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tial Streamer RAW novel - Chapter 201
각성 (2)
짝, 짝, 짝-.
불길한 박수 갈채와 함께 어둠 속에서 한 사람이 걸어나왔다.
“훌륭해. 아~주 훌륭해.”
남자도 여자도 아닌 기괴한 목소리.
이제 30대 후반이나 되었을까.
복면을 쓴 다른 자들과 달리 짙은 화장으로 뒤덮인 사내의 얼굴은 목소리만큼이나 중성적이고 기괴했다.
그러나 제갈우희는 더 이상 생각을 깊게 이어나갈 수 없었다.
쐐애액!
“흑!”
쾅-!
검에 손바닥을 꿰뚫린 그녀의 몸이 십여 장 너머 전각에 쳐박혔다.
“어유, 많이 힘든가봐? 그것도 못 피하네?”
“쿨룩, 쿨룩-.”
“세상에 이런 보물이 있을 줄 몰랐는데.”
그녀가 놓친 부채를 주워드는 그의 눈은, 새 장난감을 손에 넣은 어린아이마냥 호기심으로 반짝였다.
이어서 그는 전각에 대롱대롱 매달린 그녀를 부채 끝으로 가리키거나 주문을 외치는 등 기행을 벌였으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자 흥미를 잃은 얼굴로 부채를 바닥에 내팽개쳤다.
“신외지물이 아니고 네 능력이었어?”
말이 끝남과 동시에 사내의 신형은 그녀 앞에 도달해 있었다.
꾸득-.
다시금 손등을 빠져나가는 서늘한 금속의 감촉에 그녀는 어깨를 부르르 떨며 바닥에 무너져 내렸다.
“하아, 하….”
“어머. 얘 예쁜 것 봐. 질투난다, 얘.”
주저앉은 그녀의 턱끝을 검면을 이용해 이리저리 돌려보던 그가 이내 환한 미소를 머금었다.
“죽이긴 아까운데…. 너 내 거 할래?”
“…….”
“응~ 그렇게 경계할 거 없어. 네 몸뚱이 따위에 흥미 없으니까. 그냥 저 부채 사용하는 방법이랑 얼굴 가죽만 순순히 내놓으면, 내가 질릴 때까진 곁에 두고 보살펴줄게. 지금 죽는 것보단 낫잖아?”
아예 바닥에 쪼그려앉은 그는 퍽이나 대단한 선심을 쓰는 양 목소리를 낮췄다.
“쩌-기 뒤에 있는 애들 시선이 좀 거시기 한데, 뭐 다 죽이면 되니까.”
“…좋아요. 따를게요.”
“일단 살고 보자 이거지? 이래서 똑똑한 애들이 좋아. 아, 그런데.”
싱글벙글 웃던 그의 얼굴에 돌연 섬뜩한 미소가 걸렸다.
“얼굴은 선불이야.”
“흡…!”
“아이, 가민히 있어. 금방 끝나니까. 내가 안 아프게 해줄게.”
그녀의 뺨을 한 손으로 움켜쥔 사내가 품에서 비수를 꺼냈다.
빠르게 다가오는 칼날 앞에 그녀의 동공이 거세게 흔들리던 그 때,
“음?”
침음을 흘린 사내가 훌쩍 뒤로 물러난 것과 동시에, 그가 있던 자리로 한줄기 섬광이 내리꽂혔다.
콰과과곽-!
굉음과 함께 천지가 요동쳤다.
직후, 자욱하게 퍼져가는 흙먼지 속에서 그녀는 익숙한 등을 볼 수 있었다.
“언…니.”
“괜찮아요?”
뒤를 살핀 벽려군의 눈썹이 꿈틀했다.
“머리카락이….”
“왜… 왔어요.”
“기다리겠다고 했잖아요.”
“다른 사람들은…?”
-사강과 남궁현 수련생이 인솔을 맡았어요. 그보다 상처가 심한 것 같은데.
스팟-!
“치료하기엔 상황이 좋지 않네요.”
심장을 노리고 날아든 비도를 손가락 사이로 잡아낸 벽려군이 어둠 속을 노려보며 자세를 잡았다.
