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tial Streamer RAW novel - Chapter 182
상실 (1)
-아가씨, 의원이 당도했습니다.
침상에서 가부좌를 틀고 있던 홍사강의 눈이 스르르 열렸다.
의원이라면 분명 어제도 다녀갔는데…?
그녀는 의아해 하면서도 서둘러 몸가짐을 정돈했다.
얼마 전 제갈우희가 전해준 어떤 소식은 그녀에게 삶의 의지를 되찾아주었다.
거르기 일쑤던 끼니를 꼬박꼬박 챙겨먹고 재활 훈련에 매진한 결과,
조가장에 실려 왔을 때만 해도 산 송장이나 다름없던 그녀는 현재 빠른 속도로 건강을 회복 중이었다.
하물며 방문 시간을 어겼다 하여 고명한 의원을 내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드시라 하여라.”
-예, 아가씨.
머잖아 문을 열고 들어온 이의 얼굴을 확인한 홍사강의 눈썹이 꿈틀했다.
상대가 평소 자신을 돌보던 나이 지긋한 노인이 아닌, 새파랗게 젊은 청년이었기 때문이다.
“장 의원이 아니시네요.”
“나예요, 사강.”
홍사강의 사고가 정지했다.
그 사이 말 한 마디로 그녀를 혼란에 빠뜨린 사내의 얼굴이 꿈틀꿈틀 변화하기 시작했다.
혈마의 비동에서 그녀가 목숨을 바쳐 구해낸 어느 청년의 모습으로.
“내가, 내가 아는 그의 얼굴을 보여줘요.”
울먹임을 들은 미청년의 얼굴이 다시 한 번 변화했다.
유려한 얼굴선이 다소 짙어지며 사내다움이 물씬 풍기는 얼굴로.
검은 눈동자에는 눈부신 황금빛이 깃들었다.
그다. 꿈에서도 애타게 찾아 헤매던 그다.
“서…원.”
얼굴을 일그러뜨린 홍사강이 침상에서 일어났다.
비틀비틀, 그를 향해 걸어가는 그녀의 얼굴엔 오만가지 감정이 휘몰아쳤다.
원망, 그리움, 분노, 걱정, 환희….
하늘 높이 치켜든 그녀의 손바닥 안에도 그것들이 담겨 있었다.
“어떻게…. 어떻게….”
그녀의 손이 빠르게 낙하했다.
그러나 모든 죄를 시인하듯 가만히 두 눈을 감고 선 사내 앞에서, 단죄의 손길은 순식간에 속력을 잃고 방향을 틀었다.
뺨이 아닌 가슴으로.
툭-.
“흐윽-. 흑….”
투욱, 툭-.
처연한 울음과 함께 사내의 가슴을 두드리는 소리가 방 안에 울려 퍼졌다.
반면 갈팡질팡 허공을 헤매는 사내의 손에는 망설임이 가득했다. 그것이 너무도 서러워서 사강은,
“흐아앙-.”
그만 엉엉 목 놓아 울고 말았다.
그제야 커다란 손이 뒤늦게 그녀의 어깨를 감싸며 등을 토닥이기 시작했다.
그렇게 홍사강은 한참을 그의 품에 울며 안겨 있었다.
***
이튿날, 조가장 식구의 식사 자리에 사강이 참여했다.
여태까지는 별채에서 두문불출하던 그녀의 등장에 모두가 놀랐다.
“장주님, 부인. 평안하셨어요.”
“홍 소저. 몸은 좀 어떻소.”
“염려 덕에 많이 나았습니다. 그간 물심양면으로 돌보아주신 은혜 평생 잊지 않겠습니다.”
“자식의 목숨을 구해주신 은인께 응당 해야 할 도리를 다 했을 뿐이니 괘념치 마시오.”
“감사합니다. 저… 가…휘는 잘 잤나요?”
서원이란 이름 대신 어색하게 가휘란 이름을 읊조리는 그녀의 눈이 퉁퉁 부어 있다.
이것으로 이 자리에 눈이 부은 여인은 우희, 려군에 이어 총 셋이 되었다.
그 원흉인 내게 쏟아지는 시선들은 도무지 감당이 불가능할 정도다.
“어릴 땐 화화공자란 별호가 무슨 뜻인지 몰랐는데….”
“희 매. 희 매….”
“왜요, 현 가가?”
