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tial Streamer RAW novel - Chapter 192
잠깐의 일상 (2)
역사가 이루어진 다음 날 아침.
곤히 잠든 네 여인을 뒤로 하고 별채를 나서는 날 불러 세우는 목소리가 있었으니.
“도련님.”
“어?”
“간밤엔 즐거우셨어요?”
씩 웃으며 엄지를 치켜 보이는 여인의 모습에 난 형언할 수 없는 난감함을 느꼈다.
내 생환을 아는 유일한 시녀, 항아.
그리하여 어쩔 수 없이 내가 머무는 별채의 관리와 시중을 맡기긴 하였으나, 친누나처럼 여기는 이에게 여친과의 정사 후 현장을 보이는 찝찝함이란!
정작 그녀는 나 하나만 신경 쓰면 되니 오히려 일이 줄었다고 싱글벙글이었지만….
“우리 도련님이 어려서부터 한 미모 하시긴 했죠. 어찌나 귀엽고 방실방실 잘 웃으시는지 제 손 붙잡고 밖에 나가면 지나가던 사람들이 다 걸음을 멈추고 어느 가문 공자시냐고 묻곤 했는데.”
“…그래서 웬 아줌마가 내 이름 안 물어봤을 땐 장원으로 돌아와서 흉까지 봤다며. 한 스무 번은 들었겠다.”
“스무 번밖에 안 됐어요? 더 부지런히 해야겠네. 어쨌든 우리 도련님이 크시면 여자 여럿 울릴 줄은 진즉에 알았죠, 제가. 고추도 얼마나 실하시고.”
“아닛….”
얘는 왜 이렇게 격의가 없어.
불편하다, 불편해.
“민망하게 왜 그래.”
“업어 키운 도련님이 이렇게 장성하신 걸 보니 대견해서 그러죠.”
“아휴….”
“어? 도망간다.”
한숨을 내쉬며 자리를 피해 봤지만 그녀는 끝까지 따라붙으며 쫑알쫑알 입을 놀려댔다.
그래도 뭐 어쩌겠는가, 안 그래도 내 생존을 함구하느라 입이 근질근질 하다는데 이런 식으로라도 스트레스를 풀게 해줘야지.
“밖에서만 조심해. 말 안 새어나가게.”
“히힛, 시녀한테 이렇게 관대하신 건 우리 도련님밖에 없을 거예요.”
“알긴 알아? 어떻게 애 낳고선 더 수다스러워 진 거 같아.”
아무래도 민망한 아침은 당분간 계속될 것 같다.
누가 들으면 행동거지를 주의하면 그만이 아니냐 하겠지만, 그러기엔 연인들과의 잠자리가 너무나도 황홀했다.
단 하루도 건너뛰기 싫을 만큼.
또한 그것은 나 혼자만의 감정이 아니었다.
늦게 배운 도둑질이 무섭다더니.
뒤늦게 남녀 간 사랑을 나누는 기쁨을 맛본 여인들은 경쟁이라도 하듯 내 처소를 드나들며 날 유혹했다.
심지어 옥유경을 익히느라 다소 잠자리에 제약이 있는 사강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난 그녀들 개개인과, 때론 여럿과 사랑을 나누며 행복한 나날을 보냈다.
어쩌면 그것은 혈마의 비동에서 우리가 한 차례 이별을 겪었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흔히들 말하는 종족번식의 본능은 죽음의 위기 속에서 최고조가 된다고 하니까.
심지어 그러한 위기를 조장한 이들이 아직도 버젓이 강호에서 활동 중이니, 다들 겉으로 표현은 안 해도 적잖은 불안감을 안고 있을 터.
언제 깨어질지 모르는 평화를 조금이라도 만끽하고 싶은 것이리라.
하지만 어떤 핑계를 대도 근래 우리가 지나치게 문란한 생활을 보내고 있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매일처럼 나에 대한 성토가 벌어지는 채팅창의 민심이 바로 그 증거.
[크래카라 : 형 하루에 12시간 넘게 하늘만 비추는 거 실화야? 방송 날로 먹네] [아스파사 : 깐휘는 전설이다] [Nishikian : 보여 달라는 건 안 보여주고 왜 아무도 보고 싶지 않았던 형 것만 두 번이나 봐야 돼?] [미푸새 : ㅈ/ㅗ/ㄱ/ㅏ/ㅎ/ㅜ/ㅣ 엔딩은 어디 갔냐고] [로잴린 : 개새끼 좀 굴렀으면 좋겠네] [비굴링 : 이게 인싸의 삶…?] [yhs21cm : 우희 좀 애껴줘라] [빅그림 : 무림공적 지정이 시급하다]보인다, 보여.
늘어나는 싫어요 개수와 함께 마기가 떡상하는 모습이!