이윽고 서서히 가라앉는 흙먼지 너머로 새하얀 얼굴 하나가 불쑥 튀어나왔다.
“너 설마 검후니?”
“날 아나요?”
“알다마다. 용모파기랑 똑같이 생겼네? 내가 너 죽었다는 소문 듣고 내가 얼마나 아쉬워했는데.”
끈적거리는 시선이 그녀의 얼굴을 샅샅이 훑었다.
“가지고 돌아갈 얼굴이 하나 더 늘었네? 귀면신노가 좋아하겠어. 정마협도 만나보고 갔으면 좋았는데. 걔가 그렇게 예쁘다며?”
“…가휘가 살아있는 걸 알고 있군요. 누구에게 들었죠?”
“어머, 내 실수. 미안? 못 들은 걸로 해줘?”
입을 가리며 천연덕스럽게 웃는 사내를 향해 벽려군은 검을 치켜들었다.
“덤비게? 너 내 상대 안 될 텐데? 어이쿠, 성격도 급하셔라.”
어렵지 않게 기습을 피한 사내를 그녀의 검이 뒤쫓았다.
쐐액-!
“당신들은 암중세력인가요?”
“너희들은 그렇게 부르더라? 근데 이 정도가 전부야? 기세 좋게 덤빈 것 치고는 너무 별론데. 오히려 쟤가 더 센 거 같아.”
사내가 턱짓으로 제갈우희를 가리켰다.
그러나 그 정도 도발에 흔들릴 그녀의 부동심이 아니었다.
“당신 같은 자들이 몇이나 더 있죠?”
“왜? 나만 이기면 살아나갈 수 있을 것 같아? 음- 힘들 텐데?”
“신비인도 당신들과 한패인가요?”
“신비인? 아! 아, 그…?”
문답과 함께 수십 합도 넘는 공방이 오갔으나, 그녀의 검은 번번히 사내에게 가로막혔다.
심지어 상대는 그녀의 허점을 벨 기회가 여러번 있었음에도, 일부러 옷자락만을 노리며 농락을 즐겼다. 그것도 한 손은 뒷짐을 진 채.
허나 그마저도 싫증이 난 것일까.
그는 머잖아 미소를 거두며 선언했다.
“재미없다. 이만 끝내자.”
***
“반쪽 짜리 아니랄까봐 괜히 입맛만 버렸네.”
전투가 시작된 이래 사내는 처음으로 뒷짐을 풀었다.
그러나 이어진 상대의 반응은 그가 전혀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이 자에게 들을 건 이 정도가 전부인가요?
이 상황에서 한눈을 팔아?
흠칫 놀란 사내의 시선이 제갈우희를 향했다.
아까 전 그녀가 선보인 사술의 위력을 떠올리면 당연한 반응이었다.
그러나 그를 맞이한 것은 기습은커녕 기력이 다해 바닥에 널브러진 제갈우희의 모습이었으니.
‘속았….’
그것이 기울어가는 세상 속에서 그가 마지막으로 떠올린 생각이었다.
***
옥빛 검광이 허공을 가로질렀다.
사람들이 흔히 하는 착각이 있다.
십수 년 째 스승의 복수를 위해 강호를 떠도는 그녀가 우직할 것이라고.
사실이 아니다.
끈기와 노력만으로는 온갖 암투가 활개치는 풍진강호를 헤쳐나올 수 없다.
부족한 무공의 빈 자리를 채우기 위해선 영악해져야 했다.
그것이 그녀가 기나긴 복수행에서도 여태껏 살아남을 수 있던 이유다.
목숨이 오가는 전투에 화려함은 사치일 뿐.
평생을 도전자로 살아온 그녀의 입장에서 적의 방심을 유도하는 것은 숨 쉬듯 당연한 일이었다.
스승의 진전을 이어 절대고수로 거듭난 뒤에도 몸에 벤 습관은 사라지지 않았다.
투둑-.
바닥에 떨어진 머리에는 눈길도 주지 않은 채, 그녀는 제갈우희를 향해 걸음을 서둘렀다.
사내의 본 실력을 아는 이라면 절대 믿지 못할 허무한 죽음이었다.