“쉿….”
순수한 게 제일 무섭다더니.
천연덕스러운 얼굴로 날 맥이던 소희가 남궁현의 제지에 뒤늦게 눈치를 보며 입을 다물었다.
곧 가시방석에 앉은 듯 불편한 식사가 이어졌다.
한편, 식사 내내 한 마디도 없던 우희는 식사를 마치신 부모님께서 먼저 자리를 뜨기 무섭게 처소로 돌아갔다.
나 또한 걱정이 되어 곧장 뒤를 쫓았으나, 반 시진 넘도록 문전박대를 당한 끝에 쓸쓸히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안 만나주지?”
“응….”
“계속 그렇게 해. 그럴 때 화 풀리길 기다린다고 진짜로 그냥 놔두면 성질만 더 나는 거 알지? 계속 달래줘.”
“경험담이야?”
“죽을래?”
어릴 적에는 누구보다 내성적이었으면서 언제 이렇게 시원시원한 성격이 됐는지.
오늘도 우희의 처소 앞에서 날 기다려주던 약빈이와 사부님의 처소를 향해 걸음을 옮긴다.
전날 그녀가 잠시 언급했던 사부님의 행방에 관한 이야기를 듣기 위해서였다.
“늦어도 내일이면 희야도 마음의 결정을 내릴 거야. 어쩌면 오늘일 수도 있고.”
“그럼 좋겠다.”
“이제 하루 지났어. 우리가 마교에서부터 너 기다리느라 얼마나 힘들었는데 벌써 우는 소리야?”
“그러게…. 진짜 힘들어서 어떻게 살았냐.”
대화를 주고받으며 걷다 보니 어느새 목적지가 코앞이다.
“이제 말해봐. 사부님은 어딜 가신 건데? 몸도 편찮으신데 쉬시질 않고.”
“그 전에 흡성대법 얘기부터 해야 돼.”
“흡성대법은 그 개새끼가 가져간 거 아니었어?”
“대외적으로는 그렇지.”
입꼬리를 씩 끌어올리는 약빈이를 본 순간,
반전 영화의 한 장면을 본 듯한 짜릿함이 등줄기를 적셨다.
“…설마?”
“할아버지 실력 안 죽었더라?”
“진짜야?”
“놀랐지. 어떻게 그 상황에서 그걸 빼돌리지?”
“사도련주나 다른 사람들도 이 사실을 알아?”
“아니? 할아버지랑 우리까지 딱 넷만. 뭐, 빼앗긴 당사자까지 합하면 다섯이겠지. 그 가면 쓴 새끼 지금 쯤 약 올라 죽을걸? 주머니 털린 것도 억울한데 덤터기까지 썼으니까.”
사도련주와 동수를 이루는 절대고수조차 깜빡 소는 소매치기 실력이라니.
내가 아무리 수십 갑자의 내공과 건곤대나이를 지녔어도 흉내도 못 낼 재주다.
정말이지, 우리 사부님이지만 감탄을 금할 수 없다.
“그래서? 그 흡성대법은 지금 어디 있는데?”
“할아버지가 들고 가셨지.”
“그 위험한 걸 들고 어딜?”
“누구 줘버린대.”
“뭐?”
대경하여 묻자 그녀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런 마물을 곁에 둬서 이로울 게 없다나. 아마 우리한테 불완전한 비급이란 말을 듣지 않았으면 자신도 탐욕에 빠졌을 거라고 하셨어. 갖고 있어 봐야 조가장에 화만 부를 물건이니 믿을 만한 친구에게 맡기겠다고.”
“차라리 태우시지 않고.”
“우리도 말 해봤는데….”
어깨를 으쓱한 그녀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건 강호사에 있어 큰 손실이라 안 되겠대. 비록 지금은 무리여도 먼 훗날 백성의 천명을 늘려줄지도 모르는 보물을 이대로 없애기는 영 아쉬우시다고.”
“그 친구는 믿을 만한 분이래?”
“누군지는 못 들었어. 강산이 변해도 그 친구는 안 변할 거라고 장담하시던데? 그리고 할아버지가 얼마나 능구렁이 같은데 그 정도는 생각해두셨겠지.”
“그건 그렇지.”
“그리고 우리도 몇 가지 조치를 취해두기도 했고.”
“조치?”
그녀가 씩 웃으며 종이를 찢는 시늉을 해보였다.
