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tial Streamer RAW novel - Chapter 181
생환 (4)
“욱-.”
혼란에 빠진 가주실에 다시금 헛구역질 소리가 울려 퍼졌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훈훈했던 재회의 현장에는 오직 긴장감만이 가득했다.
나와 려군을 번갈아 바라보는 사람들의 얼굴에는 의혹이 가득했고, 려군은 려군 대로 당황을 감추지 못했다.
비록 누구도 입을 열진 않았으나, 장담컨대 그들은 머릿속으로 한 단어를 떠올리고 있으리라.
입덧이라는 단어를.
“…아니지?”
약빈이가 모두를 대변해 물었지만, 난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지금 내 머릿속엔 려군과 운우지정을 나누던 순간들이 빠르게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복숭아 기운에 취해 피임 따위는 새까맣게 잊은 채 본능을 쫓던 순간들이.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렇게 쉽게…?
보통 입덧은 언제쯤 하는 거지?
려군과 관계를 맺은 지 한 달 쯤 지나긴 했는데.
“아….”
어질어질한 기분에 눈을 질끈 감으니 강 건너 불구경 중인 채팅창이 시야에 들어왔다.
[크래카라 : 깐휘 집은 제갈세가 석빙고야 영원히] [미갸엘 : 급 호러물 ㄷㄷ] [카시 : 검후의 승리] [미푸새 : 정실려군] [원퉁사 : 소꿉친구 포지션은 패배가 국룰이지] [Nishikian : 팝콘이 여기 있었는데ㅋㅋ] [랜덤기챠 : 꼬시다 깐휘쉑 제대로 참교육 당했으면] [취킨김밥 : 팔찌에 그런 기능이???]그래, 우희. 우희는?
황급히 고개를 돌린다.
입덧의 임팩트가 워낙 강해 잠시 잊고 있던 그녀를 향해.
그러나 누구보다 큰 충격에 휩싸였던 그녀는 이미 자리에 없었다.
탓탓탓-.
“희야!”
“욱-.”
소매로 눈가를 훔치며 가주실 밖으로 뛰쳐나가는 우희와 여전히 입덧 중인 려군.
두 여인 사이에서 갈팡질팡 하던 그 때,
-전 괜찮으니 어서 가 봐요.
-려군….
-난 괜찮아요. 정말이에요.
-고마워요.
“여러분, 죄송합니다.”
려군의 독려에 난 망설임 없이 우희를 쫓아 그 자리를 뒤로했다.
***
“희야, 이것 좀 열어봐.”
“…….”
“희야.”
꽉 닫힌 방문 너머에선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걱정되는 마음에 문고리에 손을 얹은 순간,
-나중에요.
“희야.”
-나중에 얘기해요. 지금은… 이성적으로 대화가 힘들 거 같으니까.
“…여기서 기다릴게.”
문에서 물러난 난 그녀가 불러주기만을 기다리며 오랜 시간을 망부석처럼 서 있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문 안쪽에서 갈라지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가… 제발.
“이대로 혼자 두면 안 될 거 같아서 그래.”
-…….
“욕해도 좋아. 들어갈게.”
혹여 그녀가 나쁜 생각이라도 하면 어쩌나, 억지로 빗장을 열고 안으로 들어간다.
촛불 하나 켜지 않은 방은 깜깜했다.
그리고 우희는 그 어둠의 중심에 멍하니 주저앉아 있었다.
화를 내지도, 울지도 않은 채 그저 멍하니.
“희야.”
“…….”
미동조차 없는 그녀의 눈빛에 가슴이 아려왔다.
결국 언젠가는 밝혀질 일이었지만 하필 이렇게 최악의 형태라니.
려군은 정말 임신을 한 걸까?
그리고 아까 그 팔찌.
십여 년을 아무런 의심 없이 차고 다녔던 팔찌에는 대체 어떤 비밀이 숨어있는 걸까?
오만 가지 생각이 머릿속에 휘몰아쳤지만, 이 순간 내가 해야 할 일은 명확했다.
“미안해.”
내 한 쪽 무릎이 바닥에 닿았다.
이윽고 남은 한 쪽도.
“미안해, 희야.”
“…지금 뭐하는 거예요?”
