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tial Streamer RAW novel - Chapter 199
불안의 끝에서 (3)
“미안.”
“뭐가?”
“나 잠깐… 혼자 생각할 시간이 필요해.”
서신을 모두 읽은 약빈이의 말이었다.
대체 어떤 내용이 적혀 있기에.
궁금하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카메라로 훔쳐보는 짓 따위는 하지 않았다.
내가 알아도 될 일이면 알려주겠지.
그나저나 예정이 어긋났다.
오늘 하루는 상심한 그녀를 위로할 생각이었는데.
비밀공간을 나온 뒤에도 여전히 넋이 나간 그녀를 보니, 당분간 흉수에 대한 조사는 홀로 진행해야 할 듯 싶다.
“난 잠시 나갔다 올게. 저녁 전까지는 돌아올 거야.”
“…….”
멍하니 고개를 끄덕이는 그녀를 뒤로 하고 윤가장을 나선다.
그 사이 뾰족한 수가 떠오른 것은 아니었다.
가면의 신비인은 정·사 양측의 정보조직들이 몇 달 간 눈에 불을 켜고 찾았음에도 아무런 단서도 잡지 못했을 만큼 신출귀몰한 자이니.
그러니 지금부터 내가 할 일은 화풀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양진철.”
녀석이 신비인의 정보를 갖고 있으리란 보장은 어디에도 없었다.
아니, 오히려 암중세력과 신비인은 아무런 연관이 없을 확률이 높았다.
혈마의 비동과 흡성대법이란 달콤한 사탕으로 중원인들을 꿰어낸 것은 다름 아닌 암중세력.
만일 신비인이 그들과 한편이었다면 굳이 흡성대법을 탐할 이유도 없었겠지.
그러나 이쪽은 스승을 잃었다.
더 이상 수단·방법을 가릴 여유 따윈 남아 있지 않다.
그러고 싶지도 않았고.
수상한 자들을 닥치는 대로 들쑤시다 보면 어디선가는 흔적이 발견되겠지.
그 시작이 바로 존명이 놈이다.
그러나 열흘만에 학관에 돌아온 날 기다리던 소식은….
“실종…? 그것이 사실이오?”
“그렇소. 대협께서 사라지신 날 양철진 수련생과 금라희 교관 또한 모습을 감췄소. 워낙 시기가 공교롭다 보니 일각에선 세 분을 연관 지어 생각하는 사람도…. 아니, 어디 가시오! 대협!”
***
쾅-!
천무학관 교관동, ‘주원’이란 명패가 걸린 방문이 거칠게 요동쳤다.
허나 죄 없는 문에 화풀이를 한 뒤에도 기분은 나아지지 않았다.
존명, 금라희.
그 두 사람은 대체 어디로 간 걸까.
그들이 머물던 숙소를 샅샅이 뒤져봐도 답은 나오지 않았다.
하필 스승님의 시신이 발견된 시기에 놈이 학관을 떠났다.
이게 과연 우연일까?
“아니야…. 억지지, 이건.”
그보다는 녀석이 전날 받은 편지를 의심하는 쪽이 합리적이리라.
하지만 조바심이 드는 것까진 어쩔 수 없었다.
일이 자꾸만 어긋나는 기분이다.
“후….”
잠깐 앉는 게 좋겠어.
심호흡을 하며 의자로 향하던 그 때, 무언가가 내 눈을 사로잡았다.
“이건….”
책상 한 켠.
마치 어린아이가 칼로 새긴 듯 삐뚤빼뚤한 낙서는, 내가 마지막으로 숙소에 들렀을 때만 해도 분명 없던 것이었다.
물론 정파 무림의 심장에 어린아이가 함부로 드나들 리는 없으니, 문양의 정체는 아마….
“암문?”
생각과 동시에 머리가 차갑게 식었다.
내가 보름 가량 자리를 비운 사이, 누군가 내 방에 침입해 책상에 암문을 남겼다.
그럴 사람이 누가 있지?
대체 뭐라고 적은 거지?
그러나 문양을 아무리 노려봐도 답은 나오지 않았다.
우희라면 어쩌면….
전서구로 연락을 보내봐야 하나?
“머리만 더 아프네.”
책상 위의 문양을 카메라에 남김없이 담은 난, 등을 뒤로 젖히며 피로에 젖은 한숨을 토해냈다.
그나저나 이제부턴 어떡하지?
유일한 단서라고 할 수 있던 존명이마저 사라졌으니, 이 넓은 중원 땅에서 신비인을 대체 어찌 찾는단 말인가.
놈이 직접 찾아온다면 또 몰라도….
“잠깐.”
순간 머릿속에 무언가가 번뜩했다.