“몇 장은 찢어서 태우고, 몇 군데는 한글로 낙서도 하고. 희야랑 같이.”
“사부님이 뭐라고 안 하셔?”
“잘난 후손들이 알아서 복원할 거라고 하니까 웃으시던데? 당신 손녀가 아주 간이 크다고, 도둑은 그래야지 하시면서. 그것 때문에 여러 사람 다치고 휘 랑까지 실종돼서 분풀이로 찢은 건데, 예정에 없던 칭찬 한 번 들었지.”
다시금 장난기 가득한 미소를 짓는 그녀를, 나 역시 비슷한 미소를 머금은 채 마주 보았다.
***
약빈이의 예상이 맞았다.
[해시 초(오후 9시)에 처소에서 기다릴게요]늦은 밤 우희의 처소를 두드리는 내 품 안엔, 저녁 무렵 처소에서 발견한 서신이 곱게 접혀 있었다.
“희야, 안에 있어?”
-들어와요.
그저 무시당하지 않은 것만으로 안도하며 처소의 문을 연다.
“왔어요?”
“응….”
“이리 앉아요.”
어색한 분위기 속에 그녀가 나를 탁자로 안내했다.
그곳엔 그녀가 미리 준비해놓은 듯한 간단한 주안상이 마련되어 있었다.
“우리 단 둘이 술 마신 적, 거의 없죠?”
“응. 듣고 보니 그렇네.”
생각보다 분위기가 나쁘진 않다.
그녀의 표정 역시 어제나 오늘 아침에 비해 많이 부드럽다.
그러나 아직 방심은 금물.
어디에 지뢰가 숨겨져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난 여전히 바짝 긴장한 얼굴로 그녀가 따라주는 술잔을 받았다.
쪼르르륵-.
주전자에서 흘러내린 옅은 금빛 액체가 나와 그녀의 잔을 채웠다.
우린 서로를 향해 잔을 가볍게 들어 보인 뒤 단번에 술을 들이켰다.
“…희야, 원래 이렇게 독한 거 좋아해?”
“받아요.”
비우기 무섭게 채워지는 잔을 바라보며 난 침을 꼴깍 삼켰다.
그렇게 안주도 없이 연거푸 몇 순배가 돌았을까,
“생각 많이 해봤어요.”
“…응.”
자세를 고쳐 앉는 내 모습에 그녀가 힘없이 웃었다.
“긴장하지 말구요.”
“…미안해서.”
고개 숙인 날 잠시 말없이 바라보던 그녀의 입에서 뜻밖의 이름이 흘러나왔다.
“홍사강이요.”
“…어.”
“어제 만났다고 들었어요. 이야기는 잘 나눴어요?”
고민도 잠시, 그냥 솔직히 답하기로 마음먹고 입을 열었다.
“잘 모르겠어. 그냥 너무 미안해서 우는 걸 달래기만 한 것 같아. 우리 둘 다 의식적으로 다른 이야기는 피했으니까….”
“두렵다고 했어요.”
“어?”
“사강이요. 가가가 없는 동안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제법 있었으니까. 마음이 약해져서 그런지 나처럼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한테 이것저것 잘도 털어 놓더라구요.”
그걸 잠자코 들어준 너도 그만큼 힘들었던 거겠지.
차마 염치가 없어 하지 못한 말을 입 안에서 굴리는 사이, 그녀의 말이 이어졌다.
“가가에 대한 애정이 자기 혼자만의 감정일까봐 두렵대요. 아니, 그마저도 그저 집착에서 비롯된 환상일까봐. 그게 사라지면 자기한테 남는 게 아무것도 없을까봐. 그러니까 가가가 싫은 게 아니라면… 보듬어줘요.”
“어?”
놀라서 바라보는 내게 그녀가 눈물 맺힌 미소를 지었다.
“…나만큼 울더라구요. 매일. 이대로 죽는 게 아닐까 걱정될 정도로.”
“…….”
“그리고 교관님도요.”
입술을 떤 그녀가 다시 술을 들이켰다.
“으음…. 어젯밤에 교관님이 찾아 왔었어요.”
“여길?”
“하! 어떻게 하는 짓들이 그렇게 똑같아?”
헛웃음을 터뜨린 그녀가 빈 잔을 채우며 말을 이었다.
