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tial Streamer RAW novel - Chapter 200
각성 (1)
드르륵-.
흰 모서리 끝이 전장을 가로질렀다.
전각 사이사이를 바람처럼 누비는 궤적은 유려하고 경쾌했으나, 그 안에 담긴 거력은 천재지변이나 다름없었다.
뿌리 깊은 고목도.
무게만 족히 수천 관은 나갈 거대한 석등도.
흰 폭군 앞에선 모두 추풍낙엽처럼 나가떨어졌다.
허나 갑작스런 재해에도 놀라서 달아나거나 비명을 터뜨리는 이는 찾아보기 힘들었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전부 모형에 불과했으니.
툭-.
탁자 위.
조가장을 본 뜬 모형의 중심을 부채로 내리찍은 제갈우희의 두 눈이 깊게 가라앉았다.
이윽고 그녀의 손짓을 따라 현란한 연주가 펼쳐지기 시작했다.
툭, 투툭, 툭-.
춤 추는 부채에 부딪힌 모형들이 이리저리 튕겨 나가며 때아닌 몸살을 앓았다.
겉보기엔 아이들의 소꿉장난과 다름없는 행동, 그러나 그 결과마저 가볍지는 않았다.
같은 시각, 모형과 동화된 조가장에선 현실에서도 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었으니.
“으아아악!”
“사술이다!”
수많은 비명이 밤하늘을 수놓았다.
허나 그녀는 학살을 멈추지 않았다.
적들에 대한 알량한 동정심은 비수가 되어 자신과 사랑하는 이들의 숨통을 조일 테니.
“화살을 쏴라!”
‘화공?’
기감을 뚫고 날아오는 열기를 감지한 순간, 그녀의 부채는 이미 돌풍을 일으키고 있었다.
돌연 휘몰아친 바람에 휘말린 불화살들 기세를 잃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후….”
모형을 다루는 그녀의 손길에 변화가 일어났다.
조가장 곳곳에 배치된 사물들은 그 자체로도 위협적인 함정이었으나, 동시에 진법을 작동시키는 열쇠이기도 했으니.
탁! 탁!
한 수, 한 수에 생문과 사문이 뒤바뀐다.
진법에 갇힌 한밤의 습격자들은 현실과 분간되지 않는 환상에 사로잡혀 서로를 해하고, 추락하고, 익사했다.
그야말로 전지전능이란 말이 어울리는 광경이었으나, 상황은 그리 좋지 않았다.
거대한 전장을 뜻대로 움직이기 위해선 상상이상의 심력과 내력이 필요했다.
더구나 그녀 정도의 연산 능력을 지니지 않은 이는 모형을 다루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기에, 타인에게 잠시 조종을 맡긴다는 선택지도 없었다.
허나 그보다 더 큰 문제는 적들의 수였다.
수하들을 화살받이로밖에 여기지 않는 것인지.
인해전술을 펼치며 꾸역꾸역 밀려드는 습격자들의 시신과 피는 전장의 지형마저 바꾸어 놓았다.
주변 환경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기관진식이 점차 작동을 멈추기 시작한 것도 그 쯤.
천험의 요새나 성을 전장으로 삼았다면 이야기기 달랐겠지만, 애초에 조가장은 이런 대규모 공습을 막기엔 적합한 장소가 아니었다.
그렇기에 그녀는 무리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읏….”
“괜찮아요?”
“오셨…나요.”
주르륵 쏟아지는 코피와 함께 몰입에서 깨어난 그녀는, 자신을 걱정스런 눈길로 바라보는 벽려군을 향해 희미하게 웃어 보였다.
“괜찮아요. 조금 무리한 것 뿐이에요. 그보다 도주 준비는 모두 마쳤나요?”
“장주님 일가를 포함한 조가장 식구들 전원 준비를 마쳤어요.”
“무사들도 모두 포함 시키세요. 여기서 버텨봤자 개죽음이니까.”
적들의 규모가 상상 이상임을 확인한 순간 이미 판단은 마쳤다.
여태껏 벌인 고군분투 역시 그저 대피할 시간을 벌기 위한 몸부림일 뿐.
상대와 달리 이쪽엔 무공을 모르는 이가 대다수.
수성을 고집하다간 몰살을 면치 못할 것이다.
“생각해둔 도주로가 있나요?”
-서상방 가장 안쪽 방, 자단목 서랍 안쪽에 숨겨진 장치를 당기면 비밀통로가 나올 거예요. 휘 가가도 모르는 통로예요.
-당신은요.