오죽했으면 같은 코끼리 방중술을 연마한 수진이에게마저 한 소리를 들었을까.
“오빠, 요즘 많이 즐거운가 봐?”
“솔직히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야.”
“지금은 좋지? 나중에 애 낳아봐라. 전쟁이다. 사극 봐봐. 왕 자식들끼리 맨날 죽이네, 살리네 하잖아.”
“아주 망하라고 고사를 지내네. 우린 안 그래. 어제도 다 같이 얼마나 화목했는데.”
“안 그러긴… 자, 여기.”
“땡큐.”
두리번두리번.
인근에 사람이 없다는 것을 누차 확인했음에도 주위를 살핀다.
이윽고 그녀가 내민 물건을 얼른 품에 챙기는 내 모습은 장물아비마냥 잽싸고 은밀했다.
[0.01]“크흠.”
잠시 물건을 확인하는 사이에도 수진이의 핀잔은 이어졌다.
“그 많던 걸 벌써 다 쓰냐. 하긴 워낙 사람 수가 많아야지. 나 떠나고 나면 아주 단체로 애 갖게 생겼어.”
“돌아가면 하오문으로 택배 보내주면 안 돼?”
“얼씨구?”
“넉넉하게 부탁드려요, 누나.”
그렇게 오늘도 조가장 한구석에선 나와 수진이 사이의 은밀한 거래가 한창이었다.
그러나 내 요구는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아, 그리고….”
“또, 뭐.”
“레깅스….”
“하!”
팔짱을 끼고 있던 그녀가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레깅스는 못 참지. 또 뭐 있는데. 다 말해봐.”
“어? 더 말해도 돼? 그럼 신도시 미시룩이랑 이거랑, 이거랑, 이거랑….”
“이 새끼, 요거요거. 완전 변태였네?”
“아버지가 탐내실 수도 있으니까 한 벌씩만 더 챙겨주라.”
“조가장 웃겨.”
내 대답이 길게 이어질수록 그녀의 얼굴에 자리 잡은 썩소 또한 점차 짙어졌다.
그러나 그것이 거부를 의미하는 것은 결코 아니었다.
“콜. 대신 애들 입고 찍은 사진 나 보여주면.”
“…그냥 코스프레 사진 얘기하는 거지? 이상한 거 말고.”
“당연하지. 내가 지처럼 변태인 줄 알아.”
“당사자들한테 한 번 물어보고.”
“그것도 당연하지. 아- 기대된다-.”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수진이의 눈빛은 나 못지않게 기대로 반짝였다.
겉으로만 투덜대지, 실상 그녀는 누구보다 내 채널과 출연자들을 사랑하는 찐팬 중 하나.
하긴, 그랬으니 실제로는 처음 본 우리 조가장 식구들에게 그리 퍼주지 못해 안달이겠지.
완력과 화력으로 작동시키는 조그마한 발전기에 소형 냉장고, 촬영과 녹음이 가능한 태블릿, 내 채널의 지난 영상을 비롯해 가족들과 볼 법한 잡다한 영상이 담긴 대용량 usb, 빔 프로젝터 등등.
암튼 수진이가 선물한 현대의 물건들 덕분에 요즘 우리 가족들은 별천지에 떨어진 기분을 만끽하는 중이었다.
“그리고 이게 진짠데.”
“또 있어? 오빠, 나 요즘 너무 부려먹는다?”
귀여운 투정과 함께 내가 내민 쪽지를 슬쩍 훑어본 그녀의 입가에는, 이윽고 조금 전과는 다른 의미의 미소가 피어났다.
“이런 건 도와줘야지.”
“부탁할게.”
“응. 맡겨. 근데 언제 할 생각이야?”
“좀 더 나중에. 암중세력도 해결되고 나면…. 아직은 현실적으로 좀 무리인 것 같아서.”
“그래. 그 때 돼서 필요한 거 있으면 또 얘기해. 내가 여기 다시 오는 한이 있어도 꼭 도와줄 테니까. 맨날 야시꾸리한 것만 부탁하지 말고.”
내 옆구리를 쿡 찌른 그녀는 다시금 흐뭇한 미소를 머금으며 리스트를 바라봤다.
“프러포즈라….”
***
“가시겠다구요?”
“본단을 너무 오래 비워뒀네. 그만 가봐야지.”
교주 일가는 조가장에 정확히 열흘을 머물렀다.
마음 같아서는 절대고수인 그가 조금 더 머물러주길 바랐으나, 이 이상 붙잡아두는 건 몰염치한 일임을 스스로도 모르지 않았다.
“호북 외곽에 주둔 중인 교도들과도 이미 연락을 마쳤네.”
“…아쉽네요.”