“내가 잘못했어.”
“뭘.”
“네 믿음을 배신했어. 미안해.”
유리알 같은 눈동자가 날 응시한다.
어째서 그녀의 애정을 당연시 여겨 왔을까?
일체의 감정이 배제된 그녀의 눈빛은 너무나 낯설었고, 그래서 슬펐다.
지난 한 달여 간 생각해둔 변명들 따위는 새하얗게 잊힐 만큼.
“전부… 말할게. 그 날 낭떠러지에서 떨어진 다음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떠듬떠듬.
난 서신으로는 미처 다 밝히지 못한 그간의 사정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무너진 동굴 속에서 큰 부상을 입고 쓰러져 있던 려군를 발견한 일.
그녀를 등에 업은 채 미로처럼 얽힌 동굴을 탈출하던 순간의 다급함과 무릉도원을 발견한 순간의 기쁨.
그 과정에서 피어난 유대감과 이끌림.
그리고 출발 전날 일어난 사고까지.
그 모든 것들을 가감 없이 솔직히 털어놓았다.
“믿어줘, 희야. 그건 정말 사고였어. 그 복숭아만 아니었으면….”
“복숭아?”
잠자코 이야기를 듣던 우희의 눈썹이 꿈틀한 순간,
난 동아줄이라도 발견한 기분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계곡에서 우연히 발견한 복숭아였어. 겉과 속이 모두 빨간.”
“무산영도.”
“어?”
“무산영도네요.”
“알…아? 그 복숭아를?”
“잘 알죠.”
피식 웃는 그녀의 얼굴은 오히려 내 변명을 듣기 전보다 빈정이 상해 보였다.
“확실히 무산영도에는 그런 효과가 있어요.”
“아…. 난 몰랐어.”
“정말? 알면서 일부러 나눠 먹은 게 아니라?”
“일부러 먹다니. 내가 그걸 어떻게 알고….”
펄쩍 뛰는 날 향해 그녀의 입술이 속사포처럼 달싹였다.
“홍령초는 이 장 이내로 접근하게 되면 정욕이 끓어오른단 말이지. 주의하도록 하고, 또 무산영도라는 복숭아에도 비슷한 효과가 있지만….”
그녀가 누군가의 말투를 흉내 냈다.
지금은 어렴풋하지만, 분명 나도 잘 아는 누군가를.
“…송요동 교관님?”
“맞아요. 지금으로부터 3년 전인 을사년 기묘월 병자일, 만산객 송요동 교관님의 기연을 찾아서 첫 야외 수업 때 배운 내용이죠. 설마 기억이 안 난다고 하진 않겠죠? 저도 인정하는 기억력을 지닌 가가께서요.”
내가 너냐고….
평소에는 그냥 웃고 넘어가던 그녀의 과대평가가 이 순간 내겐 몹시 불리하게 작용했다.
“아니, 아니라니까. 난 기억력이 좋은 게 아니라 그 뭐야, 구독신공의 영령들이 옆에서 다 알려주는 거라….”
“다 알려주는 그들이 하필 복숭아에 대해서만 침묵했다?”
“진짜야. 나 억울해. 너처럼 기억력 좋은 영령이 어디 있겠어. 아, 그리고 그 때 기억 안 나? 우리 5년 만에 재회해서 한창 들떠 있을 때라서 수업 제대로 집중 안 한 거?”
[Rhacoom : 옛날 영상 찾아보니까 복숭아 얘기 진짜 있넼ㅋㅋㅋ ‘특별수업’이라는 영상 02:01에 나옴] [작은새우 : 깐휘쉑 알면서 쳐먹었쥬? 기억 안 나는 척 려군 눈나도 나눠졌쥬?] [달빛길 : 그래놓고 피해자인 척 했다고? 개소름이네ㄷㄷ] [뽀미 : 깐하다 추휘야 ㅋㅋㅋㅋㅋㅋ]이 배신자 새끼들!
내 기억력 수준 뻔히 다 알면서!
과거 영상을 확인한 시청자들이 날 몰아가는 사이, 우희의 싸늘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하긴 기억한다면 그렇게 당당하게 말했을 리 없죠. 만산객 교관님의 다음 설명을 기억하나요?”