‘너무 걱정 마. 혹시 몰라서 우리도 흡성대법에 몇 가지 조치를 취해뒀으니까.’
‘조치?’
‘몇 장은 찢어서 태우고, 몇 군데는 한글로 낙서도 하고.’
비동에서 생환한 뒤 흡성대법의 행방을 묻는 내게 약빈이가 준 답변이었다.
사부님이 돌아가신 충격에 그만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렇다면 불완전한 비급을 손에 넣은 신비인은 지금쯤….
“속이 새까맣게 타들어가겠지.”
이걸 역으로 이용할 수만 있다면….
“주원 대협 계시오?”
“…들어오시오.”
밖에서 들려온 외침에 생각을 멈춘다.
뒤이어 무림맹 무사 복장의 사내 하나가 문을 열고 들어와 포권했다.
“맹주부 소속 오양목이오. 주 대협의 복귀 소식을 들으신 맹주께서 소식을 궁금해 하십니다.”
“아… 그렇군.”
말도 없이 열흘이나 무단 결근을 했으니, 내게 교관 자리를 알선하신 맹주님 체면이 말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렇잖아도 신비인 수색에 대한 도움도 요청드리려 하던 참이고.
“사부님께선 지금 집무실에 계시오?”
“그렇소.”
“지금 갑시….”
막 오양목을 따라나서려던 그 때,
“혹시 주원 교관님 계신가요?”
새로운 목소리의 주인을 확인한 내 눈이 휘둥그레졌다.
“단 소저? 팽 소저까지…. 여긴 어쩐 일로….”
“안녕하세요, 교관님. 헌데 이분은….”
“오 대협. 공교롭게 날 찾는 손님이 또 계셨구려. 죄송하지만 사부님께는 평소 뵙는 시간에 따로 찾아뵙겠다고 전해주시겠소?”
“그리하겠소.”
오양목의 모습이 계단 밑으로 사라지자 난 두 여인을 처소로 들였다.
“두 분이 어쩐 일이시오.”
“그게….”
함께 온 게 아니었나?
어색한 눈빛으로 서로를 곁눈질하는 그녀들을 보며 난 작은 의문을 느꼈다.
다음 순간, 그러한 의심은 확신이 되었다.
-교관님께 전해드릴 것이 있어요.
-부탁 받은 것이 있어서….
동시에 입술을 달싹이던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설마 단 소저도?”
“…그런가 보네요.”
대체 이게 무슨 일인지.
이윽고 자기들끼리 전음을 나누기 시작한 그녀들의 모습에, 난 영문을 알 수 없어 눈만 깜빡였다.
잠시 뒤 마침내 이야기를 마친 두 사람이 내게 각기 서신 한 장씩을 내밀었다.
“오늘은 이걸 전해드리러 왔어요.”
“이게 무엇이오?”
“저희도 몰라요. 그저 전해드리라고만 들었어요.”
“대체 누가….”
“…죄송합니다. 익명으로 전달하길 부탁받아서.”
무엇 하나 시원하지 않은 대답에 난 미간을 찌푸렸다.
허나 그것도 그녀들이 준 서신을 펼치기 전까지였다.
“이건…!”
난 서신을 움켜쥔 채 다급히 책상으로 향했다.
그리곤 종이 한 장을 펼쳐, 책상의 문양들을 필사하기 시작했다.
다만 붓을 따라 완성된 선들은 더 이상 알아볼 수 없는 암문이 아닌, 제대로 된 글자였다.
그렇다.
단예지와 팽소혜가 내게 건넨 서신에는 암문의 해석법이 담겨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책상에 적힌 모든 문양의 해석을 마친 순간,
“…….”
내 손이 종이 위에 우뚝 멈춰 섰다.
경악, 그리고 분노.
내가 해석한 내용이 정말 맞는 것인가.
게다가 이 내용이 사실이라면 신비인의 정체는….
“이걸 누가 줬소.”
가라앉은 목소리로 묻자, 호기심에 주위를 기웃거리던 두 여인이 어깨를 움찔 떨었다.
“그건 말씀드릴 수가….”
“누구 주었냐고 물었소. 지금 당장…! 후….”
실수다.
두 사람에게 무슨 잘못이 있다고.
그렇잖아도 사부님께서 돌아가신 마당에 이런 서신까지 접하니 신경이 잔뜩 곤두서고 말았다.
“미안하오. 두 사람 모두 내 얼굴을 봐주시겠소?”
“……헉!”
“말도 안 돼….”
날 응시하던 두 사람의 눈이 경악에 물들었다.
이윽고 역용이 완전히 해제된 내 모습을 확인한 그녀들의 얼굴은, 귀신이라도 본 듯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당신…?”