-저까지 자리를 비우면 진법을 통제할 사람이 없어요. 그러면 따라잡히는 건 순식간이에요. 전 여기서 시간을 끌게요. 조가장 식구들의 후미를 지켜….
“아까와 말이 다르잖아요.”
진심이 담긴 얼굴을 마주한 제갈우희는 난처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래, 원래 이렇게 착한 사람이었지.
아직도 그녀를 보면 이따금 질투심에 휩싸이는 자신과 달리.
“걱정 마요. 아시잖아요. 제 은신이 얼마나 감쪽 같은지. 저 하나쯤은 안 들킬 수 있어요.”
“하지만…!”
-제갈세가로 가세요.
머뭇거리는 벽려군을 그녀는 단호히 밀어냈다.
-습격을 확인하자마자 생문을 열어 몇 사람을 저희 가문으로 보냈어요. 운이 좋다면 도중에 지원병력을 만날 수 있을 거예요. 시간이 없어요.
-…통로에서 기다릴게요.
-통로에 들어서서 오른쪽에 있는 장치를 당기면 다시 입구가 가려질 거예요. 아예 통로를 무너뜨리면 더 좋구요.
-…기다릴게요.
타탓-!
더 이상 이견은 듣지 않겠다는 듯 빠른 속도로 멀어지는 려군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그녀의 손이 다시금 부채를 집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난장판이 된 모형 위에서 달칵, 하고 비밀통로가 개방되었다는 신호가 울려 퍼졌다.
동시에 그녀는 생문 몇 곳을 개방했다.
어차피 더 이상 준비한 함정도 없다.
먼저 떠난 세가의 무사들에게 생문 근처에 일부러 발자국을 남기라 했으니, 잠깐은 적들의 이목을 끌 수 있을 것이다.
“후….”
이제 할 수 있는 일은 다했다.
남은 것은 하늘에 맡길 뿐.
스가각-!
부채를 휘둘러 모형을 산산조각낸 그녀의 모습이 이윽고 허공에 녹아들었다.
***
콰아앙-!
후두두둑-.
내원의 안팎을 구분하는 담벼락이 산산이 무너지며, 복면을 착용한 흑의인들이 장원 내부로 쏟아져 들어왔다.
그런 광경이 조가장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죽음의 함정을 헤쳐나온 그들의 눈은 살기로 가득했다.
“아무도 보이질 않습니다!”
“…도망쳤나?”
“어차피 이 일대를 물 샐 틈 없이 틀어막았으니 곧 소식이 있을 것입니다. 게다가 조금 전까지 진법이 인위적으로 변화한 것을 보시지 않았습니까. 적어도 술자는 멀리가지 못했을 겁니다.”
“그 제갈가의 계집 말이냐?”
“그렇습니다. 듣기로 그 영악한 계집은 은신에도 능하다고 하니 어쩌면 이 주위에 숨어 있을지도 모르지요.”
수하의 조언을 듣는 사내의 얼굴에, 복면 너머로도 알아볼 만큼 짙은 미소가 피어났다.
“모든 건물에 불을 지르고 포위망을 형성한다. 사방으로 검기를 날리며 전진하도록.”
“현명하십니다. 모두 전각에 불을 붙여라!”
그의 명령이 끝나기 무섭게 주변 전각들 곳곳에 화마가 솟구쳤다.
대를 걸쳐 수십 년 간 양양의 터줏대감 노릇을 하던 조가장은 그렇게 화마에 휩싸였다.
뜨거운 열기와 매캐하게 피어나는 연기 속에 복면인들은 곧장 다음 명령을 수행했다.
“산개!”
“존명!”
일정간격을 두고 질서정연하게 흩어진 복면인들이 앞으로 전진하기 시작했다.
사방에 검기를 흩뿌리며 신중하게.
그렇게 이각 여가 지났을까.
투두둑-.
“끄륵.”
“커헉!”
진법에 제법 조예가 있어 보이던 사내를 포함해 일곱 사람의 머리가 바닥을 굴렀다.
그들과 동일 선상에 있었음에도 횡액을 피한 것은 우두머리인 사내 하나 뿐.
“감히!”
쐐애액-!
노성을 터뜨린 그의 검이 시린 궤적을 그린 순간,
아무것도 없던 허공에서 아리따운 여인의 모습이 드러났다.
“대담하군. 네년이 제갈우희란 계집이더냐?”
“야밤에 방화나 일삼는 도적들에게 밝힐 이름 따윈 없다.”
우아한 몸놀림으로 바닥에 내려선 제갈우희의 목소리는 사뭇 당당했다.