순간 불안감이 엄습했다.
“…아니, 잘 모르겠는데.”
“서로에게 깊은 연정을 품지 않았다면 무산영도를 복용한들 춘약 효과는 나타나지 않는다. 그게 홍령초와 무산영도의 차이점이다. 가가는 지금 제 앞에서 다른 여자를 진심으로 사랑한다고 선언한 거예요.”
“그…럴 의도는 아니었어. 정말 미안해.”
조커라고 생각한 게 최악의 패였다니.
이제 남은 건 무조건 비는 수밖에 없었다.
아주 싹싹 비는 수밖에.
“미안해, 희야.”
“후….”
“모르고 먹었어. 정말이야. 려군에 대해.”
“려군?”
“교관님. 벽려군 교관님.”
아씨, 나 왜 이렇게 찌질하냐.
명색이 중원의 영웅인데.
그러나 아무리 화려한 타이틀도 화난 여친 앞에선 휴지조각과 마찬가지.
더구나 그게 바람기에 대한 추궁이라면.
“교관님께 아무런 감정이 없었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만, 한눈 팔 생각은 절대 없었어. 돌아오는 마지막 날에도 앞으로 좋은 친구로 지내자고 얘기까지 했는데 하필 그 날 그 사달이… 진짜야. 계곡을 떠난 뒤에는 잠자리도 안 가졌어. 정말로.”
“그래서요?”
거듭된 사과에도 그녀는 눈 하나 깜짝 않았다.
“그래서 가가는 제가 어떻게 하길 바라나요?”
“어?”
“제가 어떻게 했으면 좋겠어요. 용서를 바라나요?
“…응.”
고민 끝에 눈치를 보며 답하자 그녀가 느긋하게 되물었다.
“어떤 의미의 용서?”
“의…미?”
“응. 의미. 하룻밤의 실수였으니 눈 감아달라는 의미? 아니면 교관님을 받아달라는 의미?”
“그게….”
“회임은 고려할 필요 없어요. 가가가 교관님과 정리할 마음만 있다면 내가 대신 키울 테니까.”
그녀가 날 궁지로 몰았다.
내 마음을 모를 리 없음에도, 내가 자기 자신의 의지로 말을 꺼내길 독촉했다.
그리고 마침내 내 입술이 열렸다.
“…돌아오는 내내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 지 고민했어. 비록 생각지도 못한 형태로 이야기를 하게 됐지만… 여전히 너희를 제일 사랑해. 하지만 교관님을 향한 내 마음도 진심이야. 그걸론 안 될까? 정말 열심히 할게.”
이윽고 그녀가 눈을 감고 사색에 잠겼다.
아까 전보다 훨씬 길고 불편한 침묵이 이어졌다.
“…이야기 끝났으면 나가봐요.”
“희야….”
“설마 지금 당장 답하라는 건 아니겠죠?”
“아, 응.”
“생각할 시간이 필요해요.”
“그래. 내가 너무 내 생각만 했네. 알았어. 가볼게.”
씁쓸한 얼굴로 방을 나서다 문득 잊은 것이 떠올라 뒤를 돌아본다.
얼마나 정신이 없었으면 가장 중요한 한 마디를 잊었을까.
“…보고 싶었어, 희야.”
그러나 그녀는 마지막까지 날 돌아보지 않았다.
***
“끝났어?”
“빈아….”
우희의 처소를 나오니 벽에 기대어 날 기다리는 약빈이의 모습이 보였다.
“역용을 하든가 갓을 쓰든가 해. 살아 돌아온 거 동네방네 소문낼 생각 아니면.”
“아, 응.”
“시녀들은 내가 통제했어.”
등에 멘 갓을 고쳐 쓴 난 머쓱한 얼굴로 물었다.
“…다 들었어?”
“무릎 꿇고 찌질하게 빈 거?”
“…응.”
“왜. 나한테도 무릎 꿇게?”
“…그럴까?”
“됐어. 조금 당황하긴 했는데… 네가 살아 돌아온 기쁨이 더 크니까.”
피식 웃은 그녀가 턱짓으로 우희의 처소를 가리켰다.
“쟤도 머리로는 알 걸? 그냥 당황한 거지. 중간과정이 많이 생략됐으니까.”