“오라…버니, 이게 어떻게?”
“부탁할게. 시간이 없어. 이 서신을 둘에게 준 게 누군지 알려줘.”
날 바라보는 두 쌍의 봉목이 지진이라도 난 듯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윽고 머뭇거리던 그녀들의 입술을 통해 한 사람의 이름이 흘러나왔다.
***
가휘와 약빈이 신투를 찾아 조가장을 나선지도 어느덧 이십여 일, 늦은 시각임에도 제갈우희의 처소는 불빛이 환했다.
“이건 됐고, 다음은….”
문서와 문서를 넘나드는 그녀의 눈에는 피로가 가득했다.
개인수련 외에도 그녀에겐 암중세력의 동태와 신투의 행방 파악, 장원에 설치해둔 기관·진법의 유지·보수 관리 등 해야 할 일이 산더미였으니.
그래도 정인이 곁에 있을 땐 행복한 마음에 피곤한 줄도 몰랐건만.
“하-음.”
“희아, 안에 있니?”
“아! 어머니….”
놀라서 하품을 멈춘 그녀는 헐레벌떡 문밖으로 달려나갔다.
그곳엔 만삭의 벽교은이 시녀들의 부축을 받으며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머님. 날도 추운데 야밤에 여기까지….”
“잠이 안 와서 잠시 산책을 하는 중에 들렀단다. 희아, 너야말로 요즘 너무 무리하는구나. 이제 홀몸도 아니잖니.”
자상한 교은의 시선에 제갈우희는 배를 감싸며 수줍게 미소 지었다.
“그럴게요, 어머니.”
“그래. 나도 이만 자야겠구나. 푹 쉬고 내일 또 보자꾸나.”
“감사합니다, 어머님. 살펴가세요.”
“…많이 힘들지?”
갑작스런 교은의 포옹에 그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허나 직후 이어진 따스한 토닥임에, 그녀는 지난 며칠간의 피로가 눈 녹듯 사라지는 신기한 경험을 할 수 있었다.
“항상 고맙다. 우리 애가 맨날 밖으로 나도는데.”
“나중에 혼내주세요.”
“그러마. 이제 정말 가보마.”
“네, 들어가세요-.”
제법 먼 곳까지 배웅을 마치고 돌아온 그녀는 서둘러 어질러진 책상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아직 못 끝낸 일이 제법 있지만, 교은의 당부처럼 뱃속의 아기를 생각해 오늘은 일찍 잠들 생각이었다.
머잖아 그녀의 방을 마지막으로 조가장에 어둠이 찾아왔다.
그러나 모처럼의 숙면은 시작과 동시에 끝을 맞이하고 말았다.
화륵-.
“읏?”
벌떡 잠에서 깬 제갈우희의 시선이 책상을 향했다.
이윽고 허공으로 피어나는 한 줄기 연기를 발견한 그녀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팔산향로.
그녀가 직접 제작한 주먹 크기의 기물로, 향로에 꽂힌 여덟 개의 향은 각기 조가장에 펼쳐진 여덟 단계의 방벽을 의미했다.
헌데 그 중 하나가 현재 타들어가고 있었다.
좀도둑 따위는 결코 아니었다.
무공도 제대로 모르는 어수룩한 밤손님을 상대하기 위한 비살상 진법은 애초에 향로에 표시되지도 않으니.
향에 불이 붙었단 것은, 이미 상대가 비살상 진법을 통과해 다음 기관에 들어섰음을 의미했다.
“대체 누가….”
그 순간, 바로 다음 향에 불이 붙었다.
벌컥-!
생각과 동시에 제갈우희의 신형이 처소 밖으로 쏘아졌다.
그와 동시에 백의를 걸친 한 여인이 그녀 곁에 살포시 내려앉았다.
“당신도 느꼈나요?”
“언니.”
옥빛 검을 쥔 여인, 중원의 검후를 향해 그녀는 빠르게 내뱉었다.
“벌써 첫 번째 진법이 뚫렸어요. 사람들부터 깨워야 해요.”
“오는 길에 홍 소저에게 부탁했으니 지금 쯤이면 장주님 내외께서도 소식을 들으셨을 거예요. 그보다 문제는….”
그녀의 시선이 벽려군을 따라 담장 너머를 향했다.
직접 진법을 설치한 그녀이기에 알 수 있었다.
지금 진법을 두드리는 자가 결코 한두 사람이 아님을.
‘수백, 아니 어쩌면 수천 이상.’
멀리서도 느껴지는 가공할 기세에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었다. 그 순간,
화륵-!
향로 속 세 번째 향이 거세게 타오르며 잊지 못할 밤의 시작을 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