“교관님도 가가처럼 나한테 무릎 꿇고 빌더라? 다 자기 잘못이니까 가가는 원망하지 말래. 자기가 뭔데? 재수 없어. 착한 척 하고. 나만 나쁜 사람 만들고. 내가 그렇게 못됐어요?”
“아니야. 절대 아니야.”
“아니? 못된 거 맞아. 교관님이 받아달라고, 강호의 선배가 아닌 후처로서 깍듯하게 행동하겠다고 하길래 그럼 한번 언니라고 불러보라고 시켰어요. 이래도 내가 못된 계집이 아니에요?”
“아니야, 내가 나쁜 거야.”
“맞아, 네가 제일 나빠.”
또다시 술잔이 비워진다.
“빈아한테도 갔었나 보던데 얘기 안 해요?”
“교관님?”
“응.”
“오늘 한 마디도 안 했어.”
“내 눈치 보느라 그런 거잖아. 거봐. 내가 나쁜 거 맞네. 푸…흐.”
주향 섞인 한숨을 몇 차례 토해낸 그녀가 문득 우울한 표정을 지었다.
“…교관님이 가가 대신 희생했을 때요.”
“응.”
“…충격이었어요. 홍사강도 교관님도 가가를 위해 초개처럼 목숨을 던졌는데 난 비명만 질렀죠.”
“그럴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잖아. 같은 상황이었으면 우리 둘 다….”
“의미 없는 가정이에요. 어쨌든.”
그녀의 얼굴에 서글픈 미소가 피어났다.
“교관님이 떨어진 절벽 밑으로 울부짖는 가가를 봤을 때 깨달았어요. 내가 참 몹쓸 짓을 했구나. 저렇게 좋아하는 사람들을. 그래서 벌 받는구나.”
“무슨 말이야….”
그러고 보니 약빈이도 같은 말을 했지.
다른 사람들 눈에는 그렇게 비쳤던 걸까?
“세상이 가가를 죽었다고 할 때 아니라고 의연한 척했지만 사실 누구보다 불안했어. 다시 그때로 돌아가면 그렇게 모질게 대하지 않을 거라고, 그러니까 제발 살려 보내 달라고 하늘에 빌었는데…. 그랬는데요.”
떨리는 목소리로 심정을 토로하던 그녀의 눈에서 결국 굵은 눈물방울이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막상 둘이 서로를 바라보는 눈빛을 보니까, 교관님이 입덧하는 모습을 보니까 다 까먹어서. 너무 가슴이 아파서, 속상해서. 질투 나서…. 가가 곁에 있는 게 내가 아니니까!”
“희야.”
홀짝.
“그래서 그랬어요, 어젠. 미안해요. 겨우 살아 돌아왔는데 반겨주진 못하고. 은인이신 교관님께도 함부로 말하고.”
“아니야. 내가 이기적인 거 알아. 반대 상황이었으면 난 절대 너처럼 못했을 거야.”
“…알긴 알아?”
“왜 몰라. 알지.”
“근데 왜 그래.”
“…미안. 근데 천천히 마셔.”
“취하고 싶은데 오늘따라 잘 안 되네요. 마시다 보니까 늘었나봐.”
히죽 웃는 그녀의 모습에 가슴이 울컥한다.
울며 겨자 먹기로 나와 려군의 관계를 받아들이기로 했다지만, 마음마저 기꺼울 리 없으니.
난 다시금 술잔을 집어 드는 그녀의 손목을 얼른 붙잡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옆에 앉아도 돼?”
“왜애?”
“같이 마셔.”
대답을 듣지 않고 그녀 곁에 앉았다.
“술만 먹으면 속 버려. 이것도 같이 먹어.”
“내 허락 받은 게 그렇게 좋아? 평소에도 좀 이러지.”
“평소에도 둘만 먹을 땐… 알았어. 앞으로 더 잘할게.”
안주를 집어서 먹여주고.
입가에 묻은 것도 닦아주고.
“다섯 번 줬는데 나도 한 번 정도는 줘도 되지 않아?”
“…자요.”
“맛있다.”
“웃지 마. 화 나.”
그렇게 한 번씩은 얻어먹기도 하고.
“이젠 나 있으니까 혼자 마시자 말고. 앞으로는 이렇게 둘이 마시자.”
“빈아가 일렀어?”
“어머니가.”
“아… 응….”