그러나 자신을 둘러싼 수십 인의 복면인들을 바라보는 그녀의 등줄기는 식은땀으로 가득했다.
뾰족한 수가 있어서 모습을 드러낸 것은 결코 아니었다.
설마 적들이 자신에 대한 대책까지 세웠을 줄은 꿈에도 몰랐으니까.
금선탈각의 계가 실패했으니, 어차피 들킬 바에 진법에 능통한 이라도 해치워 수색을 방해하자는 것이 그녀의 판단이었다.
“성내 한복판에서 혈겁을 벌이다니 관아가 두렵지도 않나요?”
“우리 같은 자들이 언제부터 관을 두려워했다고.”
“…장원 근처를 둘러싸고 있던 조문객들이 있었을 텐데.”
“그들이 어떻게 됐을 것 같나?”
불길한 울림이 담긴 한 마디에 그녀의 눈빛이 흔들렸다.
“설마…?”
“아마 그 생각이 정답일 것이…다!”
카앙-!
기습을 가한 사내가 맞붙은 검 너머로 이죽였다.
“설마 네 년 하나 뿐인 것은 아니겠지? 다른 자들은 모두 어디 있나.”
“당신들은 영원히 찾을 수 없을 거야.”
“그건 두고 보면 알겠지.”
쐑! 쐑! 카각-!
두 개의 검이 허공에서 수 차례나 뒤얽혔다.
상대의 실력은 학관에서 그녀를 가르치던 교관들에 비해 결코 아래가 아니었으나, 정마협이란 불세출의 기재가 나타나기 전까지만 해도 정파제일기재로 명성이 자자하던 그녀를 단숨에 제압할 정도는 결코 아니었다.
더구나 그녀 또한 어느 순간부터 벌어지기 시작한 연인과의 격차를 줄이기 위해 잠까지 줄이며 무예를 갈고 닦지 않았나.
허나, 상대는 무인의 명예를 모르는 자였다.
“어린 계집이 제법이구나. 다들 이년을 쳐랏!”
그렇게 협공이 시작됐다.
자신에게 밀려드는 엄청난 숫자의 무인들을 보며 그녀는 이를 악물었다.
타탓!
“도주한다! 쫓아라!”
죽을 땐 죽더라도 최대한 시간을….
그래야 남은 이들이 무사할 수 있다.
그녀는 지리에 익숙하다는 이점을 백 분 살려 조가장 내부를 활개치고 다녔다.
허나 그것만으로는 뒤엎을 수 없는 전력차가 양측에는 존재했다.
아직 멀쩡한 기관들을 이용해 적들을 교란하던 것도 잠시, 결국 그녀는 머잖아 다시 궁지에 몰리고 말았다.
“죽어랏!”
스팟!
목, 그리고 심장.
두 개의 급소를 향해 쇄도하던 섬광을 막아낸 것은 한 자루 검과 부채.
신체 대사조차 의지대로 조절할 만큼의 악마적인 두뇌를 지닌 그녀에게 왼손과 오른손의 차이 따윈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
더구나 그녀의 부채는 단순히 단단하기만 한 게 아니었다.
[멸(滅)]부채에 그려진 문자를 본 적이 눈을 뒤집으며 쓰러졌다.
“조심해라! 사술이다!”
“부채를 보지 마!”
파바바밧-!
캉, 캉! 카각!
옷소매를 펄럭이며 사방에서 날아드는 검을 막아내길 일 각여.
어느덧 그녀를 둘러싼 복면인의 숫자는 수백 명으로 늘어나 있었다.
“이것이 이제 갓 방년을 넘은 계집의 실력이란 말인가!”
적들의 입에서 터져 나온 탄성도 그녀를 위로하진 못했다.
이대로는 안 돼.
약자들이 죽고 강자들이 빈 자리를 채우니, 적을 물리칠수록 그녀가 느끼는 압박감은 오히려 증가하고 있었다.
점차 짙어지는 죽음의 그림자 앞에 그녀는 모험을 감행하기로 결심했다.
한 번도 해본적 없지만.
빠르게 생각을 마친 그녀의 부채가 활짝 펼쳐지며 열 두 개의 글자가 세상에 드러났다.
“조심해! 뭔가 수를 쓴다!”
적들이 놀라 잠시 멈칫한 사이 그녀의 손이 입술로 향했다.
까득-.
엄지에서 흘러나온 피가 허공을 적시며 부채 위로 떨어져 내렸다.
이윽고 부채 뒷면에는 글자와 글자를 잇는 혈선이 그려졌다.