“미안해.”
“쟤 마음고생 많이 했어. 그러니까 너도 이 정도는 아파해도 돼. 따라와.”
앞서 걷기 시작한 그녀의 등을 바라보며 난 묘한 감성에 젖어 들었다.
아이는 금방 어른이 된다고 하더니.
난 전생보다 조금도 나아진 게 없는데, 대체 약빈이는 언제 이렇게 어른이 된 걸까.
“우리가 걱정돼서 따라온 거야?”
“응. 어머님, 아버님도 따라가 보라고 하셨고. 두 분도 많이 놀라셨으니까 바로 가봐. 교관님도 거기 혼자 남아서 힘들 거야.”
더 화낼 줄 알았는데.
솟구치는 미안함에 다시금 입을 달싹인 순간,
“사과 그만하라고 했다.”
“응. 그만할게.”
엄한 표정도 잠시, 나와 걸음걸이를 맞춘 그녀가 내 등을 툭툭 두들기며 미소를 머금었다.
“살아 돌아온 것만으로 장해. 그러니까 기운 내. 시간이 지나면 희야도 이해해 줄 거야.”
“넌… 괜찮아? 교관님이랑 내가….”
“의외로? 나도 조금 놀라는 중이야. 근데 한편으론 납득이 돼.”
그녀가 쓴웃음과 함께 먼 곳을 바라봤다.
“그 때…. 교관님이 비동에서 망설임 없이 휘 랑 대신 희생했을 때. 나도 모르게 마음속에서 교관님을 인정한 거 같아. 이런 사람이면 충분히 자격이 있다, 라고. 그리고 넌 그 때 네 표정 모르지?”
“내 표정?”
“세상 다 잃은 표정.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표정. 그래서 둘 다 살아있다는 소식 들었을 때, 어쩌면 이렇게 될 지도 모른다고 각오하고 있었어. 희야도 어느 정도 진정되면 나도 옆에서 한 마디씩 거들 테니까… 왜 그런 눈으로 봐?”
“못 본 사이에 많이 바뀐 거 같아서.”
내 말에 그녀가 코웃음을 쳤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던 건 나도 마찬가지니까. 교관님은 내게도 은인이야. 가자, 어머님 아버님 기다리시겠어.”
“…저번 서신에서 사부님은 출타 중이시라고 했지? 아직 안 오셨어?”
“빨리도 물어본다. 왜 아쉬워? 아까 그 난리를 보셨어야 하는데.”
“하!”
“풀어줬다고 웃지.”
“자기가 웃겨 놓고서.”
쓴웃음을 거둔 난 다시 진중한 표정을 지었다.
“사부님 그 때 다치신 손가락은 좀 어때?”
“…육신의 상처에는 금세 익숙해지셨어. 그보단 휘 랑의 빈자리 때문에 부쩍 늙으셨지. 너 무사히 돌아온 거 보고 떠나셨으면 좋았을 텐데.”
“연락은 드렸어?”
“드렸는데 보셨는지는 모르겠네. 행선지도 비밀로 하셔서…. 어쨌든 하오문 지부란 지부에는 다 연락을 뿌렸으니까 지금쯤이면 확인하시지 않았을까?”
“근데 어딜 가셨는데 그렇게 다 비밀이야?”
“그 얘기는 지금 하기엔 좀 길어. 나중에 따로 이야기해.”
약빈이와 이야기를 나누며 걷다 보니 어느새 가주실이 코앞이었다.
“잘 혼나고 와.”
“그래.”
“등 펴고.”
그녀가 등을 떠밀어준 덕에 가주실로 들어가는 마음이 조금은 가벼워졌다.
난 한 차례 숨을 고른 뒤 또 다른 전장의 문을 열어 젖혔다.
***
아까까지만 해도 여동생과 남궁현, 설이나, 항아 등이 모여 있던 곳엔 이제 부모님과 벽려군 세 사람만이 덩그러니 남아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아버지, 어머니.”
“어, 그래. 희아는 좀 어떠니?”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고….”
“그렇겠지…. 휘아, 네 잘못을 알고 있니?”