“조만간 제갈가주님이랑 부인께도 같이 인사드리러 가자. 적어도 두 분께는 알려야지.”
“그래요.”
탁자 위에서 서로의 손이 얽혔다.
아직 앙금이 덜 풀린 우희가 자꾸 손가락을 꼼지락거렸지만, 내가 억지로 깍지를 끼자 그제야 잠잠해졌다.
그 외에도 과하지 않은 스킨십들을 반복하며 그녀의 서운함을 조금이라도 달래기 위해 애썼다.
그 사이 그녀는 참 많이도 울었다.
가랑비 옷 젖듯 그녀의 눈물을 머금은 내 옷소매는 어느새 축축하게 젖어 마른 곳을 찾기 힘들 지경이었다.
“…지금 약속해주면 안 돼요?”
“뭘?”
“이제 다른 여자는 그만해. 나 너무 힘들어.”
“약속할게.”
“전에도 약속했는데 안 지켰잖아…. 또 어길 거지?”
“정말로.”
“누가 대신 목숨을 던져도 흔들리면 안 돼요. 아니, 위기에 처하지 마. 마교 부교주 씩이나 됐으면….”
정작 흔들리는 건 그녀의 머리였다.
드디어 주량이 한계에 도달한 걸까,
내 어깨에 머리를 툭 기댄 그녀는 뭉개지는 발음으로 하소연을 이어갔다.
“내 거였는데. 나만의 가가였는데. 자꾸 이상한 년들이 나타나서 집적대.”
“미아내. 내가 미안…. 다신 이런 일 없을게.”
남말 할 때가 아니다.
나 역시 눈앞이 핑핑 도니까.
그러나 내공을 이용해 취기를 해소하진 않았다.
우희의 늘어난 주량은 곧 그녀가 마셔온 슬픔을 의미할 테니.
오늘은 그녀가 원할 때까지 함께 어울릴 생각이다.
“가가는요. 앞으로 어떠케 할 거예요?”
“뭘?”
“이제 강호의 일에는 참견 안 하면 안 돼? 또 가가가 그렇게 되는 거 시러…. 천하가 암중세력에 대해 아는데, 왜 굳이 가가가 위험을 감수해야 돼? 그냥 아버님 일 물려받아서 상인하면 안 돼?”
“그게 좋아?”
“응… 가업도 잇고. 어머님, 아버님 걱정도 덜어드리고.”
내가 살아있음을 알면 암중세력이 가만히 있지 않겠지만 찾아보면 방법이야 없겠는가?
가문은 소희가 물려받고 난 그냥 뒤에서 받쳐주기만 해도 되고.
조가휘라는 이름을 되찾을 게 아니라면, 이대로 조용히 묻혀 사는 것도 한 방법이겠지.
“응. 고려해볼게. 부모님께도 말씀드려보고.”
“…….”
“…희야?”
잠들었네.
대답이 없어 고개를 돌리니 꾸벅꾸벅 조는 그녀가 보인다.
난 그녀를 안아 침상에 뉘이고 방을 나섰다.
“잘 자, 희야.”
처소로 돌아오는 길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비틀거리는 발걸음으로는 일직선으로 걷는 것마저 힘들었다.
이렇게 퍼마신 게 얼마만이지?
대학 신입생 때 이후 처음인가?
그러나 오늘만큼은 계속 취한 기분이고 싶다.
마음이 복잡하다.
치정 문제에 대해 한시름 덜었다는 후련함보다, 결국 우희의 양보에 기대 이기심을 관철했다는 죄책감이 가슴을 옥좼다.
자자.
취했으면 자야지.
어디서 착한 척은… 쓰레기가.
술기운 없이는 반성조차 제대로 못 하는 스스로를 욕하며 쓰러지듯 침상에 눕는다.
날 중심으로 세상이 빙글빙글 도는 듯한 어지러움 속에 조금씩, 그러나 착실히 수마에 젖어든다.
끼익-.
도중 누군가 방문을 여는 소리에 잠시 정신을 차렸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콧속으로 파고든 익숙한 체향과, 가슴에 안겨오는 부드럽고 따스한 감촉은 날 보다 깊은 안락으로 인도했다.
꿈결 속에 난 그저 황홀에 젖어 본능에 충실히 몸을 움직였다.
그리고 이튿날 아침, 난 내공을 상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