겉보기엔 단순한 선에 불과하나, 그 안에 담긴 기하학적인 의미는 그녀가 지닌 지식의 정수라 할 수 있었다.
[멸절]두 낱말이 결합해 새로운 단어로 거듭난 순간, 그녀를 둘러싼 사내 십여 명이 고꾸라졌다.
“쳐랏! 더 이상 사술을 쓰지 못하게 해!”
대경한 이들이 눈을 감고 달려들었다.
그러나 그들이 경계해야 할 것은 시각 뿐만이 아니었으니.
“실(失), 속(束), 괴뢰(傀儡).”
부채의 기운이 언령에 담긴 순간,
선두에서 공격을 날리던 몇 사람의 몸이 빙그르 회전했다.
쐐애액-!
“크아악!”
“같은 편을 공격한다!”
“이상 행동을 보이면 바로 베어라!”
이지를 상실한 열 사람의 꼭두각시가 그녀의 지시에 따라 적진을 유린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개미떼처럼 밀려드는 적들을 물리치기엔 여전히 역부족이었다.
“더, 더….”
과부하가 걸린 몸뚱이가 삐걱삐걱 비명을 질렀다.
코에선 다시 코피가 쏟아졌다.
그러나 신기하게도, 그녀의 머릿속은 점차 맑아지고 있었다.
두 개로도 부족하면….
파바바밧-!
다시금 소맷자락이 펄럭이며, 부채 뒷면에 한층 더 복잡한 혈선이 그려지기 시작했다.
세 개.
네 개.
“아악!”
“커헉!”
문자와 문자가 이어질수록 적들의 진형은 빠르게 무너져 내렸다.
동시에 그녀의 단전 또한 바닥을 보이기 시작했다.
가문과 약빈에게 지원 받은 영약으로의 힘으로도 감당하기 힘든 급류가 그녀의 안을 휘몰아쳤다.
“으읏…!”
팽팽 회전하던 머리도 한계에 달한 듯, 연기가 피어나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연산 속도를 높여도 쓰러뜨리는 적보다 밀려드는 적들의 숫자가 더 많았다.
“허억, 헉… 큭!”
숨이 머리끝까지 차올랐다.
당장이라도 움직임을 멈추고 편안한 죽음을 맞이하고 싶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멈추지 않고 부채에 피 칠갑을 했다.
그러길 마침내 새하얗던 부채에서 더 이상 흰 공간을 찾아볼 수 없게 된 순간, 그녀의 움직임도 우뚝 멈췄다.
“…지금이다! 내력이 떨어졌다!”
“두려워 마라! 죽여!”
겁에 질린 적들이 일시에 그녀를 향해 달려들었다.
허나 목숨이 경각에 달한 상황 속에서도 그녀의 눈빛은 고요했다.
두려움도 흥분도 없는, 완벽한 명경지수의 경지.
다음 순간, 돌연 그녀의 부채가 접혔다.
탁-!
경쾌한 소리와 함께 피에 젖은 열두 개의 문자들이 일직선 상에 놓이며 검붉은 정육면체를 이룬 순간,
각 문자에 나뉘어 있던 깨달음이 하나가 되며 거대한 진리로 재탄생했다.
“■.”
둥-.
인간의 문자로는 도저히 담아낼 수 없는 울림이 넓은 파동을 그리며 번져나간 순간,
후두두두두두둑-.
그녀를 둘러싸고 있던 백여 명의 무사들이 일시에 썩은 볏단처럼 스러졌다.
즉사였다.
나선형으로 퍼져나가는 죽음 속에서 유일하게 제자리를 지킨 것은 그들 모두를 이끌던 사내 뿐.
그러나 그도 결코 멀쩡하진 않았다.
“끄아아아아악!”
무엇을 본 것일까.
괴성을 지르며 스스로의 눈을 뽑아내고 귀를 뜯어내는 사내의 얼굴엔 공포가 가득했다.
참혹한 몸부림은 온몸의 살점이란 살점은 모두 긁어낸 뒤에야 끝을 맞이했다.
털썩-.
광기로 가득하던 전장에 정적이 찾아왔다.
“하악, 학, 학….”
시산혈해의 중심에 홀로 서서, 하얗게 쇤 백발을 늘어뜨린 그녀는 당장이라도 쓰러질 듯 위태로워 보였다.
그러나 전장의 그 누구도 그녀를 향해 달려들지 못했다.
그저 새로운 절대자의 탄생을 겁에 질려 바라볼 뿐.
그 순간,
짝, 짝, 짝, 짝-.
허공에 불길한 박수소리가 울려 퍼졌다.
싸움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