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tial Streamer RAW novel - Chapter 191
잠깐의 일상 (1)
“부르셨습니까, 형님.”
“자네가 자리를 비운 동안 홍 대주와 이야기를 나눠봤네. 생각이 확고하더군.”
“…네. 저도 알고 있습니다.”
“비록 나와 광염홍가의 관계가 썩 좋다고는 할 수 없으나, 교주로서 그녀의 방황을 좌시할 수는 없네. 자네의 생각을 알고 싶네.”
“전….”
오늘 낮 교주와 나눈 대화를 떠올리는 사이, 사강은 어느새 문지방을 넘어 방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왔어요?”
“…네.”
“이리 앉아요.”
늦은 밤 내 처소를 방문한 사강의 얼굴에서 날 뒤쫓던 지난날의 증오나 원망은 더 이상 찾아볼 수 없었다.
과거 명교에서 보았던 자신감 넘치는 표정은 물론, 재회 당시 보여주었던 안도와 기쁨의 표정 역시 마찬가지.
대신 그녀의 얼굴을 차지한 것은 극도의 부끄러움과 긴장감.
새빨개진 얼굴로 상대와 눈도 제대로 못 마주치는 여인을, 어느 누가 무시무시한 마교의 최연소 대주라고 생각이나 할까.
“낮에요.”
“네? 아, 네.”
“낮에 여자들끼리 무슨 얘기 했어요? 내 욕했죠.”
“…….”
긴장을 풀기 위해 던진 농담이 무색하게도 그녀의 고개가 더욱 밑을 향했다.
“뭐예요, 정말이에요? 아니면 야한 얘기?”
“…….”
“못 본 사이에 왜 이렇게 얌전해졌어요. 저랑 얘기하는 게 어색해요?”
“…네. 제가 알던 서원과는 생김새도 말투도 어딘가 달라서.”
마침내 입을 연 그녀를 향해 난 빙긋 웃어 보였다.
“원하면 바꿔줄 수 있는데.”
“아니에요. 익숙해져야죠.”
“모처럼 다시 만났는데 아무 말 없이 사라져서 놀랐죠?”
“제갈세가에 갔다고 장주내외께서 말씀해주셨어요.”
고개를 젓는 그녀를 보며 상념에 빠진다.
그녀는 대체 내 어디가 마음에 든 걸까?
비록 이 시대의 정조관념이 현대에 비해 엄격하다고는 하나, 입 몇 번 맞춘 것으로 만 리 길을 떠나 날 만나러 오다니.
더구나 교통도 발달하지 않은 시대에.
어디 동떨어진 것이 거리 뿐이겠는가.
식사, 의복부터 시작해서 명교와 중원 사이의 차이는 한두 가지가 아닌 것을.
더구나 그녀는 명교에서도 지체 높은 집안의 아가씨가 아닌가.
“지내면서 불편한 건 없었어요?”
“네. 모두 잘 대해줬어요.”
“식사는 입에 맞구요?”
“네.”
“아까부터 나만 질문하네요? 나한테 궁금한 건 없어요? 원망한다는 말 말고.”
“그 땐….”
비동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린 그녀가 말문이 막힌 듯 입술을 오물거렸다.
나라고 그녀가 긴장한 이유를 모를 리 있겠는가.
다만 도도하고 위풍당당한 그녀의 평소 모습을 알기에, 그 갭에 놀랐을 뿐.
하지만 이래서야 오늘 밤이 새도 제대로 된 대화나 나눌 수 있을지 의문이다.
“사강.”
“아…!”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나자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뜬 그녀가 허리를 바짝 세웠다.
그러나 그녀는 내가 자신의 등 뒤에 설 때까지도.
긴장으로 잔뜩 움츠러든 어깨에 사내의 손이 올라올 때까지도.
사슴처럼 떨기만 할 뿐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했다.
“사강.”
“읏-.”
“날 좋아해요?”
“…왜 그런 걸 묻나요.”
“정말 후회는 없나요? 고향도 가문도 직위도 다 버리고 먼 중원에서 살아갈 만큼?”
“당신은 아직도 제 진심을 의심하나요?”
슬픔이 담긴 목소리에 난 말없이 허리를 숙였다.
이윽고 부드럽게 이어진 백허그에 그녀의 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런 뜻으로 한 말이 아니에요. 보름 전 나한테 한 말 기억해요?”
“어떤….”
“사강이 제게 그랬죠. 절 향한 마음이 사랑인지 집착인지 스스로도 헷갈린다고. 그 말이 맞아요. 우린 아직 서로를 너무 몰라요. 천서원이 아닌 조가휘를. 홍옥대주가 아닌 사강을요. 그래도 사강이 괜찮다면… 우리 함께 노력해봐요. 더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고 알아가면서.”
