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tial Streamer RAW novel - Chapter 197
불안의 끝에서 (1)
-혹시 급한 상황에 내가 방해한 거야?
-아니야, 사부님보다 중요한 게 어디 있다고.
존명이에 대한 미련을 가까스로 털어낸 난, 약빈이를 쫓아 분주히 밤하늘을 달리기 시작했다.
-다시 얘기해봐. 사부님을 본 사람이 있다고?
-응. 여기서 북쪽으로 하루거리에 화전민 마을이 있어. 거기 사는 약초꾼 노인이 할아버지를 봤대.
-그 사람이 본 게 사부님이 확실해?
그녀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손가락 몇 개가 없었다고 했어. 그리고 흡성대법도 본 것 같아.
-그걸 왜 품에 안 두시고…?
-자세한 건 가는 동안 설명할게. 그보다 할아버지를 쫓던 자가 있어. 흰 가면을 쓴.
“신비인!”
난 놀라서 부르짖었다.
그 자가 대체 어떻게 사부님의 뒤를….
설마 조가장을 계속 감시하고 있던 걸까?
-그게 언젠데!
-열흘 전쯤이야.
“하….”
난 그제야 약빈이가 수색을 멈추고 복귀한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목격자의 말이 사실이라면, 혹여 스승님을 발견하더라도 약빈이 혼자서 구해내는 것은 역부족일 테니.
상황파악을 마친 난 약빈이를 제자리에 멈춰 세웠다.
-빈아, 잠깐만.
“어?”
“나한테 길을 알려줘.”
뒤를 돌아보는 그녀를 그대로 안아 들며 난 다시 바닥을 박찼다.
다음 순간, 단전에서 흘러나온 미증유의 거력이 사지백해로 뻗어 나가며 우리의 몸은 한줄기 유성이 되어 하늘을 가로질렀다.
***
살면서 이렇게 빨리 달려본 적이 또 있을까.
연영신법을 극성으로 전개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건곤대나이까지 아낌없이 펼친 결과, 우린 대략 반 시진 만에 목격자가 거주하는 화전민 마을에 도착할 수 있었다.
“말도 안 돼. 벌써.”
“하아, 하….”
주위를 둘러보는 약빈이의 표정은 경악 그 자체였다.
못해도 천 리 길은 되는 거리를 그 짧은 사이에 주파했으니 놀랄 만도 하지.
하지만 지금은 칭찬 따위를 주고받을 때가 아니었다.
“그 사람부터 찾자.”
“응. 이쪽이야.”
칠흑 같이 새카만 밤.
허나 어둠에 잠긴 마을을 안내하는 약빈이의 발길에 망설임 따위는 없었다.
단잠을 방해받은 상대방 입장에선 불행한 일이겠지만.
“어르신. 잠시 일어나보세요, 어르신.”
“어… 엇! 누구야!”
“어르신, 저 기억나세요? 낮에 뵀잖아요.”
“누구? 어두워서.”
“…이제 보이세요?”
약빈이가 화섭자에 불에 붙이자 그제야 노인이 눈을 껌뻑이며 아는 체를 했다.
“아, 아… 그 아가씨. 헌데 이 시간엔 왜.”
“할아버지-. 누구야…?”
소란에 깬 듯 노인 곁에 누워 있던 조그만 소년이 눈을 비비며 일어났다.
순간 노인의 두 눈에 두려움이 샘솟았다.
“낮에 준 돈이라면 고스란히 가지고 있으니 손주는….”
“급한 마음에 결례를 저질렀습니다. 결코 악한 마음으로 접근한 것이 아니니 안심하세요.”
“사례는 충분히 드릴게요. 낮에 해주신 얘기를 한 번만 더 들려주실 수 있을까요?
“잠시만 기다리게….”
우리의 간절함이 전해진 걸까, 아니면 낯선 침입자에 대한 두려움 때문일까.
머리맡의 물바가지로 목을 축인 그는 주름진 눈가를 껌뻑이며 기억을 더듬기 시작했다.
“한… 열흘 전이었나? 보다시피 내가 자식 내외도 잃고 홀로 어린 손자를 키우면서, 입에 풀칠이라도 하려면 이 늙은 몸으로 산을 오르지 않을 수 없네. 그래도 소싯적에 약초를 캐던 경험이 있어서….”
서론이 제법 길었지만 이야기를 끊지는 않았다.
혹여 약빈이가 못 듣고 지나친 단서가 있을지 모르니.
그녀도 같은 생각을 했으니 날 이곳으로 안내한 것일 테고.