“그러게 말일세. 저 아이도 그새 정이 많이 든 듯한데.”
교주의 시선 끝에는 주아가 있었다.
소희와 함께 마당에 쪼그려 앉아 어느덧 4살이 된 율이를 돌보는 그녀에게선 제법 누나 태가 났다.
“좋은 곳이야. 하인들의 표정을 보면 집주인의 성품을 알 수 있는 법이지.”
“그리 말해주시니 영광입니다.”
내 말에 말없이 웃은 그가 문득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말했듯이 천화대원들은 연락책이라는 명목으로 남겨두고 가겠네. 본디 중원태생인 이들이 대부분이니 잘 녹아들 수 있을 걸세. 후에 시국이 진정되거든 자네가 책임지고 돌보아주게.”
“부탁을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닐세. 전대 교주의 폭거에 희생당한 아픔을 지닌 이들이네. 자네가 없는 본단은 그녀들에게 안식처가 될 수 없을 테지. 다만 중원에서 배신자로 낙인찍힌 심 대주가 걱정이나 워낙 뜻이 확고하니.”
그렇게 심서우를 포함한 천화대 여인들의 거취 또한 정해졌다.
비록 보안 문제로 아직 내 생존을 알리진 못했지만, 후에 상황이 안정되거든 모든 사실을 밝히고 지원을 아끼지 않을 생각이다.
자신들만의 문파를 만들든, 각자 강호를 떠나 새 삶을 시작하는 것이든 그녀들이 원하는 대로.
비동에서 내 대신 백나은에게 공격당한 홍사강이 사경을 헤맬 때, 다음으로 가장 먼저 달려와 날 감싼 것이 그녀들임을 난 잊지 않았다.
“무슨 얘기들을 그리해요?”
“오셨소, 부인.”
“왔어? 내일 떠난다는 얘기 듣고 있었어.”
어느새 다가온 수진이가 교주 곁에 섰다.
이제는 한 쌍의 원앙처럼 잘 어울리는 두 부부를 향해 난 정중히 포권했다.
“두 분 모두 이번에 큰 은혜를 입었습니다.”
“나도?”
“살림살이 놓아주느라 고생했어.”
“그래, 나 이제 거지라 당분간은 긴축재정이야.”
내 시선이 너스레를 떠는 수진이를 지나 교주에게 향했다.
“형님께서도 아시다시피 저와 성녀는 먼 거리에서도 연락이 가능합니다. 혹여 저번에 절 도우신 일로 본교에서의 입지가 약화될 위기에 처하면 주저 말고 불러주세요. 만사 제쳐놓고 달려가겠습니다.”
“함께 금양을 몰아낸 것만으로 우리 부부는 자네에게 씻을 수 없는 은혜를 입었네. 아우야말로 암중세력에 대해 뭔가 알아내거든 성녀를 통해 연락 주시게.”
“또 그러신다. 형님이 아니라 주아와 성녀를 위해서라도 꼭 연락주세요.”
끝나지 않는 입씨름이 답답했던 걸까, 결국 수진이가 앞으로 나섰다.
“그 정도로 위험하면 남편이 말려도 내가 부를 테니까 걱정 마.”
“그래.”
이튿날 교주 일가가 조가장을 떠났다.
울고 불며 매달리는 주아를 떼어놓는 것이 얼마나 힘들던지.
단 열흘이었지만 그녀와 친자매처럼 친하게 지내던 소희의 표정도 그리 좋지는 않았다.
“울어?”
“…응.”
“강호가 안정되면 우리가 만나러 가자.”
“응, 오라버니….”
간만에 서로의 손을 꼭 잡은 우리 남매는 멀어지는 그들의 뒷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봤다.
그리고 다시 며칠이 지나 엄청난 소식이 강호를, 아니 중원 전체를 강타했다.
“…황제께서 승하하셨다니. 그 말이 사실인가?”
“그렇습니다, 장주님.”
“으음, 이리 갑자기…. 피바람이 불겠구나. 그래서 현재 황실의 싸움은 누구에게 유리하게 진행되고 있지? 예상대로 일 황자이신가?”
“그것이 이미….”
이어진 사내의 한 마디에 이야기를 듣던 아버지의 눈이 파르르 떨렸다.
그것은 갑작스레 들이닥친 정보원을 피해 서재에 은신해 있던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진시황의 현신이라고까지 불리며 긴 세월을 옥좌에 군림하던 영유제가 마침내 세상을 떠나니, 올해 그의 나이 103세.
그리고 그가 수십 년에 걸쳐 남긴 수많은 자식들 중 하나가 새로운 시대의 황제로 등극하였으니.
그의 이름은 나도 잘 아는 자였다.
“삼십이 황자 주강은, 그가 새로운 황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