농담인 듯 씁쓸한 한 마디로 말을 끝맺는다.
“지금은 암중세력을 의식해야 해서 다소 제약이 많겠지만요.”
“…네.”
“다시 물을게요. 날 좋아해요?”
“네… 읍.”
수줍게 속삭이던 입술이 내 안에 삼켜졌다.
난 그녀의 턱 끝을 잡아 내 쪽으로 돌리며, 더욱 진득하게 그녀를 탐했다.
명교에서 그녀의 약혼자를 연기한 이후 거의 1년 만의 입맞춤이다.
“응-.”
딱딱하게 굳어 있던 그녀의 혀가 부드럽게 녹아내리며 조심스럽게 나를 맛보기 시작했다.
동시에 그녀의 어깨를 더듬던 손이 차츰 밑으로 향했다.
과거 일말의 양심을 지키겠답시며 결코 침범하지 않았던 경계 너머로.
천천히, 천천히.
그리고 마침내 그녀를 내 손아귀에 움켜쥔 순간,
“흡-!”
입안으로 밀려드는 달콤한 숨결에 아찔한 흥분을 느끼며 그녀를 번쩍 안아든다.
이윽고 불이 꺼진 방안에선 달뜬 신음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
‘넓어.’
이른 아침, 잠시 멍한 눈길로 가휘의 등을 훑던 그녀의 시선이 이윽고 자신의 몸을 향했다.
불과 어제 저녁까지만 해도 없던 흔적들이 그곳엔 가득했다.
“하….”
간밤의 뜨거웠던 추억을 떠올린 그녀의 입에서 작은 한숨이 터져 나왔다.
순결을 잃지 않고도 행복을 나눌 수 있다던 우희와 약빈의 말은 모두 사실이었다.
다만 그것은 그녀가 막연히 상상하던 것보다 훨씬 적나라하고 파렴치한 행동들이었다.
지난 밤 그의 품에 안겨 자신의 것이라고는 믿기 힘든 야릇한 목소리로 앙탈을 부리던 순간들을 떠올린 그녀의 얼굴은 순식간에 붉게 달아올랐다.
동시에 그녀는 깨달았다.
세 여인과 이런 행위를 일상적으로 즐겨왔을 그에게, 고작 입맞춤을 이유로 만 리 길을 따라온 자신이 얼마나 순박해 보였을지.
허나 민망함은 있을지언정 경솔했다는 후회는 없었다.
오히려 그녀의 눈빛에는 결연함마저 엿보였다.
그녀 또한 여인.
자신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이 세 여인을 바라볼 때와 다르다는 것을 그녀 또한 모르지 않았다.
그가 아무리 티를 안 내려 애써도 말이다.
하지만 섭섭한 마음은 들지 않았다.
그도 어제 말하지 않았나.
부족한 것을 앞으로 함께 채워가자고.
그녀는 가휘의 등에 살짝 입을 맞추며 조그맣게 속삭였다.
“당신을 좀 더 알려줘요.”
“으음….”
때마침 화답이라도 하듯 몸을 뒤집은 그가 그녀를 꼬옥 끌어안았다.
사강은 아직은 어색한 알몸의 감촉에 흠칫 놀라면서도, 따스한 온기를 찾아 그의 품속으로 깊숙이 파고들었다.
***
“가휘, 들어갈게요.”
사강 다음으로 내 처소를 찾은 것은 려군이었다.
평소 수수하던 모습과 달리, 가벼운 화장에 장신구까지 패용한 그녀의 모습은 눈부시게 아름다워서, 난 씰룩거리는 입꼬리를 감출 수 없었다.
“왜 웃나요. 이상한가요?”
“…너무 예뻐서요.”
“정말…인가요? 이상하진 않나요?”
“전혀.”
“두 사람이 좀 꾸미고 다니라고 이렇게 해줬어요.”
변명하는 모습마저 왜 이렇게 사랑스러운지.
“누가 그렇게 귀여우래.”
난 그녀를 내 무릎에 앉히며 사랑을 속삭였다.
“귀여워요, 려군. 너무 잘 어울려요.”
“으응… 간지러워요. 그보다.”
내 손길을 피해 몸을 비틀던 그녀가 짐짓 눈을 가늘게 떴다.
“가휘. 내게 할 말 없나요?”
“사랑해요.”
“그거 말구요. 할 말 있잖아요.”
“…’오빠’ 말인가요?”
“네.”
전날 우희에게 들었던 전음을 바탕으로 답을 도출해낸 나를 그녀가 매섭게 노려봤다.
눈을 흘기는 려군이라니, 오히려 포상인데.
몇 번을 봐도 아깝지 않을 장면을 두 눈에 새기며 뻔뻔한 한 마디를 던진다.