그가 조직 내에서도 서열 10위 안에 드는 고수이며, 적어도 구파일방의 장문인 정도는 되는 실력자라는 사실을 벽려군은 끝내 알지 못했다.
***
“괜찮나요?”
“지는 줄… 알았어요.”
“최대한 힘을 아껴야 하니까요.”
벽려군의 등에 업히며 제갈우희는 미뤄둔 생각들을 정리했다.
죽여도 죽여도 끝이 없던 적의 규모.
강호인들이 꺼리는 화살과 화공을 아무 거리낌 없이 사용하던 적의 전술.
남자도 여자도 아닌 고수의 존재.
더구나 적들은 가휘의 생존과 현재 자리를 비웠다는 사실까지 알고 있었다.
이상을 바탕으로 추론한 암중세력의 진정한 정체와 목적은….
“서둘러야 해요! 모두가 위험해요.”
“꽉 잡아요.”
그녀의 목소리에 담긴 다급함을 읽은 것일까.
벽려군의 신형이 한 줄기 빛이 되어 장원을 가로질렀다.
쉬익-.
어둠을 벗삼아 허공을 가로지르는 그녀의 모습은 야조(야조)처럼 은밀하고 고요했으나, 적들에겐 재앙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녀의 이동 경로에 놓인 불운한 이들은 영문도 모른 채 명을 달리해야 했다.
너른 내원과 서상방을 단숨에 지나 곡성현 외곽의 어느 장원과 연결된 출구로 빠져나오기까지.
그녀들이 비밀통로를 돌파하기까지 걸린 시간은 일 각이 채 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 때는 이미 모든 것이 끝난 뒤였다.
“이제 오시는가.”
비밀통로를 나서는 두 여인의 눈빛이 파르르 떨렸다.
안가는 이미 수백 명이 넘는 복면인들에게 점령당한 뒤였다.
그것도 조가장에서 화살받이로 쓰인 어중이떠중이가 아닌, 하나같이 범상치 않은 기도를 지닌 고수들로.
그들 틈에서 조가장 식구들은 포승줄에 제압당해 옴짝달싹 못하고 있었다.
심지에 조가장주 내외를 비롯한 몇몇 중요인사의 목엔 날카로운 칼까지 맞닿아 있었다.
그나마 한 가지 위안이라면 죽은 이가 보이지 않는다는 정도일까.
“…역시 당신들이었군요.”
제갈우희의 시선이 조금 전 인사를 건넨 중년인을 향했다.
자신들과는 구면인 사내를.
“장 무사님.”
장견.
혈마의 비동에서 ‘한 사내’를 호위하며 자신들과 한동안 동행했던 사내.
그렇다면 그 뒤의 휘황찬란한 가마에 올라탄 것은 예상대로….
“오랜만이요, 제갈소저.”
“주…공자. 아니, 폐하.”
주렴 밖으로 모습을 드러낸 젋은 황제를 응시하는 그녀의 눈에 짙은 암운이 드리웠다.
***
한 때는 동료였던 두 사람의 눈빛이 허공에서 부딪혔다.
“이런 식으로 다시 보게 되어 유감이오, 소저.”
“백성을 인질로 잡고 겁박하는 것이 일국의 황제가 할 행위입니까.”
“어린 계집이 감히 어느 안전이라고…!”
“아니다. 내 친구들이다.”
살기를 내뿜는 측근을 진정시킨 주강은의 시선이 잠시 하늘을 향했다.
뒤이어 포로로 잡힌 이들을 지나, 다시금 두 여인에게 되돌아온 그의 눈빛엔 괴로움이 가득했다.
“얌전히만 있는다면… 목숨은 보장하겠소.”
“언제부터 우릴 기만한 거죠?”
“저 계집이 아직도!”
“그만하란 말 듣지 못 했느냐. 더 이상 저들에게 무례를 범하지 말라!”
“그러시면 안 되지요, 폐하.”
장내에 새로운 목소리가 울려 퍼진 순간, 수하를 나무라던 강은의 몸이 흠칫 굳었다.
직후 또 하나의 가마에서 ‘그녀’가 모습을 드러냈다.
