던진 은인임을 안 지금에는 귀빈 취급하며 치료에 돈을 아끼지 않았다.
호북에서 난다긴다하는 의원들이 정성을 아끼지 않고 돌본 덕에 그녀는 며칠 전 가까스로 의식을 되찾았지만, 가휘의 행방불명 소식을 접한 뒤에는 다시 급속도로 건강을 잃어가고 있었다.
“서원…. 서원의 소식은…?”
“아직. 그리고 서원이 아니라 가휘예요.”
“흑-. 흐윽….”
팽소혜를 향해 다짜고짜 검을 휘두른 악녀라 들었건만 이리도 마음이 여릴 줄이야.
문제는 상대가 그리도 애틋하게 여기는 대상이 자신의 정인이라는 사실.
그러나 적개심을 품기엔 그 날 광명좌사 백나은의 장심 앞으로 몸을 날리던 그녀의 희생이 너무나도 눈부셨다.
식음마저 전폐하고 눈물로 하루를 지새우는 그녀 앞에서 어찌 같은 여인으로서 측은함이 싹트지 않을 수 있을까.
마음이 복잡해진 제갈우희는 고개를 홱 돌리며 방문한 용건을 말했다.
“귀교에서 연락이 도착했어요.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할 수 없다고. 이대로 복귀하지 않을 생각인가요?”
“서원….”
“쯧.”
참다못한 그녀의 입에서 혀 차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남의 상처를 보듬기엔 그녀 자신도 이미 한계였다.
울고 싶은 게 누군데.
당장이라도 주저앉고 싶은 게 누군데.
‘여기 당신보다 덜 슬픈 사람은 없어.’
그 말을 속으로 삼키며,
제갈우희는 그녀 앞에서 매정히 몸을 돌렸다.
“…식사해요. 가가께서 돌아왔을 때 그런 몰골로 맞이할 게 아니라면.”
“…….”
“억지로라도 드시게 하렴.”
“네, 아가씨.”
문밖에서 대기 중이던 시녀에게 명령을 내린 그녀는 별채를 뒤로 했다.
머잖아 그녀가 떠나간 방문 안쪽에서 처연한 흐느낌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제갈우희는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며 걸음을 옮겼다.
가휘를 위해 희생한 또 다른 여인에 생각이 미친 것이다.
“…벽 선배.”
검후 벽려군.
가휘를 사랑했던 여인이자 자신이 갈라놓은 여인.
그럼에도 위기의 순간 사랑하는 사내를 위해 초개처럼 목숨을 내던진 비운의 여인.
그녀의 비장한 최후를, 그녀를 잃은 뒤 세상을 잃은 듯했던 가휘의 얼굴을 떠올릴 때마다 제갈우희는 숨이 턱턱 막히는 기분이었다.
만일 자신이 둘 사이를 가로막지 않았다면 무언가 바뀌었을까?
지금이라도 두 사람이 살아 돌아오기만 한다면 나는….
하루에도 몇 번씩 머릿속을 괴롭히는 부질없는 망상과 함께 그녀는 비틀비틀 처소로 향했다.
잠시라도 이 괴로움을 잊을 수 있도록, 독한 술을 찾기 위해서.
그리고 그날 저녁, 숙취에 시달리던 그녀의 앞으로 한 장의 서신이 배달됐다.
세상에서 오직 소수의 사람만이 알아볼 수 있는 문자가 적힌 서신이.
[명교 성녀 수진]어둠 속에 흐트러진 모습으로 쓰러져 있던 그녀의 눈에 한 줄기 빛이 깃드는 순간이었다.
이윽고 허겁지겁 서신을 개봉한 그녀의 눈에 환희의 눈물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아… 아, 가가. 가가….”
흐느낌은 곧 오열이 되었다.
지금까지 억눌러오던 슬픔을 단번에 쏟아내 듯 울음은 오래도록 이어졌다.
그리고 이튿날부터 그녀를 비롯해 조가장을 활보하는 몇몇 사람들의 얼굴에는 다시 생기가 넘치기 시작했다.
세상 사람들은 아직 그 이유를 알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