“그럼 안 돼요?”
“네?”
“귀여워서 그랬어요.”
“…놀리지 마요.”
순간 말문이 막힌 그녀가 시선을 피하며 떠듬거렸다.
“전 가휘보다 열 살이나 연상이에요. 교관이고.”
“까먹었어요? 무릉도원에서 했던 말.”
“무릉도원에서요?”
“떠나기 전날 밤에요. 밤엔 내가 교관님이라고 했잖아요.”
움찔.
그녀의 몸이 눈에 띄게 흔들렸다.
난 사악한 미소를 지은 채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앞으로도 둘만 있을 땐 그렇게 불러줄 거죠?”
“읏….”
“사랑해요, 려군…. 우리 이러는 거, 무릉도원 돌아온 뒤 처음이네요.”
“아… 잠시만….”
“려군은 안 말해줄 거예요?”
짐짓 토라진 표정을 짓자 그녀 또한 수줍게 사랑을 고백했다.
“저도요, 가휘.”
“이름 뒤에 뭐가 빠졌는데?”
“혼나요, 정말?”
“빨리 말해봐요. 가휘, 그 다음에.”
“…오빠.”
“잘했어요.”
한 차례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은 난, 그녀를 침상에 눕히고 입술로 몸 곳곳을 쪼아대기 시작했다.
이마와 코, 뺨, 입술에서 시작된 열정적인 입맞춤은 이윽고 우리의 사랑이 결실이 담긴 배까지 이어졌다.
“이 안에 우리 아기가 있어요.”
“네…. 가휘와 저의….”
“회임하면 평소 싫어하던 음식들도 먹고 싶어진다던데, 혹시 뭐 먹고 싶은 거 없어요? 뭐든지 말해요.”
배에서 입술을 떼며 묻자, 그녀의 대답은.
“가휘요.”
“…네?”
내가 지금 뭘 들은 거지?
순간 벙쪄서 그녀를 올려다보니 새빨갛게 물든 옆모습이 날 맞이한다.
“지금 뭐라고 했어요?”
“몰라요.”
“뭐라고 했냐니까요?”
“몰라요오.”
그녀의 입에서 이런 애교스러운 목소리를 듣게 될 날이 올 것이라 상상이나 해봤을까.
어쩐지 얼굴이 뜨거워지는 기분이다.
“려군이 먹고 싶은 그거, 오늘 배 터지게 먹게 해줄게요.”
“아!”
머리 위로 울려퍼지는 행복한 비명 속에, 난 아까부터 코끝을 간질이는 복숭아 향기를 쫓아 고개를 파묻었다.
***
다음 날은 약빈이 차례였다.
그것도 우희와 함께.
“참고로 내일도 우리.”
“시간을 효율적으로 쓰시겠다?”
“왜? 싫어?”
“오히려 좋아.”
“요즘 입이 아주 귀에 걸리셨어. 응?”
뺨을 꼬집는 약빈이에 이어 우희가 내 옷을 벗기며 속삭였다.
싸늘함과 질투의 열기가 공존하는 목소리로.
“둘한테 다 들었어요. 가가한테 어떤 짓을 당했는지.”
“너희 그런 것도 다 얘기해?”
“정말 다했는지는 저도 모르죠. 그래서 지금부터 대질심문해보려고.”
침상으로 날 밀어 넘어뜨린 두 사람이 요염한 얼굴로 내 위에 올라탔다.
감금기간 동안 서로 볼 꼴 못 볼 꼴을 다 봐서 그런지 몸놀림에 아주 거침이 없다.
“교관님…. 려군 언니랑은 어떻게 했어요?”
“뭘 그런 걸 물어봐.”
“궁금하잖아. 솔직히 말하지?”
“그렇게 궁금하면 다음에 한 번….”
“한 번, 뭐.”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다고 했던가.
난 분위기가 싸해질 것을 예상하면서도 뒷말을 던지지 않을 수 없었다.
“다음에 한 번 같이 들어와 보든가.”
아니나 다를까, 내 말을 둘의 눈빛이 단번에 샐쭉해졌다.
“내가 이 새끼 이럴 거라고 했지?”
“어디서 개수작이에요.”
“내가 억지로 하랬나? 너희가 그렇게 궁금하면 말리진 않겠다고.”
생각보다 저항이 거세군.
그러나 난 한 발 물러나면서도 일말의 여지를 남기는 것을 잊지 않았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잖아.”
“됐네요.”
매몰찬 거절이었으나, 난 놓치지 않았다.
그녀들의 두 눈에 숨길 수 없는 호기심이 피어나는 것을.
그리고 그로부터 나흘이 흘러 다시 둘의 차례가 돌아왔을 때, 난 꿈이 현실로 이루어지는 장면을 직접 목도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