“헌데 요즘 날이 제법 쌀쌀해서 산에 뭐 남은 게 있어야지. 허탕을 치고, 또 치다가 꽤 먼 곳까지 나갔어. 헌데 갑자기 천지가 진동을 하며 굉음이 울려 퍼지는 게 아니겠는가! 난 호랑이라도 나타난 줄 알았어.”
“거기서 뭘 보셨나요.”
“사람… 사람이었어.”
노인이 격앙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두 사람이었네. 한 사람은 평범하게 생겼는데 여기 옆구리에 이만한 구멍이 뻥 뚫려 있었고.”
“구멍이요?”
“피가 철철 나더란 말이지.”
“후….”
한숨으로 초조함을 다스리는 사이, 노인의 말이 이어졌다.
“그리고 그 뒤를 쫓는 다른 하나는 얼굴에 뭘 뒤집어썼는지 허여멀건 해서는 눈도 코도 잘 안 보여. 아까 호랑이라고 했지? 아니야. 어찌 미물의 손짓 한 번에 바위가 부서지고 땅거죽이 뒤집히겠나. 하늘의 신장이 아니고서야.”
“그래서 어떻게 됐나요?”
“헌데 치고 박고 싸우던 두 사람이 갑자기 내가 있는 쪽을 바라보는 게 아니겠나. 난 숨어 있던 것도 잊고 비명을 지르려 했네.”
당시 상황을 떠올린 그가 진저리를 치며 눈을 질끈 감았다.
“배에 상처를 입은 자가 내게 달려왔네. 그 자가 내 어깨를 딱 짚으니까 몸이 뻣뻣하게 굳고 말도 안 나와. 난 귀신에 홀린 줄 알고 눈을 꽉 감고 있었는데, 그자가 그러더군. 자기 뒤를 쫓는 놈이 아주 나쁜 놈이라 상관없는 사람까지 해하려 들 테니 조금만 이대로 참으라고.”
과연 사부님이다.
자신도 위기에 처한 상황에서 양민의 안위부터 걱정하시다니.
“그래서 다음은요, 어떻게 거길 빠져나오셨죠?”
“들어봐. 그래서 그 자가 날 들쳐업고 달리는데, 가면을 쓴 놈이 뒤에서 따라오더란 말이야. 그 자가 칼을 한 번 휘두르면 나무가 쓰러지고, 땅이 갈라졌네. 바로 그 때 날 업은 양반이 품에서 서책 하나를 꺼내 들었네. 그러자 흉신악살처럼 달려들던 놈이 걸음을 딱 멈추더란 말이야.”
흡성대법.
흡성대법이 분명했다.
“이자가 그걸 절벽으로 힘껏 던지니까 그놈이 기절초풍해서 절벽으로 몸을 날리더란 말이지. 대체 그 서책이 무엇이기에.”
“어르신을 업고 계시던 분은 어떻게 되셨나요?”
“나한테 사는 곳을 물어보더니 근처까지 업어다 주고 저-기, 밖에 보면 높은 봉우리가 있는데 그 너머로 갔네. 많이 다친 것 같았는데 무사해야 될 텐데.”
“혹시 이 이야기를 다른 사람에게도 하셨나요?”
그가 고개를 저었다.
“자네들이 처음일세. 다른 사람들이 믿어주기야 하겠는가. 늙은이가 노망났다고 손가락질이나 안 하면 다행이지.”
“헌데 저희에겐 어째서.”
“사실은 입 다물고 있으려 했는데, 이런 외진 곳까지 와서 수소문하는 저 아가씨의 표정이 오죽 간절했어야지. 그게 안타까워서, 그래서 말했네. 보아하니 나쁜 사람도 아닌 듯해서.”
“감사합니다. 정말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이건 말씀드렸던 사례입니다.”
약속대로 전낭에서 은자와 철전 몇 개를 꺼내 건네자 그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뭘 이런 걸….”
“혹여 다른 이가 찾아와서 같은 걸 묻더라도 절대 답하시면 안 됩니다. 그 가면 쓴 놈이랑 한 패일 경우, 자칫 잘못하면 손자 분의 목숨까지 위험할 수 있어요.”
“알겠네. 내 이 일은 무덤까지 가져감세.”
“한 가지만 더 여쭙겠습니다. 혹시 그 날 이후로 이 부근에 비가 온 적이 있나요?”
“없었네.”
질문을 마치고 모옥을 나서는 우리의 얼굴엔 초조함이 가득했다.
흡성대법을 손에 넣은 신비인이 조용히 물러갔다면 다행이지만 그렇지 않다면….
“학관에서 내가 시간만 지체하지 않았어도 이런 일은.”
“열흘 전이면 우리가 막 장원을 떠났을 때잖아. 지금이라도 빨리 찾아보자.”