처음 보는 어머니의 엄한 눈빛에 벽려군이 오히려 안절부절못하고 고개를 조아렸다.
“어머니… 아니, 조 부인. 모두 제가 부덕하며 벌어진 일입니다. 그러니….”
“그러고 보니 여협께서 가끔 저를 어머니라 칭하기에 의아했는데, 이제 보니 그 때부터 제 자식에게 마음이 있었군요.”
“어머니, 그게 아니라.”
“휘아, 넌 가만히 있거라.”
변호하려 나선 날 꾸짖은 어머니께서 다시 려군을 향해 조곤조곤 물었다.
“제 말이 맞나요, 여협?”
“…네. 모두 사실이에요.”
려군이 대역 죄인마냥 고개를 조아렸다.
“송구합니다. 그에게 정인이 있음을 알면서도 제 욕심에 못 이겨 접근했습니다. 부디 너그러이 용서해주세요.”
“…그만 고개 들어요.”
려군을 일으켜 세운 어머니께서 그녀와 눈을 맞추며 이야기를 이어갔다.
“개인적으로 여협을 존경하고 있어요. 못난 제 아들에겐 과분한 분이지요. 하지만 휘아에겐 이미 정인이 둘이나 있어요.”
“어머니, 부디….”
“하지만 둘이 정이 깊어 이미 회임까지 한 듯하니, 이 일을 어찌 풀어나가야 할지 제 지혜로는 도무지 알 수 없네요. 여협, 답해보세요. 제가 끝까지 반대한다면 휘아와 헤어질 생각이신가요?”
그녀의 질문에 려군이 나를 흘긋 바라보았다.
문득 그녀와 무릉도원을 떠나기 직전 나누었던 대화가 떠올랐다.
-사람들이 저희를 용서할까요?
-무릎 꿇고 빌어봐야죠.
-만약 절 받아들이지 않아도 원망 안 할게요. 전 우리가 살아서 대화를 나눌 수 있다는 것만으로 충분히 감사하고 행복해요.
그러나 어머니께 답하는 려군의 말은 당시와 정반대였다.
“가휘, 미안해요. 거짓말을 했어요. 나 가휘랑 헤어질 자신이 없어요. 어머니. 죄송해요. 못 헤어질 것… 같아요. 흑-.”
“…얼마나 마음고생이 심했을까. 하지만 이 일은 나 혼자 결정할 일이 아니에요. 그건 알죠?”
“네….”
“부인. 일단 희아가 진정되길 기다려봅시다. 빈아의 의견도 들어봐야 하고.”
“네, 상공.”
다음은 아버지의 차례였다.
“세상 사람들이 듣기 좋은 말로 영웅은 삼처사첩이라고 하지. 허나 한 사람의 마음조차 헤아리지 못하고, 가정의 화목함도 지키지 못하는 이를 어찌 영웅이라 할 수 있겠느냐.”
“…죄송합니다, 아버지.”
“마교의 소저는 또 어찌할 생각이냐.”
“사강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그렇다. 자세한 사정까지는 모르나 그 소저가 널 각별히 여긴다는 것만은 알겠더구나.”
꾸중은 이내 한탄으로 이어졌다.
“자식이 살아 돌아온 기쁜 날 이게 무슨 일인지…. 내 너를 잘못 가르쳤구나. 너의 분별없는 행동으로 대체 얼마나 많은 여인들이 상처를 입은 것이냐.”
“송구합니다, 아버지.”
“너도 성인이니 말은 아끼겠다. 우린 여협과 좀 더 이야기를 나눌 테니 이만 물러가 보거라.”
-…전 걱정 말고 가 봐요, 가휘.
눈물이 그렁그렁한 려군과 눈빛으로 대화를 나누며 가주실에서 물러난다.
머릿속이 복잡했다.
각오는 하고 있었지만, 모든 것이 너무 한꺼번에 터진 기분이다.
무엇을 어떻게 해야 복잡하게 꼬인 실타래를 풀 수 있을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그러나 내겐 아직 한 가지 숙제가 더 남아 있었으니.
나를 위해 목숨을 던진 또 하나의 여인을 만날 시간이었다.
“하….”
깊은 한숨과 함께 난 홍사강이 요양 중인 별채를 향해 터덜터덜 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