전설의 서시가 이러할까.
화려함과 청순함이 공존하는 얼굴은, 같은 여인이 봐도 눈을 떼지 못할 정도로 아름다웠다.
초승달마저 구름 뒤에 숨을 만큼 매혹적인 눈웃음을 머금은 그녀는, 만지면 터질 듯 생기가 넘치는 붉은 입술로 황제의 귓가에 속삭였다.
“일국의 황제란 분께서 한 때의 정에 흔들리셔야 되겠습니까.”
“마마를 뵙습니다!!!”
처척-!
대기를 쩌렁쩌렁 울리는 흑의인들의 기백은 황제를 대할 때와는 비할 바가 아니었다.
그제야 제갈우희는 이 모든 사건의 진정한 배후가 누구인지 깨달을 수 있었다.
“어마…마마. 이 일은 제게 맡겨주신다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답답해서 두고 볼 수가 있어야지요. 이 어미는 폐하를 그리 나약하게 키운 기억이 없습니다.”
황제를 꿀먹은 벙어리로 만든 여인의 시선이 제갈우희를 향했다.
“천한 것이 감히 누구를 가르치려 드느냐. 폐하, 지금이라도 저 오만한 계집의 목을 직접 거두시지요.”
“어마마마, 그녀를 해치면 가휘가 결코 참지 않을 것입니다.”
“…지금 무어라 하셨습니까?”
그녀의 음색에 북풍한설이 몰아쳤다.
“참지 않아요? 만인지상의 폐하께서 일개 백성에 불과한 정마협의 눈치를 보시다니요.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되었습니다. 혹여 그 자께 겁박이라도 당하신 것이 아닙니까?”
“어마마마!”
“뭣들 하느냐. 저 건방진 계집의 목을 가져오지 않고.”
“누구도 움직이지 말라!”
스르릉-!
머뭇거리는 병사들 앞에서 한 자루 검이 뽑혀져 나왔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폐하. 설마 그 검으로 이 어미를 베기라도 하시겠단 말씀입니까?”
“그럴 리가요.”
이어진 강은의 행동은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다.
그의 검이 향한 곳은 다름 아닌 자신의 목이었으니.
“지금… 무얼 하시는 겝니까.”
“떠나기 전 분명 제게 약조하셨습니다. 이들의 목숨을 허투루 해치지 않겠다고.”
“…….”
숨 막히는 정적은 황제의 목에서 한 줄기 피가 흐른 뒤에야 막을 내렸다.
“…이후에도 같은 수가 통할 거라고 생각하지 마세요. 다음에 또 이럴 경우엔…. 그리고 수하들 앞에서 체통을 지키세요.”
“감사…합니다.”
그제야 검을 거둔 황제의 입에서 안도의 한숨이 쏟아졌다.
그러나 여인의 말은 아직 끝난 게 아니었다.
“분명 제가 그리 말하긴 했지요. 폐하의 지인과 그 가족을 함부로 해하지 않겠다고. 하지만 천한 것들 몇 정도는 본보기를 보이는 게 좋겠습니다.”
“그게 무슨…!”
“금의위는 들으라. 저것들의 목을 남김없이 쳐라.”
여인에게 지목받은 조가장 일꾼들과 시녀들의 눈이 일시에 확대됐다.
개중에는 이제 4살 난 석율 일가도 존재했다.
“안 돼!”
주강은을 비롯한 몇 사람이 대경하여 외쳤지만, 이번만큼은 병사들도 검을 멈추지 않았다.
쐐애액!
파공성을 뿌리며 날아든 검에 수십 명의 목숨이 덧없이 스러지려던 그 때,
“헛?”
“읏, 이게 대체…!”
병사들의 입에서 당혹성이 터져 나왔다.
모든 검이 허공에 붙들린 채 옴짝달싹도 않는 광경은 마치 시간이라도 멈춘 것처럼 장엄했다.
그 현상이 의미를, 혈마의 비동을 탈출했던 이들은 너무나도 잘 알았다.
“가…가.”
어느새 자신의 앞을 막아선 듬직한 등을 바라보는 제갈우희의 얼굴에 희망의 빛이 번져나갔다.