“…그래. 다행히 비는 안 왔다니까 흔적이 지워지진 않았을 거야.”
우린 노인이 알려준 방향을 향해 서둘러 경공을 펼쳤다.
부디 스승님께서 무사하시길.
기원을 담은 카메라가 하늘 높이 솟구쳤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람쥐 자매도 수색에 동원됐다.
“둘 다 사부님 냄새 알지?”
“쯋!”
임무를 받은 두 마리 다람쥐가 코와 귀를 쫑긋거리며 산천초목을 누비기 시작했다.
영리한 녀석들이니 무엇이든 발견하면 곧장 달려와 알려주리라.
“우리도 가자.”
“응.”
불길함에 옥죄는 심장을 억누른 채 우린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
“잠깐 쉬었다 가자.”
“…응.”
수색 사흘째.
가파른 산등성이와 녹음이 우거진 숲을 몇 번이나 통과했을까.
모처럼 발견한 계곡물을 향해 다가가는 우리의 얼굴은 피로로 가득했다.
육체적 피로는 물론 아니었다.
함정이 가득한 혈마의 비동에서도 열흘 넘도록 쌩쌩함을 유지했던 우리가 겨우 이 정도로 지칠 리 없으니.
그러나 수색이 길어짐에 따라 켜져 가는 조바심과 언제 신비인과 조우할지 모른다는 압박감은, 우리의 정신력을 빠르게 소모시켰다.
오죽했으면 피륙에 상처가 난 것도 몰랐을까.
“빈아, 여기 얼굴 긁혔어.”
“아… 몰랐네.”
“이리 와봐.”
품에서 꺼낸 금창약을 그녀에게 발라주며 난 주변 지형을 둘러보았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어디에서도 전투의 흔적은 없었어. 이 정도면 무사히 빠져나가신 걸지도 몰라.”
“그렇…겠지?”
“응. 분명 어딘가에서 상처를 치료하시느라 연락을 못 하신 걸 거야. 어쩌면 우리가 여길 뒤지는 동안 연락을 남기셨을지도 모르지.”
그것은 약빈이를 향한 위로인 동시에, 스스로에게 속삭이는 희망의 암시였다.
그게 아니더라도 한 번은 돌아가야 했다.
하남에 도착한 이후 한 번도 제대로 쉬지 못한 약빈이는 슬슬 체력적으로도 한계이니.
그렇게 복귀를 결론 내리던 그 때,
“쯋?”
“쯋쯋.”
코를 쫑긋거린 두 마리 다람쥐가 어디론가 달려가기 시작했다.
“가보자.”
벽려군을 찾을 때도 비슷한 일이 있었음을 떠올린 난, 피곤함도 잊고 두 다람쥐를 쫓아 몸을 날렸다.
다람쥐들은 오 리 가량 떨어진 장소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니, 그보단 놀라서 주저앉아 있다는 표현이 어울렸다.
무언가 충격적인 광경이라도 본 것처럼.
“쯋.”
“쯋쯋.”
구슬프게 우는 두 마리 다람쥐 사이로 언뜻 엿보이는 검푸른 실루엣을 발견한 순간, 내 심장도 덜컥 내려앉았다.
“휘 랑….”
자기도 모르게 내 옷소매를 꼭 쥐는 약빈이의 어깨를 감싼 채, 난 다람쥐들을 향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머잖아 볼 수 있었다.
피웅덩이에 널브러진 또 다른 다람쥐의 사체를.
비록 얼굴은 보이지 않지만 몸을 뒤덮은 검푸른 털은 시송서의 증거나 마찬가지였다.
“보지 마.”
때늦은 만류임을 알면서도 난 약빈이의 눈을 가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녀의 떨리는 동공은 이미 참상의 현장을 지나, 다람쥐의 사체로부터 이어지는 긴 핏자국을 응시하고 있었다.
“아….”
“빈아, 잠깐만. 있어봐, 잠깐만…!”
불안이라는 감정은 어쩌면 호기심의 일종일지도 모르겠다.
번져가는 불안 속에서도 홀린 듯 핏자국을 따라가게 되는 것을 보면.
한 걸음.
다시 한 걸음.
핏자국의 근원에 가까워질수록 선명해지는 부패의 악취를 애써 외면하며.
차마 고개를 들 용기도 없어 오직 땅바닥만을 바라보며 천천히, 아주 천천히.
그러다 익숙한 신발 한 켤레가 시야를 침범한 순간, 미몽은 갑작스레 끝을 고했다.
“…….”
햇살이 내리쬐는 나무 등걸 아래.
평화로이 잠든 노인의 시신에서 우린 오래도록 눈을 떼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